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 키메라(4) >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 195화
키메라(4)
스페스는 익숙한 인기척에 연구를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로타의 발 사티로스와 로타의 코 포에토였다.
“웬일이지? 너희가 지금 여기에 있으면 남부 철도 쪽 키메라 통제가 안 되잖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게 중요하지 않으면 뭐가 더 중요하지?”
“티그리스가 리벡으로 오고 있다.”
스페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곳으로 오고 있는 거지? 놈은 남부 철도 복구 작업에 신경 써야 할 때가 아닌가?”
“올페르 백작으로부터 뭔가 이상한 정보라도 얻었을지도 모르지.”
무슨 정보를 물었는지 모르겠지만 놈이 이곳으로 온다는 건 별로 좋은 소식이 아니다.
놈들이 남부 철도 복구 작업에 신경이 팔린 사이에 키메라들을 생산하는 둥지들과 연구소를 동북부 곳곳에 숨겨둘 생각이었다.
특히 리벡은 스페스의 핵심 연구 시설이자 핏줄 거미의 둥지로써 사용될 곳이었기 때문에 이미 많은 자원들이 이곳에 투자된 상황이었다.
이곳을 빼앗기면 스페스는 뱀이 지나간 절벽 쪽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는데, 거기에서 다시 기초 작업을 진행한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그레미오스와 뤼펜은 어떻지?”
“우리 쪽 연구소는 쳐다도 보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잠시만, 벌써 지나쳤다고?”
“그래. 놈은 비상식적인 속도로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다. 잠도 자지 않고 달려온다면 36시간 내로 도착할 것 같더군.”
포에토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혹시 이곳에 귀중한 성물이라도 있나? 아니면 티그리스나 황국이 혹할 만한 무언가라도.”
“아니, 그런 건 없다. 성물도 올페르 백작이 다 가져가서 남은 건 하나도 없어.”
“흠······. 그러면 하나밖에 없군. 아르펨 님을 노리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셋의 시선이 핏줄로 만들어진 왕좌로 향했다.
그곳엔 아르펨이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아르펨 님이 이 키메라 사태의 원인이라고 판단하고 제거하기 위해 오는 것이란 건가?”
“제거라기보단 키메라의 약점을 캐거나 무슨 생각으로 키메라들을 풀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겠지. 아마 놈은 아르펨 님을 키메라 마법사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놈은 이곳이 키메라 마법사의 연구실인 것을 알고서 혼자 오고 있다는 건가? 오만한 건지 아니면 미쳐 버린 건지 당최 알 수 없군.”
마법사들의 연구실이 굉장히 위험하다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다.
그것도 키메라 마법사의 연구실이다.
그곳을 바스티얀이나 베르강도 없이 홀로 오고 있다고?
제아무리 솜니움을 죽이고 펠렌을 죽였다고 하더라도 너무 자신감이 넘쳤다.
“자신감을 가질 만큼 실력 하나는 대단하더군. 놈은 1인 군단 그 자체다. 어중간한 키메라들로는 막을 수 없어.”
“키메라들이 검강을 사용할 줄 아는 기사들에겐 상대가 안 되는 건 당연하겠지. 하지만 티그리스나 베르강이 접근조차 하지 못하도록 오염 두더지들을 시켜서 이 주변을 맹독 지대로 만들었을 텐데?”
오염 두더지는 독성이 강한 체액을 뿜어내 주변을 황폐화시키고 공기마저 오염시킨다.
어중간한 기사들은 그 공기를 마시는 순간 마나를 빼앗겨 천천히 고사하게 되는데, 티그리스는 그 맹독 지대를 몸으로 뚫으며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포에토는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놈이 중독됐는지 정확하게 확인되진 않았지만, 놈의 전진 속도는 12시간이 지나도록 줄지 않았다.”
“확인 방법은 없나?”
“직접 마주 보는 것 외엔 없다.”
“혹시 네가 직접 가서 확인할 수 없나?”
포에토는 콧방귀를 뀌었다.
“스페스 네가 직접 확인하겠다면 말리지 않겠다. 하지만 난 티그리스에게 접근해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다.”
포에토는 자기 주제를 알았다.
티그리스는 8서클의 대마법사 펠렌을 죽였다.
