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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육성 시물레이션-4화 (5/379)

4화. 처음부터 시작한다 (4)

자연스럽게 든 생각이다.

상식을 벗어날 정도의 빠른 추적.

여기에 올 날짜. 거기다 도착하는 시간까지 정확히 알고 있지 않으면, 자신들 앞에 이런 식으로 나타날 수 없을 것이다.

“……끄끅.”

설휘는 온몸을 떨어댔다.

극심한 통증에 눈앞이 흐릿해져 더는 구종명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뭐, 이미 알았으니 말해주지.”

신음을 토해내는 설휘의 귓가에 구종명이 속삭였다.

“잘 생각해봐. 한쪽은 실적을 올려서 좋고, 다른 한쪽은 거치적거리는 놈 제거해서 좋고. 서로 좋은 거잖아?”

“……으……으으.”

“그러고 보면 너도 참 독특한 놈이야. 상관에게 항명하는 마인이라니. 응? 이봐 너……?”

설휘의 눈가로 피가 흘러내렸다.

고통 때문에 이미 각막이 터져버린 것이다.

“크하하하! 명색이 마기를 다룬다는 놈이 질질 짜기는! 흘흘. 아니. 그래도 고마운 놈이지. 내 실적을 올려줬으니까.”

처억.

구종명은 검을 높이 쳐들었다.

“이제 떠나야지.”

‘부탁한다…….’

설휘는 기도했다.

자신이 원한 건 이게 아니었다.

이렇게 덧없이 죽는 삶을 바란 게 아니었다.

이대로 죽기는 너무 억울하다.

“잘 가라. 비객조 분. 대. 장.”

‘제발 내게 한 번만 더…….’

천천히 움직이는 검을 보며 빌었다.

다시 한번.

다시 한번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정말로 다른 삶을 살 수 있기를.

‘씨발놈아. 다시 나타나 달라고오오오!’

페애앵액!

스팟!

설휘의 감각은 사라졌다.

천천히 눈에 들어오는 건 천장.

바닥을 나뒹구는 수하들과 함께 제멋대로 바뀌는 공간이 보였다.

그리고.

또렷해지는 문자도.

<아직 한 번의 기회가 남았습니다.>

처음엔 생경했었다.

몇 번이고 본인에게 되물었던 적도 있었다.

▶ 처음부터 시작한다.

▷ 계속 이어서 한다.

▷ 저장한 지점을 불러온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설휘는 더 이상 의심도 고민도 하지 않았다.

10…… 9…….

시간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건 안 된다.’

설휘는 냉정히 상황을 분석했다.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또다시 이런 상황이 오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자신은 마교를 떠날 수도, 그럴 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 어떡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내가 살아날 수 있는 건가?

그런 고민이 드는 순간 눈앞의 세 가지의 목록 중.

마지막 지문이 눈에 들어왔다.

▶ 저장한 지점을 불러온다.

‘저장?’

저장이란 뜻이 무엇인지 의문을 품는 순간 자연스레 설명이 눈에 보였다.

저장 : 기록했던 삶.

그리고 자연스럽게 선택됐다.

[빈 저장 공간]

[빈 저장 공간]

[빈 저장 공간]

<설휘 님께서 ‘저장’하신 기록이 없습니다. 이전 화면으로 돌아갑니다.>

‘무슨 말이지?’

뭔가 이해할 수 없는 설명들.

그리고

▶ 처음부터 시작한다.

▷ 계속 이어서 한다.

다시 이전의 장면으로 돌아왔다.

더구나 저장한 지점을 불러온다는 지문은 사라져 있었다.

‘시간이 없어. 시간이!’

설휘의 눈은 이제 다음을 향하고 있었다.

▷ 처음부터 시작한다.

▶ 계속 이어서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결정했다.

<‘계속 이어서 한다.’를 선택하셨습니다.>

스팟!

설휘는 지문을 선택하고는 다음을 기다렸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잔뜩 긴장을 한 채로.

그런 그의 눈앞에.

천천히 새로운 지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어가기가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를 1회에 한하여 설명해드립니다.>

띠링!

<상대의 무공이 자신을 압도하거나 도저히 대화로 풀 수 없는 경우에는 이어가기가 불가능합니다.>

‘뭐?’

눈앞에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나온 말이 설휘의 시선을 다시 붙잡았다.

<몇 가지 설명과 함께 지금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 제법 한가락 하는 놈이 있었구만.”

시간이 조금 전으로 돌아갔다.

구종명이 등장함과 동시에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여섯 명의 수하.

놀랍게도 창가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도 그림처럼 멈춰 있었다.

<좀 더 먼 곳에서 이 지점의 지형을 파악해보겠습니다.>

갑자기 시야가 목옥 지붕을 뚫고 하늘 위로 주욱 올라갔다.

그리고 수백 장이나 올라간 그때.

수십 리 광경이 한눈에 펼쳐졌다.

