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 마녀들의 신전(2) >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 204화
마녀들의 신전(2)
잔혹하고 참담하다.
아모리스는 가장 참혹하던 시절에 함께 웃고 울며 생사를 넘었던 전우들이 서로를 향해 칼날을 겨누어야만 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모리스는 이런 아픈 기억을 잊고 싶어서 그토록 혐오했던 담배를 입에 물었을 것이다.
티그리스는 아모리스가 이런 아픈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어 너무 미안했다.
“사람들은 마녀의 폭주를 막아낸 그 묘령의 기사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어. 그래서 고대어로 ‘바람’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지. 그게 바로 드윈이야.”
“그렇다면 노르베르드 가문에 남아 있는 드윈의 검이 설마······.”
“맞아. 그게 바로 마녀 사냥꾼 성좌의 성물이야. 물론 어떻게 네 영혼이 살아 있는데 마녀 사냥꾼의 성좌가 등장했는지 알 수는 없어. 아마 드윈이라 착각한 한 사내의 영혼이 성좌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겠지. 당시엔 자신을 드윈이라 생각하는 기사들이 많았다고 하더라고.”
아모리스의 말은 사실이다.
실제로 드윈의 검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세상 곳곳에 마녀가 등장하는 곳마다 자신을 드윈이라 칭하는 기사들이 우후죽순 탄생했고, 그중에 누가 진짜 드윈인지 알 방법은 없었다.
“그렇게도 성좌가 될 수 있나요?”
“그럴 수 있지. 생각보다 많은 성좌들이 그런 오해로 성좌가 된 경우가 많아. 유명해지고 자신을 상징하는 별자리만 생기면 성좌가 될 수 있는데. 혹시 드윈의 검 공략 기록이 남아 있는 게 있어?”
티그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드윈의 검은 탄생한 이후로 단 한 번도 부서지거나 망가진 적이 없는 검이니까요. 누가 처음으로 드윈의 검을 공략했는지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뭐, 그런 거야. 유명해지기만 하면 성좌는 강해지고 특출난 능력이 생기지. 그게 성좌의 기가 막힌 점이긴 하지만.”
그때, 티그리스의 옆으로 악령 하나가 슬며시 다가왔다.
다른 혼령들과 달리 악독한 기세가 흘러넘쳐 티그리스의 정신을 오염시키려 했다.
티그리스는 당장에 검을 뽑아 들려고 하자 아모리스가 제지했다.
“괜찮아. 쟤는 내가 관리하는 악령이야.”
실제로 악령은 다가오려다가 아모리스를 보자 흠칫하며 물러섰다.
“이어서 말하자면 난 잊혀진 평원에서 자매들이 세운 룩스의 신전을 찾았어. 그리고 통째로 안개의 숲으로 옮겼지. 내가 주로 있는 안개의 숲 근처에 둬야 마음이 편안할 것 같았거든. 물론 어차피 잊혀질 기억이었다면 굳이 옮길 필요도 없었겠지만······.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지.”
“그럼 룩스의 신전을 어떻게 통째로 옮긴 거죠? 공간계 마법이라도 사용하신 건가요?”
“신전이라고 해도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야. 그냥 석상 몇 개랑 제단 정도가 끝이지. 그냥 아공간 주머니에 다 집어넣은 다음에 안개의 숲에 다시 재배치했어.”
아모리스가 갑자기 발을 멈췄다.
“다 왔다.”
티그리스와 레인로버는 주변을 훑었다.
그런데 주변에 보이는 거라곤 악령들과 짙은 안개 그리고 울창한 나무뿐이었다.
“어디에 있는 거죠?”
“그래서 주술사가 아니라면 발견하기 힘들다고 했잖아. 기다려 봐.”
아모리스는 준비한 부적을 허공에 붙였다.
그러자 돌로 만든 제단이 나타났다.
그 제단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기나긴 고통의 끝]
주변을 둘러보니 제단을 중심으로 석상 여섯 개가 배치되어 있었다.
