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도구함을 생성하다 (1)
오늘 낮 오시. 태황각 정문.
하루가 지난 뒤 곤마가 찾아와 건넨 정보였다.
그리고 다시 신의 농간이 시작된 것일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새로운 무언가가 눈앞에 투영되었다.
<첫 임무를 얻었습니다.>
상태창이 활성화됩니다.
설휘는 놀라지 않았다.
상태창이라는 생소한 단어 역시도 무슨 말인지 굳이 의문을 표하지도 않았다.
뒤이어 올라오는 글자들이 ‘상태창’이란 걸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State, 상태]
설휘 [말단 조직 분대장]
신체 오른팔 불구 (행동 제약)
[Value, 수치]
체력 105/105
내공 240/240
[Skill, 기술]
핵심 무공 : 마천검운, 흑마칠검, 소희마공
공격 기술 : 미약한 검풍(劍風)
다만 설휘의 신경을 자극했던 건.
자신의 상태만이 아니라.
그놈 것도 함께 떴다는 사실이었다.
[State, 상태]
적명 [상부기관 소속 일개 대장]
신체 정상
[Value, 수치]
체력 1,404/1,404
내공 1,560/1,560
[Skill, 기술]
소유 무공 : 무영신공(無影神魔), 육각신퇴(六脚迅腿), 귀영자보(鬼影刺步)
공격 기술 : 검풍(劍風), 회선풍(回線風), 각풍(脚風)
방어 기술 : 운회보(雲回步)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렇게 돌아서던 곤마를 설휘가 붙잡았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천일관에 오시기 전, 곤마 님께서는 어디에 거주하셨습니까?”
“……그게 왜 궁금한가요?”
“제겐 중요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존대로 말투가 바뀐 곤마는 말없이 설휘를 내려다보았다.
어떤 의도가 있는지를 보려는 듯 응시했다.
“뭐, 저는 특별히 할 일이 없을 땐 천일관 꼭대기에 있습니다. 답변이 되셨습니까?”
그러다 굳이 숨길 이유가 없는지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그를 죽이고 다시 찾아가겠습니다.”
“그래요.”
그렇게 곤마는 떠났다.
남은 방에서 잠시 멍하니 있던 설휘의 손이 검을 향해 움직였다.
“곤마……. 너는 내가 적명을 죽일 수 없으리라 생각하겠지?”
비객조 분대장.
말단 중에서도 말단인 자신이 흑월대장을 쓰러뜨릴 수 없으리라 확신했을 것이다.
“그래서 날 없애버리기 위해 그와 싸우라고 한 것일 테고.”
천마 제자의 눈엔 다 거기서 거기지만 그래도 직급 자체가 다르다.
비객조는 임시 조직된 하급 중에 하급 무사들이지만, 흑월대는 태황각 내 정식으로 소속된 부대이니까.
“허나, 네가 크게 착각하는 것이 있다.”
그에게 음각된 글로 펼쳐진 활자가 눈에 들어왔다.
설휘는 그중에 하나를 눈여겨보았다.
“이 싸움에는 분명 내가 살 수 있는 방법이 있거든.”
[Value, 수치]
체력 1,404
적명의 능력 중 가장 낮은 수치.
물론 자신보다는 훨씬 높지만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체력이 가리키는 뜻.
자신이 이해한 것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저 수치가 없어지면 그는 죽음에 이를 것이다.
그리고 그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은.
기연인 듯했지만, 사실은 누군가 이끄는 것처럼 얻은 능력.
바로 소희마공에 있었다.
핵심 무공 : 마천검운, 흑마칠검, 소희마공
투욱.
설휘는 검을 쥐었다.
자신에게 걸린 저주.
허나 이 저주는 자신에게 길을 알려준다.
그 끝이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자신에게 나타난 많은 문자들.
결코 삶을 포기하지 말라고 말한다.
“기필코 살아 남아주마. 살아남아서…….”
설휘는 고개를 돌렸다.
곤마가 열고 간, 텅 빈 문.
