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처음부터 시작한다 (1)
어둡다.
죽고 난 뒤 설휘(雪輝)가 느낀 첫 감상이었다.
주위를 가늠할 정도의 희미한 빛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어둡고 습한 곳이다.
‘황천길로 가는 것치고는 좀 낯이 익군.’
백 평 남짓한 공간.
가장자리에 들어선 책장과 밋밋하다 못해 바스러질 것 같은 벽이 보였다.
거기다 방 가운데 삼십여 평 공간으로 우뚝 솟은 연무장까지.
뭐? 연무장?
바닥에 깔린 수백 개의 백석(白石)을 보자마자 설휘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낯이 익다 했는데, 가만 보니 태황각 후문에 위치한 자신의 연공실이 아닌가.
“이게 대체…….”
설휘는 어이없는 상황에 웃음부터 나왔다.
하지만 그 웃음도 눈앞에 떠오르는 문자들을 보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언어를 참조하세요.>
[空 : 0, 一 : 1, 二 : 2, 三 : 3, 四 : 4, 五 : 5, 六 : 6, 七 : 7, 八 : 8, 九 : 9]
[증가增加 : +, 감소減少 : -, 배수倍數 : x]
상수학(象數學) 같은 건가?
갑자기 떠오르는 문자들과 그림 옆에 나열된 글귀를 보며.
설휘는 황당함에 말문을 열지 못했다.
“죽었는데 난…….”
자신의 기억은 그랬다.
지랄 맞게도 출신도, 나이도 모르는 정파 무사의 창에 찔려 죽었다.
그런데 지금은 살아 있다.
잘려나간 오른팔 하나는 떡하니 붙어 있었고, 복장도 그때 입은 것 그대로였다.
마치 사마귀와 독대하기 전 잠시 이곳에 머물렀던 기억처럼…….
“꿈을 꾼 걸까?”
아니다.
꿈이라기엔 감각이 너무 깨끗하다.
눈앞의 광경, 숨 쉬는 느낌,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까지.
오히려 자신이 죽었던 그때의 기억이 이질적일 만큼, 지금 느낌은 현실적이었다.
아니, 이건 현실적인 정도가 아니라…….
되살아났다는 말이 어울렸다.
* * *
“여기 있었나?”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 건 반 시진(1시간)이 지난 후였다.
자신이 왜, 어떻게 이곳에 있는지를 고민할 때쯤 연무장으로 걸어오는 장발의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적명(赤明)?”
설휘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멀대같이 큰 키에 장발의 사내.
불편함이 뚝뚝 묻어나오는 그를 자신이 모를 수가 없었다.
“…….”
“…….”
잠시 흐르는 정적.
그리고…….
퍼어억!
“컥!”
창졸간 설휘의 몸이 반쯤 꺾이며 튕겨 나갔다.
예고 없이 날아온 주먹 한 방에.
“손맛 좋고.”
사내, 적명은 눈 깜짝할 사이에 설휘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안착했다.
그는 후려쳤던 손목을 까닥이며 씨익 웃어 보였다.
“대장이라고 해야지. 비객조(飛客組) 분. 대. 장.”
“커어억! 커흑!”
복부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설휘는 온몸을 떨어댔다.
그런 와중에 상대가 누구인지 다시 한번 머릿속에 각인되고 있었다.
적명(赤明).
여섯 명을 이끌고 다니는 자신의 분대와는 달리 백여 명을 이끄는 흑월대의 수장이다.
그것도 태황각 소속의 직속부대.
“왜? 한 대 맞으니 억울해? 꼴에 수하들 몇 명 거느리고 있다고 내게 대접을 받고 싶어?”
“…….”
순간, 설휘의 눈빛이 흔들렸다.
단순히 복부의 통증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 이 상황.
분명 그의 기억으로 예전에 겪어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손맛 좋고.
-그냥 쳐 봤어. 건방지게 노려봐서 말이지.
-왜? 한 대 맞으니 억울한가? 꼴에 수하들 몇 명 거느린다고 내게 대접을 받고 싶어?
세 개 중 두 개가 일치했으니 예전의 기억과 완벽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시작이 달랐다.
당시에는 ‘무슨 일이십니까?’라고 물었으니까.
‘내 기억이 맞다면 이다음에 나올 말은, 실력이 없으면 머리…….’
“실력이 없으면 머리를 조아리는 법부터 익혀라.”
