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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210화 (210/251)

< 210. 조급함 >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 210화

조급함

아이린은 뼈를 찌르는 통증에 일어났다.

관절 여기저기가 쑤시고 뼈에 좁쌀만 한 바늘이 돋은 듯 심심할 만하면 여기저기를 찔러 댔다.

아이린은 너무나도 오래전에 겪은 통증이라 이게 무슨 종류의 통증인지 알지 못했다.

성장통이었다.

‘목이······.’

동시에 아이린은 목이 너무 탔다.

아이린은 선반 위에 놓인 물컵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아이린의 손이 물컵을 치고 떨어졌다.

쨍그랑-

아이린은 당혹스러웠다.

기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육체에 대한 이해다.

신체의 길이는 너무나도 당연하고 몸무게부터 시작해서 심지어 몸에 퍼져 있는 세밀한 근육의 위치, 무게중심까지 완벽하게 파악해 둬야 전투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

특히 아이린의 신장은 굉장히 작고 몸무게는 가벼웠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몸을 잘 이용해야 해서 ㎜ 단위까지 파악해 둔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 이게 뭔가?

시야에 닿는 물컵 하나 집지 못하다니.

아이린은 미묘하게 시야가 높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이린은 탁자 옆에 놓인 자신의 대검을 집었다.

수만 번은 휘둘렀을 대검이 미묘하게 불편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손이 커졌어.’

아이린은 침대보를 걷어 몸을 확인했다.

발 크기도 커지고 다리 길이도 늘어났다.

팔과 손가락도 늘어났다.

그 무엇보다······ 길이가 맞지 않던 양팔의 길이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세계수가 약속을 지킨 것이다.

벌컥!

아이린이 머물고 있던 병실 문이 열렸다.

네메시스였다.

“아이린 괜찮아?!”

“아, 네.”

“일단 여기서 기다려. 지금 빨리 티그리스 교관님 불러올 테니까.”

“아, 네. 그리고······.”

“그리고 왜?”

아이린은 꼬르륵거리는 배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밥이랑 물 좀······.”

* * *

티그리스네가 병실에 도착했을 땐 아이린은 스프를 말 그대로 흡입 중이었다.

도착하기 전에 몇 그릇을 해치워 뒀는지 빈 그릇들이 침대 옆에 정갈하게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아이린은 마지막 스프 한 그릇까지 말끔하게 해치운 후 입을 닦았다.

“왔어?”

“······그렇게 돼지처럼 먹은 다음에 새침하게 입 닦고 있으면 괜찮은 줄 알아? 이것아!”

샤를로트가 제일 먼저 달려들어 아이린의 등짝을 마구 때렸다.

“아파. 아파. 아파.”

“난 네가 잘못되는 줄 알고······. 진짜······.”

세계수 앞에서 기절한 아이린을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새벽 운동을 하러 나왔던 샤를로트와 리니아였다.

샤를로트와 리니아가 아이린을 아무리 흔들어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자, 샤를로트는 티그리스의 방문을 부수고 들어와 아이린을 살려달라고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그렇게까지 난리를 피울 필요는 없었잖아.”

“전날 밤에 그렇게 죽을상으로 집으로 돌아간 애가 길 한복판에 기절해 있으면 누구든지 다 놀라지 이년아!”

“······듣고 보니 그렇네.”

샤를로트는 아이린을 꽉 안았다.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세계수한테 그런 부탁을 한 거야. 응?”

아이린은 티그리스를 흘금 쳐다봤다.

티그리스는 여전히 감정을 읽기 어려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내 몸이 내 성장을 가로막고 있었으니까······. 자꾸 뒤처지는 것 같아서······.”

아이린의 육체는 확실히 성장했다.

체감이 갈 정도로 급격하게 성장한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비틀렸던 아이린의 육체가 완벽하게 균형을 되찾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대검을 휘둘러서 늘어났던 어깨 관절과 허리도 돌아왔다.

심지어 마나 회로 또한 넓혀져 계곡물처럼 시원하게 흘렀다.

“아마 4번째 고리를 지금이라도 만들 수······”

“지금은 안 된다.”

아이린은 순간적으로 울컥했다.

“왜······그렇죠? 스승님?”

“네 육체의 성장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 후 네 육체를 완벽하게 파악한 뒤에 고리를 만드는 게 더 안전하고 효과적이다.”

티그리스가 늘 강조하는 것이 있었다.

기사의 육체는 강철처럼 강인한 것 같지만, 사실 유리처럼 예민하다고.

