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186화 (186/251)

#186 미끼(3)

파스칼은 손톱 사이로 피가 줄줄 새도록 손톱을 물어뜯었다.

초 단위로 죽음이 몰려오고 있다고 생각하니, 잠도 오지 않고 심장을 누군가가 콱 조여오는 것만 같다.

잠깐 지쳐서 깜빡 기절했을 때,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단두대형에 처해지는 꿈을 꿨다.

더욱 비참한 것은 그 군중들 사이에 아버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자신이었다.

하지만 칼이 목에 들어오기 직전까지도 아버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자신을 향해 돌멩이를 던지는 성난 군중들의 얼굴들만 가득했다.

“이렇게 죽을 순 없어……. 이렇게 죽을 순 없어…….”

어떻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해 봤지만, 답이 보이지 않았다.

방법이 보이지 않자 과거를 더듬기 시작하고 자신에게 도움을 줄 몇몇 사람들의 이름이 머릿속에 올라갔다가 지워졌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죽어도 자신에게 도움을 주지 않을 악연 또한 떠올랐다.

파스칼에게 있어서 악연은 ‘바질’이었다.

“젠장……! 이럴 줄 알았다면 리뉴 가문에게 그 약초밭을 주는 게 아니었는데!”

파스칼은 약 10년 전 바질의 부모님이 업으로 삼던 약초밭을 강제로 빼앗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바질의 아버지는 먼 방계 귀족 출신인 데다가 어머니는 평민 출신으로 파스칼이 건드려도 별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점.

리뉴 가문이 파스칼에게 꾸준히 로비를 해오며 그 약초밭을 달라고 요청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 바질을 잊고 살아왔지만, 어느덧 녀석은 자신의 능력 하나만으로 올페르 공방의 수석 연구원의 자리에 올라 자신과 마주했다.

심지어 이 개 같은 상황에 처한 파스칼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질이라니…….

속이 메스껍고 짜증이 나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도련님.

젠장, 이제는 환청까지 들리는 건가.

그리고 들려도 왜 하필 바질이란 말인가?

차라리 아버지였으면…….

-파스칼 도련님. 접니다.

파스칼은 눈을 번뜩였다.

이건 환청이 아니다.

이건 분명 텔레파시 마법이다.

-어제 제가 너무 무례했었습니다. 하지만 매직미러로 티그리스가 지켜보고 있었기에 강하게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너.”

-쉿. 그냥 듣기만 하십시오. 시끄러워지면 간수가 올 겁니다.

바질의 말에 파스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백작님께서 파스칼 도련님을 어떻게든 빼주실 겁니다. 물론, 합법적인 경로는 아닐 겁니다. 파스칼 도련님이 광장에 모습을 드러내실 때 백작가의 마법사들이 어떻게든 빼낼 겁니다.

파스칼의 눈에서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그래. 아무리 올페르 백작이라고 해도 자식을 쉽게 버릴 분이 절대 아니다.

그리고 바질 이놈도 아무리 파스칼의 처지가 빈궁하다고 하더라도 욕설을 하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역시 연기였구나!

너무 실감 나서 깜빡 속을 뻔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쉽지 않을 겁니다. 그렇기에 파스칼 도련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어제 면담실에서 얘기했던 마탄총의 설계도. 그 정보가 필요합니다.

파스칼은 단번에 눈치챘다.

마탄총 설계도가 있는 곳을 테러하면 파스칼 쪽의 경계는 자연스럽게 허술해질 것이다.

그 허술해진 틈을 노려 자신을 구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 위치를 적어서 창문에 올려주십시오. 근처에 적을 만한 게 없습니까?

파스칼은 얼른 주변을 훑었다.

주변은 독방이라 아무것도 없었다.

혹시나 펜으로 자살을 할까 봐 필기도구 같은 것도 없었다.

하지만 남은 게 하나 있었다.

죄수복.

파스칼은 해어진 죄수복을 이빨로 뜯은 뒤 손톱 사이로 흐르는 피를 잉크 삼아 적었다.

살 수 있다는 희망과 흥분 때문일까?

손이 너무 떨려서 글씨가 제대로 써지지 않았다.

[드어프 말레오스. 그래이 타운. 라칸 공방.]

하지만 이 정도면 다 알아보리라.

파스칼은 주먹 두 개 정도밖에 들어가지 않는 작은 창문으로 밀서를 슬쩍 올렸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마나가 움직이더니 누군가가 밀서를 채갔다.

-감사합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때까지 최대한 잡혀 있는 연기해 주십시오.