포에토는 7서클의 연금술사라고 하지만 본격적인 전투는 이번이 처음이었고 키메라를 실제로 활용해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도저히 지금의 티그리스와 마주하고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더 이상 티그리스 그놈에게 보낼 키메라는 없어.”
“그게 무슨 소리지? 키메라가 없다니?”
“말 그대로다. 지금 남은 오염 두더지와 오염 박쥐는 남부 철도 복구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황금 기사들과 철혈 마법사들을 상대해야 한다. 놈에게 키메라를 보내면 원래 계획한 목표를 절대 달성하지 못한다.”
스페스는 사티로스를 보며 말했다.
“인면 나무나 분쇄자 쪽은?”
“이쪽도 마찬가지다. 샐러맨더의 검의 화력을 막을 수 있는 키메라들은 없어. 막는다면 우리가 직접 막아야 한다.”
“흠······.”
스페스도 포에토처럼 티그리스와 직접 마주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로타 님과 아르펨 님께서 승인해 주신 이번 작전을 도중에 포기하고 길리온 왕국으로 돌아가면 앞으로 이런 기회가 또 올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또 쥐새끼처럼 숨어서 연구할 순 없어.’
로타 님께 충성을 맹세한 이후로 지금처럼 남들 눈치 보지 않고 연구할 수 있는 상황이 없었다.
기사, 귀족, 평민, 마법사, 수인 등 다양한 실험체를 마음껏 공수해서 이런저런 실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또 언제 올까?
길리온 왕국이 본격적으로 황국과 전쟁을 벌이지 않는 한 불가능할 것이다.
“지금 당장 결정을 내려야 한다. 놈을 그냥 무시하고 남부 철도에만 신경을 쓸 것인지 아니면 이곳에서 놈과 정면 승부를 할 것인지.”
“만약 후자를 선택하면 실험은 아마 전면 중지를 해야겠지. 대신 성공한다면 우린 로타 님께 특별한 능력을 하나 더 받을 수도 있고.”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세상일이 모두 그렇듯 위험할수록 보상은 달콤했다.
스페스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도 우리 셋인데 티그리스 하나 이기지 못할까? 만약에 놈이 상상 이상으로 강해서 도망쳐야 한다면 키메라들을 던지고 텔레포트로 도망치면 될 일이고. 그리고 이번 전투를 통해 놈의 전투 데이터를 많이 뽑기만 해도 이득이다.”
“전투 데이터? 아~ 티그리스를 상대할 키메라를 만들겠다 이거군.”
“그래. 맞아.”
스페스의 말에 포에토와 사티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도 스페스가 무조건 동의할 거라 대충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남부 철도에 있는 키메라들을 모두 불러서 티그리스를 상대하는 게 좋겠어.”
“남부 철도 병력까지 빼자고?”
“좀 전에 말했잖나. 지금 당장에 쓸 수 있는 키메라들이 없다고. 놈을 상대하려면 키메라 부대라도 전부 빼내야지.”
“그러면 길리온 왕국 쪽은 어떻게 하고? 지금 전쟁 준비가 한창일 텐데?”
“티그리스를 죽인다면 놈들 입장에서도 남는 장사일 거다.”
“하긴 그렇지.”
포에토는 지도를 펼쳐 티그리스가 마지막으로 발견된 지점을 가리켰다.
“놈은 30분 전에 그레미오스를 지나쳤다. 이 속도라면 리벡에 도착하기까지 36시간 정도 걸리겠지.”
“그레미오스와 뤼펜의 병력을 빼서 티그리스를 감싸면 되겠군.”
“그래. 중요한 건 티그리스의 체력을 빼는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기사라고 하더라도 결국은 인간이다. 밥도 먹고 잠도 자야지.”
“티그리스가 최대한 많이 지치게 만드는 게 핵심이겠군.”
“혹시 핏줄 거미들도 증원할 수 있나?”
스페스는 고개를 저었다.
“핏줄 거미들은 거미줄이 없는 곳에선 제대로 된 전투력이 나오지 않는다. 대신 거미줄을 최대한 넓게 펼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도록 하지.”
