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 247화
악몽(2)
검은 연기는 안개로 변하여 적아를 구분 짓지 않고 포악스럽게 집어삼켰다.
“이건 뭐지……?”
성기사들과 사제들은 마시면 죽는 독이라 생각해 코와 입을 막았지만 별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검은 안개 속에서 걸어 나온 자신의 악몽과 마주하자 모두 기겁했다.
“어, 어떻게…….”
“네가 여기에 어떻게 있는 거야? 넌 분명 내가 죽였을 텐데?”
“으아아악! 다가오지 마! 다가오지 마!”
악몽이 성기사들과 사제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어떤 것들은 심장을 찌르고 어떤 것들은 마법을 사용해 성기사들과 사제들을 불태운다.
“여신이시여!”
사제들과 성기사들이 혼신을 다해 저항하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악몽이 괜히 악몽이겠는가?
악몽 속에서 자신은 한없이 작아지고 무력해진다.
대부분의 성기사들과 사제들은 악몽에 저항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와 동시에 악몽들은 사라졌다.
하지만 성기사들과 사제들은 성수의 축복을 받은 괴물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성기사들과 사제들이 다시 재생해 일어나자 또다시 자신의 악몽과 마주했다.
“그, 그만해! 그마아아안!”
“여기서 날 내보내 줘! 무서워!”
“살려줘어어어!”
악몽에 타격을 받는 것은 원혼들도 똑같았다.
성기사나 사제의 몸에 빙의한 원혼들은 자신을 고문하고 실험했던 키메라 연구원들과 사제들을 마주해야만 했다.
원혼들은 어쩔 수 없이 성기사들과 사제들의 몸에서 튀어나왔다.
아모리스와 일행은 일단 뒤로 물러났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구나.”
아모리스는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러봤지만, 이렇게 난장판이었던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성기사들과 사제들은 죽지 않아 검은 연기를 계속 내뿜고, 그 검은 연기는 악몽의 안개가 되어 영역을 더 넓혀만 갔다.
더 큰 문제는 저 검은 안개가 점점 영역을 넓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저거 어떻게 해야 할까?”
“한시라도 빨리 죽여야죠.”
샤를로트는 포션으로 체력을 회복시키며 말했다.
“그냥 자멸하게 놔두면 되지 않아?”
“아뇨.”
라칸은 티그리스가 들어간 성전 지하를 가리켰다.
“검은 연기들이 지금 티그리스 님이 들어가신 쪽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어요.”
“……설마.”
“네. 자칫 잘못하면 저희는 티그리스 님의 악몽을 상대해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이죠.”
티그리스가 꾸는 악몽이라니.
말만 들어도 무섭다.
“그럼 나도 절대 들이마셔선 안 되겠네.”
아모리스가 저 검은 연기를 들이마신다면 뭐가 나올까?
최악은 마왕일 것이고 아무리 못해도 마왕의 휘하에 있던 대장군들이 등장할 것이다.
그러면 이 도시가 문제가 아니라 대륙의 멸망을 걱정해야 하는 수준으로 번지고 말 것이다.
“그럼 누군가는 저 안개를 뚫고 들어가야 한다는 말인데…….”
네메시스가 손을 들었다.
“일단 전 들어갈게요. 이미 저 연기를 들이마셨으니 악몽이 계속 튀어나올 거예요.”
뒤이어 라칸도 손을 들었다.
“저도 들어갈게요. 제가 꾸는 악몽이라고 해봤자, 하찮을 게 뻔하니까요.”
연달아 샤를로트와 트리샤도 손을 들었다.
“저도 필요할 겁니다.”
“저도요.”
결국 아모리스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 저 검은 연기 속으로 들어가기로 결정되었다.
아모리스는 빗자루를 꺼냈다.
“그러면 나는 위에서 상황을 좀 지켜보다가 매튜 왕자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려줄게.”
“좋아요.”
라칸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마나 포션을 꺼내 마셨다.
마력이 화끈하게 차오르는 기분과 함께 여신의 방패를 사용했다.