지금 아이린이 고리를 추가로 만드는 것은 기껏 안정화된 몸을 더 망치는 길이 될 수 있었다.

“샤를로트와 리니아의 말을 전해 들었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검기까지 발현할 수 있었다지?”

“······네. 그렇습니다.”

“그때 내가 도와줬다면 곧바로 4번째 고리를 완성시킬 수 있었을 거다. 그리고 내가 전대 세계수로부터 받아왔던 영약을 먹으면 차근히 성장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대다수의 기사들이 4번째 고리를 앞에 두고 좌절하는 이유가 있다.

4번째 고리를 함부로 만들었다간 마나 회로가 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부서지거나 과도한 오러의 유입으로 육체가 붕괴해 버리고 말 것이다.

“육체는 정신을 담는 그릇이다. 네 검술이 발전하기도 전에 육체가 빠르게 성장해 버렸으니 넌 그 육체에 다시 적응하는 데만 최소 반년이 넘게 걸릴 것이다.”

“그럼 4번째 고리를 만드는데 반년이 지난 후에야 가능하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나마 너라서 짧게 잡은 거다. 넌 너무 조급했어.”

문득 세계수가 말했던 말이 떠올랐다.

-물처럼 유연하고 차분해질 수 없어?

또 급했던가?

빠르게 나아가고자 선택했던 길이 오히려 돌아가는 길이 되어버렸다.

“세, 세계수한테 다시 얘기해서 이 힘을 걷어가 달라고 부탁을 하면 되지 않을까요? 제가 다시 얘기해 볼게요.”

“세계수가 어리긴 하지만 엄연한 신이다. 인간이 신과의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나선다는 건 그만한 대가를 각오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도 이건 제가 일으킨 문제니까······.”

“아이린. 조급해하지 마라. 이번 일도 네가 조급해서 생긴 일이지 않나?”

아이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아이린의 볼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솔직히 말해서 아이린의 변화에 가장 기뻐할 사람이 티그리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티그리스는 오히려 아이린을 질책하고 있었다.

그게 너무 서러워서 눈물이 자꾸 났다.

“실망시켜 드려 죄송합니다. 제가 스승님을 믿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해서······.”

티그리스는 아이린의 떠는 손을 잡았다.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하다. 아이린.”

“네······?”

“난 네 스승이다. 네가 힘들다는 걸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알고 있었어야 했어.”

티그리스는 급한 일들을 처리하느라 제자들을 살피는 데에 소홀하고 말았다.

이건 아이린의 실수이기도 하지만 티그리스의 잘못이기도 하다.

그러니 티그리스는 자신의 잘못이자 아이린의 실수를 바로잡아 줘야 할 책임이 있었다.

티그리스는 자세를 낮춰 아이린의 눈을 바라봤다.

하지만 아이린은 도저히 티그리스의 눈을 볼 자신이 없었다.

“네가 저지른 첫 번째 실수는 네 육체가 감당하기 어려운 영약을 급하게 먹은 것이다. 그 실수를 저지른 이유는 네 분노와 무지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네가 배운 것이 있지. 뭐였나?”

아이린은 울음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좋은 기연을 마주하더라도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겐 독약이나 다름이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이후로 넌 무엇을 했지?”

“정직하게 검을 수련했습니다.”

“그 덕분에 네 나이 또래 중에 대검을 제일 잘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아이린은 티그리스의 눈을 힐금 쳐다봤다.

마치 죄지은 아이처럼.

“두 번째 실수는 네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로이에게 검을 휘두른 것이다. 그 실수를 저지른 것은 정신적 수양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 일을 통해 네가 무엇을 배웠지?”

“절제되지 않은 분노는 오히려 저를 해칠 뿐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 이후로 넌 무엇을 했지?”

“스승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리고 로이를 이길 수 있는 검술을 배웠습니다.”

“그 덕분에 넌 로이와의 정당한 결투 끝에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너는 대검만 고집하던 잘못된 오기를 버리게 되었다. 네게 맞는 검이 무엇인지 몸으로 깨닫게 된 거지.”

아이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세 번째 실수는 네가 말해보거라.”

“······빠르게 성장해야 한다는 조급함을 이기지 못한 것과 스승님을 믿지 못하고 세계수에게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그 이후로 넌 무엇을 할 것이냐?”

아이린은 티그리스의 손을 꽉 잡았다.

“조급함을 버리고 차분히 스승님의 말씀을 잘 따르겠습니다.”

드디어 아이린이 티그리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아이린의 눈빛에 진심이 전해졌다.

