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 224화
카이라(3)
아모리스의 폭탄선언에 라칸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것 같았다.
“잠깐만요. 뭔가 이야기 흐름을 제가 놓친 것 같은데……. 죄의 도시라는 게 저 뮬을 말씀하시는 거 맞죠?”
“어.”
“그게 가능한지는 일단 둘째 치고…….”
라칸은 아모리스의 표정을 살폈다.
“왜 이렇게 화가 나셨어요?”
“내가 화가 난 거로 보여?”
“네. 굉장히요.”
아모리스가 막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은근히 계산적이다.
나이에서 나오는 짬…… 이 아니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일종의 육감이라고 해야 할까?
주먹을 뻗어야 할 때와 뻗지 말아야 할 때를 굉장히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아모리스는 앞뒤 가리지 않고 막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저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는지 알고 계시잖아요. 심지어 저 안에는 고디바 왕국의 고위 공무원부터 시작해서 핵심 가문의 후계자들까지 모두 있어요. 저들이 모두 죽으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될지 아시잖아요. 그런데도 저 뮬을 지금 당장 무너뜨리시겠다고요?”
“응. 그래야만 해.”
“그럼 설명해 줘요.”
아모리스는 악령의 몸에서 내려왔다.
“첫 번째, 뮬에 사는 카이라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고디바 왕국을 병들게 할 거야. 지금이야 국왕이 다시 건강을 되찾아 수습을 하고 있다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뮬이야. 저게 없어지지 않으면 고디바 왕국의 시민들은 평생 고통받을 거야.”
“두 번째, 카이라는 우리의 적이야. 아르펨의 명령을 따르는 권속이야. 지금 죽어 마땅해.”
아모리스는 뮬을 가리켰다.
“마지막 세 번째, 저 안에 있는 모든 무희들이 지금도 고통받고 있기 때문이야.”
“무희들이 고통을 받는다는 게 정확하게 무슨 소린가요?”
“네가 보고 온 무희들은 단순히 카이라의 명령을 받는 인형 따위가 아니야. 저 안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이해가 안 되는데 정확하게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아모리스 대신 레인로버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뮬에 오기 전에 서큐버스들은 키메라일 것이라 생각했잖아?”
“네. 맞아요. 실제로 시술을 받은 흔적이 보였어요.”
무희들은 모두 카이라와 똑같은 얼굴과 체형 그리고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카이라가 복제 인간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면 분명히 여자들의 몸으로 키메라 시술을 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것도 용납할 수 없지만 더 큰 문제가 있어. 서큐버스 시술을 받은 여자들에게 자의식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거야.”
라칸은 순간 레인로버가 하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의식이 남아 있는데 카이라의 명령을 따른다고?
그런데 고통을 받는다고?
“……말도 안 돼요. 그러면 무희들은 자기가 원해서 카이라의 명령을 따르고 있다는 뜻 아닌가요?”
아모리스가 입을 열었다.
“그게 문제야. 분명 머릿속으론 싫다고 울부짖고 몸부림을 치는데, 정작 육체는 카이라가 원하는 대로 말하고 움직이는 거야. 심지어 육체에 오는 모든 자극이 그대로 느껴지니……. X발 괜히 기억을 엿봤어.”
악령들이 악령이 된 이유를 정확하게 알아내려면 악령의 기억을 엿봐야만 한다.
그래야 정확히 어떤 ‘한’을 갖고 있는지 알아내고 그것을 이용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감정의 격류와 온갖 특이한 경험을 오감으로 느끼게 된다.
“내가 별의별 악령들을 봤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경우는 진짜 처음 봤어.”
라칸은 아모리스가 왜 이렇게 흥분했는지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무희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그대로 경험했을 테니 흥분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그럼 너도 찬성이지?”
“그 전에 카이라가 제게 제안한 게 있어요.”
“그건 들어볼 필요도 없이……!”
“아모리스 님.”
라칸이 싸늘한 눈빛으로 아모리스를 쳐다보자 아모리스는 흠짓했다.