“그러면 남부 철도를 점령한 키메라들을 부르는 것으로 하겠다. 솔직히 말해서 베르강이나 바스티얀을 죽이는 것보다 티그리스 하나를 잡는 게 우리에게 더 이득이 될 것 같군.”
“잘하면 로타 님께 더 지원을 받을 수 있고.”
“그러면 더 좋지.”
포에토는 지도를 접었다.
“그럼 우리는 최대한 티그리스의 발목을 잡겠다. 그동안 준비를 철저히 해놓도록.”
그 말을 끝으로 포에토와 사티로스는 사라졌다.
* * *
15시간이 지나자 티그리스의 발목을 잡는 키메라들의 숫자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물론 직접적으로 상대하는 숫자가 줄었다는 뜻이지 주변에 키메라들이 없다는 건 아니었다.
티그리스의 감각엔 주변에 키메라들이 있었지만 다가오지 않았고, 티그리스가 쉬거나 밥을 먹으려고 할 때면 어김없이 키메라들이 나타나 공격을 했다.
놈들이 노리는 바가 무엇인지 티그리스는 단번에 알아챘다.
‘내 체력을 빼려는 거군.’
놈들이 본능을 억누르고 체계를 갖춘 채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뜻은 로타의 권속들이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티그리스는 지도를 펼친 뒤 북극성의 망토를 사용했다.
그러자 지도 위에 붉은 점이 보이며 티그리스의 위치를 정확하게 표기했다.
남부 철도와 얼마나 떨어졌는지 거리를 계산해 보니 40㎞가 살짝 넘었다.
그 말은 놈들은 남부 철도를 포기하고 티그리스를 상대하기로 결정을 내렸다는 뜻이었다.
‘남부 철도 복구는 생각보다 쉬워지겠어.’
키메라들과 권속들을 티그리스 쪽으로 끌어모았으니 일단 1차 목표는 이루었다.
이제 남은 것은 로타의 권속들을 처리하는 일이었다.
‘리벡까지 남은 거리가······.’
대략 100㎞정도 남았다.
지금 이 속도로 달려간다면 36시간 내로 도착할 수 있다.
티그리스는 고민했다.
웬만하면 리벡에서 사티로스와 포에토 그리고 스페스를 모두 잡고 싶다.
하지만 펠렌, 레비스, 솜니움 등 많은 권속들이 티그리스의 손에 죽은 상황에서 놈들이 방심할 거라 생각되지 않았다.
그 오만한 놈들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키메라들만 보내서 티그리스의 체력을 빼는 작전을 택했다는 건 그만큼 티그리스를 두려워한다는 뜻이니까.
자칫 잘못하다간 리벡에 가도 스페스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놈들이 방심하게 만들어줘야겠지.’
놈들이 노리는 바가 티그리스의 체력을 빼는 거라면, 그 노림수에 당해줘야 놈들과 마주할 수 있다.
즉, 기만술이 필요하다.
기만술이라고 하니 라칸이 절로 떠올랐다.
라칸의 기만술은 티그리스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대단해서 로타와 아르펨마저도 속아 넘어갔을 정도였다.
하지만 라칸 수준의 기만술을 티그리스가 잘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면 티그리스만의 기만술을 펼쳐야지.
‘진짜로 체력을 뺀다.’
티그리스는 키메라들이 뭉쳐 있는 곳을 향해 박차고 달려들어 갔다.
쾅!
검강이 폭발하며 땅이 헤집어졌고, 땅속에 숨어 있던 오염 두더지들이 튀어나왔다.
티그리스는 그 오염 두더지들을 향해 샐러맨더의 검의 능력을 사용했다.
-키에에에에에!
수십 마리의 오염 두더지들이 화염에 휩싸여 한 줌의 재가 되어버렸다.
동시에 티그리스의 체내에 남아 있는 오러도 빠르게 소진이 되었다.
불필요하고 굉장히 비효율적인 전투다.
그러나 이렇게 하지 않으면 티그리스의 체력은 빠지지 않을 것이다.
‘가자.’
* * *
티그리스가 리벡으로 향한 지 48시간이 지났다.
티그리스는 모험가의 망토의 자동 세척 능력 덕분에 몸은 깨끗했지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검을 쥔 손이 후들거렸다.
