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마공을 익히다 (2)
설휘는 혼란스러웠다.
두 선택의 지문 중 어떤 것이 더 나은지 도저히 판단할 수가 없었다.
▶ 그 책을 본 적이 없습니다.
청년이 찾는 그 책을 자신이 들고 있었고.
▶ 제가 그 무공을 익혔습니다.
무슨 의도로 찾으려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책 안에 쓰인 무공을 익혔다 할 수도 없었다.
8……7……
야속하게도 시간은 정해진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설휘는 판단을 계속 유보했다.
4……3……
공포감 때문이다.
두 개의 지문 중 하나는 자신의 목숨과 직결되리라는 두려움이 계속 엄습해왔다.
그만큼 청년의 존재가.
정확히 말하면 그의 머리 위 ‘목숨 + 10’ 이란 단어의 위압감이 엄청났다.
▶ 그 책을 본 적이 없습니다.
▷ 제가 그 무공을 익혔습니다.
‘하늘에 맡길 수밖에.’
최선이 아닌 차악을 고르는 선택에서 설휘는 첫 번째 지문으로 결정했다.
<‘그 책을 본 적이 없습니다.’를 선택하셨습니다.>
계속 진행됩니다.
“아, 본 적이 없으십니까?”
눈을 껌뻑거리며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장 시선을 돌리는 걸 보면 조용히 물러서려는 눈치다.
설휘는 혹시나 하는 불안감 때문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도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아, 그래 주시겠습니까? 어디 놓았는지 기억이 도통 나지를 않아서…….”
밝게 웃는 청년을 모습을 보고 나서야 설휘는 겨우 안도했다.
다행히 고비는 넘긴 듯했다.
자신이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눈여겨보지 않는다.
짝!
“아, 어디 놓았는지 이제야 생각났습니다.”
설휘가 벗어나려고 몇 발짝 걸을 때 청년이 손뼉을 치며 반응해온다.
“어, 어딥니까?”
설휘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까 싶어 되물었고, 그 말에 청년은 표정이 확 굳어졌다.
“네가 들고 있잖아.”
“……!”
한순간.
숨쉬기 힘들 정도의 정적이 흘렀다.
처억.
한 발짝씩 걸어오는 청년.
그 모습을 굳은 얼굴로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설휘.
“하하하!”
그런데 청년이 갑자기 자리에 서더니 크게 웃기 시작했다.
웃음소리는 지나치게 길었고, 지저분했다.
“농입니다. 제가 짓궂게 장난을 좀 쳐봤습니다.”
“……예?”
“아, 이번에 처음 오셨다고 하셨지요. 잘 부탁합니다. 저는 부일기(夫一麒)란 사람입니다.”
청년은 재밌다는 듯 싱글벙글이었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설휘를 향해 가볍게 목례 후, 돌아섰다.
정확히는 수십 개의 책장. 그중 한곳으로 이동한 것이다.
‘대체 이자는…….’
설휘는 그저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거부감이 들 정도의 웃음.
그리고 의도적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는 행동
의심스러운 것이 한두 개가 아닌 인물이다.
어린 나이에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천일관을 제집 드나들듯이 할 수 있는 것도 그랬다.
‘우선 책부터.’
설휘는 급히 생각을 접고는 옆 책장으로 이동했다.
또 말이 나올까 싶어, 들고 있던 책을 꽂아 넣기 위함이었다.
* * *
“……그러니까 태황각주의 추천으로 이곳에 오셨다고요?”
두 식경이 지났을 때였다.
한쪽에서 조용히 침묵하던 청년, 부일기가 물어왔다.
“예. 그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바로 옆.
주변의 책을 정리 중이던 설휘가 대답했다.
“의외군요. 그 영감. 따로 누구에게 부탁할 성깔은 아닌데 말이지요.”
순간, ‘그 영감’이란 말에서 설휘의 미간이 좁혀졌다.
젊은 나이와 각주보다 더 높은 서열.
이 정도 정보만으로도 그의 존재를 유추할 수 있는 조건이 생긴 것이다.
“아닙니다. 저에게 잘해주십니다.”
