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225화 (225/251)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 225화

카이라(4)

악령들과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뒤섞여 흘러나오기 시작한 지 15분이 넘었을 무렵.

레인로버와 트리샤는 라칸이 나오기로 한 북쪽 성문에서 차분히 기다렸다.

“……악령들이 저렇게 날뛰고 있는데 사람이 단 하나도 안 나오네요.”

“카이라가 뮬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통제하고 있다는 뜻이겠죠.”

뮬에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얼마인지 알 수 없지만, 최소 4만 명은 넘을 거다.

저 많은 숫자를 통제할 수 있다는 건 저 성벽 너머는 혼란 속 질서가 유지되고 있다는 뜻이다.

“라칸이 부디 잘 나와야 할 텐데.”

“어? 저기 좀 보세요.”

뮬의 성문이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성문이 왜 닫히고 있는 거지?”

“설마 라칸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는 걸까요?”

“아모리스 님께 통신을 넣어봐요. 그쪽도 문이 닫히고 있냐고.”

트리샤는 수정구를 사용해 아모리스에게 통신을 넣었다.

“아모리스 님 북쪽 성문이 닫히고 있어요. 남쪽 성문은 어때요?”

아모리스의 답변은 수정구의 통달거리 문제 때문에 약 30초가 지난 이후에 돌아왔다.

-지지직! 여기도 마찬가지야. 녀석들이 미쳤는지 문을 죄다 걸어 잠그고 있어.

남쪽 문이 잠겼다면 동쪽이나 서쪽 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레인로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눈썹을 찌푸렸다.

“악령들을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라도 있는 걸까요?”

-지지지직! 아니. 카이라는 악령을 통제할 방법이 없는 것 같아. 지금도 악령들이 단 하나도 죽지 않고 날뛰고 있는걸?

이번 작전을 계획했을 때, 뮬에 악령을 풀면 카이라는 악령에 빙의된 인간들을 모두 제압한 뒤 뮬 밖으로 던져 버리는 식으로 진행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악령들이 활개칠 수 있도록 문을 걸어 잠근다면 뮬은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 멸망하고 말 것이다.

트리샤는 눈썹을 찌푸렸다.

“정말 라칸 하나 잡겠다고 문을 다 걸어 잠근 걸까요?”

“라칸이 설령 들켰다고 하더라도, 쥐 하나 잡겠다고 초가삼간 다 태우는 짓거리를 하지 않을 텐데.”

뮬 안쪽 상황이 어떤지 아무것도 알 수 없어 머리가 복잡하다.

그때, 뮬에서 새하얀 빛줄기 하나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

“……뭔가 일이 틀어져도 단단히 틀어진 것 같네요.”

트리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칸을 구해 오겠습니다.”

라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지만, 지금은 물불을 따질 때가 아니다.

잘못하면 라칸이 죽는다.

“절대로 숨을 들이켜선 안 되는 거 아시죠?”

“네. 알고 있습니다.”

“전 바로 이탈 준비를 해놓을게요.”

“네.”

트리샤는 고개를 작게 끄덕인 멸망하는 성을 향해 박차고 달려갔다.

* * *

무희들은 라칸을 향해 여우처럼 날렵하게 달려들었다.

무희들의 스펙은 레인로버에게 질릴 정도로 많이 들어서 알고 있다.

최소 3성 기사 최대 5성 기사 이하의 육체 내구도, 하지만 오러를 쓸 수 없어 순발력이나 힘은 3성 기사 정도.

주 무기인 손톱은 최대 10m까지 늘릴 수 있으며 강도와 내구도는 흑철과 비견될 정도다.

현시점에서 라칸이 마법만으로 사용한다고 하면 무희 1마리 정도는 어떻게든 대응이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처럼 무희 13마리가 동시에 달려드는 경우엔 마법만으론 절대 대응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라칸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차분하지만 빠르게 마탄총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콰아앙-! 콰아앙-!