지금까지 단 30초도 쉬지 않고 전투에 전투만 지속했다.
전투를 하지 않을 땐 전속력으로 달렸고 일부러 오러를 태우기까지 했다.
하지만 겨우 1분 쉬었다고 금세 숨이 빠르게 되돌아오고 삐걱거리는 근육의 피로가 가시기 시작했다.
티그리스는 혀를 찼다.
‘영약이 변수였어.’
일주일 전에 먹은 드래곤의 심장으로 만든 영약의 잔여물들이 티그리스의 근육과 뼈에 스며들면서 빠르게 회복시키고 있었다.
오히려 근육과 뼈, 피부를 더 튼튼하게 만들고 있었다.
근육은 더욱 밀도 있게 압축되고 동시에 유연해졌으며 뼈는 열차와 직격으로 부딪혀도 부러지지 않을 정도가 되었으며, 피부는 질기다 못해 쫀쫀해졌다.
심지어 오러는 마치 마르지 않는 샘처럼 계속 뿜어져 나왔고 잠시 숨만 돌렸을 뿐인데 벌써 피로감이 싹 가셨다.
현재 티그리스의 몸 상태를 라칸의 스테이터스로 환산하면 모든 스테이터스가 ‘최상’을 가리키고 있지 않을까?
아무튼 덕분에 8성 기사가 될 수 있는 기초 작업이 거의 끝이 났다.
물론 48시간 동안 쉬지 않고 전투를 계속했기에 정신적인 피로감이 좀 남긴 했지만, 일주일을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권속들에게 쫓겨본 경험이 있었기에 이 정도는 피로라고 부를 수조차 없었다.
티그리스는 일단 지도를 펼쳤다.
이제 리벡이 코앞이었다.
눈앞에 있는 산만 넘으면 바로 리벡이 보일 것이었다.
그때, 티그리스의 코끝에 익숙한 냄새가 스치고 지나갔다.
‘이 냄새는······.’
티그리스는 코끝을 스치는 달콤한 향기에 순간 숨을 멈췄다.
젖내와 설탕이 섞인 듯한 오묘한 냄새.
이 냄새가 무엇인지 티그리스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핏줄 거미들이 내뿜는 거미줄에서 나오는 마약성 환각제 냄새였다.
이 향기에 중독되면 제아무리 강인한 기사라고 하더라도, 최면에 걸려 스스로 거미줄에 몸을 파묻게 된다.
이 냄새가 근처에서 난다는 말은 하나다.
‘핏줄 거미의 서식지에 도착했군.’
이 환각제에 저항하는 방법은 총 세 가지가 있다.
산소호흡기를 착용하거나 제독 마법을 사용하거나 다른 하나는 최상급 오러 운용술 중 하나인 ‘개안’을 사용하는 것이다.
티그리스의 입장에서 가장 편한 방법은 당연히 개안을 상시 발동하는 것이었다.
티그리스는 개안을 사용했다.
그러자 정신이 맑아지며 시야가 넓어졌다.
물론 이 상태를 오래 지속하다가 풀면 급속도로 피로감이 몰려온다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티그리스의 입장에선 오히려 좋았다.
놈들과 마주했을 때 조금이라도 초췌한 모습을 보여줘야 놈들이 방심하겠지.
티그리스는 산을 빠르게 올랐다.
정상에 오르자 산 아래에 붉은 도시 하나가 보였다.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전혀 알아보지 못할 도시의 풍경이었지만, 티그리스로선 굉장히 익숙한 모습이었다.
핏줄 거미에게 둥지화된 도시의 모습이었다.
저곳이 올페르 백작령의 수도 ‘리벡’이었다.
티그리스는 지도와 함께 눈대중으로 거리를 가늠했다.
‘앞으로 5㎞.’
그냥 달리기만 해도 10분 내로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하지만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로타의 권속들과 함께 위험한 핏줄 거미들이 달려들 테니 방심하지 않기로 했다.
티그리스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어 근육에 산소를 공급했다.
지금부턴 단 1초도 쉴 수 없다.
로타의 손 스페스를 죽이거나 핏줄 거미의 둥지를 모조리 태워 버리지 않는 이상.
티그리스는 땅을 힘차게 밀어내며 리벡을 향해 곧게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