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 236화
우로스(8)
라칸은 렐리우스와 티그리스와의 전투를 넋 놓고 쳐다봤다.
이젠 소드 마스터 간의 싸움이 아닌 드래곤과 검을 든 용사와의 싸움으로 변모해 있었다.
“드, 드래곤이다!”
“용아병이 드래곤이 되었어!”
병사들은 렐리우스가 드래곤으로 변하자 공포에 젖어 패닉 상태가 되었다.
“저건 드래곤이 아니다. 용아병이야!”
라칸이 공포에 젖은 병사들을 다독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몇몇 병사들은 병장기를 던지고 도망치는 녀석도 있었고, 엎드려 룩스 여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녀석도 있었다.
그나마 수인들과 엘프 쪽은 나았다.
수인들은 바야가가 정신 차리라며 크게 호통을 치자 나아지는 듯했고, 엘프 쪽은 세계수의 가호를 믿는지 아예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의외로 드워프들도 멀쩡하게 서 있었는데…….
‘선 채로 기절한 거였네.’
라칸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드래곤을 봤어야 저게 드래곤이 아닌지 알지.’
사실 렐리우스는 드래곤과 비슷하게 생기긴 했다.
하지만 진짜 드래곤에 비해 굉장히 덩치가 작다.
진짜 드래곤과 비교하면 거의 피규어나 다름이 없는 수준.
그리고 드래곤에게서 우러나오는 오오라 자체가 다르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싶던 와중 방벽 코앞에서 굉음이 터졌다.
쿵-!
티그리스였다.
티그리스는 렐리우스의 앞발을 막다가 방벽 코앞까지 날아온 것이었다.
티그리스는 넘어지진 않고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돌아 안정적으로 안착했다.
겉으로 봐선 크게 다친 것 같지 않아 보였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라칸은 티그리스에게 최상급 회복 포션을 던져 주려 했다.
“티그리……!”
티그리스는 라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땅을 박차고 렐리우스에게 날아갔다.
라칸의 눈으론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속도였다.
라칸이 볼 수 있었던 것은 티그리스의 검과 렐리우스의 앞발이 부딪히자 렐리우스가 허공을 나는 모습이었다.
“……어?”
아무리 드래곤보다 작다고 한들 그래도 최소 5m는 넘는다.
저 거대한 몸이 볼링핀처럼 튕겨 나갈 수 있는 거였나?
라칸의 옆에 어느새 다가온 네메시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와우. 티그리스 교관님께서 저렇게 화가 난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네.”
“화가 나셨다고요?”
“딱 봐도 한 대 맞으시니까 진심을 다해서 갈긴 거잖아. 아니야?”
라칸은 다시 전장을 쳐다봤다.
뭔가 허공에서 쾅쾅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고 전장이 난장판이 되긴 하지만 라칸의 눈으론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
“……그런가요?”
“뭐, 아님 말고. 그것보다 긴급상황이야.”
“긴급 상황이요?”
네메시스는 서쪽을 가리켰다.
“현재 몬스터들과 와이번들이 몰래 서쪽으로 향하고 있어. 여기서 렐리우스와 티그리스가 싸우는 사이 서쪽을 칠 모양이야.”
그러고 보니 지켜보고 있던 몬스터들이 준 것 같았다.
단순히 괜히 싸움에 휘말렸다가 죽기 싫어서 뒤로 빠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대략적으로 2~3시간 뒤에 몬스터들이 서문에 도착할 거고, 와이번은 날아가면 20분 정도 후에 도착하겠지.”
“설마 시그마가 움직인 건가요?”
“아마 그렇겠지. 레인로버 황녀님과 트리샤 경은 서문으로 이동했어. 너도 수성용 아티팩트들을 챙겨서 빨리 설치해야 할 것 같아.”
라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려면 병사들이 조금 도와줘야 하는데……. 어?”
병사들은 어느새 일어나 홀린 듯이 전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패닉 상태에 빠져 몸을 덜덜 떨었던 병사들이 주섬주섬 다시 병장기를 붙잡고 일어나기까지 했다.
“드래곤을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고 있는 거…… 맞지?”
“설마 우리 이거 이길 수 있는 거야?”