“……!”
설휘는 표정을 와락 구겼다.
대체 지금 이 상황은 뭐지?
왜 자신이 기억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가는 거지?
“……무슨 일이십니까?”
설휘는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키며 그를 향해 정중히 예를 표했다.
더 맞지 않으려면 달리 방법이 없다.
“태황각주께서 부르신다.”
‘이 말도 같다.’
설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가 내뱉는 모든 대화가 예전 자신이 ‘겪었던’ 기억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봐, 내 말 안 들려?”
“알겠습니다.”
적명의 호통에 설휘가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예전의 기억에서는 여기서 대답이 늦었다고 또다시 발길질이 날아왔었다.
그랬기에 신속하게 답했다.
“그리고.”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설휘를 적명이 불렀다.
그는 여인처럼 길게 기른 장발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충고 하나 하지.”
“…….”
“넌 운이 좋아.”
알 수 없는 묘한 어감에 설휘는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왜?
과거의 기억과 달라서?
아니, 그런 게 아니다.
<목숨 + 2>
과거의 기억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신호.
의미를 알 수 없는 구어(句語)가.
그것이 적명의 머리 위에서 팽글팽글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내가 소속된 이곳은 마니교라 불리는 단체다.
예전에는 불(火)을 앞에 두고, 평화와 화합을 소망한다는, 정파의 부처나 신선 못지않은 아후라마즈다를 섬겼던 곳.
그게 지금은 강자존(强者存)의 법칙 아래, 명확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집단이 되었지.
즉, 절대복종만 하면 특별한 일은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본교에서 사건 사고 같은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물론 나 같은 놈들은 제외해야겠지.
본교는 정파와 비교해 확실히 좋은 점이 몇 개 있다.
세칭 마공(魔功), 우리는 신공(神功)이라 부르는 무공이다.
정파의 정종무공(正宗武功)은 최소 십여 년을 갈고 닦아야 소위 ‘일류’에 오를 수 있다고 한다.
그에 반해 본교의 무공은 단 삼 년만으로도 일류가 될 수 있다.
듣기로 서른이 되기도 전에 절정에 올라선 고수가 제법 있다고 하니, 이 얼마나 좋은 환경인가.
다만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꼭 있기 마련인데.
‘수명이 줄어들지.’
마공을 익히면 반드시 위험이 따른다.
진원지기를 써 단시간에 성장하기 때문에 수명에 타격을 입는다.
예를 들어 절정에 오른 정파놈들이 백 세까지 사는 것에 반해, 마교는 절정에 올라도 육십을 넘기기가 쉽지 않다.
물론 초마(超魔)나 극마(極魔)의 경지.
정파로 치면 입경(入境)이나 화경(化境)에 오르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 * *
“비객조 분대장 설휘가 뵙기를 청합니다.”
설휘는 상념을 지우고 태황각 문 앞에 서 있었다.
아직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것이 낯설고 거북하다.
가장 괴로웠던 과거가 반복되고 있다는 고통 때문인지.
지금 이 상황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들어오라.”
때마침 노인의 목소리가 들리자.
설휘는 태황각주 집무실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방문에 들어서자 처음 설휘를 반긴 건 매캐한 향 내음이었다.
그다음은 삼십여 평의 공간 안에서 좌우 벽에 일렬로 세워진 병풍이었다.
‘사군자(四君子).’
고결한 군자를 비유해 그렸다는 매(梅), 난(蘭), 국(菊), 죽(竹).
뒷구멍이 더러운 태황각주가 가지고 있기엔 언제 봐도 기가 차는 광경이다.
“왔는가.”
설휘의 시선이 정면으로 향했다.
탁상을 끼고 자리에 앉은 태황각주 사마귀. 그 옆으로 비대한 체구의 노인도 보인다.
‘역시나 오천각주(吳天閣主) 당초인도 함께 있다.’
설휘의 눈에 보이는 상황은 과거의 기억 그대로였다.
과거의 그때에도 저렇게 둘이 방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마교의 핵심지부 중 하나인 홍마원(紅魔院).
그 기관을 떠받드는 다섯 개의 각(閣-공식 업무를 보는 곳)이 있는데 그중에 태황각과 오천각(吳天閣)이 있다.
그리고 오천각 수장이 바로 저 노인, 당초인이다.
‘뱀눈 하나와 사팔뜨기 하나.’