천지를 뒤흔드는 두 번의 총성과 함께 라칸의 마탄총에서 푸른색 빛줄기가 터져 나왔다.

무희들은 볼링공에 맞은 볼링핀처럼 이리저리 튕기며 날아가더니 잔해에 파묻혔다.

일어나려 몸부림을 치지만 사지가 이미 잘려 나간 시점에서 무희들이 할 수 있는 건 죽음을 기다리는 일밖에 없었다.

그나마 멀쩡한 무희의 몸을 빌린 카이라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건 뭐야? 네 비밀 병기야?”

“내 야심작이지. 샷건이라고 들어봤을지 모르겠네?”

라칸은 카이라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어때 또 덤벼볼래?”

정확도와 사거리는 개나 줘버렸지만, 근접 거리에서의 파괴력 하나만큼은 이 물건을 따라올 놈이 없다.

아처가 들고 있는 괴물 저격총보다 파괴력은 3배 이상 강하니 웬만한 4성 기사도 이거 한 방이면 뼈도 못추린다.

카이라는 재밌다는 듯이 큭큭 웃었다.

“위험한 장난감 하나 갖고 있다고 해서 으스대긴. 보니까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별 볼 일 없어 보이는데?”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난 네 세뇌에 먹히지 않아.”

“뭐, 네 말이 틀리진 않아. 하지만 네가 도구를 사용하는 것처럼 나도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지성인이거든.”

“……뭐?”

라칸은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마력 유동에 재빨리 앞으로 몸을 던졌다.

콰아아앙-!

그리고 방금 전까지 라칸이 서 있었던 자리가 갑자기 폭발했다.

익스플로전 마법이었다.

라칸의 배리어 아티팩트가 작동하며 날아온 파편과 열기를 모조리 막아줬지만, 반발력 때문에 라칸은 땅을 여러 번 구르고 말았다.

라칸은 뒤를 쳐다봤다.

무너진 잔해 위에 완드를 들고 있는 몇몇 사내들이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성문을 걸어 잠그는 건 그렇다치더라도 도둑놈 하나 잡겠다고 마법사들까지 부르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나?”

지금 시점에서 마법사는 악령들에 대응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나 다름이 없다.

그런 마법사들을 하나도 아니고 무려 4명이나 데려오다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절로 나왔다.

“라칸. 내가 이성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년이었으면, 세상에 존재하는 남자들을 모두 죽이겠다는 꿈을 꿨을까?”

“하긴. 내가 널 너무 과대평가했군.”

“과소평가한 거지.”

카이라는 손을 뻗었다.

그러자 마법사들은 준비한 마법을 바로 발동했다.

중력 마법이다.

쿠궁-!

타겟팅 마법이라 라칸이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었다.

라칸은 순간적으로 폐가 쪼그라든 것 같은 기분과 함께 머리가 핑 돌며 무릎을 꿇었다.

동시에 라칸의 팔다리를 묶는 바인딩 마법까지 걸려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일단 그 위험한 장난감부터 뺏어볼까?”

어느새 새로 보충된 무희들이 라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때, 라칸의 몸에 걸린 중력 마법과 바인딩 마법이 동시에 풀리며 라칸의 총구가 무희들을 향했다.

“무슨……!”

쾅! 쾅!

라칸에게 달려들었던 무희들은 라칸의 샷건 두 방에 모조리 쓸려 나갔다.

“너도 날 과소평가한 모양인데?”

쾅!

라칸은 카이라를 향해 샷건을 발사했다.

무희는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라칸은 여타 다른 전투 마법사들처럼 빠르고 정확하며 파괴적인 마법은 사용할 줄 모른다.

하지만 마법 분석과 파훼에 한해선 일가견이 있다.

라칸은 마법사들의 위치와 마법사들이 준비하고 있는 마법진을 눈으로 볼 수만 있다면, 제아무리 어려운 보안 술식으로 떡칠된 마법이라고 할지라도 10초면 분석하고 간섭이 가능하다.