티그리스와 렐리우스가 다시 호각으로 붙기 시작하자 병사들은 다시 용기를 얻었는지 어느새 정신을 차린 상태였다.
한 사람에 의해 전장의 분위기가 냉탕과 온탕을 오가다니.
이래서 전쟁은 영웅을 만드는 법인가보다.
네메시스는 라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럼 어서 옮기자. 이제 격전지는 서문이야.”
“네. 알겠습니다.”
라칸은 전장을 슬쩍 쳐다본 후 수성용 아티팩트들을 손보기 시작했다.
* * *
렐리우스는 티그리스를 향해 짐승처럼 앞발을 휘두르고 꼬리를 내리쳤다.
그러나 티그리스는 전혀 밀려나지 않고 차분하게 공격을 받아내더니, 간간이 렐리우스의 몸을 허공으로 날려버리기까지 했다.
렐리우스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분노했다.
“감히 나를 상대로 힘을 감추고 있었던 거냐!!!”
티그리스는 침착하게 공격을 막아냈다.
회귀 전, 티그리스가 렐리우스를 죽였을 땐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싸우지 않았다.
놈이 마스터 클래스인 것은 맞긴 하지만 오만하고 주제를 몰랐기에 티그리스는 단 5분 만에 놈의 목을 잘라낼 수 있었다.
그래서 렐리우스가 드래곤의 형상으로 변할 수 있는지도 몰랐고, 이렇게까지 강해질 수 있는지도 몰랐다.
‘위험하지만 할 만하다.’
진짜 그란티스는 렐리우스처럼 빠르게 움직이진 못하지만, 용언 마법으로 티그리스를 죽이려 했다.
지금의 렐리우스처럼 직접 몸을 움직여 사냥하지 않고.
놈이 용언 마법까지 사용이 가능했다면 굉장히 위험했겠지만, 단순히 꼬리와 앞발을 휘두르는 정도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렐리우스가 티그리스의 검을 강하게 잡았다.
티그리스가 검을 빼내려 했지만, 렐리우스는 죽을힘을 다해 놓아주지 않았다.
렐리우스는 주둥이를 하마처럼 쩍 벌렸다.
주변에 가득했던 마나들이 입에 모이기 시작하더니 땅과 공기가 생기를 잃는다.
심지어 티그리스의 체내에 있던 마나까지 빼앗아가기 시작했다.
티그리스는 이 현상을 굉장히 잘 알고 있었다.
드래곤이 브레스를 사용하기 직전에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렐리우스의 입에 새하얀 빛무리가 모여들었다.
드래곤의 브레스는 기본적으로 1서클의 마법인 마탄과 원리가 비슷하다.
브레스는 순수한 마나 에너지를 모아 쏘아내는 것이다.
차이점이라면 놈의 입에 모이고 압축되는 마나의 양이 말도 안 되게 많다는 것.
놈의 브레스에 정면으로 맞는 순간 뼈도 남지 않고 죄다 분해되고 말 것이다.
‘이건 좀 위험하군.’
렐리우스는 이윽고 티그리스를 향해 브레스를 쏘았다.
렐리우스가 쏘아낸 브레스는 불꽃이 아닌 레이저와 같았다.
렐리우스의 브레스가 티그리스의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용아병들과 몬스터를 휩쓸었다.
녀석들은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그럼에도 몬스터들과 용아병들은 렐리우스를 향해 엎드렸다.
마치 신을 영접한 신도처럼.
공포에 사로잡힌 죄수처럼.
렐리우스의 비늘 앞에 경배했다.
“그래.”
지금까지 렐리우스가 빚어 만든 비늘은 가짜다.
그저 단단하기만 하면 비늘인가?
모양새가 비슷하면 비늘인가?
아니다.
드래곤의 비늘이라고 함은 경배받을 때 완성이 된다.
공포에 사로잡힌 멍청한 피조물들을 지배하고 군림하는 지배자의 몸에 돋아난 비늘이야말로 진정한 드래곤의 비늘이다.
렐리우스가 염원한 것은 드래곤의 비늘이 아닌 드래곤 그 자체.
렐리우스는 자신의 심상이 성장함과 동시에 몸에서 8번째 고리가 생겨난 것을 느꼈다.
