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 섬멸(3) >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 191화
섬멸(3)
바질은 올페르 백작이 알려준 집결지로 향했다.
위치는 황도 빅토리에 외곽 동남부에 위치한 하이덴 숲이었다.
올페르 백작이 알려준 좌표에 도착했더니 긴 기찻길이 나타났고, 그 기찻길 옆에 트레인 가드들이 사용하는 가드 포인트가 있었다.
바질은 기시감에 발을 멈춰 섰다.
‘?’
올페르 백작이 트레인 가드들을 가만히 놔뒀을 리는 없다.
최소한 제압을 해두거나 죽였을 게 분명한데 왜 피 냄새나 전투가 일어난 흔적이 없는 걸까?
바질은 탐색마법을 사용했다.
가드 포인트 내부에서 마법을 사용한 마력의 흔적은 남아 있었다.
설마, 단순히 제압마법만 사용한 걸까?
아니면······.
“왔나?”
생각할 새도 없이 가드 포인트 내부에서 올페르 백작의 목소리가 메아리쳐 흘러나왔다.
들어가기가 껄끄러웠지만 가만히 있는 것도 이상했기에 일단 들어가기로 했다.
가드 포인트 내부는 처음 보는 것이지만 굉장히 단순한 구조였다.
사람이 누워 있을 수 있는 평상과 무기를 놓을 수 있는 사물함 같은 것이 쭉 놓여 있었다.
올페르 백작은 길게 난 복도 한가운데에 의자를 놓고 앉아 빵과 물로 요기를 하고 있었다.
“저 백작님, 다른 도련님들과 마법사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올페르 백작 혼자만 탈출한 걸까?
다른 가문의 마법사들은?
올페르 백작의 아들들은?
올페르 백작은 바질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텁텁한 빵을 입에 다 털어 넣었다.
“······넌 어떻게 탈출했지?”
적당히 대답할 간단한 질문이었지만 대답을 회피했다.
뭔가가 있다.
바질은 혹시 몰라 완드를 소매에 숨긴 채 들어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광장에서 문제가 터지니까 추적하던 황금 기사들과 철혈 마법사들이 우왕좌왕하더군요.”
“평생 골방에 틀어박혀 마법 연구나 하는 놈인 줄 알았는데 그런 재주도 있다니 믿기지 않는군.”
“살려고 하니까 뭐든 되더군요.”
올페르 백작이 일어나 바질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올페르 백작의 생기 없는 눈빛에 바질은 순간 완드를 꺼낼 뻔했다.
“설계도는?”
“······여기 있습니다.”
바질은 올페르 백작에게 품속에 넣어둔 설계도를 건넸다.
올페르 백작은 설계도를 흘금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빼앗길 설계도라 엉망으로 만든 게 아닌가 확인했는데 바질의 눈으로 보기엔 진짜 설계도와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정교했다.
제아무리 올페르 백작이라도 자리를 잡고 몇 시간 동안 확인하지 않는 한 이해하기 어려울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향후 계획은 어떻게 됩니까? 탈출입니까?”
“그래. 이 나라를 뜬다.”
“나라를요?”
“그럼 영지로 돌아가 황국과 전쟁을 준비라도 할 거라고 생각했나? 내 아들을 모두 잃고 전투 자원들도 거의 다 잃었다. 황국이 본격적으로 군대를 움직이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단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전사했다는 뜻인가?
말이 되지 않는다.
분명 바질이 티그리스에게 전해 듣기론 몇몇 마법사들이 간신히 탈출했다고 들었다.
분명 한둘쯤은 이곳으로 왔을 텐데······.
올페르 백작이 갑자기 바질의 어깨를 강하게 잡았다.
순간 움찔했지만 올페르 백작의 광기 어린 눈빛에 마음이 차분해진다.
살아남으려면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감정적으로 움직이면 티그리스가 도착하기도 전에 죽을 것이다.
“이건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일 뿐이다. 성과 재산, 인재는 얼마든지 잃어버려도 상관은 없다. 그것들은 내가 다시 돌아와 세우고 모으면 된다. 나만 살아 있다면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들이야.”
