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마공을 익히다 (3)
이쯤 되면 선택이 아닌 강요라고 봐야 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지문이 생성된 것이다.
580……579……578……
‘그러고 보니.’
문득 설휘의 눈에 들어오는 숫자가 있었다.
그것은 무려 세 자리의 시간이다.
최악인 선택을 강요받은 상황에서.
설휘의 눈에 시간이 각인되고 있었다.
499……498……497…….
그리고 그것은.
직감적으로 무언가를 알려주는 것 같았다.
마치 ‘이유를 찾으라’고 말하고 있는 사람처럼.
‘방법은 있을 것이다.’
마음을 다잡은 설휘는 다시 한번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빠져나갈 답변이 존재한다면.
한 가지 전제조건이 생긴다.
눈앞에 놓인 이 지문은 ‘최악의 선택’이 아닌 ‘최선의 선택’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만약 최악의 선택이라면 말 그대로 답이 없어야 하는 거니까.
‘지금껏 지켜본 과정이 그랬어.’
여기까지 살아 이곳에 올 수 있는 것도.
자신이 살아 있는 것도 여러 지문 중에 ‘최선의 선택’을 했기에 가능했다.
그렇다면 이 지문 역시.
▶ 당신도 내 처지와 그리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만?
최악이나 차악의 선택이 아닌
‘최선의 선택’일 것이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믿어야 했다.
462……461……460…….
설휘는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는 천마 제자를 상대로 어떻게 설득시킬지를.
분명히 답이 있을 거라 믿어야 했다.
그동안 최선의 선택을 해왔다면 지금 역시도.
432……431……400…….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399……398……397…….
계속.
355……354……
계속.
210……209……208…….
‘가만.’
설휘는 뭔가 의문점을 포착했다.
아니, 의문점이라기보다 하나의 장면이었다.
- 의외군요. 그 영감. 따로 누구에게 부탁할 성깔은 아닌데 말이지요.
호의적이지 않았던 청년의 말투.
설휘는 곤마에게서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가정’이란 전제하에 또 다른 형태로 갈라지고 있었다.
- 그런데 제가 누군지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다지 의미는 없을 겁니다. 저는 진즉에 권력 다툼에 밀린 놈일 뿐입니다.
권력 다툼에서 벗어난 천마 제자다.
그가 권력 다툼을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말은 정말로 진실일까?
워낙 자신은 말단이라 본교의 내부사정을 모두 다 알지 못하지만, 이것 한 가지는 안다.
적자생존.
본교는 오로지 강자존의 원칙에 의해 충성하는 곳이다.
- 당신도 내 처지와 그리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만?
그렇다면 이 지문이 나타내는 바는.
반대로 그 역시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였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힘을 갈구하는 그의 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그러하니까.
40……39……38…….
그리고 그건 다르게 생각해본다면.
그에게 ‘힘’을 줄 수 있다는 가정이 생긴다면 곤마의 분노를 누그러뜨릴 수 있다.
그 방법이 뭘까.
자신이 그에게 힘을 줄 수 있는 방법이.
21……20……19…….
‘그래. 구종명!’
그 순간 떠오른 인물.
그리고 그를 생각하니 자연스레 떠오른 태황각주.
회귀 전에는 얻을 수 없었던 정보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 너, 어떻게 알았지?
마교의 각주직을 맡은 인물이 정파의 인물과 내통한다.
이 사실은 ‘힘’을 갈구하는 그에게 줄 수 있는 정보일지도 몰랐다.
그것은 태황각주의 ‘약점’이었고, 바꿔 말하면 그의 힘을 이용할 수 있다는 걸 뜻하니까.
3……2……
‘부디 생각대로만…….’
설휘는 그제야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곤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운명의 시간이 왔다.
<‘당신도 내 처지와 그리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만?’를 선택하셨습니다.>
계속 진행됩니다.
“뭐라고?”
청년, 곤마는 주춤했다.
표정으로는 그의 감정을 알 수 없었다.
어찌 보면 당황한 것 같기도 했고, 분노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화가 난 거다.’
지이이잉-!
