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 약점 >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 197화
약점
스페스, 포에토, 사티로스 셋 모두 각각 부족한 점도 많고 약점도 많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 셋이 오늘 티그리스에게 죽는 이유를 설명하라면 딱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미숙함.
놈들은 냄새나는 골방에 박혀 키메라들이나 만들었지, 수준 높은 기사와의 전투를 경험해 본 적이 없다.
그러니 기사와의 전투에서 제일 중요한 거리와 탁 트인 전장을 내어준 것이다.
회귀 전엔 티그리스와 시도 때도 없이 싸워봤기 때문에 티그리스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각종 성물들과 마법을 개발해 막아냈다.
심지어 티그리스가 보유하고 있는 성물이 무엇이고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전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아군과 적의 전력 파악이거늘 저놈들은 티그리스의 체력만 빼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다른 것들은 아예 신경 쓰지 않았다.
디테일의 차이다.
파직-! 파지지직!
-끄아아아아!
왼쪽 벽에서 번갯불 지져지는 소리와 함께 사티로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티그리스는 거미줄 벽을 통째로 날려 버렸다.
흩어지는 먼지와 붉은 안개 너머로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사슬에 한 사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사티로스였다.
천공의 사슬의 고유 능력인 ‘하늘 사슬’의 능력은 1시간 동안 상하좌우 50m의 공간을 분리하는 능력이 있다.
억지로 이 공간을 빠져나가려는 경우 사티로스처럼 천공의 사슬에 묶이게 되는데, 천공의 사슬의 고유 능력인 ‘쇠약’과 함께 ‘제압’이 함께 걸린다.
놈이 천공의 사슬에 대한 능력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었다면 텔레포트로 빠져나가려는 수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티그리스는 사티로스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사티로스는 죽음이 다가오는지도 모르고 꽥꽥 소리만 지를 뿐이었다.
포에토의 맹독 가스에 노출되어 눈과 귀 그리고 코와 입에서 피를 쏟아내고 있었고, 살점이 녹아내리고 멋대로 재생하여 살점이 엉겨 붙어 있었다.
끔찍한 몰골이다.
회귀 전, 사티로스는 고디바 왕국을 홀로 점령하고 스스로를 ‘사막의 왕’이라 칭했던 권속이었다.
그런 존재가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발버둥을 치고 있다니······.
‘잡념은 거두자.’
승리에 도취되기엔 아직 이르다.
아직 스페스가 죽지 않았다.
티그리스는 검을 수평으로 그었다.
사티로스의 목이 호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아마 놈은 자기가 죽는지도 모르고 죽었으리라.
티그리스는 뒤를 돌아봤다.
스페스의 위치는 이미 파악한 상태였다.
티그리스는 천천히 피로에 전 몸을 이끌며 스페스가 숨은 비밀 연구실로 향했다.
* * *
스페스는 썩어 문드러져 가는 손을 더듬어가며 아공간 주머니를 열어 성수를 꺼내 얼굴에 부었다.
치이이익-!
“끄읍······!”
스페스의 몸에 남아 있던 포에토의 독과 성수가 서로 충돌하며 끔찍한 고통이 몰려왔다.
성수로도 치료가 잘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포에토의 독은 성물로 만들어진 독인 게 틀림이 없었다.
분명 자신의 피를 독으로 만드는 성물을 갖고 있었겠지.
‘개자식 그런 성물이 있었다면 말이나 해줄 것이지······!’
포에토가 유독 독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성물을 갖고 있다는 정보는 들은 적이 없었다.
만약 알고 있었다면 포에토가 죽자마자 블링크로 도망이라도 쳤을 것이다.
‘잠시만, 티그리스 그놈은 분명히 알고 있었어.’
놈은 세 명 중에 굳이 포에토를 제일 먼저 노렸고, 포에토가 죽자마자 곧바로 도망쳤다.
스페스도 모르는 포에토의 정보를 티그리스는 어떻게 알고 있던 걸까?
아니, 그냥 우연인가?