올페르 백작은 가슴 깊이 숨겨두었던 추악한 광기를 숨기지 않았다.
올페르 백작은 지금 단순히 성과 재산을 버리자는 게 아니라 가문이 수백 년간 쌓아온 신뢰와 인간관계를 끊고 도망가자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을 모두 버리고 도망친 자가 다시 돌아왔을 때 과연 반겨줄 자는 누가 있겠는가?
아니, 애초에 돌아올 수 있기나 할까?
하지만 올페르 백작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자기만 살아 있다면.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올페르 백작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졌다.
“너도 나를 못 믿는 것이냐?”
오싹!
바질은 순간 살기를 느끼고 올페르 백작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내가 물었다. 나를 못 믿느냐고. 다른 놈들처럼.”
바질은 소매에 숨겨둔 완드 손잡이를 몰래 잡았다.
바질은 침을 꿀꺽이며 입을 열었다.
“······다른 전투 마법사들과 도련님은 다 어디 가셨습니까? 첫째 도련님과 막내 도련님은 사로잡혔다고 쳐도, 둘째와 셋째 그리고 넷째 도련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너는 안 보이느냐?”
올페르 백작은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전부 이 안에 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득- 우드득!
올페르 백작의 몸이 기이하게 비틀리며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막스는 나 대신 죽었고, 셋째와 넷째는 내 안에 있다. 내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어.”
올페르 백작의 옷이 찢어지며 가슴에 두 개의 얼굴이 드러났다.
올페르 백작의 둘째 아들 가브리엘과 넷째 아들 로베르트의 얼굴이었다.
-아······아버지······.
-살려······.
바질은 올페르 백작의 공방에서 일을 하면서 볼꼴 못 볼 꼴 다 봤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처럼 끔찍한 광경은 처음 봤다.
바질은 이제 적의를 숨기지 않고 완드를 치켜세웠다.
올페르 백작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나를 못 믿는 이유는 한 가지다. 내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하고 내가 듣는 것을 듣지 못하기 때문이지. 너희들의 아둔함은 내가 이해한다.”
뒤이어 등허리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튀어나오고 팔다리가 튀어나왔다.
바질의 키가 천장에 닿을 만큼 커지곤 가슴부터 배까지 세로로 갈라지며 끔찍한 입이 생겼다.
입 내부는 별조차 삼켜진 우주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나와 하나가 된다면 이해할 수 있겠지. 내가 그리는 미래와 이상향을.”
올페르 백작은 오른손들을 뻗었다.
바질은 뒷걸음질 쳐 떨어졌다.
그리고 마법 술식을 준비했다.
“나보고 그 괴물이 되라고?”
“네 눈에는 내가 괴물로 보이나? 아둔하군. 아둔해. 나는 인류의 미래다. 너는 눈을 뜨고 있지만 보질 못하는구나.”
올페르 백작은 손을 까딱이며 말했다.
“명령이다. 바질. 내 앞으로 와라.”
“싫다.”
올페르 백작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 노예의 각인을 무시한다고? 어떻게······?”
올페르 백작의 혀가 날름거렸다.
“삼키면 알 수 있겠지.”
바질은 곧바로 준비한 익스플로전 마법을 갈기고 뒤로 떨어졌다.
가드 포인트가 큰 폭발과 함께 무너졌다.
하지만 바질은 올페르 백작이 이 정도로 죽었으리라 생각되지 않았다.
역시나 무너진 잔해를 밀어내고 올페르 백작이 튀어나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잔해 더미를 염동마법으로 죄다 띄운 것이었다.
오우거처럼 무식하게 생긴 괴물이 저 정도로 세밀한 마법 운용이 가능하다니.
등줄기에서 땀이 흘렀다.
“저건······ 도대체 뭐지?”
“‘지혜롭고 잔혹한 입’이라는 기생형 성물이다.”
바질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티그리스였다.
적으로 생각했을 땐 끔찍하다고 생각했는데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니 정말로 든든했다.
티그리스라면 어떻게든 이 난제를 해결해 주지 않을까란 맹목적인 믿음이 피어올랐다.
