#185 미끼(2)
황국은 본격적으로 올페르 백작과 귀족파의 자금줄을 조이기 시작했다.
제국 대학에 유통하는 각종 시약과 실험 도구, 약재 등의 주문을 끊었다.
“제국 대학의 마법학부는 운영이 불가능함으로 모든 수업을 중단하겠습니다.”
마법학부를 다니는 웬만한 학생들과 교관들이 범죄에 연루되었다는 내용이 대서특필되면서 마법학부의 재정비를 발표했다.
특히 제국 대학을 다니는 모든 귀족 자제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구속 수사를 받았는데, 귀족파 귀족들이 크게 반발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내 자식을 구속할 순 없소!”
“로빈은 가문의 후계자요! 황제가 볼모로 삼을 순 없소!”
귀족파 귀족들의 반발이 거세졌음에도 불구하고 토드 황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귀족 가문들이 운영하는 회사의 횡령과 자금 세탁 그리고 탈세 등을 빌미 삼아 각 귀족파 가문의 가주들을 불러 참고인 조사를 받으라고 압박을 했다.
그러니 귀족파 가문들이 살아남기 위해 모인 곳은 한 곳밖에 없었다.
올페르 백작가였다.
올페르 백작가의 회의실에 모인 가주들은 저마다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올페르 백작님! 황제가 드디어 미쳐 버렸습니다! 귀족 가문의 자식들을 볼모로 삼다니요! 이건 있어선 안 될 일입니다! 어떻게 방법이 없겠습니까?!”
“황금 기사 출신 수사관들이 한 달 뒤 영지로 오겠다고 했습니다! 즉결 처분권까지 갖고 있으니 수틀리면 가문의 마법사들을 죄다 죽여 버리겠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단순히 살려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모자란 가주들도 있었고, 그래도 머리가 조금 굴러가는 가주들은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제시했다.
“당장 모든 아티팩트와 포션 제작을 멈추고 공급량을 줄여야 합니다. 지금은 봄입니다. 몬스터들이 본격적으로 태동하는 시기이니 포션과 수성용 아티팩트의 수요가 급격히 늘 겁니다!”
“영지를 지나는 철도를 끊어버리죠! 철도를 끊으면 남부가 고립될 것이고 황제는 큰 압박을 받을 겁니다.”
“에이미로 황자를 꼬셔보죠. 에이미로 황자는 욕심이 많은 인물입니다. 혼란스러운 정국을 타개하겠다는 명목으로 쿠데타를 일으키면 승산이 있을 겁니다.”
올페르 백작은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귀족들의 하소연을 차분히 다 들었다.
“모두 얼빠진 소리만 하는군.”
올페르 백작은 발등에 불 떨어진 놈들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귀족들을 보며 눈을 부라렸다.
“아직도 모르겠나? 지금 토드 황제가 노리는 게 뭔지? 토드 황제는 지금 마법사 가문들을 죄다 말려 죽이겠다는 거다. 루카스 후작나 빈스모크 백작도 억지 명분을 만들어 죽였는데 우리라고 다를 바는 없겠지.”
올페르 백작의 말에 가주들이 몸을 떨었다.
“그…… 그럼 어떻게 합니까? 제 영지는 황도에서 제일 가깝습니다. 그럼 내 가문을 먼저 풍비박산 내겠다는 뜻 아니오!”
“내 영지는 노르베르드 변경령 바로 아래요! 티그리스가 움직이는 순간 나는 끝장이라고!”
“흑토 지대가 황제의 병력으로부터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영지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귀족파는 다릅니다. 대다수가 흩어져 있어서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게다가 귀족파 가문들은 대부분이 마법사 또는 상인 가문 출신이다.
마법사 가문은 그나마 영지를 지킬 마법사들이라도 많아서 다행이지만, 상인 가문들은 자기 성을 지킬 수단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마법사 가문들에게 약초나 각종 소모품을 판매하며 꿀을 빨아 살아왔던 놈들이라 전쟁이 일어나면 막을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었다.
“방법은 두 가지다.”
