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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223화 (223/251)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 223화

카이라(2)

카이라는 라칸의 살짝 무너진 표정을 캐치했다.

“어?! 너 못 믿는구나?”

“……너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나?”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거야…….”

라칸은 말을 신중하게 골랐다.

뭔가 계속 카이라에게 정보를 주면 굉장히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굉장히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만약 카이라의 협조를 받을 수 있다면 로타와 아르펨의 정확한 상황과 위치, 심지어 마왕성을 가는 방법까지 모두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리스크도 크다.

여기서 티그리스와 황국의 전력을 노출시켜 버린다면 로타와 아르펨에게 역공을 당할 수 있었다.

“네게 이런 말도 안 되는 힘을 전해준 작자가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고 갔을 리가 없으니까. 난 너를 믿을 수 없다.”

“오~ 정론으로 맞부딪히는데?”

‘젠장.’

카이라의 표정이나 말투로 보아 라칸이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알아낸 모양이었다.

“하긴 네 말도 맞긴 해. 내가 뭘 먹고 뭘 마시고 뭘 하는지 그 사람은 다 알고 있을지 몰라. 하지만 그거 알아?”

“……뭐지?”

“만약 그랬다면 내가 배신할 거란 걸 이미 알았겠지. 이미 난 슥삭 당했을걸?”

“그러니 너를 더 믿을 수 없는 거다. 네가 배신할 것임을 알고도 가만히 놔두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카이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역시 서로 감추는 게 많다 보니 대화가 진행되기 어렵네. 그럼 어쩔 수 없지. 나 먼저 패를 깔게.”

카이라는 라칸을 데리고 정원 안으로 향했다.

이곳은 특이하게 남자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는데, 일부러 아무도 들이지 못하도록 막은 것 같았다.

“내가 그 사람과 계약을 맺은 건 철저히 내 개인적인 복수를 위한 거였어.”

“복수? 누굴 위한 복수지?”

카이라의 목소리가 마치 겨울처럼 차가워졌다.

“나와 내 언니 동생들을 위한 복수.”

정원 안으로 들어가니 제일 먼저 보인 것은 형형색색의 꽃들이었다.

메마른 사막에서 피기 힘든 종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나름대로 종을 개량해 뜨거운 태양에서 버틸 수 있게 만든 것 같았다.

“고디바 왕국을 오면서 굉장히 이상한 점 못 느꼈어? 루체트 황국과는 뭐가 많이 다르지?”

“……날씨나 기후를 얘기하는 건 아닐 테고.”

“당연하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사람들 사이에 있어.”

그거라면 답은 하나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 좀 심한 것 같더군.”

“딩동. 너라면 맞힐 줄 알았어.”

꽃밭 한가운데로 가니 작은 정자가 있었는데, 그 정자엔 하얀색 항아리들이 놓여 있었다.

그 항아리들엔 이름이 하나하나 적혀 있었는데, 저 항아리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저건 카이라의 언니 동생들이다.

“세상 어디를 가나 무희는 존재하게 마련이지. 촛불 아래에서 몸을 흔들어 돈을 버는 것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존재해 왔던 직업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여성 차별이 심한 지역에서 몸을 파는 건 생지옥이나 다름이 없어.”

카이라의 몸 곳곳에서 흉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채찍으로 맞은 흉터부터 시작해 날카로운 뭔가에 베인 흉터, 화상을 입은 흉터, 목에는 밧줄로 묶인 흉터까지…….

라칸은 도저히 보기 힘들어 눈을 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모두 가족에게 버려져 무희가 됐어. 아버지가 돈이 필요하면 팔고, 형제가 돈이 필요하면 팔지. 마치 은행 적금 깨는 것처럼 월경을 시작하면 비싼 값에 팔아 넘긴다니까?”

“하지만 배신당해 버려졌다는 충격은 생각했던 것보다 오래가지 않아. 이곳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지옥 같으니까.”

카이라는 작은 손수건을 꺼내 항아리에 붙은 모래 먼지들을 천천히 닦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긴 악의 고리도 언젠간 끊어지게 마련이야. 뮬을 보호해 주던 가문의 세력이 약해지자 도적들이 뮬을 공격해 왔어. 금품을 약탈하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

“개돼지 취급이나 받던 우리는 의외로 오랫동안 살아남았어. 하지만 우리가 원하던 방식은 아니었지. 도적들은 모두 남자고 그들에게도 성욕이 있으니까. 결국 우리는 새로운 지옥 속에서 살아가다가 죽었어.”

카이라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뚝 떨어졌다.

그 눈물은 메마른 땅에 떨어져 깊고 어두운 자국을 남겼다.

