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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202화 (202/251)

< 202. 죄의 시작 >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 202화

죄의 시작

저택 서고에 마고의 혼령이 살든 아니든 간에 둘이 해야 할 일은 산더미만큼 남아 있었다.

바로 책 복원 작업이었다.

마법서엔 보존 마법이 걸려 있어서 망가지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책들은 습기가 가득 찬 지하실에 오랫동안 방치된 탓에 많이 망가져 있었다.

물론 망가진 고서를 복구하는 마법은 고고학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마법사들이 개발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나달이나 라칸은 엄밀히 말하자면 연금술사고 마공학자다.

그런 전문적인 복구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라칸에겐 포인트 상점이 있었다.

우우웅-!

라칸의 손에서 푸른 빛이 감돌며 고서가 천천히 제빛을 되찾았다.

“휴~ 이건 다 됐어요.”

“고생했다.”

“혹시 뭐 찾은 게 있나요?”

“아니, 모두 호문쿨루스 실험 기록뿐이다.”

“이런······.”

라칸이 조금 전에 배운 복구 마법을 사용하는 동안 나달은 라칸이 복구한 노트를 읽고 분석한다.

일련의 과정을 계속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고 달이 떴다.

“마나가 부족하진 않나?”

“아뇨. 괜찮아요.”

많이 망가지거나 오래된 고서일수록 마력을 많이 잡아먹긴 했지만, 스테이터스상 마력 수치는 무려 ‘상(上)’이다.

7서클 대마법사인 나달과 엇비슷할 정도니 마나가 부족할 일은 없었다.

“그럼 바로 다음 걸로 넘어갈게요.”

“연구 노트는 방금 전에 네가 복구한 게 끝이다.”

“에? 그러면 의료학은요?”

“의료학도 마찬가지다. 다른 연금술 관련 서적이나 주술 서적도 마찬가지고.”

라칸은 방금 복구시킨 노트를 펼쳐 빠르게 읽었다.

“이것도 허탕이네요.”

호문쿨루스 제작법이라든가 영혼을 옮기는 방법에 대해 적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실험 관찰 결과만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이게 마지막 연구 기록인데······.

맥이 빠졌다.

“······분명 뭔가 숨겨져 있는 게 있을 텐데.”

라칸의 촉과 ‘최상급 탐색’이 동시에 말한다.

분명히 이 서재에 어마어마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일단 밥이나 먹지. 빵을 데워뒀다.”

“아, 감사합니다.”

라칸은 빵과 따뜻한 차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연구 기록이나 의료학 서적, 연금술 서적, 마법서, 주술 서적에도 답이 없다면 도대체 어디에 비밀이 숨겨져 있단 얘긴가.

정말 이 서재에 있는 책들을 모두 고쳐봐야 답이 나올까?

만약 그렇게 했는데도 답이 안 나오면?

“벌써 밤이네.”

이제 남은 건 이 저택에 있는지 없는지 모를 마고의 혼령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다.

도대체 호문쿨루스 제작에 도움을 주었던 ■의 정체가 뭔지.

그리고 또 다른 호문쿨루스 제작을 하지 않았는지.

만약 호문쿨루스 제작을 했다면 혹시 그게 아르펨과 로타인지.

물어볼 게 산더미만큼 쌓여 있었다.

“일단 오늘은 서고에 남아서 계속 조사를 하면서 혼령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 보죠.”

라칸은 팔을 걷어붙이며 책장 앞으로 갔다.

* * *

그렇게 4~5시간 정도 지나 자정이 갓 지났을 무렵······.

“음냐······.”

라칸은 복구 마법을 과도하게 사용한 탓에 정신적 피로감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잠이 들어버렸다.

마나량은 충분했지만 복구 마법을 계속 사용하려면 극도의 집중 상태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제아무리 밤샘 작업에 단련된 라칸이라고 할지라도 무리였다.