“방법이 두 가지나 있습니까? 그게 뭡니까?”
“하나는 황제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주고 꼭두각시처럼 살아가는 거다. 그러면 귀족파는 사실상 사멸하겠지. 귀족파의 사업장은 모조리 빼앗기고, 황제의 말을 잘 듣는 방계나 잡종이 후계를 잇게 되겠지.”
“그…… 그건 용납할 수 없소. 우리 가문이 어떤 가문인데! 어떻게 잡종 놈들이 주인 행세를 하고 다니는 걸 두고 보란 말이오!”
마법사 출신 가문들은 자존심을 굽히지 않고 목소리를 크게 냈지만, 상인 출신 가문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마음이 혹한 것이다.
올페르 백작은 그들이 누구인지 모두 파악했다.
“다른 방법이 없겠습니까?”
“다른 방법은 황제의 적의 도움을 받는 거지.”
“황제의 적? 설마…… 길리온 왕국?”
“맞다.”
올페르 백작은 길리온 왕국의 인장이 박힌 편지지를 흔들었다.
“이건 길리온 왕국의 차기 계승자 매튜 왕자의 친서다. 원한다면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하더군.”
“어떤 도움을 주겠다고 한 겁니까?”
“키메라.”
키메라란 말에 가주들의 표정이 싹 굳었다.
“키…… 키메라? 키메라를 왜…….”
“다들 알고 있는 사실 아니었나? 길리온 왕국은 키메라를 만들고 조종할 수 있는 기술이 있네. 그들이 황제가 우리에게 관심조차 가질 수 없게 키메라를 풀어주겠다고 하더군.”
“하지만 키메라가 우리를 도와준다는 걸 알게 되면 영주민들의 통제는 불가능합니다. 흑토 지대가 어찌 멸망했는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흑토 지대가 반년 만에 토드 황제의 손에 들어간 가장 큰 이유는 전쟁의 명분이 황제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국민을 상대로 키메라 실험을 자행한 귀족들에 대한 혐오로 내부 반란이 일어났고, 황제의 군사들이 성문 앞에 당도했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성문이 죄다 열렸다는 건 익히 알고 있는 정보였다.
‘병신 같은 놈.’
지금까지 영지 관리를 어떻게 해왔길래 전쟁을 앞두고 영주민들 눈치를 본다는 말인가.
하지만 저런 모자란 놈들도 귀족파의 일원이다.
한 명이라도 아쉬운 상황에서 저놈들이 배신하고 황제에게 쪼르르 달려가면 답이 없어진다.
“키메라가 우리의 전쟁을 대신 해주겠다고 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반격할 시간을 벌어주는 거지.”
“반격할 시간?”
“키메라들은 우리를 직접적으로 돕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영지를 치고 다닐 것이다. 마치 몬스터 웨이브처럼.”
가주들은 올페르 백작이 하려는 말을 단번에 알아챘다.
“원래 국난이 오면 내부를 결속시켜야 한다는 말이 있지! 키메라들로 구성된 몬스터 웨이브가 국내를 쑥대밭으로 만들면 황제도 쉽사리 전쟁을 할 수 없을 것이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포션과 수성용 아티팩트의 수요가 급격하게 늘겠지. 그러면 당장에 아쉬운 건 황제가 되겠군.”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이 점점 보이기 시작하자 귀족들은 저마다 어떻게 하면 황제를 등쳐먹을 수 있을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티팩트 가격을 두 배로 늘린다거나 아니면 열차 선로가 끊겼다는 이유를 핑계로 포션을 자신들의 영지를 지키는 용병들에게만 지급한다는 계획을 세우는 등 행복 회로를 마구 돌리기 시작했다.
그때, 한 사내가 손을 들었다.
다급해서 입부터 열었던 가주들에게서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황제에겐 마탄총이 있지 않습니까? 포션이야 계속 필요할진 몰라도 수성용 아티팩트의 수요는 줄지 모릅니다.”
