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마공을 익히다 (1)
“이름.”
“설휘입니다.”
“나이.”
“스물아홉입니다.”
“경력은.”
“비객조 8년 차입니다.”
“천향소(天香小)에서는 몇 등 했는가?”
천향소는 마교 내 기초교육을 가르치는 기관이다.
타고난 자질과 근골.
복합적인 인내심과 끈기, 노력을 점수로 체계화해 검증하는 곳.
마인이 되기 위해 한 해 천 명 정도가 본교에 들어온다.
“십이(十二) 등이었습니다.”
“뭐?”
슥.
사무관 두홍(頭紅)은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고작 이런 허름한 곳에서 최상위 등급을 보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문득.
입구에서 붙어오는 바람결에 한쪽 어깨가 축 처져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너 오른팔이…… 왜 그래?”
보고서를 작성하던 두홍의 고개가 올라가자 설휘가 답했다.
“사고가 있었습니다.”
“사고?”
두홍은 슬쩍 서류상의 추천인 이름을 읽었다.
그러다 고개를 저으며 다시 붓을 움직였다.
“뭐,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
두홍은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 이후로 더는 자세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우연인가. 아님 운명인가.’
한편 그를 바라보는 설휘의 감정은 복잡 미묘했다.
이곳에 오기까지 담담했던 그다.
그런 그의 눈앞에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 보이고 있었다.
<목숨 + 1>
자신을 두홍이라고 소개한 장년인.
그의 머리 위에 있었다.
한 개라는 숫자가.
* * *
“이곳이 네가 일할 곳이다.”
지하로 내려온 두홍이 입을 열었다.
설휘의 눈앞에 펼쳐진 수많은 책.
얼핏 봐도 수만 권에 달하는 많은 양이다.
“너는 앞으로 이 책들을 관리해야 한다. 정리는 물론이고, 파손된 것까지 다 책임져야 한다는 거다. 뭐냐? 하기 싫은가?”
“아, 아닙니다!”
설휘는 급히 부복하며 대답했다.
바닥에 널브러진 책들.
아무 곳에나 꽂혀 있는 책뿐만 아니라 찢기거나 유실된 것도 보였다.
“정리하기 전까지 밖에 나올 생각 마라.”
“알겠습니다.”
두홍은 뭔가 생각났는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예, 사무관님.”
“될 수 있으면 사람들 눈에 띄지 마라. 오래 살고 싶다면 말이지. 여긴 괴물들이 돌아다닌다.”
쾅!
그길로 그는 1층으로 올라갔다.
방문 닫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
잠깐의 정적.
침침한 지하 공간에 서 있는 상황인데도 설휘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눈엔 희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저자의 무공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이곳을 나가기 위해서.
아니, 그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목숨 하나가 필요하다.
이번 인생은 틀렸더라도.
다음 인생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 전에…… 이 몸으로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까?”
하필 불구가 된 손이 마공을 펼칠 오른손이다.
왼손으로는 한 번도 제대로 된 기술을 펼쳐본 적이 없었다.
“태황각주와 오천각주. 너희들은 모를 것이다.”
설휘는 주위를 바라보았다.
수없이 펼쳐진 비급들.
주로 원류를 알 수 없는 기초무공서와 잡서(雜書)들일 것이다.
총 12층으로 이루어진 천일관 지하에 상승무학 같은 비급이 있을 리 없다.
“상승무학 같은 건 필요 없다. 두홍 저자를 이길 수 있는 비급만 있다면.”
천천히 고개를 드는 설휘.
그는 끝도 없이 늘어선 책장을 보며 눈을 부라렸다.
“다시 도전할 것이다. 이번 삶을 바쳐서라도.”
* * *
척. 척. 척.
지하 입구 쪽부터 책장이 하나씩 채워지고 있었다.
한 손이라 그런지 움직임은 느렸지만, 눈빛만은 뜨거웠다.
이제껏 마공서라곤 기초교육 때 배운 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건 또 뭐야? 맥심(脈深)?”
바쁘게 정리하던 중에 집어 든 책 하나.
설휘는 왠지 모르게 눈길이 갔다.
흐를 맥(脈)에 깊을 심(深)이라.
뭐가 깊다는 거지?
설휘는 몇 장을 넘겨보지도 않고 책장에 꽂아 넣었다.
뭔가 비범한 마공서인 줄 알고 집어 들었건만, 펴보니 평범한 춘화도(春夏桃)였다.
“대체 얼마나 더 해야 하는 거냐…….”
투욱.
잠시 동작을 멈춘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몇 시진 동안 작업을 했지만, 여전히 정리할 양은 방대했다.
얼마나 많은 서책이 있는지 아직 티도 나지 않았다.
“그나저나…….”
잠시 한쪽에 앉아 휴식을 취하던 설휘는 잠시 예전의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정확히는 죽기 직전의 장면들이었다.
“저장된 지점이라고 했지.”
설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기록했던 삶.
그것을 저장이라고 했다.
“그 말은 나의 삶을 기록할 수 있다는 말인데…… 그럼 기록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지?”