이것이 티그리스가 라칸에게 조언했던 선택과 집중의 결과물이다.

라칸은 샷건 카트리지를 교환하며 빠르게 방어 마법을 준비하고 있는 마법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적당한 거리에서 방아쇠를 당겼다.

쾅! 쾅! 쾅! 쾅!

샷건이 불을 뿜으며 마법사들이 서 있던 자리가 마치 폭탄 세례라도 당한 것처럼 깊은 구덩이를 남기고 사라졌다.

라칸은 뜨겁게 달궈진 샷건을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파괴력은 좋은데 내열성이 좋지 않아 10발 정도 연달아 쏘면 총이 망가져 쓸 수 없다.

그렇다면 다른 샷건을 꺼내 들면 될 일.

라칸은 새로운 샷건으로 교환한 뒤 한숨을 돌렸다.

한고비를 넘겼지만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보이지 않는다.

카이라가 무슨 성물을 사용했는지 모르겠지만, 무대 위 주인공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중이다.

주변이 엉망진창이라 몸을 숨길 마땅한 장소가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성문을 통째로 넘는 방법밖에 없다.

라칸은 자신의 몸에 플라이 마법을 걸었다.

카이라나 다른 무희들이 북문까지 도달하기 전에 성문을 넘어 트리샤와 레인로버 일행과 합류해야 했다.

푸슉!

그러나 허벅지에 불에 덴 듯한 고통과 함께 라칸은 바닥에 추락했다.

허벅지를 보니 날카로운 검은색 바늘 같은 것 하나가 박혀 있었다.

라칸은 간신히 비명을 이를 악물어 씹어냈지만, 추가로 날아온 날붙이 세 개가 라칸의 양어깨와 남은 왼쪽 허벅지에 꽂히자 비명을 참을 수 없었다.

“끄아아아악!”

라칸은 마치 벌레 박제가 된 것처럼 벽에 꽂혀 매달렸다.

라칸은 검은 손톱의 근원지를 눈으로 좇았다.

그곳엔 카이라가 서 있었다.

“네가 설마 대마법전에 일가견이 있을 거라곤 정말 예상치 못했어. 내 정보에 의하면 넌 그냥 총기 개발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거든. 정말 대단해.”

카이라는 천천히 라칸에게 다가왔다.

“그렇다고 해서 이 뮬에서 사지 멀쩡하게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좀 아니지.”

카이라는 손톱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라칸은 처음 겪어보는 끔찍한 고통에 몸이 덜덜 떨렸고, 샷건을 놓치고 말았다.

[명경지수의 정신이 발동합니다.]

하지만 머리는 신기하게도 차가워졌다.

어떻게든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만 했다.

“넌 내가 평생 가지고 놀 거야. 네가 왜 내 세뇌에 걸리지 않았는지 아주 천천히 조사하고 실험할 거야.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너는 아마 상상조차 못 하겠지.”

[명경지수의 정신이 발동합니다.]

라칸의 손가락이 소매 사이로 파고들었다.

“걱정 마. 곧 알게 될 테니까.”

[명경지수의 정신이 발동합니다.]

카이라의 날카로운 손톱들이 라칸의 몸을 옥죄어왔다.

“자, 가자.”

“꺼져.”

라칸의 소매 속에 숨겨둔 작은 완드에서 마법이 발현되었다.

파이어볼 마법이었다.

파이어볼이 카이라의 얼굴에 정통으로 박혔다.

“제법 화끈한데?”

그러나 카이라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웃었다.

피부가 약간 그을렸을 뿐 머리칼 하나 타지 않았다.

역시 마법만으론 화력이 부족하다.

하지만 시선을 돌리기엔 이것만 한 것이 없다.

“그럼 이것도 그냥 화끈한지 보자.”

카이라는 뒤에서 들려온 여인의 목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카이라는 뒤를 돌아볼 새도 없이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카이라의 목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며 몸이 스러졌다.