“아모리스 님께서 화가 많이 나신 건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저희가 섣부르게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잖아요. 그러니 조금만 진정하고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아모리스의 어깨가 축 내려왔다.
“……미안.”
트리샤와 레인로버는 라칸에게 이런 면모가 있다는 것에도 놀랐지만, 저렇게 화가 잔뜩 난 아모리스를 단번에 진정시킨 점이 제일 신기했다.
아모리스는 역시 라칸에게 많이 약한 모양이었다.
“먼저 결론부터 말하자면 카이라는 아르펨에게서 벗어나고 싶다고 했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카이라는 아르펨을 배신할 생각이라는 거죠.”
레인로버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쳤다.
티그리스의 회귀록상 카이라는 모든 남자들에게 있어서 악몽과도 같은 존재였다.
길리온 왕국을 완전히 점거해 북상하기 시작한 카이라는 서큐버스 군단을 이용해 남자들을 세뇌시켜 반란을 일으키고 정보를 빼내기까지 했다.
그런 카이라가 아르펨을 배신한다고?
“그게 말이 돼? 아니, 왜 아르펨을 배신하려고 하는 건데?”
“현재 로타와 아르펨의 전력으론 저희를 절대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에요.”
“이길 수 없는 싸움은 하지 않겠다 이건가?”
“네. 카이라의 목표는 아르펨과 다르니까요.”
“카이라의 목표가 뭔데?”
라칸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음심을 갖고 있는 모든 남자들을 죽이겠다는데요?”
트리샤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세상에 음심이 없는 남자가 어디에 있어. 아, 티그리스 님이라면…… 그럴지도?”
레인로버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건 아닐걸요. 잘 참고 드러내지 않고 있는 거죠.”
“네? 정말요?”
“그,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나중에 얘기해 주시는 거예요?!”
레인로버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어졌다.
“아, 아무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라칸. 카이라는 모든 남자를 다 죽이고 싶다 이거야?”
라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그럴진 모르겠지만 그 정도로 남자들을 혐오하고 있는 건 확실해요. 뮬도 그걸 위한 포석이고요.”
“하지만 아르펨은 계속 승산 없는 싸움을 하고 있고, 이대로 가면 뮬도 망하고 자기도 망할 것 같으니 벗어나고 싶다 이건가?”
“네. 정확해요.”
트리샤는 복잡한지 머리를 북북 긁었다.
“그럼 카이라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아르펨의 약점을 알 수 있는 것뿐만이 아니라 고디바 왕국 내에서 아르펨이 수작질을 벌일 수 없다는 뜻이 되는 건가?”
“네. 그리고 뮬의 확장을 멈추라고 제안도 할 수 있죠. 아르펨은 어찌 됐건 황국과 카이라의 적이니까요.”
“이게 아르펨의 함정이라면?”
“카이라가 저희 측에게 정보를 달라고 하거나 한 건 없어요. 그냥 동맹을 맺자고 한 거죠.”
“방심을 유도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
“그럴 가능성은 아예 없는 건 아니죠. 하지만 카이라를 포섭하는 데 성공한다면 전선을 두 개로 나눌 필요가 없어지는 거죠.”
만약 카이라와 동맹을 맺지 않고 길리온 왕국을 쳐들어간다면, 아르펨은 무조건 카이라에게 고디바 왕국을 통해 루체트 황국을 공격하라 지시를 내릴 것이다.
하지만 카이라와 동맹을 맺는다면 카이라는 적극적으로 루체트 황국을 공격하지 않거나 아예 가만히 있을 수도 있다.
“아르펨을 먼저 처리한 이후에 카이라를 처리할 기회가 생기는 거죠. 카이라의 말을 들어봤는데 아르펨이 죽으면 뮬을 유지할 수 없나 봐요.”
“하지만 그걸 카이라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대신 카이라는 우로스를 파괴해 버리거나 알 수 없는 어딘가에 숨겨놓겠죠.”
“맞다. 우로스가 있었지.”
좀 전까지만 해도 잔뜩 흥분한 아모리스마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현재 군사 전문가들과 장군들이 머리를 싸매며 수립하고 있는 ‘길리온 왕국 해방’ 작전에서 가장 큰 변수가 바로 고디바 왕국이었다.