그의 검 끝에 맺힌 짙푸른 마기가 피어오르자 설휘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이 정도로 분노하는 상대를 설득시킨다는 건 상상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시도는 해봐야 했다.
통하기만 한다면.
자신 역시 또 한 번 인생을 바꿀 수 있으니까.
“곤마 님께서는!”
투욱.
한순간 상대의 움직임이 멎었다는 걸 설휘는 감지했다.
“곤마 님께서 천마 님의 선택을 받을 때는 이미 다른 제자들이 지지기반을 다져놓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떠한 노력을 하셨다고 하더라도 쉽게 격차를 좁힐 수 없었을 겁니다.”
다른 제자들은 최소 10년이 넘는다.
그에 반해 곤마가 천마의 선택을 받은 지는 고작 5년.
후발주자가 선발주자를 잡기도 쉽지 않은데, 다른 제자들은 지지기반까지 다져놓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넷째 제자님은 오로지 본인의 능력으로 위기를 극복하셨습니다. 암살에 특화된 밀영대(密永隊)를 포섭하셨다는 건 마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처억.
땅을 보고 읊던 설휘의 목소리가 멈췄다.
어느새 그의 옆.
곤마의 칼날이 목을 겨누고 있었다.
“말 돌리지 마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내 말을 듣는다.’
설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희망을 보았다.
충분히 자신을 죽일 수 있음에도 그가 검을 멈춘 건.
‘자신의 처지와 같다’는 말을 왜 꺼냈는지 궁금하다는 것이다.
“태황각주를 포섭하십시오.”
“……뭐?”
곤마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설휘가 바닥에 부복했다.
“태황각은 홍마원의 핵심지부입니다. 태황각을 잡으면 총단의 핵심기관 중 하나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저를 보러 오신 게 아닙니까?”
“……!”
멈칫.
칼을 쥐어 든 곤마의 검에서 마기가 사라졌다.
순간, 설휘의 눈빛도 변했다.
“곤마 님께서는 삼수원교서란 책을 찾으러 오신 게 아닙니다. 아니, 처음부터 삼수원교서란 책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그랬다면 이미 책을 찾아 밖으로 나가셨겠지요.”
가만히 내려다보는 곤마.
설휘는 더욱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애초에 천마 제자께서 이곳에 온 이유가 무얼까. 나에게 말을 계속 붙이는 이유가 무얼까. 단순히 책을 찾기 위해서는 아니었을 겁니다. 말단 중에서 말단인 저에게 말입니다. 그러던 중에 한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
“저를, 아니 정확히 말하면 ‘태황각주의 빈틈을 알 수도 있을 만한 인물’을 찾으러 온 것이란 것을요.”
곤마의 표정이 조금씩 변화했다.
그렇게 잠시 내려다보다.
그가 툭 하고 한마디를 던졌다.
“왜 그렇게 생각했나?”
그 말에 설휘가 고개를 들었다.
이 순간을 위해 기다렸던.
날카로운 한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태황각주가 저에게 주려고 했던 임무. 공교롭게도 그 임무에서 저만 빠지지 않았습니까?”
“……!”
* * *
천일관에 온 지 한 달이 지났다.
자신의 기억대로 흘러갔다면 당연히 수하들은 모두 죽었을 것이다.
사망 소식이 본교로 전해졌을 시간도 충분했다.
곤마 역시 그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화산파와 조우해 죽은 비객조 대원들을.
‘애초에 천마 제자가 날 만나러 올 이유가 없다.’
가장 큰 전제는 이것이었다.
그가 말단인 자신을 만나러 올 이유가 없다.
아니, 우연히 왔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관심을 줄 필요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 정도로 관심을 보이는 거라면.
분명히 ‘뜻하는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 전제로 추측한 것이다.
“하하하. 하하하하!”
곤마는 웃었다.
과할 정도로. 그는 웃고 있었다.
“정말이지…… 재밌는 놈이구만. 사마귀 영감이 널 싫어한 이유를 알겠어.”
그는 긍정인지 부정인지 모를 모호한 말투를 내뱉었다.
“뭐, 그래 좋다. 일단은 그렇다고 해두지.”