“그때, 아르펨이 내게 손을 내밀었어. 세상에 성욕에 미친 모든 남자들을 벌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줄 테니 나를 따르라고. 너는 이 세상에 가득한 음욕을 깎아내 아름다운 조각품으로 탄생할 것이라고 말했지.”

“……그래서 넌 아르펨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가? 그리고 복수를 하고 있는 거고?”

“맞아. 도적놈들을 모조리 다 죽인 것도 모자라 내게 복수할 힘을 주겠다는데 악마라도 손을 잡아야 할 거 아니야? 그래서 잡았지.”

라칸은 카이라의 말에 모순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 뮬에서 왜 여자들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것을 용인하고 있지?”

“내가 노예로 팔아먹는다고? 아니지. 가족들에게 배신당한 여자들이 아프지 않도록 내가 사들이는 거지. 실제로 뮬이 생겨난 덕분에 고디바 왕국 내에 홍등가는 깨끗하게 사라졌어.”

“그럼 그 여자들은 어떻게 했나?”

“그 여자들이 원하는 대로 해줘. 복수를 원하면 복수를 도와주고, 자유를 원한다면 풀어주지.”

“그렇게 손쉽게 풀어주나?”

“내 적은 음욕에 찌들은 남자들이야. 여자들은 내가 감싸줘야 할 불쌍한 사람들이고.”

카이라는 눈물을 손으로 닦으며 말했다.

“그것보다 여자가 우는데 손수건 하나 안 건네주는 거야? 너무한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아?”

“네 손에 들린 건 뭐라고 생각하지?”

“참나. 이건 모래가 묻었잖아. 센스 없긴.”

라칸은 순순히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카이라는 의외라는 듯이 라칸의 손수건을 받았다.

“역시 나쁜 남자가 매력이 있네. 한번 잘해주니까 설레잖아?”

“네가 받았던 고통이 거짓처럼 보이진 않으니까.”

“뭐야. 날 동정하는 거야?”

“네 삶이 불행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원래 동정받는 건 정말 싫어하는데 네게 받으니 조금 기분이 새롭긴 하네.”

카이라는 납골묘 중앙에 있는 작은 의자에 앉아 손짓했다.

“이리 와 앉아. 다리 아프지 않아?”

“난 괜찮다.”

“넌 참 딱딱하다. 여자들한테 인기가 별로 없을 것 같아.”

‘티그리스 교관님은 이렇게 딱딱하게 굴어도 인기가 많던데…….’

[분석 결과]

[티그리스 교관님은 얼굴이 잘생겼습니다.]

‘아, 외모구나.’

라칸은 기분이 팍 상해 눈앞에 있던 메시지창을 치웠다.

그 때문에 카이라가 다가온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카이라의 부드러운 손이 라칸의 목에 닿았다.

라칸은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질 쳤다.

“뭐지?”

“약 발라주는 거잖아. 그러다가 흉져.”

자기가 상처 내고 약 발라주는 건 무슨 짓거린가?

라칸은 카이라의 손을 내쳤다.

“내가 알아서 치료하겠다.”

“미안해서 그래.”

“미안하면 떨어져라.”

“참나. 빈틈이 없네. 빈틈이.”

카이라는 투덜대며 라칸의 손에 연고를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

“그것보다 이젠 내 차롄가?”

“……뭐가?”

“기억 안 나? 우리 내기했잖아. 서로 원하는 것 맞추기.”

그런 쓰잘데기없는 내기를 굳이 해야 하나 싶었지만, 개도 자기 집 앞마당에선 텃세를 부린다.

심지어 이곳은 카이라의 영역이니 라칸이 괜히 카이라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은 별로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다.

“질문은 세 번이다.”

“쩨쩨하긴. 우선 첫 번째 질문. 혹시 네가 노리는 게 사람이야?”

라칸은 거짓말을 할까 고민했지만 카이라의 첫 질문을 보아하니 웬만한 거짓말로는 절대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니. 사람이 아니다.”

“설마 나는 사람이 아니다 뭐 이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건 두 번째 질문인가?”

“그렇게 팍팍하게 굴 거야? 나도 어느 정도 느슨하게 봐줬다고 생각했는데?”

카이라의 말도 어느 정도 사실이었기 때문에 라칸도 조금은 양보해 주기로 했다.

“너도 사람에 포함된다.”

“오~ 진짜인가 보네?”

말투를 보아하니 진실인지 거짓인지 구분하는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는 듯했다.

“그럼 두 번째 질문. 그럼 뮬을 노리고 들어온 건가?”

라칸은 카이라가 뭘 노리는 지 알아냈다.

이 진실게임을 통해 라칸에게 정보를 빼내고 있는 것이다.

라칸의 생각을 정확하게 읽어내는 것만으로도 카이라에겐 큰 이득이니까.

역시 생각했던 것보다 만만치 않다.

카이라는 싱긋 웃었다.

