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처음부터 시작한다 (2)
‘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죽어가는 도중에 나타났던 문자.
그것이 또다시 나타났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지문 내용이 제각기 다르다는 것.
‘시간이 멈춘 건가?’
설휘는 그런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노려보던 사마귀와 당초인.
두 노인이 석상으로 변한 듯 움직이지 않고 있다.
단순히 동작만 멈춘 게 아니라 눈의 동공까지 멈춘 것이다.
더불어 자신의 몸도 움직여지지 않는다.
‘모두 멈춘 게 아니야.’
때마침 언뜻 구석에서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몸을 움직일 수 없고, 두 노인도 자세에 미동조차 없는 상황에서.
홀로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하는 것이 있었다.
8, 7, 6……
전에도 보았던 기호다.
그것은 지문 아래에서 사라졌다 나타나며 바뀌고 있었다.
거기다 과거로 돌아왔을 때 나타났던, 참조하라는 언어도 함께 보인다.
<언어를 참조하세요.>
[空 : 0, 一 : 1, 二 : 2, 三 : 3, 四 : 4, 五 : 5, 六 : 6, 七 : 7, 八 : 8, 九 : 9]
‘다섯, 넷? 이건…….’
그림 문양에 집중하던 중 설휘의 눈빛이 반짝였다.
직감적으로 오른쪽 구석에 쓰여 있는 기호가 수(數)를, 시간을 가리킨다는 걸 알아낸 것이다.
또한, 그 횟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도.
5, 4…….
숫자는 의도적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선택을 강요하는 듯한 광경이다.
‘가만, 선택이라고?’
4…… 3…….
다급히 지문을 읽어보는 설휘.
그런 와중에 지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 말하면 첫 지문의 어떤 임무라도 따르겠다는 말.
과거 자신이 두 노인 앞에서 했던 말이 지문에 쓰여 있는 것이다.
▷ [어떤 임무라도 따르겠습니다.]
▷ [다른 임무를 받고 싶습니다.]
▶ [오른팔을 자르겠습니다.]
‘대체 이게 무슨 의미인가……’
설휘의 감정은 복잡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두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선택의 시간이 거의 끝나간다는 것.
그리고 오른팔을 자르겠다는 지문만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는 것.
자신의 행위가 앞으로 어떤 일을 불러올지 모르지만, 그런 기분이 들었다.
결국, 설휘의 시선은 지문의 두 번째 칸으로 이동했다.
<‘다른 임무를 받고 싶습니다.’를 선택하셨습니다.>
계속 진행됩니다.
순간 번쩍임과 함께 조금 어두웠던 주위가 다시 환해졌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던 두 노인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재차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설휘는 찌릿한 감각이 전해오자마자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방금 자신이 뭔가 말을 뱉었다.
뭐라 얘기한 것을 뒤늦게 자각할 정도로 너무나 순식간이었다.
“쯧쯧.”
설휘의 행동을 보던 당초인은 혀를 찼다.
그러고는 길게 자란 자신의 수염을 매만지며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보였다.
“다른 명을 받고 싶다고? 이유가 무어냐?”
‘……!’
물어오는 사마귀를 본 설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순간적으로 숨쉬기 힘들 만큼 엄청난 살기를 몸으로 받아버린 것이다.
그가 익힌 화온마공(火蘊魔功).
한 줌의 염기(炎氣)만으로도 뼈가 녹아내린다고 알려진 기운이다.
“내가 어떤 임무를 시킬지 말하지도 않았는데 건방지게 다른 임무를 받고 싶다고 입을 놀리는 것이냐!”
계속되는 사마귀의 질문에 설휘는 대답하지 못했다.
애초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답변이었기에 마땅히 항변할 말도 없었다.
그렇게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그 정적을 깬 건.
“그만!”
사마귀와.
“헉!”
자신의 외침이었다.
덜덜덜.
설휘는 몸이 굳은 채로 뻣뻣이 서 있었다.
번쩍임과 함께 나타난 한 줄기 호선.
날카로운 그것이 어느새 자신의 목젖을 겨눈 채 멈춘 것이다.
만약 사마귀가 설휘보다 더 빨리 외치지 않았다면, 칼은 그의 목을 관통하고 지나갔을 터였다.
‘흑비(黑秘)다…….’
설휘의 시선이 눈앞의 여인에게로 향했다.
천장을 뚫고 나타난 이자.