곤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휘를 응시했다.
“그래서 네가 그 빈틈을 만들어 줄 수 있다는 말이냐?”
설휘는 알고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을.
칼을 집어넣지 않고 있다는 건 아직 적대감이 남아있다는 거다.
“예. 그렇습니다.”
“그게 뭔가?”
설휘는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불쾌한 듯 곤마는 입꼬리를 올렸다.
“왜? 생각나지 않느냐? 말은 그럴싸하게 해놓고 인제 와서?”
곤마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아닙니다.”
“헌데 왜 얘기 안 하는 것이냐?”
“갈등이 생겼습니다.”
“갈등?”
곤마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그런데 설휘는 오히려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곤마 님께서 원하는 것을 드리면, 저는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뭐?”
와락 구겨지는 곤마의 얼굴.
하지만 설휘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물러설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고민해 왔던 것이다.
죽고 살아나기를 반복하고, 천일관 지하에 갇혀 있는 동안 수도 없이 생각했다.
더는 이대로 살 수 없다고.
눈앞에 보이는 ‘그것’이 원하는 대로.
끌려다니는 삶을 살 수 없다고.
“곤마 님. 저는 여기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러니 얻을 게 있다면 얻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안을 했다.
더 이상 끌려다니는 것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주어진 삶’을 끌고 와야 한다고.
“네 목숨 따위가 얼마나 가치가 있다고. 그리고 그 전에 내가 널 죽일 수도 있다는 걸 모르느냐?”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곤마 님의 시간과 노력을 아끼거나 혹은 좋은 기회를 안겨다 드린다면, 그 가치는 충분하지 않습니까?”
“내 시간과 노력이라고?”
“예.”
“…….”
곤마는 대답이 없었다.
고민하는 것 같았다.
팔짱을 낀 채 잠시 시선을 돌리는 것을 보니.
그렇게 조금 시간이 흘렀을까.
“만약 네가 가진 정보의 가치가 합당하면…….”
담담히 기다리는 설휘를 향해 곤마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에 걸맞은 보상을 해준다고 약속하마.”
설휘는 고개를 들었다.
드디어 이제 밝힐 시간이 된 것이다.
“태황각주의 빈틈은 화산파 구종명입니다.”
“…….”
이번에도 곤마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잠시 생각하는 듯 바닥에 시선을 내리는 것뿐.
“내통했다는 증거는?”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설휘에게 물어왔다.
“태황각주는 증거를 남길 노인이 아닙니다.”
“단순히 심증뿐이었나?”
“저에겐 단순히 심증이지만…… 곤마 님께서는 아닐 수도 있지요.”
“……?”
“인물이 한 사람으로 좁혀지면 심증을 증거로 만들 능력이 있지 않습니까?”
설휘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곤마에겐 그를 따르는 수많은 세력이 있다.
그리고 그중엔.
사건의 진상을 밝힐 신비의 고수들도 다수 보유하고 있을 것이다.
“자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설휘입니다.”
“설휘라…….”
곤마는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어느새 그의 눈높이가 설휘의 눈높이와 같아졌다.
“한번 확인해 보지.”
“아…….”
설휘는 짧게 신음했다.
걱정보다 살아났다는 안도감의 반응이었다.
“그전에 하나. 네가 해줘야 할 게 있다.”
“예? 어떤…….”
“적명. 그자를 죽여라.”
“……!”
설휘는 눈을 부릅떴다.
회귀를 하자마자 자신에게 주먹질해댄 인물.
태황각의 부대 중 하나인 흑월대장을 거론한 것이다.
“왜? 하기 싫으냐.”
“그건 아닙니다. 다만 이유가…….”
곤마는 비릿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너를 믿으려면 너부터 검증해야지. 네가 태황각주와 한패일 수도 있지 않느냐.”
그랬다.
그는 소문대로 의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그의 말 또한 당연한 것이다.
“할 수 있느냐?”
또다시 그의 질문.
설휘의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임무인 것이다.
“하겠습니다.”
설휘는 예를 갖추며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를 향해 의지를 다지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를 죽여 보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