스페스의 머릿속이 복잡해질 무렵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저벅-
스페스는 목에 걸어두었던 푸른색 보석 목걸이를 강하게 쥐어 부쉈다.
이건 고디바 사막에서 얻은 ‘거미의 가호’라는 방어용 성물이었다.
1회용 성물인지라 진짜 긴급한 상황이 아니면 쓰면 안 되는 성물이지만,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판단은 유효했다.
팅-!
스페스의 바로 뒤에서 날카로운 강철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끼기기기긱!
스페스는 침을 꿀꺽이며 뒤를 쳐다봤다.
뒤에는 온몸이 거미줄로 묶인 티그리스가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 살기 어린 눈빛에 발이 후들후들 떨렸지만, 지금은 하늘이 내려준 천금 같은 기회임을 알고 있었다.
속박 및 방어용 성물인 ‘거미의 가호’는 자신에게 접근하는 적의 모든 물리 공격을 막아내고 딱 5초 동안 묶어둘 수 있다.
그사이에 티그리스를 죽일 수 있는 마법 또는 성물을 바로 사용해야만 했다.
티그리스의 전투 데이터를 분석해 본 결과 티그리스를 한 방에 죽일 수 있는 마법은 없다.
대신 성물은 있다.
스페스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붉은 모래가 담긴 병을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마개를 열어 모래를 쏟아부으며 말했다.
“왕의 불멸!”
보석 목걸이에서 튀어나온 모래 손이 티그리스를 집어삼켰다.
스페스는 쾌재를 불렀다.
“됐다!”
이 성물의 이름은 ‘사막 장의사’라는 것으로, 성물에서 뿜어져 나온 모래에 닿는 순간 생명체는 모래에게 모든 수분을 빼앗겨 미라화되고 만다.
제아무리 7성 기사라고 하더라도 이것에 당하면 인간인 이상 죽을 수밖에 없다.
5초가 넘도록 모래 뭉치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스페스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공방은 단 10초도 되지 않았지만, 온몸에 힘이 없었다.
“괴물 같은 놈.”
그럼에도 스페스는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티그리스를 죽였다.
그것도 시체를 보존한 채로.
수분이 없는 미라 상태라는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상흔 하나 없이 시체를 보존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이제 남은 것은 놈의 신체를 연구하는 일이다.
놈의 신체를 연구하면 사상 최강의 키메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이고, 영생에 대한 비밀에도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질 것이다.
부스스-
공중에 떠 있던 모래 뭉치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수분을 다 흡수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모래 뭉치가 툭툭 떨어질수록 스페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이게 무슨······.”
스페스는 티그리스가 모래에 갇히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이······ 있어야 하는데······. 분명히 있어야······!”
스페스는 갑자기 목덜미가 화끈해지는 감각과 함께 세상이 거꾸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목을 잃은 자신의 몸뚱이가 보였다.
툭!
무너져 가는 자신의 몸 뒤로 깨끗한 군화가 보였다.
티그리스의 깨끗한 군화였다.
티그리스는 뻐끔뻐끔거리는 스페스의 얼굴을 보며 중얼거렸다.
“황제 폐하께 감사해야겠군. 덕분에 생각보다 쉽게 잡을 수 있었어.”
북극성의 망토가 산들바람에 살랑거렸다.
* * *
티그리스는 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려 주변에 살아 있는 권속이 있나 다시 확인했다.
하지만 주변엔 살아 있는 권속은 없었다.
그제야 티그리스는 마음을 적당히 놓고 쉴 수 있었다.
사실 티그리스도 아슬아슬했다.
오러와 체력이 바닥이 나서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정말 힘들었으니까.
티그리스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포션을 꺼내 마셨다.
그제야 몸에 활력이 돌며 피로감이 빠르게 가시기 시작했다.
그때, 티그리스의 감각에 기묘한 것이 걸렸다.
아주 작은 꿈틀거림.
마치 새끼 거미나 쥐새끼가 꿈틀거린 것만 같은 미세한 진동이었다.
“흠······.”
의심스럽다.
그렇다면 할 일은 하나다.