그곳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너희들 위에 군림해주마!”
* * *
설휘는 소희마공을 펼쳤을 때 나타난 변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림자가 만들어낸 그것은 흡사 검기(劍氣)를 생성해내고 있었다.
물론 자신은 그 기운을 완벽히 구현하지는 못한다.
허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적명의 급소에 이 기운을 정확히 명중시킬 수 있다면…….
“핫! 합!”
설휘는 벽에 대고 기운을 뻗어냈다.
쩍! 쩌적!
돌로 이루어진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한 번 더 정신을 가다듬고 검을 뿌리자.
패액! 쾅!
균열이 가는 모습이 더 눈에 띄게 보였다.
“확실히 검풍과는 달라.”
꽤 긴 시간을 수련하던 설휘는 잠시 검을 내려다보았다.
결코, 이전 생에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능력이다.
검 끝에서 아지랑이처럼 퍼지는 이것은 그에게 또 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만약 내가 가진 모든 내공을 일시에 쥐어 짜낸다면…….’
그땐 지금보다 더한 위력이 나올 것이다.
혹 운이 좋다면 검기와 흡사한 기운을 펼쳐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시간이 됐다.”
설휘가 방문을 걸어 나오며 말했다.
문 앞에는 시간을 계산하기 위해 꽂아둔 긴 막대기가 보였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
곤마가 말했던 오시에 가까워진 것이다.
“설휘. 쫄 필요 없어.”
그는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두려움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어차피 몇 번 죽었던 인생이다. 그냥 덧없이 사라진다고 해도…… 그뿐이야.”
그는 검을 가슴팍에 당겼다.
허리춤이 아닌 가슴에 붙이듯 당기는 이유는 일초필살을 위해서다.
기습도 기습이지만, 적명을 만나면 검을 뽑을 여유 따위는 없을 테니까.
파팟.
그렇게 설휘는 태황각 정문으로 몸을 움직였다.
운명의 시간이었다.
* * *
사람이 언제 긴장을 풀까?
식사를 할 때일까?
아님 사랑하는 연인을 만날 때?
그것도 아니라면 잠자리에 누울 때?
“지랄. 똥 쌀 때지.”
설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방법에 대해 더욱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놈은 똥을 오래 눈다.”
그것이 설휘의 생각이었다.
사실 그는 오랫동안 적명을 봐왔다.
심심하면 맞고, 따분하다고 맞고, 재수 없다고 맞았다.
그럴수록 그를 쓰러뜨릴 방법을 수없이 고민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답은 하나였다.
그가 가장 긴장을 놓는 변기 밑으로 기어들어 가서 없애버리기로.
어찌 됐든 그를 죽이는 것이 목표였다.
“여기가 최적의 장소야.”
건물 몇 채를 지나 설휘가 도착한 곳은 조그마한 언덕이었다.
향락실(享樂實).
이름 한 번 괴이한 편액 아래.
대충 걸린 오동나무를 사이에 두고 변소 대여섯 개가 있는 흑월대의 전용 뒷간.
“그를 발견하면 옷부터 벗는다.”
적명은 자신보다 고수다.
미묘한 움직임, 혹은 소리에도 반응하는 그를 상대하기 위해선 옷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똥통에 들어가야 더욱 인기척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그놈만 죽이면 끝나.’
설휘는 이를 악물었다.
더럽고 괴롭지만, 이번 한 번이면 된다.
한 번이면 그를 죽일 수 있다.
그는 언덕 아래가 보이는 곳에 몸을 숙이며 때를 기다렸다.
적명이 올라올 때를.
* * *
밤이 되었다.
설휘는 몸을 숨기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흑월대원으로 보이는 몇 명이 지나갔지만, 아직 그는 올라오지 않았다.
대체 그가 뭐 하는지 직접 찾아가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괜히 의심을 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응?’
저벅저벅.
때마침 소로길을 통과하는 인영 하나가 눈에 띄었다.
건물 사이마다 꽂혀 있는 황촉불이 보였지만 설휘는 그의 인상착의만 봐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왔다!’