파스칼은 아무도 보지 않음에도 고개를 미친 듯이 흔들었고, 이불도 없는 딱딱한 침대에 누웠다.

파스칼은 그날 다시 꿈을 꿨다.

단두대 위에 눕는 자신.

이번엔 주변을 둘러보니 군중들 틈 속에 아버지가 보였다.

그러나 달라지지 않는 건…….

서걱!

파스칼의 목이 붉은 핏물과 함께 잘려 나가는 것이었다.

***

올페르 백작은 바질의 전문을 받곤 고심했다.

‘마탄총 설계도라…….’

만약 이 설계도를 얻게 된다면 올페르 백작은 어떤 이득을 취할 수 있을까?

이 설계도의 가치는 단순히 귀족파에게 부족한 마공학 기술을 단번에 도약시킬 수 있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마탄총의 설계도를 토대로 마탄총의 설계적 약점을 찾아내 마탄총을 단순한 고철 덩어리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그리고 설계도가 올페르 백작의 손에 들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황국을 압박할 수 있다.

황국은 솔직히 말해서 귀족파를 눈엣가시 그 이상으로 보고 있지 않다.

황국은 자신을 그저 길리온 왕국을 쳐내기 위한 중간 과정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설계도를 길리온 왕국에 넘기기만 한다면 황국은 크게 곤란해질 것이다.

‘하지만 함정일 가능성이 높다.’

정보 출처가 다른 사람도 아닌 그 모자란 파스칼로부터 나왔다는 게 굉장히 의심스럽다.

놈은 가진 욕심에 비해 머리가 그리 비상하지도 않고 옹졸하기 짝이 없다.

그런 놈이 이런 고급 정보를 물어 왔을 리가 없다.

그래서 바질이 정보의 신뢰도를 ‘하’로 책정한 거겠지.

하지만 안 물기엔 너무 맛있는 먹잇감이다.

귀족파는 현재 하나로 똘똘 뭉친 것 같지만 사실 모래성과도 같다.

특히 마법사 가문이 아닌 마법사 가문에게 여러 가지 약초를 팔아넘기거나 중간 마진을 챙겨 먹는 상인 가문들 같은 경우엔 언제든지 자신을 배신하고 도망칠 수 있다.

이 미련한 놈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기 위해선, 올페르 백작은 귀족파 일원들에게 강력한 한 방을 보여줘야만 했다.

올페르 백작의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작전이 번뜩였다가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다음 날 아침.

올페르 백작은 가신들을 모두 소집했다.

“마탄총 설계도를 구하는 척, 파스칼을 포함해 사로잡힌 귀족파 일원들을 모두 구한다.”

마탄총 설계도를 구하는 것도 좋지만, 현재 귀족파에 가장 절실한 것은 그들의 혈육을 되찾는 것이다.

특히 몇 명은 자신의 후계자까지 지하 감옥에 잡혀 있어서 어떻게든 구해보려고 중앙 정관계 인사들에게 로비를 시작했다고 들었다.

놈들이 헛짓거리를 할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올페르 백작이니, 귀족파 일원들을 빨리 안심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마탄총 설계도도 운이 좋으면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까.’

가신들은 올페르 백작의 작전을 듣곤 침을 꿀꺽였다.

“그러니까…… 역모를 꾀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귀족들이 황도 한복판에서 테러를 저지르는 것도 모자라 범죄자들을 강제로 빼 온다는 이야기는 쿠데타를 하겠다는 말과 똑같다.

어쩔 수 없는 수순이라는 것은 모두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반역을 저지르겠다는 말이 올페르 백작의 입에서 나오자, 가신들의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

올페르 백작은 동요하는 가신들을 보곤 책상을 강하게 내려쳤다.

쾅!

“정신 차려라! 황제의 이빨이 먼저 우리를 향했다. 살아남으려면 먼저 무는 수밖에 없지. 그리고 길리온 왕국에 연락을 넣어라. 약속한 물건을 받겠다고.”

“약속한 물건이라면…….”

“그것까진 알 필요 없다. 하지만 그것만 있다면 이번 작전의 성공률은 비약적으로 올라갈 것이다.”

가신들 중의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역모를 꾀했다가 다른 가주들이 등을 돌리면 어떻게 합니까? 저희만 움직이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한마디로 뒤통수를 맞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올페르 백작을 팔아넘기는 대신 면죄부를 달라고 황제에게 요구하면, 황제가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당연히 올페르 가문만 움직이지 않는다. 다른 가문들의 협력을 받아야지.”

“모두 부르면 되겠습니까?”

“아니, 마법사 가문 출신들만 불러라. 상인 출신들은 배신할 가능성이 높아.”