“그럼 출발하죠.”
* * *
티그리스는 쏟아지는 검은 연기를 쳐다봤다.
잔해가 여기저기서 떨어져 동굴 입구를 가로막았다.
“으아아아아아!”
급기야 성전 위에 있던 사람들도 추락했다.
더 넓어진 구멍으로 검은 안개가 폭포수처럼 흘러들어 왔다.
티그리스는 빠르게 생각했다.
‘천장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르펨과 오슬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을 게 분명했으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하나.
티그리스는 검강을 날렸다.
방향은 성배 방향이었고 오슬로는 하늘을 날아 검강의 방향을 간신히 뒤틀었다.
그러나 양팔이 부서졌다.
“네 말대로 난 저게 무엇인지 모른다.”
티그리스의 황금 사슬이 무방비 상태에 놓인 아르펨을 향해 날아갔다.
아르펨은 좀 전에 티그리스의 공격을 막았던 성물 ‘피에타의 반지’로 사슬을 튕겨냈다.
그 때문일까?
아르펨은 티그리스가 자신의 뒤로 이동한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티그리스는 아르펨의 양손을 가차 없이 잘랐다.
“으아아아아악!”
헨게나의 불꽃이 아르펨의 양손을 지져 버리고, 티그리스의 심상의 영향으로 재생되지 않는다.
아르펨은 영혼을 불사르는 듯한 끔찍한 고통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심장으로 날아온 황금빛 말뚝을 피할 수 없었다.
“컥!”
아르펨은 자신의 영혼이 꿰인 듯한 느낌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실제로 아르펨이 한번 쓰고 버릴 생각으로 만들었던 연약한 육체에 영혼이 구속되어 버렸다.
차륵-
아르펨은 심장과 연결된 황금빛 사슬을 잡아당기려 했으나, 양팔이 잘려 빼는 것도 불가능했다.
‘천공의 사슬에 이런 능력이 있었을 줄이야.’
레비스의 영혼이 로타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은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오슬로가 다시 덤벼든다.
티그리스는 오슬로의 양팔과 다리를 자른 후 구석에 내던졌다.
오슬로는 죽어야 부활할 수 있다.
저렇게 양팔과 다리를 잘라놓은 뒤 던져놓으면 적어도 몇 분은 버틸 수 있으리라.
마지막으로 티그리스는 검강을 날렸다.
검강은 먹잇감을 노리는 매처럼 날아가 성배를 잘라냈다.
성배가 먼지로 변하며 사라졌다.
‘여기까진 내 구상대로다.’
검은 안개가 티그리스의 목까지 차올랐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하늘을 무너뜨리고 도망치려고 해도 저 위는 검은 안개로 가득할 것이다.
티그리스는 심호흡을 했다.
어차피 아르펨을 죽이는 게 쉬울 거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티그리스는 천공의 사슬을 강하게 당겼다.
“끄아아아아악!”
아르펨이 검은 연기 안에서 비명을 지른다.
그래, 놈을 사로잡았으니 절반은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놈이 무슨 함정을 팠건 티그리스는 이겨낼 것이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티그리스는 검은 안개에 파묻혔다.
* * *
라칸은 여신의 방패를 사용한 후 제일 선봉에 서서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안개는 습하고 진득해 기분이 나빴다.
라칸의 눈앞에 메시지가 떴다.
[악몽의 안개가 당신의 악몽을 훑습니다.]
[명경지수의 정신이 저항합니다.]
[악몽 구현에 실패합니다.]
“어?”
“왜 그래 라칸?”
“저 매튜 왕자의 능력에 면역인가 본데요?”
“그게 무슨 소리야?”
“제가 익힌 명경지수의 정신이…….”
그때, 검은 화살이 검은 안개를 뚫고 날아왔다.
쩡-!
라칸의 여신의 방패에 막히며 반대로 튕겨져 나갔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해드릴게요. 아무튼 제 악몽은 안 나타날 겁니다.”
샤를로트와 트리샤, 네메시스는 검은 안개를 들이마셨다.