“대답 안 할 거야?”

“아니. 뮬은 중간 목표에 불과하다.”

라칸이 할 수 있는 일은 카이라가 최대한 이해하기 난해하게 설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뮬 자체가 목표는 아니었다는 거네? 하긴 뮬을 없애고 싶었다면 티그리스가 직접 행차했겠지. 그럼 내가 아직 부담스럽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목적에 맞는 질문을 해라.”

“넌 참 까다로운 남자야. 하긴 내 세뇌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으니까 이곳에 왔겠지. 어째서 너는 내 세뇌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던 걸까?”

라칸은 대답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카이라는 재밌다는 듯이 쿡쿡 웃었다.

“알았어. 장난은 여기서 끝. 그럼…… 도대체 뭘 찾으러 뮬에 왔을까. 사람도 아니고 뮬도 아니고 내가 목표도 아니라면 아주 귀한 물건이라는 건데…….”

카이라는 라칸 뒤쪽을 향해 손짓했다.

“설마 이건가?”

무희 두 명이 커다란 보자기에 조심스럽게 싸서 들고 온 것은 찬란한 황금빛을 토해내고 있는 갑옷이었다.

성물 우로스다.

라칸은 진심으로 놀랐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지?”

“사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너희들이 정말로 국왕을 살리기 위해 긴급 파견된 줄 알았어. 뭐, 사실 그것도 맞았을 거야. 트리샤가 네 팀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국왕을 살린 이후에도 투투를 타고 남쪽으로 이동하던데? 거기서 느꼈지. 아, 이 녀석들 뭔가를 찾으러 이 사막에 왔구나.”

카이라는 사막에 사람들을 쫙 풀어 사막 내에 특별한 변화가 있는지, 아니면 뭔가 신기한 게 떨어지진 않았는지 찾아오도록 지시했다.

무려 25개의 가문이 움직이고 돈이 급한 도적들까지 죄다 끌어다 움직인 결과 찾아낸 특이한 점은 딱 한 가지.

최근 성물 우로스가 사막 한가운데에 떨어졌다는 점이었다.

“우로스는 드워프들의 보물이지. 그리고 너희는 드워프들과 동맹을 맺은 상황이고. 하지만 드워프는 스스로 성물을 되찾을 힘조차 없지. 그러니 황국에 부탁해 우로스를 되찾도록 부탁할 거라 생각했어.”

“뭐, 아니면 진짜 나를 죽이러 오거나. 레인로버나 너나 트리샤는 뮬을 무너뜨릴 힘이 없지만,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에게 특별한 힘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카이라는 악녀처럼 웃으며 라칸에게 다가왔다.

“내가 목표가 아니라면 높은 확률로 이 우로스가 네 본 목표일거라 생각했어. 그런데 도박이 맞은 모양이네.”

“……그럼 약속대로 우로스를 내놓을 건가?”

“성질이 급하네. 서로 게임에서 승리했으니 거래를 해야지.”

“거래?”

카이라는 라칸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날 아르펨에게서 해방시켜 줘. 그러면 이 우로스를 줄게.”

어차피 아르펨은 황국의 목표다.

그러니 카이라의 제안은 손해 볼 것이 없다.

하지만 거래의 균형추가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좋아. 그럼 우로스를 먼저 건네줘. 그러면 아르펨을 죽여주지.”

“아니. 아르펨은 죽어선 안 돼.”

“그럼 제압을 하라고?”

“그래. 내게 잘 포장해서 가져와. 그러면 우로스를 건네줄게.”

라칸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너희가 이걸 꿀꺽 삼키고 나 몰라라 하면 어쩌려고. 그러니까 내가 아르펨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걸 확실하게 안 이후에 건네줘도 늦지 않아.”

역시 카이라는 우로스를 건네줄 리가 없었다.

저게 카이라의 목숨줄이라는 걸 모를 리가 없을 테니까.

문제는 아르펨을 카이라의 손에 되돌려 주라는 것이다.

아르펨이 없으면 카이라의 이 막강한 권력이 유지되지 않는 모양이다.

카이라의 입장에선 둘 다 놓치고 싶지 않겠지.

하지만 그게 가능했다면 진작에 아르펨을 죽이고도 남았다.

라칸은 일단 속내를 숨기고 카이라로부터 아르펨의 정보를 뽑아내기로 했다.

“그럼 적어도 아르펨에 대해 알려줘라. 아르펨이 어디에 숨어 있고 도대체 어떻게 네게 그런 막대한 힘을 건네줄 수 있었는지.”

“아르펨에 대해 아예 모르는 척은 그만해도 좋아. 지금까지 아르펨의 권속들을 잘만 죽여왔잖아? 아니야?”

“하지만 모르는 게 많은 것도 사실이지. 도대체 왜 네가 아르펨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고.”