“인간인 이상 우리 모두가 실수를 한다. 그건 나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실수를 했다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실수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배우고 발전하느냐다. 네가 그것을 이번 기회에 알았으면 좋겠구나.”

“네. 알겠습니다. 스승님.”

티그리스는 아이린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좋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 네 몸 상태를 객관적으로 설명을 해주겠다. 잘 듣도록 해라.”

아이린은 티그리스가 건넨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경청했다.

“네. 알겠습니다.”

“우선 좀 전에 말했던 대로 네가 4번째 고리를 완성하는 데 최소 반년은 걸릴 것이다. 길면 1년이 넘을 수도 있겠지. 관건은 네 변화한 육체를 얼마나 빠르게 익히느냐다. 이해했나?”

“네.”

아이린의 눈빛과 심장의 박동으로 봐서 아이린은 순순히 티그리스의 말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이제 당근을 줄 차례다.

“그리고 엄연히 말하자면 세계수의 계약은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다. 언제가 되었든지 간에 며칠 전처럼 네 육체가 네 정신을 따라가지 못하는 일이 생길 것이고 넌 너를 속박한 육체의 한계를 스스로 극복해야만 했다.”

“그 말씀은······ 그 과정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뜻인가요?”

“그래. 넌 네 성장을 방해하고 있던 장애물을 해치운 셈이 되었다. 그러니 아예 안 좋은 일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 거지.”

사실 아이린이 4번째 고리를 만드는 것보다 자신의 육체의 한계를 극복하는 게 더 힘들었을 것이다.

아이린이 스스로 헤쳐 나가게끔 도와주기 위해 각종 영약을 준비해 두긴 했지만, 세계수의 도움 한 번으로 한 번에 해결되었으니 오히려 더 좋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티그리스는 아이린에게 이런 말을 해주지 않기로 했다.

아이린은 지금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조급함과 분노를 다스려 가는 중이다.

괜한 말로 아이린의 마음을 흔들 생각은 없었다.

아이린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평소와 다름이 없다. 검을 수련하는 거지. 하지만 대검을 드는 것은 당분간 금지다. 당분간 가벼운 검을 들고 연습하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티그리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유는 궁금하지 않나?”

“이제 스승님의 말씀만 따르기로 했으니까요. 이젠 이유를 묻지 않고 바로 따르겠습니다.”

순한 양이 된 것 같아 좋긴 한데 이건 티그리스가 바란 방향은 아니다.

“다른 건 믿고 따라도 좋다. 하지만 검술에 한해선 끊임없이 궁금증을 갖고 물어봐라.”

“그럼 제가 깊게 고민하고 여쭈어보겠습니다.”

티그리스는 살짝 감탄했다.

아이린은 훌쩍 커버렸다.

육체보다 마음이.

“네가 그렇게 하겠다면 굳이 반대하지 않으마.”

* * *

아이린과 티그리스가 나눴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세계수는 울상을 지었다.

“······죄송해요. 아빠.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네 잘못이 아니다. 넌 그냥 도움을 주려고 했던 것뿐이니까.”

“그게 아녜요······.”

“아이린에게 힘을 나눠준 이유가 따로 있는 건가?”

세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봤던 기사들 중에 아이린이 제일 강했거든요. 샤를로트나 리니아보다 더!”

“······그래?”

세계수는 검술을 볼 줄 아는 눈이 없다.

하지만 세계수는 엄연한 신이다.

그녀만의 통찰력이 따로 있겠지.

“그래서 아이린을 제 호위기사로 삼으면 제가 안전해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젠 별 상관없어요! 아빠가 내 옆에 있으니까!”

세계수는 티그리스의 목덜미에 파고들어 몸을 비볐다.

세계수 나름대로의 애정 표현이리라.

“그나저나 아이린의 성장은 언제쯤 멈추지?”

세계수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이린이 만족할 때까지요.”

“정확하게 설명해 줄 수 있나?”

“으음······. 아이린이 스스로 성장을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그때 끝나요.”

“그러니까 아이린의 성장은 아이린에게 달렸다 이 말이군.”

“네. 맞아요.”

티그리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나랑 약속 하나만 하지.”

“네! 무엇이든 말씀하세요!”

“방금 말한 건 나와 너와의 비밀로 남겨두기로.”

세계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네? 그건 왜요? 아이린의 성장이 빨리 멈추면 멈출수록 좋은 거 아닌가요?”

“네 말대로 아이린의 육체의 불균형은 이미 사라졌다. 그러니 아이린은 성장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왜 아이린에게 비밀로 하는 건가요?”