자신과 수하, 구종명이 있는 목옥의 건물이 손톱처럼 작아 보일 만큼.

마치 하늘을 나는 매가 되어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동서 방향으로 이십여 명의 화산파 무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또한, 남쪽 십여 리 근방에 맹의 무사 삼십여 명이 순찰을 돌고 있습니다.>

‘언제 이렇게 많은 인원이 따라왔던가?’

설휘는 정말로 신(神)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태산처럼 치솟은 허공에서 ‘그것’은 자신에게 수많은 정보를 알려주고 있었다.

<이 건물에서 도망친다고 해도 살아날 가능성은 없습니다. 다시 이전 상황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여기에 제법 한가락 하는 놈이 있었구만.”

이전처럼 구종명이 말을 내뱉자 또다시 장면이 멈췄다.

동시에 기록처럼 펼쳐지는 문장들.

<상대의 공격 무공은 총 열두 가지로 나뉩니다.>

매화검파(梅花劍切) 공격 피해 5,400만

매화절후(梅花絶後) 공격 피해 2,200만

양오검(養吾劍) 공격 피해 7,570만

광풍쾌검(狂風快劍) 공격 피해 3,500만

……중략

<설휘님의 공격 무공은 총 두 가지로 나뉩니다.>

마천검(魔劍天) 공격 피해 1,002

흑마칠검(黑魔七劍) 공격 피해 1,524

설휘는 지금 뭐가 뭔지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이해하려 하지 않고, 보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무공으로는 어떤 수단을 써도 이길 수 없는 상대입니다. 처음 화면으로 돌아갑니다.>

▶ 처음부터 시작한다.

‘…….’

처음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문이 하나만 남아서인지 임의로 선택이 되었다.

<처음부터 시작하기를 선택하셨습니다.>

임시 저장된 파일.

‘태황각주 독대 전’으로 돌아갑니다.

* * *

눈을 뜬 설휘.

주위를 가늠할 정도의 희미한 빛이 보였다.

동시에 우뚝 솟은 연무장 위에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하하…….”

설휘는 백석이 깔린 바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분명 목이 날아갔는데 살아 있다.

싸움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복장도, 몸 상태도 그대로다.

“귀신이라도 씐 건가…….”

그럴지도 모른다.

벌써 이 같은 상황을 두 번째 맞이했으니까.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었으니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군.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설휘는 알았다.

이런 상황이 계속 이어지지 않을 거란 걸.

죽기 전, 한 번의 기회라는 문구를 똑똑히 보았다.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던 그는.

어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대로 계속 있으면 안 돼.”

여기 계속 앉아 있으면 곧 그놈이 온다.

흑월대장 적명이.

파파팟.

설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연무장을 벗어났다.

* * *

설휘는 태황각 뒷문, 어느 건물 앞에 서 있었다.

그가 여기에 온 건 이곳 한구석에 비치된 면경(面鏡-거울) 때문이었다.

Coin 1 [마지막 기회]

자신의 머리 위에 떠 있는 글자가 보인다.

강에서 본 글자와 달리 너무도 또렷하게 수놓아 져 있었다.

“앞으로 어떡해야 하는가…….”

마음 같아선 이곳을 벗어나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본교의 추적을 받게 된다.

운이 좋게 따돌린다고 하더라도 중원에 가서 살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야 해.”

설휘는 이를 악물었다.

사방에 모두가 적이다.

피할 수 없고 이길 수 없는 상대와 싸워야 한다.

한동안 고민하던 설휘가 움직였다.

그가 향한 곳은.

의아하게도 사마귀가 있는 태황각이었다.

* * *

“비객조 분대장 설휘가 뵙기를 청합니다.”

설휘는 태황각 문 앞에서 입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들어오라.”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고, 설휘는 태황각주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왔는가.”

예상대로 방 안에는 태황각주 사마귀, 오천각주 당초인이 앉아 있었다.

투욱.

설휘는 이전과 달리 급히 머리를 바닥에 처박으며 부복했다.

“비객조 분대장. 태황각주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

“…….”

잠시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사마귀가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제가 말씀드렸지요? 저 아이가 바로 설휘라는 자입니다.”

“호오, 그래요?”

예상했던 대로 여기까지는 같았다.

그리고 처음 듣는 반응이 나왔다.

“제법 싹수가 있어 보이는데요?”

“허허. 그리 보셨습니까?”

‘상황이 이전과 달라졌어!’

설휘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번에는 대놓고 먼저 엎드렸기 때문일까?

예전과 달랐다. 저들의 비아냥이 날아오지 않았으니까.

별것 아니지만 적어도 설휘에겐 커다란 변화였다.

“흠흠. 그건 그렇고. 거기 자네.”

사마귀가 운을 떼며 화제를 돌렸다.

“천일관(天日官) 내 서기관을 맡을 생각은 없나?”

‘천일관.’