티그리스는 제자리에서 검을 휘둘러 검강을 날렸다.
그러자 왕좌가 폭발하듯이 터져 나가며 새하얀 인간이 튀어나왔다.
인간이지만 인간이라 느껴지지 않는 얼굴.
저 얼굴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쥐새끼처럼 잘 지켜봤나? 아르펨 대사?”
티그리스의 말에 아르펨은 피식 웃었다.
“잘 봤지. 네가 생각보다 굉장히 강하다는 것도 알았고.”
티그리스는 아르펨과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회귀 전을 포함해 딱 두 번이다.
최후의 전쟁에서 한 번.
그리고 지금.
하지만 아르펨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이 있다.
아르펨은 직접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 숨어서 남을 조종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런데 직접 몸을 움직여서 권속들을 통제했다는 말은 놈도 제법 급하다는 뜻이리라.
“생각보다 긴장을 많이 하는군. 티그리스. 탈진 상태에서 7서클의 대마법사 세 명을 모두 죽일 정도로 대단하지 않았나? 그런데 마나라곤 한 줌도 없는 나를 왜 견제하는 거지?”
티그리스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아르펨은 상대방의 감정을 뒤흔들어 권속으로 만드는 놈이다.
그러니 놈의 혓바닥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
“마나가 없는 몸으로 내 검을 피해낸 것 자체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나?”
“음······. 역시 그렇긴 하지?”
아르펨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일단 이런 소모적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건설적인 이야기를 좀 하자.”
“무슨 이야기?”
“길리온 왕국을 가만히 놔둬라. 그러면 우리도 황국을 공격하지 않겠다.”
티그리스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놈이 황국을 노리지 않는다고?
대륙을 집어삼키기 위해 음지에서 키메라 마법사들을 키워내고 권속을 늘려간 주제에?
놈의 수가 뻔히 보였다.
“그러니까 혼란스러운 길리온 왕국의 정세가 안정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 이건가? 그 이후엔? 또다시 키메라 부대를 키워서 황국을 쳐들어올 거고?”
“우리도 어쩔 수 없었다. 대국이 소국을 괴롭히니 금단의 영역에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지.”
“황국에 첩자들을 심어놓고 비밀 연구소를 세운 것은 잊었나?”
“우선 키메라 마법사들을 품은 건 황국이 룩스교를 탄압하기 시작하니 거둔 것일 뿐이다. 순서가 뒤바뀐 거지. 그리고 너희도 길리온 왕국에 첩자를 심어두지 않았나? 똑같이 되갚아준 거지.”
아르펨이 도대체 뭐를 노리는 걸까?
놈은 왜 이런 쓸모없는 대화를 하는 걸까?
티그리스는 검을 들어 아르펨의 목을 치고 싶은 욕망이 들끓었지만 참아내야만 했다.
당장에 아르펨을 죽일 수 있는 수가 11가지는 보였지만 아르펨을 지금 이렇게 쉽게 죽인다는 게 머릿속으로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최후의 전쟁에서 티그리스의 한쪽 팔을 날려 버린 장본인이자 대륙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행성 침략자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다고?
티그리스는 이 상황 자체를 믿지 않았다.
티그리스의 검이 푸른 불꽃에 휩싸였다.
그 푸른빛을 보자 아르펨의 얼굴 근육이 꿈틀거렸다.
“헛소리를 할 거면 죽어라.”
‘하늘 사슬’이 꺼지기까지 10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10분이면 놈을 슈비츠 꼴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게 슈비츠를 죽였다던 검술이 맞나? 영혼을 베어낸다고 하지?”
또 쓸모없는 말을 한다.
놈이 노리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일단 검을 내질러 보자.
티그리스는 말로 아르펨의 약점을 꼬셔낼 수 있는 달변가도 아니고 검을 좀 잘 다루는 기사일 뿐이다.
놈이 뭘 원하는지 티그리스의 검이 답해주리라.
티그리스는 최대한 오러를 아끼기 위해 북극성의 망토의 능력을 사용했다.
단거리 순간이동.