“마탄총의 대량생산은 아무리 빨라도 올해 말에서 여름일 것이다. 게다가 부대를 훈련시키고 편제를 개편하는 데에는 1년이 넘게 걸리겠지. 그리고 마탄총이 아무리 대단한 무기라고 하더라도 아티팩트를 버릴 순 없다. 키메라 수만 마리가 메뚜기 떼처럼 황국 전역을 휩쓸고 다니는데 어떻게 막겠나?”
가주들의 표정이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다.
“이거 망나니처럼 피 맛을 본 토드 황제의 뒤통수를 제대로 후리겠군요.”
“역시 올페르 백작. 뭔가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가주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웃고 있을 때, 회의장에 집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집사의 손엔 신문이 들려 있었다.
“뭐지?”
“백작님. 죄송합니다만 읽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집사가 건넨 신문을 읽은 올페르 백작은 신문을 구겼다.
“이 빌어먹을 놈의 새끼가……!”
[올페르 백작, 길리온 왕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
[길리온 왕국과의 외교는 오직 황국의 외교부를 통해서만 가능. 그런데 어째서 올페르 백작은 길리온 왕국과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가?]
[인퀴지터, 조만간 사실 확인을 위해 올페르 백작을 소환할 예정.]
[소환에 응하지 않을 시 황도의 영웅, 티그리스 경이 직접 움직일 수도…….]
이 정보의 출처가 누구인지 모를 리 없었다.
파스칼이었다.
***
파스칼은 올페르 백작가에서 사람이 나왔다는 말에 독방을 빠져나와 면담실로 향했다.
그래도 올페르 백작이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몰려왔지만…… 면담실 안으로 들어가자 파스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올페르 백작도 아니고 파스칼의 형들도 아닌, 바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스칼은 이를 뿌득 갈며 입을 열었다.
“잡종. 네가 왜 여길 온 거지?”
“올페르 백작님께서 저를 대신해 보내셨습니다.”
파스칼은 주먹을 파르르 떨었다.
자신이 올페르 백작에게 있어서 이 정도였단 건가?
적어도 첫째 형님 아니면 둘째 형님이라도 보내줄 줄 알았지만, 올페르 백작은 저 잡종견을 보냈다.
자신이 저 속내를 알 수 없는 놈을 끔찍이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네가 올페르 백작님의 뜻을 대신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당장 아버지를 모셔와!”
“올페르 백작님께서는 굉장히 바쁘십니다. 도련님께서 싸질러 놓으신 똥 때문에 말이죠.”
“너……! 너 지금……!”
바질은 지금까지 파스칼에게 단 한 번도 무례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파스칼이 서슴없이 욕설을 하자 파스칼은 너무 당황해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바질은 테이블에 놓여 있는 휴지를 뽑아 천천히 접기 시작했다.
“길게 할 이야기도 없고 저와 얼굴을 오래 마주하고 싶지 않으실 테니 짧게 끝내겠습니다. 일단 앉으시죠.”
“아니. 앉을 것도 없다. 아버지께 전해, 당장 나를 이 빌어먹을 지하 감옥에서 벗어나게 해주지 않으면 자구책을 마련하겠다고.”
“그 자구책이라는 게 길리온 왕국과의 밀수 루트를 알려주는 조건으로 황국과 사법 거래를 하겠다는 겁니까?”
파스칼은 순간적으로 심문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매직미러를 쳐다봤다.
저 매직미러 너머에 누가 있을지 뻔했다.
“……그것뿐이겠어? 내가 그래도 올페르 백작 가문의 아들이야. 어디서 주워들은 건 굉장히 많지.”
“당신은 정말 끝까지 모자라군요. 파스칼 도련님.”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모자라다고 했습니다. 아니, 병신이십니까?”
갑작스럽게 흘러나온 바질의 살기에 파스칼은 순간 몸이 굳어 움직여지지 않았다.
“당신이 알고 있는 정보. 수박 겉핥기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는 걸 올페르 백작님과 가신들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길리온 왕국에서 성수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어디서 들으셨을진 몰라도 그 밀수 루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지 않습니까?”
“내…… 내가 그것도 모를 것 같아? 내가 입만 뻥긋하면……!”