나달은 책을 베개 삼아 잠이 든 라칸에게 담요를 덮어준 뒤 책을 읽었다.

‘······나타날까?’

나달은 자신이 마고가 나타나길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에 살짝 놀랐다.

나달은 지금까지 살면서 마고를 그리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마고와 노엘은 부자 관계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관계는 엄연히 말하자면 사제 관계에 가까웠다.

마법과 수사 기법을 알려주고 인퀴지터 요원으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과 주의해야 할 점을 알려주는 딱딱한 상하 관계.

그래서 나달은 차기 인퀴지터 수장을 길러내기 위해 자신을 양자로 들였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모리스가 보여준 노엘의 영혼 속에 남아 있는 기억의 파편이 나달의 마음을 헤집으면서 묘한 기대감을 심어주었다.

지금이라면 노엘에게 보여주었던 환한 미소와 걱정 어린 눈빛과 따뜻한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까?

‘이 나이를 먹고도 질투하는 걸까?’

같은 영혼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겐 무뚝뚝하게 대했던 마고였다.

도대체 왜 자신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인륜을 저버린 자가 왜 나달에게 그리 뻣뻣하게 대한 걸까?

나달은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창가를 쳐다봤다.

그리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가 책장 앞에 서서 책을 읽고 있었다.

마고다.

“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잔뜩 남아 있는데.

심장이 너무 뛰어 동맥이 기도를 조여 버리는 듯했다.

이 감정을 말로 어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립다?

그런 단순한 단어로 표현이 되지 않는다.

감출 수 없는 기쁨과 슬픔과 그리움이 얽히고설키며 ‘아버지’라는 감정으로 치닫는다.

이 감정은 노엘의 것일까? 아니면 나달의 것일까?

마고로부터 이성과 냉정함을 배운 나달은 마고의 앞에 서니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갓난아기가 된 것 같았다.

“아버지.”

마고가 나달을 쳐다봤다.

마고의 반투명한 얼굴이 창가에 걸린 보름달에 걸려 보이지 않았다.

-생각보단 빨리 왔군.

영혼을 울리는 굵직한 목소리가 나달의 심장에 파고들었다.

-너도 가족을 만들었더구나.

마고의 눈길이 라칸에게 향했다.

나달은 처음으로 마법을 선보였을 때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라칸이라고 합니다. 제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손자이기도 하고요.”

-장하다.

나달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칭찬을 받지 못했다.

처음으로 마법을 발현했을 때도, 마법을 익힌 지 3개월 만에 2서클 마법을 사용했을 때도, 인퀴지터 시험에 통과했을 때도 잘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나달은 후들거리는 두 다리를 붙잡고 일어났다.

마고의 얼굴이 드러났다.

마고는 웃고 있었다.

노엘에게 지었던 미소보다 더 환하게.

하지만 그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죄인이다. 나달. 네게도 그리고 이 세계에게도.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난 내 욕심 때문에 벌여선 안 되는 일을 저질렀다. 금기를 범했어.

“호문쿨루스. 그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마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죄는 절대 지워지지 않을 거다. 너무 많은 인간의 피가 이 땅을 적셨어. 그리고 더 흐를 것이다.

마고는 참담한 표정으로 책장을 짚었다.

-그 유혹을 버렸어야 했는데. 이 세상의 순리를 따랐어야 했는데. 그 고통을 참지 못해 널 되살리고 말았다.

마고의 영혼이 빠르게 옅어지고 있었다.

아니, 옅어진다기보단 빼앗긴다는 느낌이 강하다.

마고의 영혼이 창백한 달빛에 이끌려 강탈당하고 있다.

“아버지!”

나달이 마고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나달의 손은 마고의 몸을 통과할 뿐이었다.

-이 세상에 지옥이 있다면 나는 필시 지옥을 가게 될 거다. 나달. 가야만 해. 그러니 찾아라.

마고는 책장을 가리켰다.

-모든 것은 여기에 남겨두었다.

그대로 나달은 기절했다.