파파팟.
설휘는 순식간에 옷을 벗어 미리 파놓은 땅속에 묻었다.
그리고 급히 향락실로 들어가 문 하나를 열고 변소 안으로 몸을 던졌다.
“윽!”
코를 막고 내려왔지만, 상상조차 하기 힘든 냄새 때문에 신음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적응해야 해.’
철퍽!
설휘는 끈쩍끈쩍한 똥 안으로 얼굴을 쑤셔 넣었다.
각오를 다져야 했다.
고작 냄새 때문에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스윽.
갖은 인상을 찡그리며 설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들고 있던 검을 부여잡으며 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끼이이익.
‘왔다.’
문 여는 소리에 설휘의 신경이 곤두섰다.
긴장감 때문인지 코를 찌르는 냄새도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음음.”
스르륵.
적명이 바지춤을 내리는 동작과 소리가 들리자 설휘의 눈이 주변을 살폈다.
‘어디냐. 어디서 싸고 있느냐.’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설휘는 귀를 기울이며 대상을 찾았다.
그리고 잠시 뒤.
철푸덕.
‘맨 우측이다.’
설휘의 눈이 빛났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 신중함이 스쳐 갔다.
‘천천히. 상대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움직여야 한다.’
스륵. 스륵.
철푸덕. 철푸덕. 콰카카직!
속이 안 좋은 건지 적명은 계속 똥을 갈겼다. 그럴수록 설휘는 더욱 신이 났다.
방귀 소리가 클수록 자신의 인기척을 가려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금 시간이 흘렀을까.
‘거의 다 왔다.’
설휘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그곳엔 희미하게 보이는 반달 두 개가 그의 눈에 투영되고 있었다.
‘한 번…… 한 번만.’
설휘는 내공을 모두 끌어올렸다.
정말로 한 번이다.
이 한 번에 모든 걸 쏟아내야 그를 죽일 수 있다.
천천히 검을 든 설휘의 눈에.
푸지지지직!
묵직한 무언가가 얼굴 위로 떨어졌다.
덜덜덜.
‘아아아…….’
설휘는 말없이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번엔 정말…… 위험했다.
생을 놓아버릴 정도의 위기였던 것이다.
‘이놈을 기필코 죽여야 해!’
하지만 반드시, 반드시 죽이겠다는 살심이 그의 이성을 붙잡고 있었다.
스윽.
다시 검을 고쳐잡은 설휘는.
단전에 모든 내공을 끌어올리며 검에 힘을 담았다.
그리고 소희마공의 구결대로 곧장 검을 뻗으려던 그때.
뽀오옹.
길고 굵은 똥 덩어리가 떨어졌다.
‘아씨!’
순간적으로 욕설이 튀어나왔지만, 설휘는 기지를 발휘했다.
고개를 뒤로, 그리고 반원을 그려 피해내고, 재빨리 검을 휘둘렀다.
그런데 의도치 않은, 괴이한 문자가 눈앞을 가렸다.
[대박검을 사용합니다!]
‘뭐야?’
갑자기 뜬 문자.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문자도 처음 보는 내용들이었다.
[절호의 기회! 적의 빈틈을 발견했습니다. 강력한 피해를 입힙니다!]
승낙과 함께 설휘의 몸이 그의 통제를 벗어나며 검이 움직였다.
‘아--- 안 돼!’
그것을 본 설휘는 절망했다.
검을 던지려 했는데, 갑자기 뭔가에 의해 막혀버렸고 이후, 단순히 휘두르게 돼버렸다.
기습도 하지 못한 데다, 상대가 알아챌 인기척을 내버린 것이다.
“커억!”
그런데도 손맛이 있었다.
적명의 엉덩이가 수박처럼 쪼개지는 광경이 눈에 포착된 것이다.
놀란 설휘는 똥물 속에서 자신의 검을 바라봤다.
신의 농간으로 검 끝에서 나오는 희미한 기운.
그것은 놀랍게도
검기(劍氣)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