직위야 어쨌든, 설휘는 편한 대로 이름을 붙이며 그들에게 부복했다.
처억.
“비객조 분대장. 태황각주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설휘는 슬쩍 주변을 살폈다.
기억대로 사마귀는 깡마른 외관에 볼품없는 행색을 하고 있다.
퀭한 눈과 불쑥 튀어나온 광대뼈만 봐도 재수가 없다는 느낌이 든다.
“조금 전에 제가 말씀드렸지요? 저 아이가 바로 설휘라는 자입니다.”
“호오. 그래요?”
사마귀가 운을 떼자 당초인이 묘한 시선으로 설휘를 바라봤다.
찬찬히 훑는가 싶던 그는 둥근 턱을 한 번 슥 문지르며 말했다.
“말씀대로 아주 대단한 실력자인가 봅니다. 고개만 대충 까닥이는 모습을 보면요.”
쿵.
그 얘기를 듣자마자 설휘가 급히 바닥에 머리를 내리찍었다.
“무,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태황각주께서 집무실에 들어오면 간단히 예식을 하라고 하셔서…….”
“허허허. 오천각주.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설휘가 반문하던 순간, 사마귀가 그의 말을 빠르게 가로챘다.
웃고는 있지만 그게 그런 의미가 아니란 건 곧 알게 되었다.
“추궁하듯 나무라면 저런 식으로 저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제가 오천각주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허허허. 그게 어디 태황각주의 잘못입니까? 건방진 수하의 잘못인 게지요.”
“그 역시 다 제가 모자란 탓입니다. 허허허.”
‘두 번 겪는 일인데도 기분 참 더럽군.’
기억대로 상황이 흘러가니 겁이 없어진 걸까.
설휘는 둘의 대화를 들으며 두려움이 아닌 짜증이 일었다.
태황각주는 분명 나흘 전에, 이곳에 방문했을 때 이런 식의 묵례를 하라고 명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교묘히 말을 바꿔 자신에게 모욕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일단은 따라야 한다.’
설휘는 여전히 현실 감각이 없었다.
그럼에도 기억대로 따르는 이유는, 곧 태황각주의 입에서 나올 그 말.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흠흠. 그건 그렇고.”
사마귀가 운을 떼며 화제를 돌리자 설휘의 눈빛이 번뜩였다.
“천일관(天日官) 내 서기관을 맡을 생각은 없나?”
“천일관이라 하시면…….”
“그렇게 마공을 익히고 싶어 하기에 내 특별히 신경을 썼네.”
천일관은 오각(五閣)에 비치된 서관이다.
총단에 있는 칠홍비고(七洪備考)에는 한참을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수만 권의 비급이 비치되어 있는 곳.
‘처음 이걸로 미끼를 던졌지.’
“영광입니다. 태황각주.”
하지만 설휘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꿈이든 현실이든.
예전처럼 행동해야 자신의 기억대로 상황이 흘러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인데. 다만, 이건 대단한 영광이니 그에 걸맞게 임무를 하나 줄까 하는데 말이야.”
사마귀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며 오른손을 움직였다.
그 모습에 설휘의 눈이 커졌다.
미끼를 던졌으니 이제 그의 본심이 나올 때였다.
분명 기억대로라면 그는 자신을 처리하기 위해 화산파에 대한 얘기를 꺼낼 것이다.
“드릴 말씀이 있습…… 헉!”
설휘가 한발 앞서 말을 하려던 그때.
무엇을 본 건지 그는 눈을 부릅뜨며 말끝을 흐렸다.
“……?”
“음?”
의아한 표정으로 변한 두 노인.
하지만 설휘는 그들의 모습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눈앞에 선명하게 각인된.
책을 펼치듯, 문자들이 눈앞을 뒤덮어버린 것이다.
<아래 지문을 보고 선택하세요.>
▶ [어떤 임무라도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그걸 본 설휘는 그제야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를 깨달았다.
자신은 이전에 한 번 죽었다는 것.
▶ [다른 임무를 받고 싶습니다.]
이 상황이 자각몽이 아닌, 지극히 현실이라는 것.
▶ [오른팔을 자르겠습니다.]
그리고 시선에 따라.
▷ [어떤 임무라도 따르겠습니다.]
▷ [다른 임무를 받고 싶습니다.]
▶ [오른팔을 자르겠습니다.]
시선에 따라, 눈앞의 지문이 움직인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