티그리스는 샐러맨더의 검 대신 아공간 주머니에서 대적자의 검을 뽑아 들었다.
“자식을 잡아먹으면 자식이 갖고 있던 지식과 지혜 그리고 경험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성물이다. 인간의 성물이 아닌 멸종한 거인의 성물이지. 워낙 능력이 잔혹한 탓에 길리온 왕국의 깊은 지하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성물 중 하나였다.”
올페르 백작은 티그리스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티그리스······!”
“하지만 저 성물은 타락하면서 다른 능력으로 변모했지. 자신이 죽으면 자신의 혈육이 죽는 저주가 걸리고 말았지. 하지만 올페르 백작에게 있어선 그리 중요한 능력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 대신에 아들이 죽어줄 수 있다면 굉장히 좋은 일이라 생각했겠지.”
티그리스는 바질을 보며 말했다.
“바질. 라칸은 널 용서했겠지만 난 너를 용서하지 못했다. 넌 저 괴물이 그린 끔찍한 미래를 향해 함께하며 선량한 인간들을 죽이고 방관했을 테니까.”
바질은 침을 꿀꺽 삼켰다.
티그리스의 살기와 분노에 저절로 무릎이 꿇렸다.
“그러니 넌 라칸에게 감사하라.”
티그리스는 바질을 지나쳐 올페르 백작에게 나아갔다.
티그리스의 넓고 큰 등이 올페르 백작을 가렸다.
“네가 라칸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서 죽었을 거다.”
올페르 백작은 공중에 띄운 건물 잔해를 티그리스에게 날렸다.
속도는 음속을 아득히 넘어 바질로선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훙-
티그리스는 대적자의 검을 단 한 번 휘둘렀다.
검에서 발한 날카로운 수천 조각의 검풍이 건물 잔해를 먼지로 만들어 버렸다.
올페르 백작은 난폭하게 팔을 휘둘러 시야를 가린 먼지를 날려 버렸다.
“내 아들들은 지금까지 내게서 빼앗아가기만 했다. 내 것을 되찾아 오겠다는데 뭐가 잘못된 거지?”
“네 어긋난 사상과 생각을 고쳐줄 생각도 없고 굳이 입 아프게 설명할 이유도 없다.”
티그리스의 검은 조용하지만 빗살처럼 움직였다.
올페르 백작은 티그리스가 언제 검을 움직였는지조차 볼 수 없었다.
그저 검이 휘둘러졌을 때 올페르 백작의 거대한 오른팔이 맥없이 툭! 떨어졌을 뿐이다.
“끄아아아아아악!”
올페르 백작의 비명이 전장을 질주했다.
티그리스는 그 비명을 정면으로 거스르며 돌진했다.
압도적인 죽음의 공포에 올페르 백작은 빠르게 마법을 빚어 내질렀다.
지혜롭고 잔혹한 입의 능력으로 올페르 백작이 잡아먹은 72개의 뇌가 동시에 계산을 내려 72개의 마법이 동시에 펼쳐졌다.
익스플로전 마법과 파이어월과 같은 공격 마법과 각종 디버프 마법이 티그리스에게 작렬했다.
공격 마법은 그리 티그리스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냥 검만 내뻗으면 될 일이니까.
하지만 디버프 마법은 조금 다르다.
즉발형으로 작동하는 마법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티그리스의 몸에 디버프 마법이 그대로 걸렸다.
오른손과 왼손의 신경 작동을 바꾸는 정체 모를 혼란 계열 마법과 육체의 피로도를 늘리는 탈진 마법, 눈앞을 가리는 블라인드 마법까지 걸렸다.
하지만 주술이 아니고 마법인 이상 대처 방안이 있었다.
티그리스는 순수한 오러 운용술로 디버프 마법을 깨부쉈다.
혼란 계열 마법은 정신을 맑게 해주는 ‘개안’이라는 운용술로 대응하고
탈진 마법에 늘어진 근육은 오러로 자극을 주어 다시 긴장감을 주고
마지막으로 블라인드 마법은 시각 강화로 간단히 파훼했다.