“이게 그 매튜 왕자의 입김이라고 생각하니까 너무 기분 나쁜데.”
“집중하죠. 언제 어디서 악몽이 나타날지 모르니까요.”
그때, 라칸의 수정구에서 아모리스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너희들 있는 쪽에서 북쪽으로 500m 정도 가면 매튜가 있대. 어서 가봐.
“어떻게 아셨어요?”
-안개 속에 살아 있는 원혼들이 있어. 그 녀석들이 매튜 왕자를 쫓는 중이야.
“아하, 알겠습니다. 저희도 빠르게 가겠습니다.”
라칸 일행은 천천히 걸어갔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다.
“왜 싸우는 소리가 하나도 안 들리지?”
좀 전까지 성기사들과 사제들이 자신들의 악몽과 싸우느라 난리였는데, 지금은 전혀 그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라칸은 바닥에 쓰러져 죽은 성기사를 내려다봤다.
[사망]
[사인: 과다 출혈.]
[성수의 재생 능력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어?”
“왜 그래?”
“성기사들하고 사제들이 전부 죽은 모양이에요.”
“그게 무슨 소리야? 성배 때문에 계속 재생할 수 있던 거 아니었어? 설마 이 안개 안에선 재생이 안 된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성배가 부서진 모양인데요?”
라칸의 말에 사람들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티그리스 님이 부순 걸 거야!”
“세상에……. 그걸 성공시키다니.”
솔직히 힘들 거라고 생각했던 작전이었는데, 티그리스는 놀랍게도 성공시켰다.
“그런데 왜 안 나오시는 거지?”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나 보죠.”
라칸은 일리야드의 횃불을 앞으로 들었다.
“그러니 매튜 왕자는 저희가 해결해야 할 겁니다.”
라칸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나 다를까 다시 화살이 날아왔다.
이번엔 방향이 앞이 아닌 뒤였다.
네메시스는 곧바로 반응해 단검으로 화살을 막아냈지만, 뒤이어 날아온 검격은 보지 못했다.
쩡-!
트리샤가 간신히 검을 막아냈다.
그 여파로 바로 옆에 있던 샤를로트의 오른쪽 귀에서 피가 흘렀다.
기기기긱-!
“……또 너냐.”
기습을 한 것은 티그리스의 얼굴을 한 매튜 왕자의 악몽이었다.
-그워어어어어어어!
악몽은 비명을 지르며 불을 토해냈다.
라칸은 여신의 방패를 사용해 그 불길을 막아냈다.
샤를로트는 검을 내질렀다.
허공에서 날카로운 얼음창이 만들어지더니 놈의 옆구리를 뚫었다.
매튜의 악몽은 사라졌으나 다시 안개를 뚫고 악몽이 샤를로트를 향해 검격을 날렸다.
라칸은 날아온 검격을 막아냈다.
샤를로트는 검을 내지른 악몽과 눈을 마주쳤다.
“넌 설마…….”
매튜 왕자의 악몽처럼 티그리스인 것은 동일했다.
하지만 이번 티그리스는 매튜 왕자처럼 괴물로 변해 있지 않았다.
지금의 티그리스보다 더 앳된 데다가 움직이기 편한 수련복을 입고 있었다.
샤를로트는 이 악몽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이건 샤를로트 자신의 악몽이다.
샤를로트의 악몽은 라칸의 방패에 의해 검이 튕겨져 나오자 그 반동을 사용해 바닥을 내려찍었다.
쿵-!
땅이 거세게 진동하며 샤를로트가 밟고 서 있던 땅이 무너졌다.
그 틈을 비집고 샤를로트의 악몽이 달려들었다.
말도 안 되는 전투 센스와 감각, 매튜 왕자의 악몽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지능을 갖춘 악몽이었다.
샤를로트는 이를 으득 갈며 검격을 막아냈다.
쩡-!
샤를로트는 양손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충격에 이를 강하게 깨물었다.
이 떨림과 충격은 굉장히 익숙했다.
처음 티그리스와 결투를 했던 슈베어트 때와 똑같았다.