고디바 왕국이 만약 길리온 왕국과 결탁해 흑토 지대를 침공한다면, 황국의 주요 곡창지대가 망가지는 것은 물론 식량 보급에도 큰 문제가 생긴다.
물론 그것에 대비해 흑토 지대를 빠르게 재정비하고 있긴 하지만 확실한 동맹을 구축하여 뒤를 신경 쓰지 않는 것과 신경 쓰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황녀님은 어떻게 하셨으면 좋겠어요?”
“……난 찝찝해. 정말 아쉽지만 우로스를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카이라의 제안은 거부하는 게 맞다고 봐.”
“트리샤 경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도 마찬가지야. 사실 난 조금 더 과격하게 나갔으면 좋겠어. 아모리스 님처럼 뮬을 아예 통째로 날려 버리는 게 맞을 것 같아.”
트리샤는 뮬을 노려봤다.
“썩은 사과는 통째로 버리는 게 맞아. 사과 하나가 다른 건강한 사과들을 오염시킬 수 있으니까.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해.”
“아모리스 님은……”
“나도 트리샤 의견하고 똑같아. 지금 저 안에 고통받고 있을 무희들만 생각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뮬을 통째로 날려 버렸으면 좋겠어.”
아모리스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중요한 건 네 생각이지. 네가 리더니까.”
사실 라칸은 여기 오기 전부터 생각해 둔 결론이 있었다.
“카이라의 제안은 거절해야죠. 그리고 아모리스 님의 말대로 뮬을 공격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이유는 세 가지나 있다.
첫 번째, 카이라는 너무 변덕이 심하다.
루체트 황국이 조금이라도 빈틈이 보이면 고디바 왕국을 접수해 루체트 황국을 침공할 것이다.
두 번째, 아르펨을 죽이지 말고 안전하게 확보한 뒤 고디바 왕국에 데리고 와줘야 우로스를 준다고 하는데 그게 가능할 것 같은가?
아르펨은 성좌다.
심지어 영혼을 자유롭게 이탈해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능력까지 있는데 그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마지막 세 번째, 아모리스에게 컨트롤할 수 있는 악령들이 무려 수백 마리나 있다.
“아모리스 님이 악령으로 뮬을 흔드시면 제가 우로스만 슬쩍 가져와 볼게요.”
“그건 너무 위험해. 뮬에 악령이 풀린 이후엔 내가 컨트롤할 수 없어. 자칫 잘못하면 네가 악령에게 빙의를 당할 수 있다고.”
“악령들을 한 방향으로 풀면 돼요. 그사이 전 악령들이 없는 반대 방향으로 침투하고 빠져나올게요.”
“……그건 가능하긴 한데 그러면 카이라가 대응하기 쉬워질 거야. 그럼 카이라도 뮬도 살아남겠지.”
“뮬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건 불가능할진 몰라도 혼란을 틈타 우로스를 가져오는 것까진 가능하겠죠. 지금 우로스를 빼앗기면 카이라에게 남은 협상 카드는 더 이상 없으니까요.”
“가능하겠어? 진짜 빨리 우로스를 탈취하고 나와야 해.”
라칸은 눈앞에 뜬 메시지를 쳐다봤다.
[퀘스트가 갱신되었습니다!]
[성물 우로스를 회수하라]
→
[카이라 몰래 우로스를 탈취해라!]
보상: 10,000~50,000포인트
기한: 12시간 내.
난이도가 올라갔다.
하지만 보상 난이도가 그리 높지 않다.
이 정도면 해볼 만하다.
라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능합니다.”
* * *
뮬의 밤은 낮보다 빛나며 동시에 음침해진다.
내일이면 세상이 모두 끝날 것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고 흐트러지는 사람들과.
옆 사람의 절규와 비명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시끄러워지는 음악.
그리고 지독할 만큼이나 달콤한 냄새까지.
카이라는 스스로 생명을 불태우며 뮬을 빛내는 저 사내들이 너무나도 한심했고 동시에 즐거웠다.