그 일련의 과정은 올페르 백작의 투사체 마법들이 티그리스에게 날아오기 전에 모두 완료되었고, 티그리스는 온전한 상태로 검을 내질렀다.
검이 모든 종류의 투사체 마법을 잘라내고 땅에서 솟구치는 파이어월 마법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피해냈다.
이윽고 올페르 백작의 왼 다리가 잘려 나가며 육중한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끄아아아아아!”
허우적거리는 올페르 백작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대며 티그리스는 입을 열었다.
“죽이기 전 질문을 하겠다. 길리온 왕국과 어떻게 소통했고, 길리온 왕국에게서 어떻게 그 저주받은 성물을 받은 거지?”
“죽어라!”
올페르 백작은 목에 칼이 들어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법을 시전했다.
티그리스의 의문을 풀지 않으면 자신을 영원히 죽일 수 없을 것이란 계산이었다.
올페르 백작의 발악은 티그리스의 눈으로 보기엔 벌레의 꿈틀거림과도 같았다.
차라리 루카스 후작의 결계 마법이 티그리스의 입장에선 더 위협적이었다.
하긴 이 정도에 불과하니까 티그리스의 기억 속에도 남지 못하고 죽었으리라.
티그리스는 주문 사냥의 술을 사용할 필요도 없이 순수한 오러의 힘으로 모든 마법을 부숴 버렸다.
푹!
“커어어억!”
티그리스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입에 대적자의 검을 꽂아 넣었다.
거대한 입은 대적자의 검을 어떻게든 씹어 먹으려고 이빨들이 움찔거렸지만 씹어 먹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대적자의 검’과 ‘지혜롭고 잔혹한 입’은 상성이 맞지 않는다.
대적자의 검은 거인의 왕을 사냥한 검이다.
거인의 왕을 사냥하는 성물이 거인의 영향을 깊게 받은 성물에게 밀릴 리가 없었다.
“다시 묻겠다. 길리온 왕국에게서 어떻게 이 타락한 성물을 받은 거지?”
“차라리 죽여······!”
티그리스는 검을 비틀었다.
검강이 성물을 찢어발기며 검은 피가 줄줄 새어 나왔다.
올페르 백작은 술식을 엮으려 했지만, 티그리스의 정순한 오러가 올페르 백작의 마나를 산산이 흩어버리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너는······ 너는 모르겠지. 길리온 왕국이 멍청이처럼 당하기만 한 건 숨을 고르기 위함인 것을. 나는 보았다. 길리온 왕국 놈들이 만들어낸 키메라들이 황국을 집어삼키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길리온 왕국 놈들은 미쳤어. 그 끔찍한 괴물들을 길들이다니. 황국은 드래곤이 득세하던 300년 전으로 회귀하고 말 것이다.”
키메라란 말에 티그리스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길리온 왕국, 아니, 로타와 아르펨이 벌써 키메라를 사용한다고?
왜?
그 키메라들을 지금 움직인다면 황국이 혼란스러워지긴 하겠지만, 결코 놈들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다.
키메라는 현재로선 놈들의 최종 전력이니까.
“말해라. 키메라들을 어떻게 움직이는 거지?”
“끄그그그그!”
올페르 백작의 눈알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티그리스의 강인한 오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온몸이 붕괴하는 것이었다.
티그리스는 올페르 백작을 일단 살리기 위해 검을 뽑아냈다.
울컥!
검은 피가 솟구치며 동시에 올페르 백작의 상반신을 잡아먹고 있던 검은 입이 튀어나왔다.
-키에에에에에! 케에에에에!
놈은 다음 먹잇감을 찾아 헤매듯 하얀 이빨을 지네 다리처럼 움직여 사방을 돌아다녔다.
저 끔찍한 놈이 기생형 성물 ‘지혜롭고 잔혹한 입’이었다.
티그리스는 절단의 심상을 담아 검을 내질렀다.
검은 심연을 담은 입은 그대로 양단되었고, 성물은 죽기 직전 자신이 먹었던 사람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웨에에에에엑!
잡아먹었던 마법사들과 트레인 가드 그리고 아들들까지 모조리 토해냈다.
