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 아센시오(2) >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 199화
아센시오(2)
와장창!
사내가 호화로운 음식으로 가득 찬 식탁을 통째로 뒤엎었다.
사내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시녀들을 노려봤다.
“이년들이 감히 날······!”
시녀들은 벌벌 떨며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아닙니다! 저희는 그저······!”
사내는 기미를 보다가 거품을 물고 죽은 시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면 왜 음식에 독이 나온 것이냐! 너희가 몰래 독을 탄 게 아니냐?!”
“절대 아닙니다!”
“꼴보기 싫다! 이년들과 이 요리를 한 모든 요리사들의 사지를 잘라 죽여라!”
“안 돼! 안 돼!”
성기사들이 시녀들을 끌고 가자 사내는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다리를 덜덜 떨었다.
“난 죽을 수 없어······. 절대 죽을 수 없어······.”
“매튜 왕자님.”
옆에서 들려온 사내의 목소리에 매튜는 애처로운 미소를 지으며 사내의 손을 꼭 붙잡았다.
“아르펨! 자네가 없었다면 난 진작에 명을 달리했을 걸세. 정말 고맙······.”
쩍!
아르펨은 매튜 왕자가 검게 죽은 오른팔을 강하게 잡자 매튜 왕자의 뺨을 후려쳤다.
매튜 왕자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아르펨을 쳐다봤다.
“아······ 아르펨······.”
“제 몸에 손을 대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매튜 왕자의 눈빛이 몽롱해지며 몸을 덜덜 떨었다.
“아······. 아······. 미안하네. 미안해. 아르펨. 내가 깜빡하고······.”
매튜 왕자의 비굴한 미소에 아르펨은 비소를 지었다.
길리온 왕국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심지어 핏줄 거미들이 남하하기 시작하니 매튜 왕자는 정신적으로 점점 무너지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적으로 보였고 밥을 먹는 것도 물을 마시는 것도 꺼려 했다.
그 덕분에 매튜 왕자는 날이 갈수록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쇠약해졌고, 동시에 아르펨이 원하는 인간 군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아르펨은 티그리스에게 가장 중요한 비밀을 들켰다.
아마 지금 당장 아르펨이 티그리스의 눈앞에서 죽더라도 티그리스는 아르펨이 죽었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겠지.
오히려 아르펨의 영혼을 갈기갈기 찢기 위한 검술을 준비할지도 몰랐다.
‘오랜만이군. 이런 감정은.’
아르펨은 정말 오랫동안 죽음이라는 공포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이미 우노와 함께하기로 한 이상 죽음을 이미 초월했으니까.
하지만 검게 썩어버린 오른팔이 증명한다.
티그리스는 아르펨을 죽일 수 있다.
‘위험해. 정말 위험해.’
아르펨이 티그리스가 죽기까지 어떻게든 기다린다고 하더라도 놈이 아르펨을 죽일 수 있는 검술을 후대에 전수한다면, 티그리스가 죽기를 기다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진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지식을 후대에 전수했고 그런 방식으로 발전해 왔으니까.
특히나 아르펨을 경계하고 있는 티그리스가 이런 지식을 가만히 둘 리가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세 가지다.
아르펨이 죽었다고 착각하게 만들거나.
티그리스의 검술을 훔쳐 약점을 찾아내거나.
마지막으로 티그리스를 죽이거나.
아르펨은 세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해 볼 생각이었다.
* * *
황국의 키메라 사태는 빠르게 종식되었다.
오염 박쥐와 오염 두더지가 길리온 왕국으로 도망쳐 버리고, 인면 나무와 분쇄자들은 자기들끼리 영역 다툼을 하다가 자멸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황국에 남아 있는 키메라들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일과 도시를 복구하는 일뿐.
그 일은 티그리스나 바스티얀, 나달, 베르강이 할 일이 아니었기에 넷은 황도로 복귀하기로 했다.
“전 여기서 먼저 내리겠습니다.”
나달은 황도로 바로 향하지 않고 중간에 내렸다.
며칠 전, 티그리스에게 말했던 대로 아센시오 가문을 조사할 생각이었다.
“라칸은 어디서 만나기로 했는가?”
“역 앞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아들하고 편히 휴가 다녀온다고 생각하고 느긋하게 다녀오게. 기왕이면 맛있는 것도 좀 먹고 오고. 이건 학교장으로서 하는 말일세.”
나달에게 있어서 휴가라는 개념은 굉장히 낯선 단어였다.
태어난 시점부터 시작해서 인퀴지터 요원이 되고 수장이 되기까지 단 한 번도 휴가를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달은 내색하지 않고 빙긋 웃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나달이 열차에서 내리자 정갈한 양복에 중절모를 쓴 사내가 나달을 반겨주었다.
