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곤마가 제시하는 세 가지의 삶 (2)
무관도는 일개 하부지단이나 상부지단이 아닌 총단 내부에 있다.
본교를 대표하는 인재 양성기관으로 총단에서 직접 주관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태황각에서는 거리가 제법 멀어, 설휘는 거운이란 자와 꽤 오랫동안 동행할 수밖에 없었다.
적대감 : 77%(경고)
천마 첫째 제자의 부하. 세작(細作) (간첩)
‘첫째 제자가 언제 세작을 심어 놓았을까.’
설휘는 눈앞에 뜬 정보를 몇 번이고 확인했다.
독심술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어 놀라운 정보를 얻게 되었다.
이 정보가 사실이라면 곤마와의 관계에서 유리한 입지를 보장받게 된다.
‘아닐 리는…… 없겠지?’
괜한 염려가 들긴 했지만, 지금으로선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눈앞에 뜬 정보가 거짓을 말한 적은 없었다.
설령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자신이 그 진상을 파헤칠 입장도 아니다.
“여기다.”
투욱.
걸음을 멈춘 거운이란 자가 한 곳을 가리켰다.
그의 손짓 끝에는 팔각 모양의 장엄한 전각 하나가 보였다.
5층 크기의 본교를 대표하는 교육 양성소.
“안내가 끝났으니 나는 가겠다.”
거운의 대답에 귀찮음이 물씬 느껴진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말을 걸지도 않은 것도 그랬고.
“…….”
그가 그렇게 뒤돌아 갈 때쯤.
설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문자가 생성된 것이다.
▶ 곤마 님께 받은 비룡단 한 알을 더 내놓으시지요.
▷ 제게 하고 싶은 말이 있지 않습니까?
▷ [표정] 피식 웃는다.
‘…….’
설휘의 감정이 묘하게 변했다.
비룡단이라니?
이미 그에게서 비사단을 하나 얻지 않았던가.
이번 지문은 그 역시 조금 당혹스럽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표정? 뭐…… 어쩐다고?’
표정이란 단어의 의미가 강조된 것이 유독 눈길이 간다.
이건 대화를 거는 게 아니라 행동을 나타내는 뜻 같았다.
‘뭘 골라야 하나.’
3……2……
멈춘 시간이 끝나가자 설휘는 슬쩍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그리고 이내 하나의 지문을 선택했다.
<‘제게 하고 싶은 말이 있지 않습니까?’를 선택하셨습니다.>
계속 진행됩니다.
“뭐?”
투욱.
순간적으로 걸음을 멈춘 거운의 시선이 자신 쪽으로 이동했다.
노골적인 살기가 느껴진다.
“무슨 뜻으로 한 말이냐.”
거듭된 질문에 설휘는 그제야 그를 향해 눈을 맞췄다.
“그냥…… 의아해서 말입니다.”
“무엇이?”
“무관도는 특정 기관에서 선택된 자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촉망받는 실력자들뿐만 아니라 이미 완성된 실력자, 이를테면 일류를 넘어서는 실력자들이 대부분일 거란 말이지요.”
“그런데?”
“곤마께서는 제 실력이 어떤지는 잘 아실 겁니다. 처음에 제게 영약을 주신 것도 이곳에서 살아남기가 힘들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일 테니까요. 그래서 생각해보았습니다.”
“…….”
대답 없이 불편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거운.
설휘는 천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정말 이대로 가면 되는 겁니까? 내공 증진을 한 것만으로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겁니까?”
“흐음.”
거운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턱을 올린 채 뭔가를 생각하던 그는 허리끈을 풀며 말을 이었다.
“하긴. 그냥은 쉽지 않겠지. 자, 받거라.”
‘어?’
투욱.
그가 자신이 소지한 검을 내밀었다.
얼떨한 표정으로 설휘가 그것을 받아들자 거운은 말했다.
“이곳은 핵심지부 수장들의 선택을 받은 자들만 들어오는 곳이다. 본교를 대표하는 비급과 각종 임무 수행에 적합한 능력을 익히게 되지. 넷째 제자께서 이 정도로 배려를 해주신 것만으로도…….”
거운은 이빨을 드러내며 힘주어 말했다.
“감. 사. 함. 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
설휘는 온몸을 휘감는 살기에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함부로 입을 열었다가는 그에게 목이 날아갈 것 같은 불안감을 느낀 것이다.
스르릉.
거운이란 자가 조금 멀어졌을 때.
설휘는 그에게 받은 검의 손잡이를 잡고 검집을 열어보았다.
그리고.
[단영검(斷影劍) 1개를 얻었습니다. 능력치를 보시겠습니까? 승낙 / 거절]
설휘가 승낙을 보며 고개를 돌리자, 문자가 줄줄 나타났다.
