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처음부터 시작한다 (3)
온종일 비가 내린 탓인지 협곡 주변의 바람이 매우 세찼다.
육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골짜기를 통과하며 더욱 빠른 유속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철썩. 처얼석.
야밤에 여덟 명을 태운 호선(虎船) 하나가 협곡 사이를 빠르게 파고들고 있었다.
급류와 가파른 절벽.
은밀하게 움직이기에 최적인 환경이다.
‘결국, 이곳에 와버렸구나.’
설휘는 뱃머리에 앉아 주위를 보고 있었다.
정박할 위치는 서쪽의 중문(中門).
보름 넘게 걸려 도착한 이곳의 환경이, 설휘는 너무나도 낯이 익었다.
‘어차피 본교에 있었으면 적명에게 죽었겠지.’
정박할 위치가 가까워질수록 설휘는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어차피 적들은 자신들이 온다는 걸 모른다.
그렇다면 적들이 지나다니는 곳만 조심하면 되지 않을까?
“이보게.”
“아! 조장.”
수염이 한가득한 중년인 하나가 다가오자 설휘가 고개를 숙였다.
비객조장 철수독(鐵修獨)이다.
자신의 직속상관이며 비객조 분대 3곳을 관리하는 인물.
“예. 조장.”
“주변에 화산파 일행들이 있으니 무리하게 움직여선 안 된다. 적들의 수와 주변 지형만 파악한 뒤 빠져나오거라.”
“알겠습니다.”
대답하던 설휘의 시선이 미묘하게 움직였다.
사마귀의 명이 있었다지만, 조장씩이나 되면서 자신은 직접 실력행사에 나서지 않는다.
과거에는 경황이 없어 그러려니 했는데 지금 보니 좀 의아하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는 두 가지 형태로 나뉜다.
사마귀에게 별도의 지시를 받았거나.
아니면 그들과 한패이거나.
투욱.
배가 정박할 곳에 다다랐을 때쯤.
“모두 나를 따라 움직여라.”
설휘는 수하들을 향해 손짓했다.
이후, 딛고 있는 바닥.
그 앞, 강물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Coin 2 [두 번의 기회]
‘여전히 있구나.’
강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 위로 보이는 문양들.
“설휘?”
철수독의 부름에도 설휘는 대꾸하지 않았다.
자신의 머리 위로 기록되어 있는 글자.
어떤 형태로든 의미가 있을 터였다.
“뭐해? 가지 않고!”
보다 못한 철수독이 목소리를 높이자 설휘가 급히 손짓했다.
“날…… 따라와라.”
이후, 서둘러 땅을 밟았지만.
굳은 얼굴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대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 * *
스스슥.
초목들 사이로 파고든 설휘는 빠르게 몸을 엄폐했다.
그를 따라 수하들도 민첩하게 자리를 잡았다.
하부지단에서도 말단 조직으로 치부되긴 하나, 그래도 본교의 신공을 익힌 자들이다.
중원에서는 적어도 일류 소리를 들을 정도는 된다.
‘이제 어찌해야 하나.’
설휘는 몸을 엄폐시킨 채 강 쪽을 바라보았다.
조장 철수독이 탄 배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그는 이곳에 오던 내내 고민했다.
어차피 이 임무를 수행하면 죽게 된다는 걸.
그렇기에 곧장 여기서 몸을 빼야 한다는 걸.
허나, 그리하면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한다.
본교로 돌아간다 해도 문책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 전에 적명에게 목숨을 잃는 게 더 빠를 수도 있다.
‘여기 있어도 죽어.’
짐작건대 비객조장은 수시로 자신들의 위치를 점검하려 들 것이다.
또한, 이곳의 적들에게 발각될 가능성도 생각해야 한다.
‘중원으로 도망이라도 가야 하나…….’
그나마 해결책이라 할 수 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는 걸 안다.
자신이 익힌 무공.
불쾌하고 사이한 이 기운은 어떻게 해도 숨길 수가 없다.
일정 경지에 오른 정파 무인이 이 사이한 기운을 감지하지 못할 리도 없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개 쫓기듯 쫓기다 죽을 터였다.
“분대장, 저희는 어찌할까요?”
수하의 질문에 설휘는 깊은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우선…….”
설휘는 주변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강물을 등에 끼고 바라보는 정면에 중문이 보인다.