샤를로트의 악몽이 비릿하게 웃으며 샤를로트를 향해 검을 올려 쳤다.
샤를로트는 허공을 날았다.
* * *
레인로버와 베르강은 길리온 왕국의 수도 마리나에 도착했다.
“……이게 무슨 일이죠?”
사실 레인로버와 베르강은 굉장히 조심스럽게 마리나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길리온 왕국의 수도에 있는 대부분의 성기사들과 사제들이 죽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리나를 지키던 거대한 키메라들도 피를 뿜으며 죽어가고 있었고, 사방에선 타는 냄새만이 가득했다.
“머, 먹을 걸 내와! 어서!”
“우린 자유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이것 놔라!”
수도는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대다수의 병력들이 동부 전선에 가 있기도 했고, 성기사와 사제 그리고 키메라들도 죽었으니 폭정에 억눌려 있던 시민들은 울분을 마음껏 토해냈다.
신전에 들어가 금은보화를 털고 전선에 보내려 했던 군수품도 약탈해 허기진 배를 달랬다.
덕분에 베르강과 레인로버는 그 혼란을 틈타 아주 손쉽게 둘이 목표한 신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신전엔 살아남아 있는 성기사들과 사제들이 있었으나 그들도 분노한 시민들을 막느라 정신이 없었다.
“일단 지하로 내려가죠.”
텔레포트 게이트가 있다고 알려진 장소는 이 신전의 지하.
문이 잠겨 있으면 레인로버의 마법으로 우선 해결하고, 그마저도 안 되면 베르강이 검강을 이용해 문을 파괴하며 내려갔다.
살아남은 성기사들이 반격을 해왔으나 베르강도 아닌 레인로버의 소환령, 미쉬타와 아만, 후마윤 선에서 끝났다.
그렇게 결국 도달한 성전 지하.
레인로버와 베르강은 지하에 결국 도착했으나,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텔레포트 게이트가 산산조각이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티그리스가 검은 연기에 집어삼켜지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레비스였다.
레비스는 티그리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 검은 녹슬 것이다.
놈이 손가락을 튕기자마자 헨게나의 검이 녹슬어 바스러진다.
처음 레비스를 만났을 땐 이 말도 안 되는 능력에 당황했겠지만, 지금의 티그리스는 다르다.
티그리스는 헨게나의 검을 다시 재생시킨 후 검을 휘둘렀다.
삽시간에 재생한 헨게나의 검이 레비스의 목을 가르며 지나갔다.
뒤이어 나타난 것은 수없이 많은 변이 오크 떼들.
모두 팔이 네 개씩 달린 변이 몬스터였고, 놈들은 모두 티그리스를 죽이기 위해 침을 질질 흘리며 달려들었다.
-구어어어어어!
티그리스는 검을 횡으로 그었다.
헨게나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화염이 오크 떼들을 덮치자 사라졌다.
이어서 레비스가 만들었던 키메라, 검은 사신이나 월식 기사 등이 튀어나왔으나 헨게나의 불꽃에 모조리 잠식되어 사라졌다.
“그래…….”
아르펨은 다 죽어가는 창백한 얼굴로 웃었다.
“그래,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 너는 신비의 땅에서 미래를 본 게 아니었어.”
처음에 레비스가 악몽으로 튀어나왔을 때부터 조금 의아했다.
레비스와 티그리스와의 관계를 놓고 봤을 때, 레비스가 티그리스를 지독하게 괴롭힌 적도 없었고 티그리스의 소중한 사람을 빼앗지도 않았다.
오히려 레비스가 겁을 먹었으면 먹었지 결코 티그리스가 레비스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티그리스가 신비의 땅에서 레비스가 저지른 미래를 보고 충격에 빠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봐왔던 티그리스의 멘탈은 강철이다.
제아무리 신비의 땅에서 충격적인 미래를 보고 왔다고 할지라도 악몽을 꿀 정도까진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다.
결정적으로 기괴한 변이 오크들까지 튀어나오고, 아직 미완성에 불과했던 검은 사신이나 월식 기사 등이 튀어나오자 확신할 수 있었다.