성물은 모든 것을 토해내다가 결국 재로 변해 죽고 말았다.
티그리스는 올페르 백작을 노려봤다.
올페르 백작은 잘려 나간 오른팔과 왼 다리 때문에 쇼크가 왔는지 눈을 뒤집어 까고 있었다.
티그리스는 놈의 목을 잡고 들어 올렸다.
티그리스의 정순한 오러가 들어가자 올페르 백작은 강제로 정신이 차려졌다.
그 때문에 잘려 나간 오른팔과 왼 다리의 고통이 그대로 느껴졌다.
“으아아아아아아악!”
“말해라. 올페르 백작. 어떻게 키메라들을 황국으로 옮긴다는 거지?”
티그리스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포션을 꺼내 들어 놈의 상흔에 가져다 부었다.
그러자 빠르게 아물었고 고통도 잦아들었다.
“죽······ 죽여라. 그냥 날 죽여!”
“차라리 내게 말하고 깔끔하게 죽는 편이 나을 것이다. 나달이 심문하기 시작하면 너는 이보다 끔찍한 일을 겪게 될 거니까.”
고통 앞에선 모두가 평등하다.
바질은 결국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이······ 이미 늦었다. 티그리스.”
“그게 무슨 소리지?”
“이번 작전을 보기 좋게 실패했으니, 길리온 왕국이 움직여 키메라들을 풀었을 것이다. 아마 지금쯤이면 키메라들이 내 성을 장악하고 있겠지.”
“어떻게? 네 성과 길리온 왕국은 500㎞는 넘게 떨어져 있다. 국경을 넘어서 온다고 해도 ‘뱀이 지나간 절벽’은 험준해서 키메라들이 넘어올 수 없다. 그리고 펠렌이 죽은 이상 고위 텔레포트 마법을 수시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고.”
뱀이 지나간 절벽은 길리온 왕국과 루체트 황국의 국경을 나누는 천연 절벽이다.
절벽엔 세찬 바람이 상시 불고 플라이 마법으로 날아서 통과하기엔 마나가 굉장히 불안정한 곳이라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키메라들이 통과하려고 한다면 무조건 에이미로 황자가 지키고 있는 에이미로 자치령 또는 밀림 아니면 멸지 쪽으로 멀리 돌아서 이동해야 하는데 그것은 시간과 동선 낭비가 심하다.
그럼 어떻게 놈들은 성물을 주고받은 것일까?
“길리온 왕국에 그리폰을 다룰 줄 아는 소환술사가 없을 것 같나? 그리폰이 키메라의 알들과 새끼들을 날라주었지.”
그리폰······!
와이번과 함께 하늘을 지배하는 몬스터 중 하나다.
바람 마법까지 사용할 줄 아는 그리폰이라면 세찬 바람이 부는 뱀이 지나간 절벽을 가로지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 또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하나 남아 있다.
“주기적으로 연락하기 위해 그리폰을 보낸다고? 500㎞나 되는 거리를 그리폰이 오고 가려면 최소한 이틀은 넘게 걸린다.”
“소통 수단은 그리폰을 사용하지 않았다. 길리온 왕국에서 온 대사 하나가 괴상한 방법으로 길리온 왕국과 소통하더군.”
“어떤 방식으로?”
“그건 나도 모른다. 그냥 내 뜻을 대사에게 전하면 30분도 채 되지 않아 길리온 왕국의 뜻을 그대로 전달해 주었다. 마법은 아니고 마치 주술 같았다.”
그런 기괴한 능력의 소유자가 과거에도 있었던가?
무려 500㎞가 떨어진 아군과 신속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자.
티그리스의 기억으론 없었다.
“그 대사의 이름이 뭐지?”
“그것만 알려주면 놓아줄 건가?”
티그리스는 올페르 백작의 목을 강하게 쥐었다.
올페르 백작의 눈이 붉게 충혈되며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직접 하지 않아도 네게서 그자의 이름을 듣는 방법은 수없이도 많다. 그러니 답해라. 그자의 이름이 뭐지?”
“아······ 아······.”
올페르 백작은 간신히 입을 열어 말했다.
“아르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