“그럼 말해보십시오. 밀수 루트가 어떻게 됩니까?”
“뭐…… 뭐? 그걸 내가 왜 지금 여기서 얘기하는데?!”
“운이라도 띄워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느 지역을 통해 어떻게 운송한다. 뭐, 이 정도요. 저도 모르는 정보를 파스칼 당신이 알고 있다길래 정말 신기해서 그렇습니다.”
파스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정말로 파스칼은 디테일은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살아보기 위해 라칸에게 블러핑을 한 것이다.
“역시 모르시는군요. 아니, 알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당신은 제국 대학을 2년이나 유급한 머저리입니다. 그런 고급 정보를 당신이 알고 있을 리가 없죠.”
파스칼은 나이프 모양으로 곱게 접은 휴지를 파스칼 앞에 건넸다.
“그냥 곱게 죽으십시오. 백작님의 전언입니다.”
“……뭐? 그게 진짜야? 나를 이렇게 버리겠다고?”
“파스칼. 당신은 그냥 저같이 잡종들의 중간만 가면 제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걷어차셨죠. 그래놓고 살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바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올페르 백작님께서 지시하신 말을 다 전했으니 저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아, 그래도 희망은 버리지 마십시오. 당신이 애완견처럼 키웠던 리뉴 가문이나 블루아 가문이 도움을 줄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리뉴 가문과 블루아 가문은 귀족 가문도 아닌 그냥 약초 농사나 짓는 농부 가문이다.
그들이 무슨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파스칼이 살려면 반드시 올페르 백작의 도움이 필요했다.
“자…… 잠깐! 내가 라칸에게서 얻은 정보가 있어! 라칸 그 새끼가 마탄총 설계도를 완성했대!”
마탄총 설계도란 말에 바질의 발걸음이 멈췄다.
“설계도?”
“그래! 그게 지금 누구한테 있냐면……!”
그때, 매직미러 쪽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티그리스였다.
저 매직미러 너머에 티그리스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바질과 파스칼은 살짝 놀랐다.
파스칼은 최대한 예를 갖춰 인사했다.
“티그리스 경을 보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저는 바질 드 올페르라고 합니다.”
“티그리스 디 노르베르드다.”
바질은 빠르게 판단을 했다.
바질이 라칸에게서 뭔가 정보를 물어온 게 분명해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티그리스가 직접 나타날 리가 없었으니까.
바질은 파스칼을 슬쩍 쳐다봤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려고 혓바닥을 제법 놀렸나 보군.’
“이야기는 다 나누었나?”
바질은 파스칼이 알고 있는 정보가 뭔지 진심으로 궁금했지만, 파스칼이 밀수 루트를 정확히 모른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이 정도로 만족하고 물러나는 게 맞았다.
“네. 그렇습니다.”
“그럼 가보시게. 인퀴지터 요원들이 파스칼과 잠깐 이야기할 게 있다고 해서 말이지.”
파스칼은 입술을 덜덜 떨었다.
자신이 허풍을 친 게 들켜 버렸으니 사법 거래는 물 건너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 전에 올페르 백작님께서 티그리스 경께 따로 전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지?”
“쥐도 궁지에 몰리면 문다고요. 제법 아프실 겁니다.”
“자기를 쥐새끼에 비유하다니. 제법 자기 주제 파악을 잘 아는군.”
한 방 먹은 바질은 헛웃음을 쳤다.
“티그리스 경이 신비주의 노선을 타시길래, 말을 못해서 그러신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요. 원래 천재는 어딘가 하나씩 결여되어 있지 않습니까?”
“자네의 손기술이 모자라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군.”
티그리스는 바질이 휴지로 만든 작은 검을 집어 들었다.
휴지로 만든 주제에 제법 무게가 나가고 날카롭다.
바질이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손가락에 발라둔 경화 약물을 묻혀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가지고 가게. 감옥에선 장난감 칼도 반입이 안 되니.”
바질은 티그리스에게 휴지검을 건네받곤 마법으로 가볍게 태워 버렸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티그리스 경.”
바질은 파스칼을 쳐다도 보지 않고 심문실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