트리샤였다.

트리샤는 힘을 잃고 축 늘어진 라칸에게 달려갔다.

“라칸!”

“트리샤 경 정말 멋졌어요……. 마치 히어로를 보는 것 같은…….”

라칸은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아무 말이나 주절거렸다.

라칸의 상태가 생각보다 좋지 않다.

그건 트리샤도 마찬가지였다.

트리샤는 머리가 아찔해지는 달콤한 냄새에 정신을 금방이라도 잃을 것 같았다.

검을 휘두를 때 잠깐 숨을 들이쉬었더니 이 모양이다.

트리샤는 대충 라칸의 몸에 박힌 손톱을 짧게 쳐낸 후 업었다.

지금 이 손톱들을 빼내면 라칸은 과다출혈로 죽는다.

“아프더라도 조금만 참아. 지금 뮬을 나갈 거니까.”

“……그래야죠. 그런데…… 너무 졸립네요.”

“라칸! 정신 차려! 기절하면……!”

라칸은 눈앞이 아득해지며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 * *

카이라가 눈을 떴을 땐, 한 사내가 커다란 마테체로 카이라의 배를 찌르고 있었다.

“죽어어어어어어!”

사내의 입에서 여성의 비명과 함께 검은 연기가 카이라의 얼굴을 뒤덮었다.

그 검은 연기엔 피 썩은 냄새로 가득했다.

카이라는 정신을 다시 다른 무희에게로 옮겼다.

그러나 무희의 몸은 기름이 부어진 것처럼 활활 타고 있었다.

끔찍한 고통에 카이라는 정신을 잃을 뻔했지만, 간신히 정신을 다른 무희에게로 옮기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무희는 이미 악령에게 몸이 지배되어 있었다.

끔찍한 분노와 살기 그리고 고통의 기억이 카이라의 정신을 헤집었다.

카이라는 정신을 다른 무희에게로 옮겼다.

하지만 그 무희의 양 허벅지가 잘려 있는 상태였다.

양다리 없이 뮬에서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없다.

카이라는 다른 무희에게 정신을 옮겼다.

그러나 그 무희도 정상이 아니었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얼마나 많은 무희에게 정신을 옮겼을까.

카이라는 정신을 차려보니 좀 전에 두 다리가 잘려 기절했던 무희에게로 다시 되돌아와 있었다.

카이라는 주변을 훑었다.

모든 것이 불타고 있다.

도적 떼가 뮬을 급습해 모든 것을 불태웠던 그때처럼 화마가 뮬을 집어삼켜 잿더미로 만들고 있었다.

“아…….”

나의 최후는 왜 이러한가?

남자들은 카이라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고 괴롭혔다.

카이라도 그때 겪었던 고통을 되돌려 주고 싶었을 뿐인데.

내가 겪은 고통의 십분의 일이라도 사내들이 겪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이제 꿈에 한 발자국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가니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기절하고 정신을 잃길 몇 번이나 했을까?

카이라의 주변에 무희들로 가득했다.

그녀들의 입과 눈엔 검은 연기와 함께 끈적한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카이라는 땅을 기어 도망쳤다.

하지만 의미 없는 몸부림일 뿐.

그녀들에게 벗어날 수 없었다.

“오지 마…….”

저벅 저벅.

“하지 마…….”

그녀들의 입이 열렸다.

“너는 내가 멈추라고 했을 때 멈췄니?”

“너는 내가 하지 말라고 했을 때 안 했니?”

카이라는 허우적거리던 팔을 멈췄다.

도망칠 곳이 없다.

숨을 곳도 없다.

카이라는 하늘을 보고 누웠다.

자신을 둘러싼 악령들 사이로 당장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아름다운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닿지 못할 거면 반짝이지도 말든가.”

역시 별은 인간을 홀린다.

카이라는 눈을 감았고, 원한의 폭포가 카이라에게 쏟아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