지붕이나 벽도 없는 이곳이 신전이 될 수 있나 싶었지만, 룩스의 교리상 제단과 사람만 있으면 그곳이 신전이라고 했기에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티그리스는 홀린 듯이 한 석상을 향해 걸어갔다.
티그리스와 키가 비슷하고 검 하나를 든 채 고개를 푹 숙인 사내의 석상이었다.
근육의 발달도와 골격이 지금의 티그리스와 굉장히 흡사하다.
티그리스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수준의 검사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티그리스는 석상을 만지며 입을 열었다.
“이것들······ 모두 검기로 조각된 거군요.”
마법이나 망치로 조각된 것이 절대 아니다.
망치나 마법으론 이렇게 깔끔하고 날카롭게 조각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조각상을 조각한 자는 지금의 티그리스보다 월등한 검술사다.
“맞아. 이거 모두 호스가 조각한 거야.”
티그리스는 회귀한 이후로 깨달음은 평생 얻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 조각품을 보니 자신은 아직 멀었다는 걸 느낀다.
티그리스의 검술은 베어내고 끊는 것에만 특화되었지만, 호스의 검술은 달랐다.
날카로움 속에 상냥함이 담겼다.
냉철함 속에 비통이 담겼다.
검에 감정을 담는 것이야 갓난아이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이 정도로 상반된 감정을 짙게 남길 수 있는 자는 없다.
이건 지금의 티그리스는 감히 따라 할 수 없다.
티그리스는 조각상을 조사하던 중 발밑에 뭔가 음각된 글자를 발견했다.
처음 보는 글자라 티그리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무슨 글자입니까? 고대 왕국어입니까?”
“아니, 이세계 언어야.”
아모리스는 발밑에 적힌 글자를 더듬으며 입을 열었다.
“김호수. 이게 페레이라가 검성 호스에게 붙여준 한국식 이름이야.”
페레이라는 이 세계에선 전혀 쓸모없는 한글을 친한 전우들에게 알려주었다.
호스는 당연히 뭐 이런 쓸모없는 문자를 알려주냐며 이럴 시간에 수련이나 더 하라고 핀잔을 줬지만, 그럴 때마다 페레이라는 특유의 장난기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병신 쪼다 등신 개새끼.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내가 한국어를 모르지만 그게 욕이란 건 알 수 있다.
-칭찬인데? 등신아.
-또 날 모욕했지?
-억울하면 한국어 익히든가. 호수야.
-······젠장할.
아모리스는 아련하게 웃었다.
“페레이라는 틈만 나면 한국어를 알려줬어. 제일 먼저 알려준 건 당연히 욕이었지. 마왕이나 대장군을 마주하면 한국어로 시원하게 욕을 한 바가지 쏟아부으라면서 말이야. 신기하게도 한국어로 욕을 하면 놈들은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어. 기분이 굉장히 나빴나 봐. 나중엔 호스 그 녀석도 한국어로 ‘X발’이렇게 소리 지르면서 불사의 대장군에게 달려들었는데 얼마나 웃겼는지 전쟁 중에 웃음을 참느라 정말 힘들었어.”
아모리스는 웃으며 말했지만 눈에선 눈물이 흘렀다.
추억에 잠긴 아모리스의 말을 감히 끊을 자신이 없었기에 티그리스와 레인로버는 가만히 아모리스의 말을 들었다.
아모리스는 도끼를 들고 있는 야만 전사 석상 앞에 섰다.
“이 머저리처럼 무식하게 생긴 도끼쟁이 보이지? 한국인으로 태어났으면 건달을 했을 것 같다면서 저런 이름을 붙여줬어. 아하드는 의외로 곽두기란 이름을 기분 나빠해하지 않고 진짜 마음에 들어 했어. 이름이 세 보인다고 말이야.”
다음은 얇은 세검을 들고 있는 엘프 석상 앞에 섰다.
“엘리시아는 박한빛이었어. 굉장히 희귀한 빛의 정령과 계약을 해서 밤이 되면 정령처럼 빛이 났지. 그래서 박한빛이라는 이름을 붙여줬어. 한빛이와 계약한 정령에겐 ‘빛나리’라는 이름을 붙여줬고. 둘 다 제법 마음에 들어 했어.”