예전과 똑같은 얘기다.

이 제안을 받게 되면, 오히려 난주 접경지 정찰 임무에 투입된다.

쿵!

잠시 고민하던 설휘는 바닥에 머리를 찍었다.

“아닙니다. 태황각주. 감히 저 따위가 그런 귀한 곳이라니요. 저에겐 어울리지 않는 자리입니다.”

“오, 그래?”

설휘의 반응을 보던 사마귀는 조금 의외였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당초인도 미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쓰읍.

사마귀는 탁상 위에 놓인 차를 한 잔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뭐, 아무렴 좋다. 그나저나 이번에 임무를 하나 줄까 하는데…….”

설휘의 눈이 번뜩였다.

“각주. 사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다렸다.

<아래 지문을 보고 선택하세요.>

바로 이 선택의 순간을.

▷ [어떤 임무라도 따르겠습니다.]

▷ [다른 임무를 받고 싶습니다.]

▶ [오른팔을 자르겠습니다.]

설휘는 재빨리 마지막 지문으로 시선을 내렸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이미 죽는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이것밖에 없었다.

만약 안 된다면 그뿐이다.

어차피 모두 빠져나갈 수 없는 운명이라면.

그 결과라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오른팔을 자르겠습니다.’를 선택하셨습니다.>

계속 진행됩니다.

“왜? 뜬금없이?”

사마귀가 곧장 물었다.

황당했는지 그의 눈썹이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간 저를 한번 돌아봤습니다. 감히 상승무공을 배우고 싶다고 주제넘은 소리를 했고, 겁도 없이 태황각주님의 집무실을 뒤진 적도 있었지요. 그게 생각이 났습니다.”

“…….”

“저는 몇 번을 죽었어도 마땅한 몸. 태황각주께 충성심이라도 보이고자 합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설휘는 설휘대로, 각주들은 각주들대로 뭔가 묘한 감정들이 오갔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깬 건.

“듣던 것보다 더 재미있는 아이군요.”

당초인이었다.

사마귀도 호기심이 일었는지 의자 모퉁이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럼, 어디 한번 해 보거라.”

“…….”

투욱.

사마귀가 던져주는 단검 한 자루.

설휘는 그것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

‘사마귀. 당초인…….’

철컥.

쇳소리와 함께 잘 벼린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왼팔로 그것을 집어 든 설휘는 자신의 오른팔로 가져갔다.

몸에 오한이 일었지만, 가까스로 이를 악물었다.

설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한 번이면 된다. 이번만 넘기면 어떻게든 길이 보일 것이다.

“크윽.”

설휘가 손에 힘을 주며 이를 악물었다.

어느새 사마귀가 건네준 단검이 자신의 어깨로 파고들고 있었다.

“……거기까지.”

피가 흥건히 바닥을 적실 때쯤, 사마귀가 나서서 제지했다.

그는 뭔가 마뜩잖은지 인상을 찌푸린 채로 고개를 저었다.

“쯧쯧쯧. 망측한. 손님 앞에서 이 무슨 해괴한 짓이냐!”

“…….”

설휘는 손을 파르르 떨었다.

다행히 팔은 붙어 있었다.

힘줄이 끊어져 움직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돼버렸지만.

“크크큭. 제가 뭐랬습니까? 재밌는 놈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 설휘에게 두 노인의 웃음소리가 날아들었다.

“크하하! 정말 재밌는 놈이군요! 본교 창설 이래 저런 자는 처음일 겁니다. 크흐흐……!”

설휘에게 굴욕과 수치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해졌다.

참기 힘든 고통을 누그러뜨릴 만큼 이 순간을 똑똑히 눈에 새겨 넣고 있었다.

“허억. 허억.”

설휘는 이를 악물며 무릎을 꿇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약점을 잡히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던 그때.

“한번 맡아서 해봐.”

투욱.

사마귀가 패(牌) 하나를 던지며 말했다.

“과거에 천일관을 맡고 싶다고 하지 않았느냐? 거기 가 보라고.”

‘아, 이것이었나!’

설휘는 고개를 숙였다.

세 개의 지문.

그 지문 중 자신이 살 수 있는 방법은 결과적으로 가장 마지막 지문이었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래그래. 잊지 말라고. 저 병신. 하하.”

“하하하. 푸흐흐흐!”

뭐가 그리 재밌는지 사마귀와 당초인은 서로를 쳐다보며 방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웃어댔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서는 설휘.

그는 도망치듯 방문을 한 손으로 닫으며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내 잊지 않을 것이다.”

설휘는 태황각까지 걸어 나온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조금 전 방문했던 태황각 집무실을 뒤돌아보며 이를 악물었다.

“내 절대 잊지 않을 것이야.”

반쯤 잘려나가, 불구가 된 오른팔.

그곳을 부여잡으며 혼자만 들을 수 있게 씹어 내뱉었다.

“이 두 개새끼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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