설휘는 대충 얼버무렸다.
괜히 솔직히 고했다가 난처한 상황을 맞이할지도 모르니까.
“아, 그렇게 잘해줘서 무인의 생명이라는 오른팔을 스스로 불구로 만드셨습니까?”
“……!”
설휘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휙 돌아갔다.
청년은 시선은 여전히 책에 향해 있었다.
대충 자신이 무슨 반응을 할 것인지 예상했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아, 미안합니다. 신상 내력을 보려고 한 건 아닌데. 서기관으로 오신 분이 궁금해서…… 허허.”
말과는 달리 누가 봐도 전혀 미안해하는 모습이 아니다.
아니 그것보다 애초에 여기에 온 목적을 잊어버린 듯했다. 책을 찾으러 왔다더니 전혀 연관 없는 책만 붙들고 있었으니까.
“뭐, 그래도 목이 아닌 게 어딥니까? 똥 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훨씬 좋지요. 다만 앞으로 본교의 신공을 익히기는 포기하셔야겠지만요.”
‘이놈…….’
설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건 대놓고 자신을 자극하는 발언을 쏟아내고 있었다.
마치 그물에 한번 걸려보라는 듯.
‘넌 대체 누구냐…….’
청년의 장난이 도를 넘을수록 설휘는 본교의 핵심기관들을 되짚고 있었다.
사원(四院) 팔전(八殿).
이 12개의 기관들이 본교의 핵심이다.
그 아래로 떠받드는 기관이 바로 5각(閣)과 9당(黨)이 있다.
그렇다면 태황각주보다 서열이 높은 인물 중에서 찾으면 되는데…….
“생각이 잘 안 나시죠?”
탁.
그때 청년이 책자를 덮는 소리가 났다.
설휘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로 쏠렸다.
“예? 무슨…….”
“젊은 나이에 태황각주를 영감이라 부를 수 있는 인물이 말입니다.”
독심술을 쓰는 것일까.
설휘는 안색이 확 변했다.
“아닙니다. 제가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괜찮습니다. 자연스러운 과정이니까요.”
투욱.
청년은 책을 집어넣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말씀해보시지요.”
“……예? 어떤?”
“소희마공. 어디까지 익혔습니까?”
“……!”
또다시 노려보는 청년.
웃음 사이에 미묘한 감정의 그림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설휘는 그를 똑바로 마주 볼 수 없었다.
‘정말 알고 있는 건가?’
선뜻 입이 열리지 않는다.
아니면 그냥 던지는 말인지 아닌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빠르게 마음을 다잡은 설휘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그래요?”
“예. 저는 오른팔을 쓰지 못합니다. 아시겠지만 기본적으로 무공이란 인간의 음양오행(陰陽五行)을 바탕을 두고 익히는 겁니다. 기(氣)를 단전에 축적하는 것도 몸의 중심이 바로 서야 가능합니다. 불구의 몸인 제가 감히 익힐 수 있는 무공이 있겠습니까?”
설휘는 자신이 아는 무공 지식을 총동원하여 그를 설득시키려고 노력했다.
사실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을 둔 얘기이기도 했다.
“아, 알겠습니다. 뭐 그렇게 인상까지 쓰며 말씀하실 필요까지야…….”
청년의 반응에 설휘는 자신의 말이 통했다고 믿었다.
물론 다음 말을 듣기 전까지.
“다만 그 말이 사실이 아닐 시…….”
“…….”
“당신은 저를 농락한 겁니다.”
설휘는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청년의 말투.
대화를 나눌수록 웃음과 진지함이 구분되지 않는 그것은.
심장을 조여 오는 공포감을 주고 있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뒤돌아서는 청년의 목례를 보더라도 그렇다.
예를 차리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방심을 노리는 시퍼런 비수 같이 느껴졌다.
저벅 저벅.
청년이 걸어 나가는 모습을 보며 설휘는 그제야 안도했다.
일단 급한 위기는 피했다고 생각하는 그때.
‘응? 왜 안 나가는 거지……?’
또다시 청년이 걸음을 멈췄다.
아니. 멈춘 게 아니다.