올페르 백작은 핏발이 선 눈으로 가신들을 훑었다.

“지금부터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빠르게 움직여라. 작전의 시행일은 파스칼의 사형식인 다음 주 토요일이다. 이제 5일밖에 남지 않았으니 바쁘게 움직여야 해.”

“예. 알겠습니다.”

가신들은 그 말을 끝으로 회의장을 나갔고, 올페르 백작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피로가 몰려왔다.

***

“인퀴지터의 보고 결과 올페르 백작가가 굉장히 바쁘게 움직인다고 합니다. 몇몇 가주들도 모두 모였고요.”

라칸의 말에 레인로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 가주들이라면 역시 마법사 가주들만 모인 거야?”

“네. 올페르 백작이 상인 출신 가문들이 배신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실제로 상인 출신 가문들은 황국과 은밀히 접촉하려고 시도했으니까요. 물론 아직 완전히 배신했다기보단 간을 보는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와서도 간을 보다니. 상인들 아니랄까 봐 눈치를 정말 열심히 보네.”

베르강은 까끌까끌한 수염을 긁으며 말했다.

“혹시 상인 가문 놈들이 배신을 한다고 하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뭐, 살려만 줘야죠. 그러니까 이번 작전이 굉장히 중요해요. 올페르 백작의 공격을 딱 한 번만 제대로 막아내면 상인 가문 놈들은 모두 귀족파를 배신할 거니까요.”

레인로버는 베르강을 보며 말했다.

“말레우스 님 경호는 어떻게 되고 있죠?”

“고든을 포함한 황금 기사들이 위장 경호를 하고 있습니다. 놈들이 습격해 올 것이라 예상되는 사형식 날, 티그리스 경과 나달이 추가로 파견될 겁니다. 그리고 샤를로트에게서 ‘페르셴과 아드네’ 목걸이를 빌려서 말레우스 님의 목에 걸어두었습니다.”

“음, 알겠어요.”

레인로버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손이 떨려서 찻잔 속 물이 살짝 흔들렸다.

‘……나도 초조한가 보네.’

지금까진 아는 적만 상대해 온 데다가 회귀록의 도움을 받아서 빠르게 대처가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모르는 적을 상대해야 한다.

올페르 백작이 회귀 전에 어떤 활약을 했는지 티그리스의 회귀록엔 적혀 있지 않았다.

그땐, 바로스 후작과 빈스모크 백작이 활개를 칠 때였으니 상대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일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아니면 포션 공방을 운영하는 만큼 앞에서 행동할 이유가 없었거나.

레인로버는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정신을 바짝 차렸다.

‘회귀록을 들여다보는 건 의미 없어. 지금이 중요해.’

올페르 백작과 귀족파의 전력은 황제가 갖고 있는 전력에 비해 한참 모자라다.

그걸 올페르 백작이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설계도를 노린다는 건 뭔가 숨기고 있는 한 수가 남아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한 수는 무엇일까?

‘보나 마나 길리온 왕국이겠지.’

올페르 백작과 귀족파는 현재 궁지에 몰려 있다.

놈들이 도움을 청할 대상이라고 해봐야 길리온 왕국인데, 길리온 왕국은 내정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많은 도움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놈들이 길리온 왕국에게 뭘 받아낸 건지 알아내야 하는데…….’

그때, 라칸이 입을 열었다.

“황녀님.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부탁? 무슨 부탁?”

“바질 교관을 조금 만나보고 싶습니다.”

레인로버는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바질 교관을? 왜?”

“바질 교관을 인퀴지터에서 따로 조사를 해봤는데, 조금 의아한 점이 있어서요.”

“그게 뭔데?”

“바질 교관은 34살이 되도록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식도 없습니다. 게다가 절친한 친구도 없고요.”

“그러니까 그 젊은 나이에 올페르 포션 공방의 수석 연구원이 될 수 있었던 거겠지.”

“하지만 바질 교관의 커리어는 거기서 끝입니다. 바질 교관은 올페르의 이름을 잇고 있지만 서자 출신에 방계 출신이니까요. 보통 서자 출신에 방계 출신이면 수석 연구원 자리가 끝입니다.”

올페르 백작가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귀족 가문은 직계와 장자 계승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아무리 바질 교관이 몸부림을 쳐봤자 수석 연구원 그 이상의 자리를 올라갈 수 없다.

공방장이나 연구실장과 같은 핵심 요직은 무조건 직계 자손들이 다 해쳐 먹는다는 거다.

그래서 대부분의 방계나 서자 출신은 명예나 승진보단 돈을 더 따지곤 한다.