태황각주 사마귀를 지키는 가신(家臣)이며, 자신 같은 인물 수백 명이 덤벼도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는 고수다.
“이유나 들어보고 결정하지.”
캉.
사마귀의 명이 떨어지자 그제야 흑비가 검을 회수했다.
상대가 살기를 거두었음에도 설휘의 안색은 새하얗게 변해있었다.
“오해 마십시오. 태황각주. 다른 임무를 받고 싶다고 한 것은 제 입맛대로 고르려고 해서가 아닙니다.”
“허면?”
“최근에 들은 소문이온데, 난주(蘭州) 접경지에 화산파 일행이 한데 모인다고 합니다. 과거 태황각주께서 화산파 놈들을 제거하는 것이 본교의 숙원사업이라 늘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반응이 있었다.
설휘는 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외쳤다.
“제가 그 기회를 잡았으면 합니다! 제 비객조는 정찰과 적의 시선을 끄는 것에 특화된 분대. 이번 본교의 고수분들을 투입하실 시기만 알려주시면 언제든 함께하고 싶습니다.”
말이 좋아 정찰이지, 사실상 칼받이다.
자신의 실력으론 적에게 발각되는 순간 목숨을 잃고 말 테니까.
실제로 그렇게 되기도 했다.
화산파 고수, 구종명의 무리들과 대면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 임무를 말하지 않으면 당장의 목숨이 위험하다.
다른 임무를 받고 싶지만, 살기 위해서는 결국 예전의 임무를 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괜찮을까?’
설휘는 슬쩍 눈을 들어 반응을 살폈다.
혹여나 자신의 기억대로 상황이 흐르지 않는다면.
사실상 여기서 생을 마감해야 했으니까.
“…….”
“…….”
사마귀는 대답이 없었다.
그때 당초인이 슬쩍 말을 걸었다.
“허허허. 총단의 매천각(鹰天閣)에서 정보를 흘렸는가 봅니다. 그렇지 않고선 고작 일개 분대장이 어찌 소문을 들었겠습니까?”
당초인이 슬쩍 던지는 말에 설휘는 눈이 크게 뜨였다.
‘맞다.’
단순한 직감이 아니었다.
매천각은 중원 정보를 수집하는 마교의 상급기관 중 하나.
그곳을 거론하는 것을 보면 자신의 대답이 먹혔다는 뜻이다.
“재밌구나. 안 그래도 마침 내가 그 임무를 줄 참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공교롭구만?”
그리고 그 생각을 사마귀는 재차 확인시켰다.
동시에 그가 뿜어내는 살기도 눈에 띄게 사라졌다.
그럼에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 할 상황에서 설휘의 시선은 또 다른 곳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또다시 저게…….’
<목숨 + 4>
흑비란 자에게 나타난 기호와 문양.
그리고 아래에는 의미를 풀어놓은 해석.
‘목숨…… 증가…… 넷.’
이번엔 대충 흘려보내지 않았다.
숫자 십(十)과 비슷한 저 문양.
아래 번역된 내용을 참고해 보면 그것은 ‘증가’란 의미였다.
아니, 확실하다.
이건 분명히 의미가 있는 단어다.
‘목숨’ ‘증가’ ‘넷’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지 흑비란 자와 관련이 있다.
그것도 매우 밀접하게 말이다.
* * *
어스름한 저녁.
집무실을 나온 설휘는 소로길을 걷고 있었다.
이 길은 태황각 북쪽에 나 있는 길이다.
그리고 길 끝나는 지점에는 자신의 분대원들이 숙식하는 집역소(集役小)가 있다.
네 말대로 그곳에 부교주께서 친히 출정을 가신다고 한다. 그 전에 지형을 살펴볼 자가 있어야겠지. 네가 갈 함곡관(函谷關)에 어떤 인물이 있는지, 지형은 어떠한지 면밀히 살핀 후, 비객조장에게 정보를 넘겨라.
사마귀가 말한 임무는 자신의 기억과 한마디도 다르지 않았다.
함곡관 주변의 지형을 조사하고 정보를 넘기라는 내용.
뻔뻔한 거짓말을 저리 천연덕스럽게 말하고 있다.
‘그래 놓고 누구도 오지 않았지.’
부교주는 고사하고 일개 부대의 대장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걸 몰랐으니,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퇴로까지 막혀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번에 큰 임무 하나 맡았다지요?”
투욱.
설휘의 고개가 움직였다.