라칸이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너도 고생 많았다.”
나달은 라칸의 옷을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비싼 양복을 입고 왔군.”
“레인로버 황녀 전하께서 조금 도와주셨습니다.”
라칸은 아센시오라는 성을 붙인 이후로 처음으로 자신의 가문에 방문하는 것이다.
그래서 레인로버는 다른 가족들에게 기죽지 않게 최고급 원단으로 만든 양복을 맞춤형으로 제작해 선물해 주었다.
“나쁘지는 않다만······.”
“네?”
‘황녀님도 아센시오 가문에 대해 잘 모르는 건가?’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센시오 가문에 대한 정보는 나달이 극비로 다뤘으니까.
“아니다. 가지.”
나달은 라칸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아센시오 남작 가문에 대해 얼마나 알지?”
“음······. 연금술로 유명한 마법사 가문이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
“좋게도 포장해 주는군.”
“하하······.”
라칸이 아센시오 남작 가문에 대해 조사했을 때 놀랐던 점은 딱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아센시오 남작 가문의 영지가 시골 촌구석에 박혀 있다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센시오 남작 가문이 찢어지게 가난한 가문이라는 점이었다.
아센시오 남작 가문이 원래부터 가난한 가문은 아니었다.
그래도 귀족답게 영지를 운영하면서 품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전대 가주, 마고 드 아센시오가 인퀴지터의 수장의 자리에 오르면서 아센시오 남작 가문은 황금기를 맞았다.
하지만 황금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편히 물어봐라.”
“왜 가문을 돕지 않으시는 겁니까?”
지금은 빚더미에 앉아 허덕이고 있다고 하지만 나달이 조금 힘만 써준다면 가문은 금방 일어설 수 있다.
하지만 나달은 간신히 이자나 갚을 만한 적은 돈만 지원해 줄 뿐, 아센시오 남작 가문을 적극적으로 돕지 않았다.
혹시 라칸이 알지 못하는 깊은 사연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지만, 나달의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아버지의 명이셨다. 정확히는 유언이었지.”
“왜 돕지 말라고 하신 건지 알고 계십니까?”
“아니, 물어보지 않았다.”
라칸은 꼬치꼬치 캐묻고 싶은 마음이 가득 넘쳤지만, 나달의 아픈 과거를 헤집는 것 같은 기분이라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달은 라칸의 표정만으로도 뭘 궁금해하는지 알고 있었다.
“라칸. 너도 아센시오 가문의 일원이다. 그리고 네 할아버지가 전대 가주님이시고. 넌 충분히 질문할 자격이 된다.”
“······그래도.”
라칸은 나달의 표정을 보며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슬퍼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
나달은 자신의 손등 위로 떨어진 물을 매만졌다.
하얀 장갑에 눈물이 스며들었다.
“음······. 그렇군.”
나달은 손수건을 들어 눈물을 닦아냈다.
사실 나달은 아직 자신이 누구인지 정하지 못했다.
자신의 영혼이 마고의 친아들 노엘의 것임을 아모리스 덕분에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 육체는 만들어진 것이고 노엘의 기억 따윈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자신은 노엘일까?
아니면 나달인 것일까?
나달은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명확하게 결정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왜 우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슬플 뿐이었다.
나달은 손수건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당황시켜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그것보다 내가 아버지께 여쭈어보지 않은 건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관심이 없었다고요?”
나달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었기 때문이었지. 지금까진 아버지의 명에 따라 움직이며 살아왔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그게 정확히 무슨 말입니까?”
“난 평생을 아버지의 명을 받들며 살아왔다. 내 의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지. 하지만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내게 어떻게 살라는 지침을 주지 않아서 문제였다. 내가 인퀴지터를 계속하길 바라냐고 물어봐도 ‘네가 알아서 하거라’라는 곤란한 대답만 하셨다.”
나달은 피식 웃었다.
“그땐 그 대답이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그전까진 아주 명확한 지침만 주셨거든.”
“그럼 어떻게 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까?”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마치 태엽이 감기지 않은 인형처럼 멍하니 있을 뿐이었지. 하지만 문득 이렇게 사는 것은 아버지가 원하는 게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
나달은 품속에서 작은 노트를 꺼내 들었다.
그 노트엔 버킷 리스트라고 적혀 있었다.
“그래서 나만의 버킷 리스트를 적은 후 끝낼 때마다 지웠다.”
“오~ 그럼 가장 먼저 한 일은 뭔가요?”
나달은 잠깐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건 며칠 후에 알게 될 테니 직접 봐라.”
“아센시오 남작령 내에 있는 겁니까?”
“그래.”
“그럼 가장 만족스러웠던 버킷리스트는 뭔가요?”