“아이린은 검으로 자신의 심상을 구현할 수 있는 검술사다. 그러니 멈춰야 할 때를 자신이 잘 알고 있겠지.”

“말이 너무 어려워요······.”

티그리스는 세계수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내가 굳이 개입하지 않아도 알아서 자신의 길을 알아서 찾아나갈 것이란 뜻이다. 아이린은 분노로 뭉개진 검이지만, 그 검을 날카롭고 명철한 이성으로 갈고 닦는다면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명검으로 탄생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대장장이들이 그렇듯이 검의 완성을 결정짓는 것은 대장장이 자신의 몫이다.”

“······말이 더 어려워진 것 같은데요?”

“네게 숙제로 주마. 내 말의 뜻을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 깊게 생각해 보도록 해라.”

“네!”

세계수가 조용히 생각에 빠지자 티그리스는 세계수 옆에 놓인 무거운 철판을 들었다.

그 철판 위엔 ‘성물 우로스의 진실’이라고 써 있었다.

“이제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질 않는다.

황도의 여름이 끝나가기 전에 분명히 나타날 것이다.

회귀 전, 라칸이 성물 우로스를 되찾는다고 이번 여름방학 때 갑자기 사라졌다가 개학 때쯤에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우로스를 되찾아서 드워프들에게 건네주기도 했고.

그것 때문에 황국과 드워프 간에 사이가 급진적으로 좋아졌다고 들었었다.

문제는 우로스를 되찾아주기만 했지, 라칸조차도 우로스가 내리는 시련을 감당하지 못해 티그리스가 우로스를 공략할 때까지 방치해 둬야만 했다는 점이다.

티그리스는 우로스 공략을 하면서 처음으로 죽음을 경험해 봐야만 했다.

성물 우로스의 시련은 공성전에 가깝다.

그란티스가 뿜어내는 화염과 용언 마법을 막아내고 몰려오는 그란티스의 와이번들을 내기만 하면 된다.

문제는 그게 어렵다.

그란티스의 손짓 한 번에 드워프들이 만든 철옹성이 종잇장처럼 잘려 나가고, 용언 한 번에 군인들이 돋보기에 타 죽는 개미처럼 몰살당한다.

그래도 용언과 드래곤의 단단한 발톱은 그나마 괜찮다.

그란티스의 가장 무서운 점은 놈의 눈이었다.

놈의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몸이 완전히 얼어붙어 버린다.

티그리스마저 얼어붙게 하는 용언이라도 있는 걸까 조사를 해봤지만 그게 아니었다.

드래곤과 인간이 눈을 마주치면 자연스럽게 인간의 내면 속 가장 깊은 공포가 꿈틀거린다.

그것을 ‘스네이크 아이’ 또는 ‘드래곤 피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일종의 주술과도 같은 거라 일반 검술사에 불과한 티그리스가 저항할 수 있는 종류의 기술이 아니었다.

그래서 티그리스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그란티스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버텨내는 것뿐이었다.

‘이번엔 조금 다를까?’

성물 우로스의 공략 자체는 한번 해봤으니 단 한 번 만에 성공할 자신이 있다.

그러나 티그리스는 조금 욕심이 생겼다.

서쪽의 용 그란티스를 아예 죽이는 것.

이 정도는 해야 우노와 직접 대면했을 때도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잘하면 우로스의 성좌를 만나 성좌만이 아는 우노의 약점을 알아낼 수도 있고.

문제는 드래곤을 베어내는 검술을 만드는 것이다.

‘용살(龍殺)이 남아 있었다면······.’

서쪽의 용 그란티스를 벤 검술은 벨프 가문의 검술 ‘용살(龍殺)’이다.

그 검술을 티그리스가 익혔다면 생각보다 손쉽게 그란티스를 죽이고 아이린에게 용살(龍殺)을 가르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용살(龍殺)을 찾을 수 없었다.

흑토 전쟁이 끝나고 빈스모크 가문의 서고를 조사해 봤지만, 용살(龍殺)을 비롯한 빈스모크 가문이 점령한 가문들의 고유 검술서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누가 가져간 걸까?

아니면 불태워 버린 걸까?

깊은 고민에 빠져 있을 때, 티그리스의 앞에서 잔디 밟는 소리가 났다.

“어떻게 내가 일주일 동안 말없이 사라졌는데 찾는 사람이 라칸 말고 없을 수가 있지?”

찬란한 달빛을 뚫고 한 여인이 걸어왔다.

아모리스였다.

“나 좀 섭섭한데?”

< 210. 조급함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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