그것이 설휘의 궁금증이었다.
저장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떤 상황에 부닥쳐야 저장이 되는가?
“그게 아니지.”
그 생각을 하던 설휘는 실소가 터졌다.
“적어도 지금은 저장할 순간은 아니다. 외팔이 병신일 때를 저장해 놓고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면 안 되잖아.”
적어도 이 순간은 아닐 것이다.
불러온다는 말이 저장한 삶을 불러온다는 뜻이라 생각해보면.
현재 자신은 완전히 망한 인생이지 않은가.
“후우, 우선 일이나 하자.”
설휘는 무릎을 딛고 일어섰다.
오른쪽 어깨의 간헐적 통증 때문에 입꼬리 한쪽이 제멋대로 움직였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움직였다.
척. 척. 척. 척.
설휘는 바닥에 널브러진 책들을 주변에 널린 포대에 주워 담았다.
이후, 다시 책장 쪽으로 가지고 오려는 그때.
<어떤 무공을 익히시겠습니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지문이 나타났다.
▶ 소희마공(素熙魔功) (가능)
▷ 적수마공(赤手魔功) (불가)
▷ 초극마공(焦極魔功) (불가)
‘이게…….’
설휘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자신이 집어 든 포대 자루에서 오묘하게 빛나는 서책 하나가 보였다.
거기다.
“이번엔 움직여진다.”
몸이 멈춰 있지 않았다.
설휘는 고개를 들어 다시 지문을 바라보았다.
‘가능? 불가?’
가능이라 적힌 무공 하나와 불가능이라 적힌 무공 두 개.
세 개 중 하나만 선택 가능하다는 뜻인가?
‘그런데 어떻게 선택하지?’
설휘는 ‘초극마공’으로 시선을 내렸지만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이전에는 시간이 줄어들어 자연스럽게 선택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시간 자체가 없었다.
‘가만.’
설휘의 머릿속에 문득 한 생각이 스쳐갔다.
제일 처음 지문이 나오기 전에 나타났던 문장.
밀어서 잠금을 해제하라는 뜻이었다.
‘이렇게 했던 것 같은데…….’
지문을 바라본 채로 시선을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지문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됐다!’
<오른팔이 불구가 된 상태로는 익힐 수가 없습니다.>
“이런!”
밝아지던 설휘의 얼굴이 다시금 굳어졌다.
선택이 되었지만, 불가능하다는 문구가 뜬 것이다.
초극마공은 태황각주가 익힌 화온마공과 같은 뿌리의 무공이다.
본교에서는 못해도 상급계열이라 평가받는 마공이었다.
적수마공도 그렇다.
과거 전대 부교주 갈염기가 보조적인 용도로 익혀 유명해진 마공이었다.
“괜찮아. 다른 것도 있어.”
아쉬웠지만 설휘는 첫 번째 지문으로 시선을 올렸다.
소희마공은 뭔지 모르겠지만, 이것도 꽤 유용한 무공일 것이다.
유명한 무공 사이에 있는 걸 보면.
설휘는 삼수원교서(三秀原敎書)라고 적혀 있는 글귀를 한 번 바라보곤.
“어떻게든 되겠지.”
라며 소희마공을 선택했다.
<소희마공을 선택하셨습니다. 아래를 보고 원하는 방식을 선택하세요.>
▶ 검법(가능)
▷ 권법(가능)
▷ 보법(가능)
설휘는 곧장 선택했다.
전부 익히는 게 가능하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우선은 검법부터.’
<검을 이용한 검법을 선택하셨습니다. 영상을 보여드립니다.>
‘영상이라고?’
의문과 함께 생성되는 반투명 인영(人影).
사람이 아닌 그림자의 그것이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이럴 수가…….”
단순히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자세를 가다듬는 동작의 기수식부터.
서 있는 발의 디딤축.
그리고 자연스럽게 펼쳐내는 검로(劍路)까지.
심지어는 그림자의 입가에 허연 서리가 나타나며 호흡법까지 알려주었다.
그림자는 소희마공의 모든 초식을 하나하나 그려내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 소희검법 특성 기술표 ◆
대박검(大舶劍) : ↓↘ → ←, B (New)
전혀 의미를 알 수 없는.
기호도 함께였다.
* * *
팟. 파팟.
첫째 날은 동작부터 익히기로 했다.
예상대로였다.
소희마공 중 권법, 보법을 선택하니 반투명 인영이 나타나 모든 동작을 가르쳐주었다.
검을 뻗는 자세와 발을 내딛는 축.
어떤 동작을 취해야 하는지,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이 무공은 왼팔만을 사용하고도 무공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검법에 숙달하니, 권법과 보법은 익히는 데 훨씬 수월했다.
설휘는 삼수원교서란 책도 읽어보았다.
확실히 그냥 보았다면 결코 이해가 되지 않았을 문장들.
그런 부분들까지 그림자는 친절하고도 완벽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칠주야. 7일이 흘렀다.
그때쯤 설휘는 동작을 어설프게나마 따라 할 수 있었다.
“이게 뭐냐 하는 게 문제인데…….”