“난 그란티스다.”
“그렇군. 그렇다면 이게 진짜 그란티스의 비늘이겠어.”
렐리우스는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티그리스였다.
분명히 브레스로 녹여 없앴을 텐데.
어떻게?
렐리우스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을 쳐다봤다.
그건 검이 아니라 부러진 검 조각이었다.
티그리스의 부러진 샐러맨더의 검에서 진홍빛 화염이 뿜어져 나오더니 새로운 검신이 만들어졌다.
“젠……!”
렐리우스가 피하기도 전에 티그리스의 검이 렐리우스의 거대한 날개를 베었다.
아니, 부쉈다.
렐리우스의 날개가 육중한 굉음과 함께 떨어졌다.
렐리우스는 반사적으로 꼬리를 휘둘렀다.
티그리스는 피하지 않고 검으로 맞받아쳤다.
티그리스의 허리보다 두꺼운 꼬리가 부딪혔지만, 티그리스는 날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꼬리를 파고들었다.
렐리우스는 너무 놀라 뒤로 물러났다.
티그리스의 검이 비늘 사이에 꼈지만 상관이 없었다.
티그리스는 망설임 없이 검을 부러뜨린 뒤 새로운 검신을 만들었다.
“어떻게?! 넌 브레스를 정통으로 맞았을 텐데?”
하지만 렐리우스는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쿵!
렐리우스의 꼬리가 떨어져 나갔다.
렐리우스의 뇌가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았다.
이보다 완벽한 비늘은 없을 텐데.
아니, 이보다 더 나은 나는 없을 텐데.
어떻게 티그리스가 자신의 꼬리를 베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좀 전에도 말했잖나? 너와 나는 다르다고.”
티그리스가 렐리우스의 비늘을 부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바로 벨프 가문의 용살을 연구했었기 때문이었다.
벨프 가문의 검술, 용살에 대한 기록을 보면 모든 검술사들이 동일하게 말하는 게 있다.
용살은 검이 아닌 둔기를 위한 검인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벨프 가문의 가주와 검을 나눌 때면, 언제나 검이 심하게 금이 가거나 부서져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티그리스는 그게 용살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 가주들의 실수라고 생각했다.
검이란 자고로 무언가를 베고 자르고 찌르기 위한 날카로운 것.
차라리 뭔가를 부술 것이었다면, 검이 아니라 둔기를 사용하는 것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서리용 프리하를 베었던 프리하르덴 류를 떠올린 티그리스는 자신의 생각을 고쳤다.
프리하르덴 류의 정확한 원리는 비늘을 급속 냉각시켜 약화시킨 후에 부수는 것이다.
실제로 티그리스가 아우로므의 목을 베어냈을 때도, 프리하르덴의 여름의 능력을 사용해 급속 냉각된 아우로므의 목을 결에 맞게 부순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벨프 가문이 들고 있는 용혈검은 냉각을 시키는 종류의 검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벨프 가문의 가주는 드래곤의 비늘을 부술 수 있었던 걸까?
‘이제 이해가 간다.’
용살은 오러를 강제로 비늘에 집어넣어 폭발시키는 것이 기본 골자다.
벨프 가문에서 내려오는 용혈검의 능력 또한 검이 피부에 닿기만 해도 피를 폭발시키는 능력이 있다.
벨프 가문의 가주도 이 용살검에 영감을 받아 비늘을 가르는 것이 아닌 내부에 오러를 집어넣어 폭발을 시키는 방향으로 접근했을 것이다.
‘말도 안 되게 어려운 기술이다.’
자신의 검에 오러를 집어넣는 것도 못 하는 기사들이 태반이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맞닿은 드래곤의 비늘에 오러를 침투시켜 폭발시킨다니.
티그리스가 아니었다면 재현조차 못 했을 검술이다.
물론 지금은 원리만 이해했을 뿐 용살을 완성 시킨 것이 아니다.
티그리스의 심상은 가르고 싶은 것을 가르는 것.
용살처럼 오러를 주입해 폭발시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니 용살을 처음 만들어낸 초대 가주와 똑같은 용살을 구현할 순 없다.
하지만 프리하르덴 류를 변형시킨 것처럼 티그리스의 식대로 변형시킬 순 있다.