[무기 - 검]
체력 + 2
내공 + 2
공격력 + 5%
민첩 + 2%
특성 :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지는 효과.
“허허…….”
설휘는 헛웃음이 나왔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하건만.
새롭게 뜨는 문자들에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그였다.
* * *
접수처를 지나 앞을 가로막은 건 하나의 문이었다.
부채꼴 형태로 만들어진 건물에는 끝도 없이 늘어선 대문이 그를 맞이했다.
설휘는 허리춤에 찬 단영검을 내려다보았다.
‘꽤 좋은 것 같은데…….’
겉은 철 재질인데 화려한 용 모양의 그림이 음각되어 꽤나 좋아 보이는 보검.
은은한 비취색에 괜히 한 번씩 눈길이 간다.
‘혹시 모르니, 창고에 넣어둘까?’
이리 좋은 걸 굳이 들고 있다가, 나중에 제출하라면 곤란해진다.
괜히 뺏길 수도 있고.
설휘는 오른쪽 위에 있는 도구에 시선을 두었다.
[도구함을 여시겠습니까?]
설휘는 빠르게 승낙했고.
검을 들어 눈앞의 창에 슬쩍 가져다 놓았다.
[도구함]
약초 + 1
연양갱 + 1(한입 먹음),
비원교서(여지도) + 1
단영검 + 1(new, 신규)
[도구함에 안전하게 넣었습니다.]
“이제 됐고.”
그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대문을 열었다.
기이이익.
문을 열자 거대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곳 중심.
탁자를 앞에 두고 의자에 앉은 노인이 보였다.
호교사자(護敎使者).
무관도의 모든 시험을 감독하는 자들이다.
알려지기로 실력은 태황각주 한 단계 아래.
허나, 총단의 명령을 받는 이들을 마교 내 누구도 함부로 대하진 못한다.
조심히 다가가며 예를 표하자 호교사자가 고개를 들었다.
눈을 뜬 건지 감은 건지 알아보기 힘든 백발의 노인은 무미건조하게 물어왔다.
“설휘. 맞느냐?”
“예.”
“그렇군.”
설휘가 대답하자마자 그는 책상 위에 편죽(片竹) 을 내밀었다.
촤라락.
“보고 선택해라.”
설휘는 고개를 내렸다.
네 개의 조각이 엮인 대나무에는 각각 한 글자씩 적혀 있었다.
신(身) 언(言) 서(書) 판(判)
‘신언서판(身言書判)?’
설휘는 머리를 굴렸다.
글자로 해석하자면 신체와 말씨, 글씨, 판단이란 뜻이다.
그럼 이 네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함에 따라 무관도 시험 내용이 결정된다는 거겠구나.
‘신은 대충 몸으로 때우는 거겠지. 언은 말로 뭔가를 하는 걸 테고. 서는 글을 쓰는 건가? 판은 냉철한 판단 같은 걸 내리는 걸 테고.’
설휘는 고민했다.
가장 자신 있는 길로 가는 게 유리할 듯했다. 하지만 사실 시험이 어떤 내용인지 모르니 고르기가 까다로웠다.
“어차피 네가 다 할 것이다.”
생각하는 게 별 의미 없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는지, 백발의 호교사자는 대뜸 설명을 해왔다.
설휘는 한 글자를 짚으며 말했다.
“이것으로 하겠습니다.”
스윽.
호교사자가 편죽을 잡았다.
“신을 선택했군.”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설휘는 그제야 그가 눈을 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작은 눈이 조금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받거라.”
그는 편죽을 떼어내 설휘에게 대나무를 건넸다.
“이처럼 신(身)이 들어간 대나무를 여섯 개 모으면 된다. 시간은 하루. 정확히 이 시간까지 버티면 시험은 끝난다.”
“…….”
“뒤편 맨 오른쪽 문이다. 돌아오는 곳도 이 문을 통하면 되지.”
설휘에게 당혹감이 서렸다.
지금 이곳 주변에는 자신과 같은 조건을 받은 놈들이 있을 터.
이 같은 대나무를 여섯 개 받아오라는 건, 그들을 죽이라는 것과 진배없었다.
상대는 별 신경 쓰지 않는지 몇 가지 설명을 덧붙였다.
“저 안에는 많은 것들이 있다. 모두가 원하는 비급서. 싸울 때 도움이 되는 보물. 적을 죽일 때 쓰이는 병기. 네가 저 안을 둘러보면 둘러보는 만큼, 원하는 걸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아…….”
설휘는 의도를 곧장 알아챘다.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유리한 물건을 얻을 수 있다. 달리 말하면 그럴수록 위험에 노출된다는 것을 뜻했다.