<아래의 지문을 선택하세요.>
갑자기 그것이 나타났다.
굳이 대화를 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도리어 자신이 말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뭐야 이게!’
그리고 설휘는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고민하는 동안 예상하지 못했던.
전혀 고려하지도 않던 인물이.
지문의 하나로 떠오르는 것이다.
▶ 천마 넷째 제자 곤마(坤魔) 님이 아니십니까?
천마 넷째 제자라니.
무려 서열 30위.
무공 서열로는 초절정에 육박하는 인물이 여기서 왜 언급이 된 것인가.
▶ 사실 찾으시던 책의 소희마공을 제가 익혔습니다.
‘이런!’
두 번째 지문이 뜨는 순간 설휘의 신경이 곤두섰다.
조금 전 청년이 소희마공을 익히면 자신을 농락한 거라는 그 지문이었다.
▶ 당신도 내 처지와 그리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만?
‘대체…….’
마지막은 설휘를 더욱 당황케 했다.
이건 쳐다볼 필요가 없다.
절대로…….
절대로 해선 안 되는 지문이 나왔다.
▶ 천마 넷째 제자 곤마(坤魔) 님이 아니십니까?
▷ 사실 찾으시던 책의 소희마공을 제가 익혔습니다.
▷ 당신도 내 처지와 그리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만?
‘고민할 필요 없어.’
설휘는 빠르게 지문을 선택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천마 넷째 제자 곤마(坤魔) 님이 아니십니까?’를 선택하셨습니다.>
계속 진행됩니다.
뚜욱.
청년의 걸음이 멈췄다.
설휘는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에 따라 자신의 운명도 결정될 것이다.
혹여나 존재를 들켜서 안 되는 이유라도 있다면 최악의 상황도 간과할 수 없다.
계속 이어지는 침묵에 불안감을 느낀 설휘가 뭐라고 입을 열려고 할 때.
“제법이시군요.”
청년의 목소리가 정적을 먼저 깨버렸다.
긍정의 의미인가?
아니면 부정의 의미인가.
“어떻게 아셨는지 모르나, 특별히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겁니다. 저는 진즉에 권력 다툼에 밀린 놈일 뿐입니다.”
다행히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청년의 목소리에 기운이 없어 보이는 것이 뜻밖이라면 뜻밖이랄까.
“용서하십시오. 소인이 아무것도 모르고 결례를 범했습니다.”
설휘는 부복했다.
사실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어느 정도 유추는 가능했다.
총단에 복귀하지 않고 태황각 내에 있는 천일관 주변을 돌아다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으니까.
세간의 이목은 권력 최전선에서 쟁투를 벌이는 첫째, 둘째, 셋째 제자에 쏠려 있었다.
“후.”
청년, 곤마는 다시 갈 길을 갔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또다시 청년이 멈췄다.
가슴을 쓸어내리던 설휘의 눈이 부릅떠졌다.
<아래의 지문을 선택하세요.>
▶ 사실 찾으시던 책의 소희마공을 제가 익혔습니다.
▷ 당신도 내 처지와 그리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만?
‘대체 왜 계속 뜨는 거야!’
지문이 또다시 나타났다.
그것도 자신이 말했던 지문만 사라진 채로.
겨우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지문은 끝나지 않고 있었다.
‘제기랄!’
또다시 최선보다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사실 찾으시던 책의 소희마공을 제가 익혔습니다.’를 선택하셨습니다.>
계속 진행됩니다.
“아, 그래요?”
청년이 자연스럽게 반응해온다.
설휘는 식은땀이 흘렀다.
이제 상황을 어떻게 수습을 할 것인가.
“지금 죽고 싶은 거군요.”
“……!”
철컥.
청년이 칼을 빼 들고 천천히 뒤돌아섰다.
표독스럽게 변한 얼굴.
그 모습을 본 설휘는 직감했다.
자신이 결국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라고.
아니, 애초에 이건 이런 상황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그런데.
청년이 다가오고 있을 때쯤.
<아래의 지문을 선택하세요.>
그것이 다시 생성되었다.
▶ 당신도 내 처지와 그리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만?
선택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지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