저 사내들은 지금 자신의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절규하고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까?
무희들이 뽑아낸 사내들의 정기와 생명력이 카이라의 몸으로 흘러들어 올 때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천상의 음식을 먹는 것처럼 환희에 젖었다.
카이라는 달콤한 디저트를 먹은 후 차로 입가를 헹궈내듯, 와인으로 몰려 들어온 환희의 흔적을 깔끔하게 지워냈다.
감정의 격류에서 벗어나니 머리가 차게 식는다.
카이라는 찬란하게 빛나는 우로스를 쳐다봤다.
“과연 넌 어떻게 나올까?”
똑똑한 물고기는 찌에 걸린 미끼가 위험한 먹잇감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너무나도 맛있는 먹잇감이라 참지 못하고 입에 넣어버리는 것뿐이다.
잘하면 찌에 걸리지 않고 먹잇감만 쏙 빼먹고 낚시꾼을 엿먹일 수 있으니까.
과연 라칸은 이 달콤한 유혹을 거부할까?
아니면 위험하지만 도전할까?
제발 미끼를 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정작 라칸이 미끼를 물어버리면 조금 실망할 것 같다.
넌 과연 어떤 해답을 내놓을까?
그 답이 무엇이 되었든 카이라를 깜짝 놀라게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카이라는 무릎을 꿇은 채 포도 그릇을 받히고 있는 다우드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다우드 넌 어떻게 생각해? 라칸이 내가 던진 미끼를 물까?”
다우드는 주인의 부드러운 손길을 받은 새끼 강아지처럼 몸을 떨며 말했다.
“모, 모르겠습니다.”
“하긴 넌 라칸이 아니지.”
카이라는 포도를 따서 다우드의 입에 넣어주며 말했다.
“그러니 넌 내 강아지가 된 거야.”
그때, 카이라의 감각에 이상한 것이 잡혔다.
성문이 아닌 성벽을 타고 수백 마리의 무언가가 타고 넘어왔다.
인간이라고 하기엔 짐승처럼 난폭하고 짐승이라고 하기엔 살기가 첨예하다.
카이라는 화로를 관리하던 무희를 손가락으로 불렀다.
“지금 북동쪽 성문에서 불청객이 온 모양인데?”
“확인해 보고 있습니다.”
카이라의 눈과 귀는 무희들이다.
무희들은 모두 북동쪽 성벽을 타고 넘어온 그림자들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그녀들의 눈과 귀는 카이라의 눈과 귀가 되어 성벽을 타고 넘어온 재앙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어떻게.”
악령들이다.
악령들은 마치 파도처럼 무희들을 덮쳤다.
무희들은 날카로운 손톱으로 악령들에게 저항해 보지만, 손바닥으로 물길을 막는 것처럼 허무하게 쓸려 나가고 만다.
“꺄아아아아악!”
무희들과 정신을 공유하고 있던 카이라는 비명을 질렀다.
지독하리만치 끔찍한 살기와 분노가 카이라의 뇌를 헤집고 지나갔다.
카이라의 찰랑이는 흑발이 날카로운 손톱에 잘려 나가 바닥에 흩어진다.
“카, 카이라. 괜찮…… 컥!”
카이라의 날카로운 손톱이 다우드의 목을 스쳐 지나갔다.
다우드는 와인병에서 흘러나오는 와인처럼 주르륵 흘러내리는 붉은 피를 애써 막아보려 했다.
“그르륵! 그르르륵!”
살려달라 외쳐보지만 피가 성대를 타고 기도를 넘어간다.
와인잔에 차오르는 와인처럼 다우드의 폐가 피로 채워져 가고, 다우드는 결국 깨진 와인잔처럼 바닥에 피를 쏟아부은 채 쓰러지고 말았다.
그사이 카이라는 정신을 차렸다.
“헉……. 헉……. 어떻게…….”
저 악령들은 분명 카이라가 직접 구도시 ‘뮬’에 봉인해 두었다.