“감히 내 비늘을!”
렐리우스가 극도로 분노하여 티그리스를 향해 날아들었다.
티그리스는 그런 렐리우스의 앞발을 향해 검을 뻗었다.
티그리스의 오러가 렐리우스의 비늘을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마치 나무가 대지를 뚫고 뿌리를 내리는 것처럼.
오러가 렐리우스의 비늘을 타고 들어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쩌적-!
렐리우스의 손이 결을 타고 갈라졌다.
촤아아아아악!
렐리우스의 손에서 붉은 선혈이 쏟아져 나왔다.
“으아아아아악!”
렐리우스는 끔찍한 고통에 손을 부여잡았다.
티그리스는 렐리우스의 허리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렐리우스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겁에 질린 짐승처럼 티그리스를 보며 떨었다.
“어떻게……. 어떻게…….”
렐리우스의 비늘이 갑자기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마치 병든 나무처럼 겉비늘부터 박피된다.
티그리스는 왜 렐리우스의 비늘이 사라지는지 이해했다.
렐리우스의 오러가 부족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렐리우스가 티그리스에게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렐리우스에게 있어서 드래곤이라고 함은 고고하고 완벽한 존재다.
그런데 티그리스가 렐리우스의 비늘을 깨부숨으로써 드래곤의 비늘이 완벽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결국 렐리우스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심상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돼!”
렐리우스는 벗겨지는 비늘을 잡아 몸에 덧댔다.
하지만 비늘들은 한 줌의 마나가 되어 사라질 뿐이었다.
렐리우스의 몸이 점점 작아진다.
주둥이도 사라지고 꼬리도 사라진다.
“아니야! 나는 완벽한 존재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이미 렐리우스의 심상이 무너진 이상 되돌릴 수 없다.
렐리우스는 보잘것없는 용아병으로 다시 돌아갔다.
렐리우스는 검을 든 티그리스를 두려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이건……. 이건 말도 안 돼. 내가 인간 따위에게 지다니…….”
티그리스는 렐리우스를 어떻게 처분할지 고민했다.
당장에 죽이면 그란티스가 날아올 것 같고, 그렇다고 그냥 보내주자니 않자니 뒤가 구리다.
티그리스는 그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주변이 너무 고요하다.
용아병이나 와이번, 몬스터들이 단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렐리우스의 브레스 맞아 많이 죽었다고 한들 렐리우스가 굴욕적으로 티그리스의 앞에서 떨고 있는데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 것은 의아하다.
그때, 티그리스의 그림자를 타고 네메시스가 나타났다.
“무슨 일이지?”
“시그마가 몬스터들을 대동하고 서문으로 진격했습니다. 현재 정문에 있던 병력들도 모두 서문 쪽으로 이동했고요.”
티그리스는 렐리우스를 쳐다봤다.
렐리우스는 웃었다.
“하, 하하하! 네놈이 정신을 판 사이 시그마에게 말해뒀지. 서문을 공략하라고!”
티그리스는 렐리우스의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별 상관은 없었다.
중요한 건 서문이 공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티그리스는 천공의 사슬을 꺼내 렐리우스의 몸을 감았다.
거인들의 성물이자 드래곤의 날개를 속박할 수 있는 위대한 성물인 천공의 사슬을 보자 렐리우스는 기겁했다.
“이건……. 어떻게 네놈이…… 설마 아우로므 님을 죽인 것이냐?”
티그리스는 대답하지 않고 놈의 관자놀이를 검면으로 쳐 기절시켰다.
티그리스는 렐리우스를 네메시스에게 건넸다.
“나도 서문으로 가겠다. 시그마는 부상을 입었고 렐리우스도 없으니 동문은 안전할 거다.”
“이 녀석은 어떻게 할까요?”
“천공의 사슬에 묶여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다. 데리고 서문에 걸어두어라.”
“예? 서문에 걸어두라고요?”
“그래. 와이번이나 몬스터는 몰라도 용아병들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을 거다.”
티그리스는 하늘을 쳐다봤다.
어느새 밤이 깊어 달이 떴다.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았지만 체감상 사흘은 지난 것만 같다.
“이젠 버티기만 하면 되는 싸움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