카이라는 라칸에게 살짝 떨어져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할 말은 많지만 말을 신중하게 고르는 듯했다.

“아르펨은 지금 무리를 하고 있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루체트 황국과 전쟁을 하려고 하는 건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아르펨은 마왕성이 아닌 길리온 왕국에 있는 듯했다.

하긴 황국에 길리온 왕국의 대사로 찾아올 정도였으니까.

“물론 비밀이 많은 사내이긴 하지만 그 정도론 어림도 없다는 건 누가 봐도 알아.”

아르펨이 비밀 병기 몇 개를 갖고 있지만, 지금 권속들을 포함해 길리온 왕국 내에서도 루체트 황국과 전쟁을 원하지 않고 있는 듯했다.

그 비밀 병기론 루체트 황국과 전쟁을 벌이는 건 택도 없는 모양이다.

그보단 중요한 것은 다른 권속들도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게 과연 누구일까?

“난 전쟁의 광기에 집어삼켜지고 싶지 않아. 난 나만의 작은 낙원을 지키고 싶을 뿐이라고.”

카이라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그게 진짜일지는 모르겠지만 뮬을 지키기 위해선 전쟁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라칸의 마음속에 여전히 남지 않은 의문이 2개 남아 있었다.

“넌 고디바 왕국에 있는데 어떻게 먼 타지에 있는 권속들과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거지?”

“그건 말해줄 수 없어.”

이게 카이라의 역린인 듯하다.

좀 더 파볼까 싶던 찰나 카이라가 먼저 선수를 쳤다.

“나를 이용해 아르펨과 길리온 왕국의 약점을 알아내는 것은 좋아. 하지만 내 약점을 파고들려는 건 좀 아니지. 난 지금 옷을 다 발가벗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거기에 굴욕적으로 춤까지 추라는 말이잖아.”

아쉽지만 이건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그럼 네 최종 목표는 뭐지?”

“나? 방금 전에 말했잖아. 이 작은 낙원을 지키는 것.”

“아니. 낙원은 수단에 불과해. 넌 남자들에게 복수하고 싶으니 이 낙원을 만든 거잖아.”

“전후 관계를 놓고 보자면 그게 맞긴 하지. 하지만 내가 모든 남자를 다 죽이고 싶은 미친년처럼 말하는데 그건 아니야.”

“그럼?”

카이라는 빙긋 웃었다.

“성욕에 미쳐 여자를 홀대하는 남자들을 모조리 찢어 죽이고 싶을 뿐이지.”

역시 카이라는 미쳤다.

카이라는 손을 휘저었다.

“그럼 어서 가봐. 너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잖아? 같이 뮬에 들어온 세 분과 충분히 논의를 해봐야 하지 않겠어?”

“……알고 있었나?”

“적어도 내 앞마당에 어떤 쥐새끼들이 들어왔는지는 알아야 뮬의 성주라고 할 수 있겠지.”

카이라는 무희들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귀한 손님이야. 밖까지 잘 모셔다 줘.”

“예.”

카이라는 축객령을 내렸고 라칸은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우로스를 얻지도 못하고 오히려 카이라에게 협박을 받았다.

하지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우로스가 누구에게 있는지 알아냈고, 아르펨이 내부적으로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라는 걸 알아냈으니까.

* * *

무희들이 끝까지 쫓아올 줄 알았지만, 무희들은 라칸이 뮬의 입구를 나서자마자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보냈다.

심지어 꼬리를 붙이는 일 따위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라칸은 편하게 수정구로 연락을 넣을 수 있었다.

-우로스가 뮬에 있는 건 우연이 아니었구나. 쉽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어.

“네. 그리고…….”

-자세한 건 우리 만나서 얘기하자. 카이라가 알아챘다면 수정구로 대화하는 건 위험할 수 있으니까.

“네. 알겠어요. 그럼 어디로 가면 될까요?”

-북동쪽으로 올라오면 작은 폐허가 있어. 거기로 오면 돼.

“네. 알겠습니다.”

라칸은 일단 레인로버의 말대로 북동쪽으로 향했다.

중간에 뮬로 가는 사람들을 마주쳤지만, 그들은 라칸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이 라칸을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북동쪽으로 향하니 진짜로 작은 폐허가 나타났다.

그리고 라칸은 정말 믿기 어려운 광경을 목격했다.

“……지금 뭐 하고 계신 거예요?”

거뭇거뭇한 악령 수백 마리가 아모리스를 향해 머리를 박고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아모리스는 악령의 몸에 올라타 여왕님처럼 앉아 씨익 웃었다.

“악령들을 길들이고 있어.”

“악령들을 길들여서 뭐 하시게요?”

“뭐 하긴.”

아모리스는 번쩍이는 도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죄의 도시를 무너뜨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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