* * *

라칸이 나달의 몸을 흔들었다.

“나달 님 괜찮으세요?!”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해가 떠 있었다.

나달은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아버지는?”

“마고 님이요? 마고 님을 정말 만나셨나요?”

나달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원체 땀이 없는 몸인데 땀 때문에 옷이 축축할 정도였다.

“넌 보지 못했나?”

라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 그때 잠이 들어서요.”

라칸은 조심스레 물었다.

“어떠셨나요? ······할아버지는?”

라칸의 입에서 처음 나온 ‘할아버지’란 단어에 나달은 순간 멍해졌다.

가슴 한편이 따뜻해지는 울림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아버지가 사라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자신에게 화가 난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아버지를 붙잡을 수 있었다면 그간 나누지 못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하다못해 마고가 죽은 후 단 한 번이라도 이 저택에 발을 들였다면 마고를 만났을 텐데······.

나달은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추슬렀다.

이런 감정 과잉의 모습을 라칸에게 보여주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일단 차분히 생각하자.

분명 아버지는 달빛을 따라 사라졌다.

그 달빛을 조종한 존재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왜 나달은 기절을 한 것일까?

나달은 당시 기절했을 때의 기억을 다시 짚어봤다.

‘손이······.’

나달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떨고 있음을 느꼈다.

신경이나 근육의 문제는 아니고 정신의 문제다.

무서운 것을 보면 저절로 침이 마르고 식은땀을 흘리며 근육이 경련하는 것과 같다.

마치 라칸이 귀신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래.

나달은 그 달빛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이 느낌을 최대한 묘사해 보자면 드라코레퀴엠산에서 본 골드 드래곤 아우로므를 본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공포와 경외심이 느껴졌다랄까?

당시 느꼈던 공포보다 100배는 더 농축된 공포심이 나달의 뇌리를 휘젓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정신이 버티지 못하고 기절해 버린 것이다.

“괜찮으세요?”

라칸의 걱정 어린 눈빛에 나달은 주먹을 꽉 쥐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선 분명 금기를 범하셨다고 했다. 호문쿨루스를 만들었다고 했지. 문제는 그게 아니다.”

나달은 홀린 듯이 일어나 조금 전에 마고가 서 있었던 책장 앞으로 갔다.

그 책장은 라칸이 문학만 따로 정리해 둔 책장이었다.

“모든 답은 여기에 있다고 했어. 그리고 아버지는 누군가에게 끌려갔다. 달에게.”

“달이요?”

“그래.”

나달은 눈을 감고 과거 기억을 되짚었다.

아버지가 영혼의 소멸을 각오하고 남겨둔 진실이자 죄악이다.

도대체 여기에 무슨 비밀이 있단 걸까?

마고는 나달이 서재에서 마법 공부를 하고 있을 때면 항상 고전 소설을 읽으셨다.

그리고······.

“항상 여기에서만 책을 꺼내 읽었다.”

나달의 기억 속에 마고가 책을 꺼낼 때 허리를 숙이거나 까치발을 들어 책을 꺼낸 적이 없었다.

항상 눈높이에 놓인 책들만 골라 읽었다.

무려 10년 동안.

“설마······.”

나달은 눈높이에 배치된 소설들을 모두 빼냈다.

그리고 아버지가 10년 동안 읽은 고전 소설들만 골라 빼냈다.

책들이 많이 헤어지고 망가지긴 했지만, 겉표지에 적힌 제목만큼은 알아볼 수 있었다.

고전 소설의 개수는 총 48개.

다른 소설들은 빈칸 아무 데나 쑤셔 박았다.

“여기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

“이 고전 소설들에요?”

“그래. 이제 비밀을 찾아내야 한다. 라칸. 혹시 이 책들을 복원해 줄 수 있겠나?”

“네. 바로 할게요.”

라칸은 최대한 빠르게 복구를 시작했다.

라칸이 책을 복원하면 나달은 그 소설들을 읽었다.