아르펨의 뒤로 이동한 것과 티그리스의 검이 움직인 것은 거의 동시였다.
아르펨은 블링크로 피해냈다.
하지만 티그리스의 검이 더 빨랐다.
아르펨의 오른팔이 잘려 나가며 푸른 불꽃에 휩싸였다.
“끄으으으윽!”
아르펨은 영혼이 지져지는 고통에 입술을 깨물었다.
“넌······!”
‘살짝 늦었군.’
아르펨의 오른손을 노린 이유는 아르펨의 오른손에 팔찌형 아티팩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른팔을 잘라내고 단번에 다리까지 잘라내려 했는데, 아르펨은 오른팔이 잘려 나가기 직전에 아티팩트를 사용해 빠져나왔다.
하지만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놈에겐 마나가 거의 없다.
반응속도를 올릴 수 있는 오러 운용술을 사용할 수도 없고 마법도 사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놈은 티그리스의 검격에 반응해 아티팩트를 사용했다.
도대체 어떻게?
‘괜히 행성을 집어삼킨 괴물이 아니군.’
아르펨은 우노와 함께 행성을 떠돌며 수없이 많은 행성을 집어삼켰을 것이다.
그 경험과 실력이 어디 가지 않았을 테니 티그리스의 검격에 반응했을 테지.
하지만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왜 지금의 아르펨은 반항조차 하지 않는가?
최후의 전쟁에서 보여주었던 그 압도적인 검술과 마법 실력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생각은 나중에.’
지금이 얼마나 천금 같은 기회인지 모른다.
지금이라면 놈을 죽이거나 놈을 협박해 우노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아르펨은 오른팔을 감싸쥐며 티그리스를 노려봤다.
영혼이 타들어 가는 고통은 예전에도 경험해 봤지만 정말 끔찍하리만큼 고통스러웠다.
‘괜한 짓을 했군.’
티그리스의 무위를 직접 보고자 왕좌에 몸을 묻어 기척을 없앴건만, 설마 들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물론 지금처럼 들킬 경우 품속에 숨겨둔 텔레포트 스크롤로 도망치려고 했지.
하지만 티그리스가 성물을 사용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물론 아르펨에게 도망칠 방법이 딱 하나 남아 있긴 하다.
아르펨과 로타는 사실 대륙 곳곳에 만들어진 분신들을 숨겨두었다.
그리고 원할 때마다 그 분신에 영혼을 옮겨서 권속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거나 조종했다.
지금도 간단하게 영혼을 배출해서 도망치기만 하면 끝이다.
하지만 티그리스에게 자신이 영혼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티그리스가 아르펨을 죽일 때 영혼을 배출해 죽은 척 도망치려고 했는데 쉽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아르펨은 티그리스의 성질을 긁는 말을 내뱉었다.
“잠깐! 평화롭게 대화를······.”
티그리스가 또다시 사라졌다.
아르펨은 온 감각을 총동원해 놈의 공격이 어디로 들어오는지 파악했다.
티그리스의 검은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됐다!’
영혼이 지져지는 고통이 밀물처럼 밀려왔지만 아르펨은 참았다.
티그리스의 검이 목덜미의 절반까지 파고들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고 영혼을 배출했다.
티그리스가 영혼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한 티그리스는 아르펨을 죽였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르펨의 착각이었다.
티그리스의 검이 아르펨의 목을 반절까지 파고들었다가 멈췄다.
그러나 아르펨의 분신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허물어졌다.
티그리스는 피를 쏟아내는 아르펨의 목과 팔에 포션을 부었다.
일부러 치료할 수 있도록 절단의 심상을 사용하지 않았다.
빠르게 치료되었지만 아르펨의 심장은 뛰지 않았다.
티그리스는 결론을 내렸다.
“영혼을 컨트롤할 수 있는 모양이군.”
아르펨은 사령술을 익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영혼을 제멋대로 빼내고 집어넣을 수 있었다.
그 말은 회귀 전 최후의 전쟁에서 아르펨과 로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죽기 직전에 영혼을 배출하고 살아남았다는 뜻과 똑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