다음은 활을 들고 있는 사내의 앞에 섰다.
“이 늑대의 탈을 쓴 녀석 보이지? 얘가 아치피터야.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늑대 수인들에게 길러져 늑대 전사가 된 녀석이야. 인간인 주제에 정령과의 감응도가 엘프보다 뛰어나서 엘리시아가 바람의 정령을 선물해 줬어. 참고로 이 녀석에겐 ‘주몽’이란 이름을 붙여줬어. 한국의 유명한 활잡이라고 했던가? 정령에겐 ‘삼족오’란 이름을 붙여줬지.”
다음은 낫을 들고 있는 여인의 앞에 섰다.
“이 석상은 누군지 알겠지? 이건 나야. 나한텐 ‘김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줬어. 곽두기 그놈은 내 이름이 진짜 안 어울린다고 했는데 난 마음에 들었어. 이름이 되게 둥굴둥굴하고 예쁘잖아? 유신이가 내게 사랑아 이렇게 불러주면 가슴이 뛰었어.”
마지막으로 아모리스는 검을 든 사내의 앞에 섰다.
“······그리고 얘가 페레이라야. 김유신. 생판 남이나 다름이 없는 이 세상에 강제로 소환되었지만, 그 누구보다 이 세상을 사랑한 사내. 그리고 날 그 지옥 같은 마왕에게서 구원해 준 왕자님.”
아모리스는 한동안 페레이라의 석상을 바라보다가 한쪽 무릎을 꿇고 땅을 조심스럽게 팠다.
그 안엔 나무 상자가 들어 있었다.
아모리스는 나무 상자를 꺼내 제단 위에 올려놓았다.
“호스와 자매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일들을 절대 잊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기록으로 남겨두었지.”
아모리스는 나무 상자를 열었다.
나무 상자 안엔 녹슨 검 한 자루와 28권의 붉은색 노트가 들어 있었다.
붉은색 노트엔 아무 제목도 적혀 있지 않았지만, 어떤 내용이 들어 있을지 대충 예상이 갔다.
“이 노트엔 자매들이 죽인 사람들의 이름과 숫자, 왕국 그리고 마을의 이름이 적혀 있어. 죽인 사람들의 이름을 알아낼 수 있으면 이름을 적었고, 나이까지 적을 수 있다면 적었지. 그리고 자신들이 어떤 죄악을 저질렀는지 상세하게 적었어.”
레인로버는 떨리는 손으로 노트를 짚어 읽었다.
그 노트엔 피 묻은 손으로 적은 마녀들의 속죄록이 적혀 있었다.
속죄록마다 크기는 제각기 달랐다.
어떤 것은 두꺼웠고 어떤 것은 얇았다.
얇은 이유는 단순했다.
사람을 죽인다는 죄책감을 견디지 못해 미쳐 버려 호스에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호스에게 죽은 마녀들의 기록들의 말미엔 호스의 필체로 추정되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그 누구보다 아이들에게 상냥했던 니노. 그녀의 고향 소베에서 잠들다.
-외팔이와 외눈박이들에게 사랑받던 헬레나. 가장 참혹했던 전장 밀란의 언덕에서 잠들다.
-집을 잃은 이들에게 집을 지어주던 로라. 하늘을 지붕 삼아 잠들다.
최후의 최후까지 살아남은 마녀들의 숫자는 총 셋.
마리아와 린, 데니는 자매들의 유해를 수습해 제단 아래에 묻어주고 신전을 세웠다.
모든 이를 사랑하고 섬기라는 룩스의 교리를 배반한 자들이지만 적어도 사후엔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러면 안 되잖아요. 이건 아니잖아요.”
레인로버의 손이 덜덜 떨렸다.
“이렇게 끝날 순 없어요. 마녀들은 원해서 사람들을 죽인 게 아니잖아요.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그런 건데.”
“레인로버. 대의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소리는 하지 못해. 너도 알고 있잖아. 그녀들과 호스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을 거야.”