“넌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온 것이었어.”
티그리스는 강하게 천공의 사슬을 끌었다.
“큭!”
아르펨은 심장을 짓이기는 고통에 엎어졌다.
티그리스의 앞에 로타의 손 스페스가 나타났다.
스페스는 티그리스를 향해 수십 개의 손을 날렸다.
그러나 티그리스의 검을 막을 순 없었다.
헨게나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불꽃이 놈의 손과 검을 모조리 불태웠다.
티그리스는 이 검은 안개의 능력이 무엇인지 대충 이해가 갔다.
“이건 내가 꾼 악몽이 현실로 나오는 모양이군.”
“그래. 맞다.”
아르펨은 피를 한 움큼 토해내며 웃었다.
“그럼 궁금하군. 네 악몽 속 나는 어떻게 나올까?”
“아니, 네가 나올 리가 없다.”
“왜지? 내가 안 두려웠나?”
티그리스의 악몽은 하나같이 자신이 죽는 악몽이 아닌 자신의 전우들과 가족들을 잃는 모습이 나타났다.
특히 티그리스를 가장 오랫동안 괴롭혔던 악몽이 있다면…….
“왔군.”
티그리스는 저 멀리서 걸어오는 한 여성을 쳐다봤다.
단순히 실루엣만 봤을 뿐인데 티그리스의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아르펨은 도대체 저 여인이 누구길래 티그리스를 이토록 동요시킬 수 있는지 궁금했다.
여인이 안개를 뚫고 얼굴을 드러내자 아르펨도 제법 놀랐다.
그녀는 다름 아닌 티그리스의 여동생이자.
슬픔을 깎아내는 자.
리니아 디 노르베르드였다.
* * *
샤를로트는 정신을 차려보니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낙오된 것이다.
샤를로트의 악몽이 팔짱을 낀 채로 넘어져 있는 샤를로트를 내려다봤다.
-차라리 그렇게 검을 휘두를 거면 춤을 추는 게 낫겠군. 껍데기만 번지르르하지 알맹이는 텅 비었어.
“……닥쳐!”
샤를로트는 벌떡 일어나 악몽을 향해 향해 검을 내질렀다.
“난 그때의 나보다 강해!”
검은 티그리스는 샤를로트의 검을 비껴 친 후 날카롭게 올려 쳤다.
샤를로트는 가까스로 피해냄과 동시에 횡으로 검을 그었다.
“그리고 난 그때의 너보다 강해!”
티그리스는 샤를로트의 검격을 딱 한 발자국 움직여 피해냈다.
그리고 팔꿈치로 샤를로트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텅-!
드래곤의 비늘로 만들어진 갑주 때문에 별 타격은 없었으나, 샤를로트는 땅을 굴렀다.
악몽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넌 나를 평생 이길 수 없어.
샤를로트는 이를 으득 갈았다.
이것은 매튜 왕자가 만들어낸 악몽이자, 샤를로트 자신의 악몽이었다.
스승님이 이젠 결코 저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알고 있고, 이젠 스승님이 밉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을 갉아먹었던 악몽과 마주하니 열이 뻗치는 것을 넘어 자괴감이 들었다.
티그리스를 닮은 악몽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샤를로트의 자존심을 짓뭉갰기 때문이었다.
샤를로트의 입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와 검은 티그리스에게 흡수된다.
-샤를로트, 넌 나를 단 한 번이라도 이겨본 적이 있나?
샤를로트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넌 나를 단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어.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그러니 네가 네 힘만으로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다.
-그러니 어서 동료들을 불러. 도와달라고 외쳐라.
악몽이 저런 말을 하는 이유는 샤를로트도 잘 알고 있었다.
악몽은 샤를로트가 죽었으면 죽었지 절대 동료들을 부르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샤를로트의 발끝이 악몽을 향한다.
“닥쳐.”
샤를로트의 검에 눈부시도록 찬란하면서도 창백한 검기가 일렁였다.
“넌 나 하나만으로도 충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