납골 항아리를 깨부순다고 한들 절대 풀려날 수 없게 조치해 둔 악령들인데 어떻게 저들이 풀려나 버린 걸까?
“설마…….”
저것이 라칸의 답인가?
라칸이 악령을 다룰 수 있단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
그렇다면 그 정체를 알 수 없던 여자가 악령을 다룰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혼령술사란 말이 된다.
이건 뮬 안에선 라칸이 그 어떤 수작을 부려도 괜찮을 거라 생각한 오만과 착각에서 비롯된 패착이었다.
이걸 어떻게든 수습해야만 한다.
하지만 어떻게?
뮬이 불타오른다.
악령들에게 몸을 빼앗긴 무희들과 사내들이 서로를 찌르고 살육을 벌이고 있다.
“안 돼……. 안 돼……!”
환희와 환락으로 가득 찼던 뮬이!
카이라만의 낙원이 피로 물들고 불타오르고 있다.
카이라는 무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악령에게 빙의된 연놈들을 뮬에서 쫓아내!”
악령들 자체엔 큰 물리력이 없다.
그저 정신을 좀먹는 것일 뿐.
그렇다면 악령에 빙의된 사람들을 뮬 밖으로 던져 버리면 될 일이다.
악령들은 기껏해 봐야 400마리 안팍.
뮬에는 카이라의 명령에 복종하는 5만 명이 넘는 사내들과 7,000여 명의 무희들이 있다.
악령에 빙의된 인간들을 물리력을 동원해 어떻게든 뮬 밖으로 던져 버린 후 뮬을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그만이다.
“라칸……!”
이게 내 질문에 대한 네 해답이냐?
오냐.
쉽게 나오지 않으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난 전력으로 이 왕국을 집어삼켜 주겠다.
네 알량한 생각이 이 대륙을 어떤 파국으로 치닫게 만들지 넌 감히 예상조차 못 할 것이다.
일단 우선……!
“……어?”
카이라는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바로 옆에 있어야 할 것이 없다.
“우로스. 우로스는 어디로 갔어?!”
하지만 카이라의 질문에 대답을 할 무희가 없었다.
카이라의 주변에 있던 무희들은 모두 죽었기 때문이었다.
자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가 기습한 게 분명했다.
범인이 누구인지 카이라는 단숨에 눈치챘다.
“당장 모든 성문을 걸어 잠가!”
라칸이 뮬에 있다.
아직 라칸이 뮬을 빠져나가지 못했을 터.
라칸을 어떻게든 생포한 후 악령들을 처리하면 될 일이다.
카이라는 복수심과 분노에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 * *
라칸은 은묘의 망토를 쓰고 성문을 향해 달렸다.
악령에 빙의된 사람들은 어떻게든 사람들을 찔러 죽이려고 발버둥을 쳤고, 사람들은 악령에 빙의된 인간들을 밧줄로 묶으려고 했다.
악령이 깃든 인간을 죽이면 악령이 풀려난다는 것을 아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악령은 자신이 빙의한 육체가 제압되면 즉시 혀를 깨물고 자살해 다른 육체로 갈아타 난동을 부렸다.
‘어서 탈출하자.’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눈길을 줄 만큼 여유로운 게 아니다.
이 혼란을 틈타 어서 성문을 벗어나야…….
‘어?’
성문이 닫혀 있다.
심지어 성문에 특이한 마력 파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건 텔레포트를 방해하는 공간 왜곡 마법이 분명했다.
‘벌써 들킨 건가?’
들킨 것은 둘째 치고 저렇게 성문을 걸어 잠그면 악령에 빙의된 인간들을 뮬 밖으로 내쫓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뮬은 악령들에 의해 여기에 있는 모든 인간들과 완전히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건 카이라도 원하지 않을 텐데…….
그때, 라칸의 몸에서 환한 빛기둥이 솟구쳤다.
마력이 움직인 느낌이 없으니 이건 마법이 아닌 성물의 능력이다.
주변을 배회하던 무희들이 빛기둥을 쳐다보며 오싹하게 웃었다.
“거기구나.”
“젠장.”
카이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