아모리스의 말에 레인로버는 말문이 막혔다.
“도대체 인간들이 무슨 죄를 저질렀길래 이런 비극의 역사를 받아들여야 하죠?”
“너도 알다시피 마왕을 탄생시킨 것은 인간들이니까.”
“모든 인간들이 원해서 마왕을 탄생시킨 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드래곤은 4마리를 제외하곤 모두 멸종했고, 성산을 잃어버렸어. 거인들이 살던 터전을 잃어버리고 왕의 핏줄이 모두 끊겼지. 수인들과 엘프들은 그나마 괜찮았지만 많은 동포들을 잃었어. 놈들의 입장에선 인간들은 멸절당해야 한다고 생각했겠지. 아니, 인간들이 또 마왕을 불러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인간들이 어떻게 또 마왕을 불러낼 거라고 생각하겠어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티그리스는 읽던 속죄록을 내려놓았다.
“인간이 왜 마왕을 불러낸 겁니까? 실수입니까? 아니면 고의입니까?”
아모리스의 기억이 다 돌아왔으니 이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왜 인간이 마왕을 탄생시켰는지.
“1,300년 전 인간들이 살 수 있는 공간은 그리 넓지 않았어. 거인들과 수인들 그리고 드래곤과 엘프들 사이에서 인간들은 드워프처럼 노예나 다름이 없는 생활을 해야만 했지.”
거인의 시대만 보더라도 인간들은 거인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주기적으로 인간을 제물로 바쳐야만 했다.
그런데 1,300년 전에는 거인뿐만이 아니라 드래곤이 수천 마리가 살던 세상이었다.
당시 인간이 생존하려면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노예를 자처하는 것.
“내가 살았던 소로나 왕국 안에서도 매년 인신 공양으로 거인들에게 바쳐지는 사람들이 백 명이 넘어갔어. 드래곤과 거인들이 영역 다툼을 할 때면 땅이 뒤엎어지고 산이 사라져 인간들이 떼죽음을 당했지. 엘프들이나 수인의 경우엔 세계수의 비호 아래 드래곤과 거인들로부터 자신들을 지킬 힘이 있었다고 하지만 인간들에겐 그럴 힘이 없었어.”
결국 버티다 못한 인간들은 한 가지 방법을 사용하기로 한다.
성좌의 힘.
성좌의 힘은 드래곤이든 거인들에게 공평하게 적용이 된다.
그렇다면 드래곤과 거인들로부터 자신들을 지킬 수 있는 강력한 성물을 만들면 자신들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 성물을 만들기 시작한 왕국은 알케미아 왕국이라는 곳이었어.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다시피 연금술로 유명한 나라였고, 거인들과 드래곤이 기피하는 추운 땅 지금의 ‘멸지’에 있던 나라였지.”
알케미아의 연금술사들은 인간들이 이렇게 약한 이유는 거인들과 드래곤에 비해 육체 자체가 나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연금술사들이 염원하는 궁극의 존재 ‘완전체’가 될 수 있다면, 인류는 대륙을 지배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완전체는 인공적인 방법으론 도저히 만들 수 없었어. 인간의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도 불가능했고. 그래서 인간의 육체를 진화시키는 성좌를 만들기로 결정했어.”
“성좌를 만드는 게 가능한가요? 성좌가 탄생하려면 영혼과 유명한 이야기 그리고 상징하는 별자리가 필요하다면서요.”
“별자리야 그냥 왕국이 알아서 정하면 될 일이니 어려운 일이 아니였어. 중요한 것은 이야기와 이야기 속 주인공이 유명해져야만 하는 거였지. 그래서 알케미아 왕국은 소설과 연극을 사용하기로 했어.”
왕국 차원에서 유명한 소설가와 연극 각본가들을 불러내 왕과 연금술사들에 입맛에 맞는 소설과 연극을 만들어 배포했다.
그리고 그 연극과 소설은 알케미아 왕국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잠시만요. 성좌가 탄생하려면 진짜 있었던 과거를 바탕으로 만들어져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건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말이야. 사람들은 진짜 있었던 이야기에 열광하잖아? 그래서 모든 성좌들은 진짜 있었던 과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거지.”