조경으로 만들어진 인공연못 앞쪽.
줄지어 늘어선 너럭바위 위에 앉아 낄낄대며 웃는 자가 있었다.
“조심 좀 하시지. 그러기에 태황각주 집무실을 왜 뒤져가지고…….”
칙산(則山)이란 자다.
흑월대 소속. 적명의 수하로 항상 그의 옆을 졸졸 따라다니는 놈.
완력으로는 유명한 녀석이라 그런지, 추운 겨울에도 사람 머리통만 한 굵기의 팔뚝과 다리를 드러내고 있다.
“아. 혼잣말인데 혹시 들으셨습니까? 미안합니다. 뭐, 이미 들었으면 할 수 없고. 허허허.”
설휘에겐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가끔 소속 일개 대원들도 자신에게 이렇게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린다.
적명에게 얻어터지는 장면을 자주 목격하다 보니 기가 산 것일 수도 있고.
태황각주의 별도의 명이 있었을 수도 있다.
뭐, 사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이봐.”
돌아서던 칙산을 설휘가 불렀다.
“왜요? 할 말 있으십니까?”
확실히 과거에도 이놈과 여기서 마주친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에는 그냥 무시했었다.
적명이라는 놈의 후환이 두려웠으니까.
“확인해 볼 게 있어서.”
“무슨 시험이요?”
하지만 이번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목숨 + 1>
칙산의 머리 위에 떠 있는 단어.
어쩌면 지금 이것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뭐 하는 거요?”
저벅저벅.
한 걸음씩 다가오는 설휘를 향해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한 발짝.
또 한 발짝 움직이자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파파팟.
한순간, 설휘의 동작이 급작스럽게 빨라지자.
당황한 그가 허리춤에서 검을 빼들었고.
캉! 캉!
급히 검으로 몇 번 맞대던 그의 신형이 크게 흔들렸다.
“늦었어. 이 새끼야!”
푸욱!
그게 끝이었다.
반 호흡 빨리 움직인 설휘의 칼이 그의 심장을 꿰뚫어버린 것이다.
“꺼……어…….”
첨벙!
칼을 품에 안고 주저앉듯 연못 밑으로 넘어간 칙산은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창졸간 생긴 일이 믿기지 않는지, 그의 부릅뜬 눈이 설휘의 미간을 향하고 있었다.
“태황각주 집무실을 왜 뒤졌냐고?”
상대의 고통이 검자루를 통해 전해져온다.
그럴수록 설휘의 칼은 그의 몸을 더 파고들고 있었다.
“거길 뒤지면 뭐라도 나올까 싶어서다. 강해지고 싶은데, 아무리 찾아도 방법이 없으니까.”
“……커……컥.”
“씨발, 이 엿 같은 단체는 삼류 무공 하나 던져주고 혼자 강해지란다. 너 같으면 따르겠냐? 적어도 출발선은 같아야 덜 억울하지.”
“이……이익….”
“너무 억울해하지 마. 머지않아 나도 널 따라갈 테니.”
기억대로 흘러간다면, 설휘는 얼마 있지 않아 자신이 죽게 될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뭐라도 해야 했다.
뒷감당을 신경 쓸 상황이 아닌 것이다.
투욱.
칼날을 붙잡던 그의 손이 맥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동시에 칙산의 몸도 천천히 가라앉았다.
연못 아래. 그의 몸 주변으로 시뻘건 핏물이 물감처럼 잔잔히 퍼지고 있었다.
‘사라졌다.’
천천히 그를 내려다보는 설휘의 눈이 커졌다.
변화가 일어났다.
칙산의 죽음과 함께 그의 머리 위에 떠 있던 구어도 사라진 것이다.
척.
설휘는 급히 한 걸음 물러나며 검을 집어 들었다.
‘목숨’ ‘증가’ ‘하나’
혹여나 그가 다시 눈앞에 살아날 수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이 녀석이 아니네?”
그런데 변화가 없었다.
연못은 잔잔했고 주위는 조용했다.
“……어?”
의아한 표정으로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던 설휘가 멈칫했다.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다시 한번 연못을 바라봤다.
“이게 뭐야?”
칙산의 목숨 증가 하나가 사라진 후.
생전 처음 보는 단어가 연못에 비친 자신의 머리 위에 생성된 것이다.
Coin 2 [두 번의 기회]
“이게 대체…….”
이 세계에서는 전혀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
바로 Coin이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