“고문실 고치기.”
“아.”
나달의 약한 피부에 오염된 고문 기구가 닿으면 병균이 옮아 크게 다쳤다.
그래서 구식 고문 기구들을 다 없애고 나달이 성심성의껏 골라서 구입하고 직접 제작한 고문 기구들만 들여놓았다.
“고문 기구를 정리하고 나니 이곳에 사람을 채워 넣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래서 반역을 저지른 사람들을 하나둘씩 집어넣었다. 그리되니 인퀴지터를 떠날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지.”
“······아하하.”
고문실에 사람을 채워 넣고 싶어서 인퀴지터를 그만두지 못했다니.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사이코패스 범죄자의 이야기라고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직업을 참 잘 선택한 것 같다.
만약 나달이 범죄의 길로 넘어갔다면······.
라칸은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 * *
거의 이틀 가까이 마차를 타고 가고 나서야 둘은 아센시오 남작령에 도착했다.
라칸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느껴지는 자연의 향기에 살짝 놀랐다.
자연의 향기라는 게 별다를 것 없이 사방에 똥 냄새가 가득하다는 뜻이었다.
황도에 그 흔한 가로등도 없고 도로 공사는 제대로 되지 않아 질퍽한 진흙이 바닥에 가득했다.
나달이 본가에 잘 찾아오지 않은 이유가 더러워서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냄새나고 더러웠다.
“그럼 가지.”
나달은 신발에 방수 마법을 사용하고 걸었다.
그렇게 하니 신발과 옷에 더러운 진흙이 묻지 않았다.
라칸도 똑같이 방수 마법을 걸은 뒤 나달의 뒤를 따라갔다.
라칸은 아센시오 영지 구석구석을 확인했다.
사람들은 멀끔한 청년 둘이 갑자기 시골 마을에 나타나니 신기한 눈빛으로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둘의 뒤를 몰래 따라오며 키득대며 웃었다.
차가운 도시에서 느껴볼 수 없는 따뜻한 순박함이 곳곳에 가득했다.
‘연금술이 아니라 농사로 유명한 곳이라고 할걸.’
냄새가 좀 나긴 하지만 나쁘지 않은 동네인 것 같았다.
그때, 뒤에서 어린아이 하나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쪽은 가면 안 된다고 들었는데!”
“음?”
라칸은 발을 멈추고 아이를 쳐다봤다.
“히익!”
아이는 라칸이 갑자기 쳐다보자 허름한 나무 기둥 뒤에 숨었다.
“거기 가면 까마귀 귀신이 잡아간다고 했는데······.”
라칸은 아이를 불러 무슨 이야기인지 들어보고 싶었지만, 나달과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어차피 가면 알게 되겠지.’
라칸과 나달은 영지 깊숙한 산으로 향했다.
왜 마을에서 마차를 내렸나 싶었더니만 길이 전혀 정돈되어 있지 않아 마차가 들어올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으스스한 저택에 도착했다.
공포 영화에서나 볼 법한 비주얼이랄까?
외관만 보더라도 별로 관리가 된 것 같지 않아 영체형 몬스터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기세였다.
그나마 이곳이 아센시오 가문의 저택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게 하나 있다면 정문에 박혀 있는 까마귀 문장이었다.
아센시오 가문의 문장은 까마귀였으니까.
나달은 반쯤 열려 있는 정문을 그냥 들어갔다.
여름철이라 후덥지근한 날씨였지만, 저택에 발을 들이자 냉기가 바닥에서부터 올라왔다.
정말로 이곳에 사람이 사는 게 맞나 생각이 들려던 찰나, 라칸의 눈앞에 퀘스트가 떴다.
[신규 퀘스트!]
아센시오 남작 가문의 저택의 비밀을 밝혀내라!
보상: ???
제한 시간: 없음.
“어?”
“왜 그러지?”
“퀘스트가 떴습니다. 아센시오 남작 가문의 저택의 비밀을 밝혀내라고요. 보상은 밝혀지지 않았고요.”
“보상이 밝혀지지 않다니?”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런 경우는 흔치 않아서······.”
“이곳에 비밀이 있긴 한 모양이군.”
나달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저택을 훑었다.
“그럼 가지. 일단 집에 도착했으니 가주님께 인사를 먼저 드려야 하니까.”
“이런 곳에 가주님이 사세요?”
“그래. 요원들의 말에 따르면 그렇다고 하더군.”
“······최근에 연락을 한 적이 있나요?”
“가주님과 직접 대화를 나눈 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이후론 처음이고, 편지는 받기만 했지 준 적은 없었다.”
“그럼 저희가 여기에 온 건 남작님은 알고 계신가요?”
“모를 거다. 굳이 알 필요도 없고.”