그런데 바질 교관은 사실상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커리어를 갱신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사지나 다름이 없는 황도로 몸을 내던졌다.

“바질 교관은 올페르 백작에게 분명히 뭔가를 받기로 했을 겁니다. 아니면 원하는 게 황도에 있거나요.”

베르강은 라칸이 노리는 바를 알아챘다.

“바질 교관을 회유해 보겠다는 뜻인가?”

“네. 바질 교관이 원하는 바를 알아내기만 한다면 회유해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이번 작전 성공률은 크게 올라가겠죠.”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다.

하지만 그만큼 리스크가 있는 제안이다.

“바질 교관을 회유할 수 있다면 최고겠고, 바질 교관이 거부한다면 원점으로 돌아가겠지. 하지만 바질 교관이 이중 첩자 노릇을 한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야.”

“역으로 저희가 바질 교관을 이용할 수도 있겠죠. 바질 교관에게 잘못된 정보를 줘서 놈들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습니다.”

“네가 그걸 할 수 있겠어? 라칸? 어제 바질 교관은 티그리스 경 앞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고 설전을 나눴어. 보통이 아니라는 거지.”

라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라칸은 눈앞에 뜬 메시지를 확인했다.

[신규 퀘스트]

바질 교관을 회유해 올페르 백작의 정보를 빼내라.

보상 : 8,000포인트

“협상에 필요한 몇 가지 권한만 있다면 가능할 겁니다.”

“권한? 어떤 권한?”

“그건 오늘 저녁쯤에 다시 말씀드릴게요. 인퀴지터 요원 하나가 바질과 파스칼 사이에 악연이 있다는 정보를 물어 왔거든요. 잘하면 바질을 생각보다 쉽게 회유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레인로버는 라칸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1년 전, 실없이 웃기만 하던 라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진지함만 남았다.

그동안 많은 일을 겪긴 했지만, 라칸이 결정적으로 변한 이유는 아마도…….

‘……과거를 알았기 때문이겠지.’

“알겠어. 믿어볼게.”

“네. 감사합니다. 아, 맞다. 그리고 한 가지 지금 당장 필요한 게 있어요.”

“음? 그게 뭔데?”

“오늘하고 내일까지 휴강을 좀…….”

레인로버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대리 출석 해줄게. 나도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거든.”

라칸의 출석을 불렀는데 갑자기 레인로버가 손을 들고 말하면 교관은 어떤 생각을 할까?

음…….

생각하지 말자.

라칸은 바삐 자리를 옮겼다.

***

마법 학부가 쑥대밭이 되었기에 바질 교관이 사실 제국 대학에 출근해서 할 일은 없었다.

가르칠 학생도 없고 주변 동료들도 없다.

하지만 바질 교관은 꾸준히 제국 대학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올페르 백작에게 파스칼의 정보를 넘긴 이후 별다른 지시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올페르 백작가로 가주들이 모였다는 건 들었는데…….’

그 이후로 소식이 없다.

아마 올페르 백작과 가신들도 작전을 짜느라 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고요하군.”

평생 성과를 내지 않으면 밀려나는 치열한 삶을 살아왔다.

집보단 연구실에서 집에서 잠을 더 많이 잤고, 주말이나 휴일에 쉬어본 기억은 없었다.

동료, 아니, 경쟁자들이 그렇게 했기 때문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노력마저도 평가가 되는 치열한 공방 생활 속에서 결국 공방의 2인자 자리인 수석 연구원의 자리를 쟁취했다.

그렇다 보니 이렇게 할 일 없이 멍 때리는 시간은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질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고요함과 고독함을 버텨야 한다.

바질은 오직 이날만을 위해 살아왔으니까.

바질은 고독과 고요함을 이겨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교무실에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한가하게 쉬고 있는 종이들을 꺼내 교탁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종이를 접었다.

처음에는 가장 쉬운 비행기를 접었고, 다음은 배, 다음은 꽃을 접었다.

뭔가 하나에 집중을 하니 시간이 눈 녹듯이 사라졌고.

동시에 경계심도 허물어졌다.

“전에도 봤지만 종이접기를 정말 잘하시네요.”

바로 앞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바질은 살짝 놀랐다.

너무 집중하고 있던 탓에 누가 다가오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라칸은 눈으로 바질이 접은 종이를 구경했다.

“다람쥐, 딱정벌레, 이건 드래곤인가요?”

“여긴 무슨 일이지? 라칸?”

라칸은 특유의 시원한 미소와 함께 바질 교관의 옆에 앉았다.

“그냥 교관님과 인생 상담을 하고 싶어서요. 시간 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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