이제는 소희검법을 펼칠 때마다 떠오르는 기술표에 관심이 갔다.
분명 의미가 있는 기호 같은데, 어떤 의미인지는 추론이 되지 않았다.
“가만. 이것도 지문을 선택할 때처럼 하면 어떨까?”
그 생각이 들자 기술표를 응시하며 시선을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오호, 뭔가 생긴다!”
<참조하세요.>
(앞 →), (뒤 ←), (위↑), (아래↓) (우하단↘), (좌하단 ↙)
A = 오른손, B = 왼손, C = 오른발, D = 왼발
설휘는 곧장 새로운 문자가 뜨자마자 곧장 기술표에 대입해보았다.
대박검의 기술표.
참조하라는 ↓↘ → ←, B 이것에 대입해보면 아래, 우하단, 앞, 뒤 방향에 왼손이란 뜻이다.
“뭐든 해보자.”
정확히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건지는 몰랐지만 설휘는 일단 따라 해보기로 했다.
하다 보면 건질 게 있을 것이다.
그게 뭐가 됐든 간에.
* * *
“헉!”
한 달이 지났을 때였다.
설휘가 그림자를 따라 동작을 반복하던 와중에 그와 흡사한 기운을 펼쳐낸 것이다.
다만 완벽하지는 않았다.
그림자가 펼쳐낸 그 기운은 겹쳐진 책장을 뚫고 벽을 박살 낼 정도의 위력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책장을 뚫으며 사라져 버렸다.
대략 파악하기를, 그림자의 위력에 3할도 되지 않았다.
“왼손으로도 이 정도 위력이라니…….”
방금 펼친 검법은 소희마공의 힘이었다.
오른팔로 펼쳐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심대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대박검도 사용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위력 때문인지 설휘는 소희검법 특성 기술표에 자꾸만 눈이 갔다.
그가 한 달 동안 시도해 본 바로는, 어떤 방법으로도 대박검을 펼칠 수가 없었다.
왼손이라는 뜻은 이해하겠는데 방향의 의미가 뭔지 알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
그럼에도 좋았다.
생각지도 못한 기연으로 평생 얻지 못할 신공(神功)을 얻었으니.
잘하면 사무관이란 자와도 한 번쯤 싸움이 될 것 같았다.
“혹시 모르니 정리를 좀 해야겠군.”
그제야 설휘의 눈앞에 정리되지 않은 수많은 책이 들어왔다.
정리한다고 해놓고 여기서 너무 오랜 시간을 머물러 있었다.
한구석에 햇빛에 말린 곡식들이 없었다면 진작 끝내고 밖으로 나가려 했을 것이다.
“그전에 놓친 것이 있는지 한 번 더 봐야겠군.”
그는 구석진 탁자 쪽으로 걸어갔다.
자신이 익힌 삼수원교서, 그곳에 적힌 소희마공서를 보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책을 집어 들었을 때.
끼이이익.
문이 열리며 누군가 내려왔다.
설휘는 어떤 동작을 취할 새도 없이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어? 여기 사람이 있었군요.”
청년이었다.
마치 중원의 선비처럼 뒷짐을 쥔 채 유삼 자락을 흩날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이건 또…….’
설휘의 눈은 청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당혹스러움과 황당함.
난처함이 한데 뒤섞인 얼굴을 하고서.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이목구비가 또렷한 미공자.
고개를 갸웃거린 청년은 변성기가 채 지나지 않은 미성으로 물어왔다.
<목숨 + 10>
‘이럴 수가…….’
하나도 아닌 열 개다.
대체 이자는 누구기에 저런 표식이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아, 아닙니다.”
정신을 차린 설휘는 다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사마귀를 보좌하던 절정고수 흑비란 자도 목숨 네 개였다.
목숨 열 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자라면 누군지 몰라도 까마득히 높은 사람일 터.
“하하. 그렇게 예의 차릴 필요 없습니다.”
청년은 손사래 치며 해맑게 웃어 보였다.
그의 예상과 달리 척 보기에도 천진하고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보였다.
청년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그쪽은 어떻게 부르면 되나요?”
“……설휘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아. 네.”
청년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시선을 들어 재차 불렀다.
“그런데 설휘 님. 여기서 뭐 하고 계셨던 건가요?”
“책장 정리를 하란 명을 받았습니다.”
“아, 정리 중이셨군요.”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됐네요. 그럼 한 가지 여쭤볼게요.”
“무엇이든 말씀해 주십시오.”
설휘가 대답했다.
그 말에 청년은 뭘 찾으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요.”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삼수원교서란 책을 본 적이 있나요?”
<아래 지문을 보고 선택하세요.>
그리고 그때.
▶ 그 책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번 생에 처음으로 선택의 지문이 떴다.
▶ 제가 무공을 익혔습니다.
설휘는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지문은 두 개가 끝이었고.
공교롭게도.
▷ 그 책을 본 적이 없습니다.
▶ 제가 그 무공을 익혔습니다.
청년이 찾던 그 책은 설휘의 손에 들려 있었다.
차마 어떤 지문도 선택할 수 없게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