“그럼 성좌의 시련 속 이야기들은 진짜 과거가 아니라······.”
“성좌가 보고 싶어 하는 이야기이자 자신이 유명해질 수 있었던 이야기의 핵심이지. 전부는 아니겠지만 대다수의 성좌들은 자신의 이름이 유명해지기만 한다면 이야기쯤이야 아무렇게나 바뀌어도 상관 안 할 거야.”
아모리스의 말에 티그리스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러고 보니 연인 자리의 성좌를 만났을 때, 행복한 결말을 보여줘서 고맙다고 했었다.
만약 진실에 집착하는 성좌였다면 이야기의 흐름이 바뀐 것에 화를 냈겠지.
“이 사실을 알케미아 왕국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알아낸 모양이야. 그래서 가짜 이야기를 만들고 가짜 주인공을 만들어 내 일단 이야기가 유명해지게 만들었지. 그 이야기의 내용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느 산골에 박혀 있는 작은 샘에 들어가니 거인처럼 강력한 몸과 드래곤의 강력한 마력을 갖게 되었다는 망상과도 같은 이야기였지.”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알케미아 왕국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사랑했다는 점이었다.
왕과 연금술사들이 만들어낸 가짜 별자리에 ‘진화의 샘’이라는 이름도 붙여주었다.
그러나 50년의 세월이 걸치면서 ‘진화의 샘’의 이야기는 점점 변질되기 시작되었다.
더 자극적인 이야기를 원하던 알케미아 왕국의 사람들은 진화의 샘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진화의 샘 앞에 꽂혀 있는 검을 뽑은 자가 영웅이 되어 사악한 드래곤과 거인들을 무찔렀다는 이야기로 변형시키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는 수천 개의 아류작을 만들어내며 검을 뽑은 자가 언데드가 되기도 했고, 드래곤이 두려워했던 고대의 종족 흡혈귀가 되기도 했으며, 심지어 거인이 되거나 드래곤이 되기도 했다.
“문제는 별자리 자체는 유명해졌지만 그 별자리에 들어갈 영혼이 없기 때문에 성물이 생길 리가 없었어. 하지만 사람들은 인류를 구원할 영웅의 존재를 늘 갈구했어. 그동안 인간들은 드래곤과 거인들에게 너무 많은 핍박을 받았으니까. 그때, 다 늙어버린 왕이 나선 거야.”
사실 그 검을 뽑은 영웅이 바로 자신이라고.
사람들은 그게 진실이건 아니건 상관이 없었다.
그 영웅이 자신들의 눈앞에 있다는 것 자체에 열광했다.
문제는 살아 있는 인격체가 성좌가 되면 어떻게 되는지 아무도 몰랐다.
지금까지 모든 성좌는 죽은 영혼이 별자리를 얻고 성좌가 되었으니까.
“노왕은 알케미아 왕국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를 모두 흡수하여 그가 바라던 완전체가 되었어. 죽지도 늙지도 않는 불로불사의 몸을 얻었지. 살아있는 인간이 성좌가 되어버린 거야.”
노왕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진화의 바람은 알케미아 왕국을 휩쓸었다.
알케미아 왕국의 사람들의 육체는 기괴하게 변형되었다.
어떤 이들은 흡혈귀가 되었고, 어떤 이는 죽지 않는 언데드가 되었으며, 어떤 이들은 그린스킨이 되었고, 어떤 이들은 육체를 벗어난 영체가 되었다.
그들은 노왕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자신의 몸이 흉측하게 변해도 더는 죽음의 공포에 떨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만족했다.
“노왕의 모든 백성들이 두려움과 공포를 잃은 군인이 되었으니 할 일은 하나뿐이었어. 남하.”
인간의 손에서 만들어진 소설이 현실이 된 그 날.
대륙은 전례 없는 전란의 시대를 맞았고, 살아남은 자들은 그 시대를 마왕의 시대라고 부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