원하는 것을 가지고 싶으면 최대한 많이 돌아다녀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지금 바로 출발해라.”
호교사자의 말에 설휘는 고개를 들었다.
뒤쪽 벽에 있는 총 4개의 문.
네 개의 문이 어떤 걸 의미하는지 대강 알 것 같았다.
다시 호교사자를 쳐다봤을 땐.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 * *
문을 열고 나온 설휘는 눈앞의 풍경에 잠시 넋을 잃었다.
아름다웠다.
가끔 들었던 이름 있는 강호의 정원처럼 그저 한없이 아름다운 인공연못, 교각, 돌담, 나무들이 펼쳐져 있었다.
‘건물들도…….’
풍경을 더욱 다채롭게 만드는 건 전각들이었다.
2층, 3층의 건물들.
빨간 지붕부터 시작해 파란 팔각지붕. 황색도 있었고 녹색도 있었다.
마치 무지개처럼 아름드리 교목들 사이로 형형색색의 수많은 건물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처음부터 살육전인가.”
설휘는 주변을 살피며 조심히 움직였다.
쉽지 않은 곳임을 알고 있었지만, 이런 건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건 수련이 아닌 시험이 아닌가.
더욱이 상대가 누군지, 어떤 무공을 쓰는지 정보가 전무했다.
휙.
설휘는 주변을 살핀 뒤 돌담 아래에 몸을 낮췄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위화감이 대단하군.’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벌어지는 살육전이다.
엄폐물이 많은 절벽도 아니고, 어둠이 짙은 동굴도 아닌 이런 곳을 시험관이 선정했다는 것이다.
왠지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유희 같다는 느낌이 짙게 들었다.
‘강해져야 한다. 어떻게든.’
주변의 오색 빛깔로 수놓아진 풍경이 그의 마음을 더욱 다잡게 만들었다.
자신이 선택한 삶이다.
이미 죽었어야 할 자신이 얻은 새로운 생명이다.
이런 기회를 얻고도 강해지지 못한다면 더는 변명할 수가 없었다.
스윽.
주변을 다시 돌아보았지만 어떠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이 빨리 온 것인지. 아니면 요지에 매복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저곳으로 일단 가볼까?’
가장 가까이 보이는 팔각의 빨간 지붕.
총 3층으로 만들어진 건물 중 1, 2층은 밀실처럼 안이 꽉 막혀 있다.
‘가자.’
설휘는 신중히 주변을 살핀 뒤 곧장 도약했다. 자신이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는 경공술로.
투욱.
빨간 지붕의 문 앞에 당도했다.
그리고 주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후…… 다행히…….”
그 순간 뭔가 이상하게 변했다.
변한 게 아니라 멈춘 것이다.
[경고! 정체불명의 적이 설휘 님의 빈틈을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대응하시겠습니까?]
‘이 무슨!’
상태창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이전과 다른 분위기였다.
▶ 맞대응한다.
▷ 방어한다.
▷ 도망간다.
9……8……
이전과 달랐다.
그리고 무엇도 확신이 없었다.
예전에는 적의 빈틈을 발견했다는 글자가 떴었기에.
▷ 맞대응한다.
▶ 방어한다.
▷ 도망간다.
지금은 완전히 달랐다.
상대에게 빈틈을 발견 당했고 판단을 해야 했다.
그리고 어떤 것도 제대로 된 근거가 없었다.
▷ 맞대응한다.
▷ 방어한다.
▶ 도망간다.
……2……1
결국 설휘는 최대한 조심하는 쪽을 택했다.
그랬는데.
[도망간다를 선택하셨습니다. 곧바로 재개됩니다.]
팟.
시간이 원래대로 돌아오자 설휘는 자리에서 곧장 도약했다.
하지만 적이 주변에 있다는 두려움에 잠깐의 망설임이 있었다.
그사이 등 뒤를 스쳐 가는 한 줄기 그림자.
자신의 어깻죽지부터 허리까지 긴 실선이 몸을 헤집고 지나갔다.
“크윽!”
바닥을 딛는 순간 설휘는 신음을 토해냈다.
검이 스쳐 지나간 등허리에는 이미 핏물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쉽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그림자.
처음 보는 사내의 눈빛에는 매우 안타까운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State, 상태]
설휘 [말단 조직 분대장]
신체 정상
[Value, 수치]
체력 103(↓102)/205
내공 1,220(↓1,030)/2,250
자신의 상태를 나타내는 수치는 대폭 하락해 있었고.
[State, 상태]
??
신체 정상
[Value, 수치]
체력 680/685
내공 470/550
상대의 능력은 생각보다 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