좌측에는 우거진 초목이, 우측에는 발목까지 올라온 잡초와 무릎 높이의 수풀도.
“밑으로 내려간다.”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당연스럽게 반문해 오는 목소리들.
설휘는 그런 수하들을 무시하고 먼저 몸을 뺐다.
“내려간다고. 빨리 움직여.”
* * *
설휘는 수하들과 함께 숲속을 거닐고 있었다.
과거 적들에게 최초로 발견된 곳은 이곳과 반대 방향에 있었다.
정확히는 초목 사이에 지어진 긴 교각에서부터.
“분대장이 왜 그러는지 알아?”
“나도 모르겠다.”
수하들의 목소리가 미약하게 들린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을 정찰해야 할 곳과 멀어지더니 급기야 일대를 이탈해 중원 지역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설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사실, 수하들의 수군거림보다 ‘두 번의 기회’란 단어가 머릿속에 가득했다.
‘내게 두 번의 기회가 있다는 뜻일까? 아니면 이번이 두 번째, 마지막이라는 뜻일까.’
그는 이미 이번 생에도 희망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늦게 죽든 빨리 죽든 비참한 결말이 될 거란 것도.
그랬기에 한 번 더 희망이 남아 있길 바랐다.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나은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을 테니.
“잠깐.”
설휘가 손을 들었다.
때마침 숲 사이로 목옥 한 채가 보였다.
“어떻게 합니까? 누가 보고 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한 수하가 다가와 물었다.
“괜히 들었다가 기습을 받을 수 있으니 내가 들어가겠다.”
설휘는 목옥의 형태를 살폈다.
특이하게도 창이 네 개 나 있는 사각형의 건물.
이런 경우 감시 초소처럼 지어진 형태일 가능성이 높았다.
“혹여나 소리가 난다면 바로 따라붙어라.”
“옙.”
“알겠습니다.”
스윽. 스윽.
설휘는 자세를 낮추며 천천히 접근했다.
한 발 걸을 때마다 긴장감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제발 누구도 없기를…….’
일류 수준의 무사라면 자신이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
그 실력을 상회한다고 해도 한번 비벼볼 만하다.
허나 검기를 피워내는 고수라면 십중팔구 죽는다.
대등하게 펼쳐내더라도 죽는다.
단번에 제압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스윽.
이런저런 생각하던 사이 어느덧 설휘는 목옥 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하나, 둘…….’
크게 심호흡을 한 그는.
“핫!”
빠르게 문을 열어젖히며 뛰어 들어갔다.
파파파팟.
잠시 뒤, 수하 여섯이 차례로 들어오며 주변을 살폈다.
“분대장?”
“아무도 없나 봅니다.”
“괜히 긴장했네.”
비어있는 내부를 둘러보며 수하들이 한마디씩 말을 보탰다.
“그렇지 않습니까?”
가슴을 쓸어내리던 각진 얼굴의 조원.
그는 안심한 표정으로 설휘를 향해 말을 걸었다.
그런데.
“분대장?”
어딘가 이상했다.
설휘는 마치 홀린 사람처럼 창가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분대장…….”
그는 재차 질문을 던졌지만.
설휘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없었다.
<적이 나타났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실 겁니까?>
설휘는 눈앞에 떠 있는 지문을 보고 있었다.
뒤늦게 시간도 멈췄고, 예상치도 못한 유형의 질문을 받아들여야 했다.
▶ 별것 아닌 상대다. 싸움을 건다.
전혀 이해되지 않는 지문이다.
왜? 무엇 때문에?
언제 적이 나타났다는 건가.
▷ 별것 아닌 상대다. 싸움을 건다.
▶ 일단 대화로 풀어보자. 말을 건다.
적이 있지도, 보이지도 않는데도 계속 지문이 펼쳐지고 있었다.
정말로 자신은 어떠한 미세한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거늘.
▷ 별것 아닌 상대다. 싸움을 건다.
▷ 일단 대화로 풀어보자. 말을 건다.
▶ 이길 수 없는 상대다. 전력으로 도망친다.
‘대체 어디냔 말이다!’
설휘의 생각에 반박이라도 하듯 지문은 계속해서 생성되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설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멈췄기 때문에 그저 지문을 볼 수밖에.
▶ 별것 아닌 상대다. 싸움을 건다.