라칸은 대화가 툭툭 끊긴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뭔가 나달과 라칸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하나 쳐 있는 느낌이랄까?
나달과 대화를 하다 보면 종종 이런 느낌을 받곤 하는데 유독 오늘은 심했다.
그래도 내색하지 않고 라칸은 나달의 뒤를 따라갔다.
어차피 저택 안으로 들어가면 알게 되리라.
저택 안도 마찬가지로 관리가 전혀 안 됐는지 먼지만 쌓여 있었다.
심지어 집기는 망가지거나 부서졌고 멀쩡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절대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닌 것 같았지만, 최근에 사람들이 돌아다녔던 흔적이 분명히 있었다.
나달은 막힘없이 2층을 올라갔다.
‘무슨 마법이······.’
라칸의 수준으로선 알 수 없는 마법이 2층 집무실에 걸려 있었다.
뭔가를 봉인하는 마법이 걸려 있다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이 마법에서 느껴지는 마법 패턴은 굉장히 익숙했다.
이 마법 패턴은 나달의 것이었다.
나달은 가볍게 봉인을 해제한 뒤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에는 빼빼 마른 사내 하나가 한쪽에 링거를 꽂은 채 황금 의자에 앉아 있었다.
사내는 말할 기운도 없는 듯 나달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오랜만입니다. 아센시오 남작님.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너······!”
사내는 당장에라도 욕이라도 내지를 것처럼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네놈이 여길 어디라고······! 이 괴물! 드디어 날 죽이고 이 자리를 되찾으려고 온 것이냐!”
“전 가주의 자리를 찾기 위해 온 게 아닙니다. 가주의 자리는 남작님의 첫째 아들 론이 이어야겠죠.”
“그럼 도대체 여길 왜 온 거야! 왜!”
사내는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뭔가를 강하게 갈구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나달을 굉장히 두려워하면서도 갈구하는 것.
이런 눈빛은 인퀴지터의 지하에 갇혀 있는 범죄자들의 눈빛과 똑같았다.
정신적으로 무너져 차라리 편한 죽음을 원하는 눈빛이었다.
나달은 품속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먼지 가득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채권 증서였다.
“아센시오 가문이 지고 있는 빚, 정확하게 금화 1,312개를 모두 탕감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핀 공자님이 지신 사채까지 모두 처리해 드리죠.”
“그딴 건 아무 소용없다! 그냥 나를, 제발 나를······!”
나달은 남작의 눈을 보며 말했다.
“대신 그 황금 의자와 함께 저택을 떠나주시죠.”
“······떠나? 정말로? 더······ 더 이상 이 집무실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다고? 날 죽이는 것도 아니고?”
“네. 그렇습니다.”
“당장 하지! 당장!”
나달은 준비한 서류를 꺼내 남작의 앞에 놓았다.
남작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인장을 찍었다.
그리고 링거를 거칠게 뽑아버린 뒤, 황금 의자도 버리고 집무실을 벗어났다.
“난 자유다! 난 자유야!”
라칸은 저택을 맨발로 달려 나가는 남작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죠?”
“그냥 내 버킷 리스트다.”
“버킷 리스트요?”
나달은 증서를 품에 넣으며 말했다.
“핀, 그러니까 현 아센시오 남작과 그의 아버지 세시오는 날 죽이려고 했었다. 놈들은 내가 남작 직위를 이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지.”
노엘이 죽은 이후로 아센시오 남작의 직위를 이어받는 1순위는 아버지의 남동생 세시오였고, 2순위는 세시오의 첫째 아들 핀이었다.
그런데 대뜸 마고가 호문쿨루스를 양자로 삼으니 계승 순위가 뒤바뀐 것이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세시오 삼촌과 아센시오 남작님은 날 죽이려고 했었다. 먹는 음식에 독을 타는 것은 당연하고, 내가 마법 연습을 할 때 술식에 끼어들어 내 마력 회로를 망가뜨리려고 했었지.”
“그래서 복수하고 싶으셨던 건가요?”
“음······. 복수라.”
나달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걸 했을 뿐이다. 그냥 두 놈을 죽기 직전까지 괴롭히고 싶었어. 그래서 괴롭혔다. 하지만 네 말을 들어보니 복수하고 싶었던 게 맞는 것 같군.”
라칸은 가끔 나달이 무서울 때가 있는데, 지금이 꼭 그랬다.
약간 뒤틀려 있다랄까?
더 깊이 알게 되면 심연을 보게 될 것 같아 라칸은 대화 주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이 저택의 비밀을 찾아내야죠. 그게 좋지 않겠어요?”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네? 그게 뭔데요?”
“청소.”
나달은 사실 이 저택에 발을 들일 때부터 이 불결한 곳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