혹시 마고가 필기 같은 것을 남겨두지 않았나 한 장 한 장 집중해서 살폈다.

하지만 라칸이 48권을 모두 복구했을 때까지 마고가 남긴 힌트 따윈 발견되지 않았다.

“도대체 뭐지?”

분명 여기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

하지만 마고가 직접 남긴 흔적이 없다.

분명 여기에 비밀이 남아 있는데.

나달은 바닥에 쌓여 있는 48권의 고전 소설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께선 언제나 같은 자리에 물건을 정리하는 버릇이 있었다.’

나달이 마법서를 책장에 순서 없이 마구잡이로 꽂아 넣었을 때, 마고는 제대로 정리하라면서 혼을 냈다.

마고가 외부 출장 때문에 저택을 오랫동안 비워뒀을 때,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의 순서가 뒤바뀌어 있거나 책상 위에 놓인 만년필이나 전등의 위치가 조금이라도 바뀌면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 강박증이 지금의 나달에게 이어져 결벽증과 정리병이 생겼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났다.

도대체 어떤 순서대로 책장에 책을 꽂아 넣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저 한 가지 규칙을 찾은 것 같아요.”

“뭐지?”

“이 고전 소설들 발행 연도가 1년 주기로 전부 달라요.”

가장 최근에 발행되었던 고전 소설은 제국력 300년에 발행되었고, 가장 오래된 책은 제국력 252년에 발행되었다.

“이런 걸 어떻게 모은 거죠? 다 발행 연도가 다른데요?”

“대부분 초판본이 아니라 재판된 것들이 다수다. 유물적 가치가 높은 초판본 같은 경우엔 서고에 따로 관리되고 있었지.”

나달의 말대로 대부분 초판이 아닌 사람들의 입맛과 시대상의 변화에 맞춰서 재판된 소설들이라 생각보다 모으기 쉬웠을 것이다.

“그럼 이거 순서대로 배열해 보면 되지 않을까요?”

“해보자.”

나달과 라칸은 발행 연도별로 책들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고가 숨겨둔 비밀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거다.”

첫 소설의 제목은 ‘사랑하는 렌에게’고, 그다음은 ‘아들’이고 다음은 ‘구세주에게 바치는 헌정’이었다.

그다음은 ‘달의 노래’, 그다음은 ‘그림자를 사랑하는 새싹’, 그다음은 ‘비추는 자’, 그다음은 ‘별자리 사냥꾼’이었다.

각 제목의 첫 어절만 계속 읽어나가면······.

“사랑하는 아들 구세주에게······. 구세주가 뭐죠?”

“내 이름은 고대 마법어로 만들어졌다. 나달은 구세주란 의미고 노엘은 구세주의 탄생일이란 의미지.”

“아하······. 둘 다 비슷한 의미가 있는 단어네요.”

라칸은 계속 읽어나갔다.

달의 그림자를 비추는 별자리.

늘 우리를 주시.

수레바퀴와 정 합일.

부패한 여왕.

둘과 하나 아는 별자리.

오염된 악한 왕좌를 두려움.

유혹의 원죄는 밤하늘의 달빛처럼.

땅에서 추악한 기적의 성물이 완성.

성물 탐색 절멸.

여왕이 만들어진 수레바퀴와 정.

조심 접근.

사죄 사죄 마지막으로 사죄.

하나뿐인 아들.

구세주.

라칸은 천천히 마고가 남긴 메시지를 읽어나갈 때마다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제목 어절 하나만으로 구성되다 보니 말이 토막토막 잘리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수레바퀴는 티그리스가 말했던 ‘쉼 없이 구르는 수레바퀴’ 로타를 의미하는 것이고 정은 ‘마음으로 조각하는 조각가’를 의미하는 말이리라.

마고는 오염된 여왕 우노의 도움을 받아 호문쿨루스 제작을 했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로타와 아르펨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달을 만들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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