▷ 일단 대화로 풀어보자. 말을 건다.
▷ 이길 수 없는 상대다. 전력으로 도망친다.
의문이 커지는 것과 반대로 시간은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설휘는 빨리 선택해야 함을 느꼈다.
정말로 적이 있다면.
그리고 자신이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상대라면.
싸워도. 도망쳐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일단 대화로 풀어보자. 말을 건다.’를 선택하셨습니다.>
팟!
“분대장?”
수하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던 그때. 설휘는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만 나오시지.”
본인도 말도 안 되는 걸 알고 있었다.
도착한 지 한 식경이나 지났을까? 그 짧은 사이에 어떻게 적이 자신들을 발견했단 말인가.
과거의 기억엔 적어도 자정이 넘었을 때 발각이 되었다.
건물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의아한 표정의 수하들과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설휘.
잠시 짧은 순간이 지나가자 설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그렇지. 여기에 있을 리…….”
“여기에 제법 한가락 하는 놈이 있었구만.”
“……!”
그때 열린 문으로 걸어 들어오는 정체불명의 노인.
순간적으로 보름달의 빛이 우측 옷섶 아래를 훑고 지나갔다.
“너는…….”
설휘의 침음이 길게 늘어졌다.
반사된 도복의 그림.
그것은 화산파의 상징 매화(梅花)였다.
* * *
‘어떻게…….’
설휘는 충격을 받은 듯 서 있었다.
중문에 도착해서부터 멈추지 않고 계속 아래로 내려왔다.
임무와 상관없는 지역까지 멀어졌는데 화산파 구종명 장로가 이곳에 온 것이다.
마교 내 위험수위 1급.
매화검수의 최상위 실력자 구종명 장로의 용모파기를 수하들 역시 모를 리 없었다.
“이거 왠지 나를 알아보는 듯한 표정들인데?”
백발의 노인은 편안해 보였다.
벽에 어깨를 기대는 모습은 여유로움이 지나칠 정도.
설휘가 물었다.
“어떻게 우리가 여기 있는 줄 알았나?”
“응?”
구종명 장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피식 웃으며 설휘를 향해 말했다.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군. 내가 순찰하던 지역에 쳐들어온 건 너희들이 아닌가?”
“순찰지역?”
설휘의 눈이 커졌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그가 순찰하던 지역이라니?
“긴말 필요 없지. 무슨 이유로 여기에 온 건지 모르겠지만, 마교인 새끼들은…….”
철컥.
자연스럽게 검을 들어 올리는 구종명.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싹 다 쳐 죽여야지!”
“쳐!”
수하들이 다급히 외치며 달려들었다.
설휘도 황급히 검을 뽑았다.
그와 동시에…….
착란을 보았다.
촤아아악!
눈앞에 어른거리는 흰색 광망(光芒).
패애애액!
사방에 휘몰아치는 시뻘건 핏물.
수욱!
그리고 어느새 뭔가가 자신의 복부에 파고들었다.
“어, 커억…….”
찰나. 아니, 그보다 더 짧았다.
단 한 순간도 상대의 움직임을 쫓아가지 못한 것이다.
그는 전광석화처럼 여섯 명의 수하들의 목을 베고 자신의 복부까지 검을 찔러 넣었다.
“느려 터진 새끼들. 뭐 이리 약해?”
구종명은 비아냥거리며 바닥에 침을 뱉었다.
“어…… 어…….”
“하기야 대장이란 놈이 이리 병신이니 무슨 말이 필요할까.”
비웃음.
그리고 멸시와 조소.
압도적인 무위에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설휘가 고개를 짓쳐 들었다.
“너…… 알고…… 있……었지?”
“뭘 말인가?”
“우리가 온……다는 거……. 그렇지 않고…… 말이…… 안 돼…….”
“뭐라는 거야? 이 병신이.”
구종명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짜증난다는 듯 장검을 빠르게 빼내고.
“욱!”
다시 한번 설휘의 복부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설휘의 몸이 아래로 꺾이자 빠르게 머리를 낚아채 들어 올렸다.
피로 범벅이 된 얼굴과 설휘의 눈.
상대의 시선과 맞춰질 때쯤 한기가 감도는 그의 눈빛이 들어왔다.
귀를 의심할 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너, 어떻게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