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곤마가 제시하는 세 가지의 삶 (3)
‘크읍…….’
아프다.
현기증 때문에 잠시 몸도 휘청했고, 뒤이어 따가움 때문에 표정 관리도 되지 않았다.
칼이 지나간 주변으로 핏물이 흐르는 게 눈에 보였다.
운 좋게 치명상은 피했다지만, 가볍게 볼 상처 역시 아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몸을 움직이는 데는 이상이 없다는 정도랄까.
체력 103(↓102)/205
자세를 고쳐잡는데 체력이란 수치가 눈에 확연히 들어왔다.
아마 저 수치가 모두 떨어지면 죽는 걸 테지…….
“괜히 시간 끌지 맙시다. 형장.”
입술을 말아 올릴 때 돌출된 잇몸이 눈에 띄는 사내였다.
빈정거리는 것이 꼭 승리를 확신하는 말투.
이 정도 상처를 입혔으니 당연히 이기리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나도 그럴 생각이야.”
설휘는 검을 꺼내 들며, 이를 악물었다.
지금으로선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는 알 수 없다.
그나마 한 가지 확인할 수 있는 건.
설휘 [말단 조직 분대장]
체력 103(↓102)/205
내공 1,220(↓1,030)/2,250
?? [??]
체력 685/685
내공 470/550
상대의 내공의 수치가 자신보다 꽤 낮다는 것 정도.
그 뜻은 두려워할 수준의 인물은 아니란 것이다.
‘소희마공을 쓴다.’
설휘는 상대를 응시하며 기회를 기다렸다.
자신에겐 누구도 알지 못하는 능력이 있다.
얼마나 쓸모 있는지 이번 기회에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뭘 그리 잔대가리를 굴려…….”
팟.
상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설휘는 곧장 소희마공을 펼쳤다.
이전에 그림자가 했던 움직임처럼 상대를 향해 빠르게 침투했고.
캉!
“익!”
사내가 가까스로 막아내는 걸 본 설휘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길 수 있다!’
소희마공의 소(素)는 한기를 뜻한다.
호흡할 때 허연 서리가 입 주변에 맺히는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지금도 무공 특성상 사내가 맞대응하면 할수록, 시린 한기가 그의 동작을 더디게 만들고 있었다.
곧장 상대가 방어 위주로 동작을 바꾸는 것도 그런 현상 때문이다.
“억!”
한 번 더 검을 부딪치자 사내가 크게 신음했다.
설휘는 웃었다.
“억은 무슨!”
그리고 거침없이 파고들며 검을 휘둘렀다.
스걱-!
이번에는 상대가 반응하지 못했다.
이미 온몸이 굳어, 목을 긋는 설휘의 검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후우…….”
투욱.
느닷없이 나타났던 사내는 고목나무처럼 쓰러졌다.
설휘는 호흡을 가다듬고 눈앞의 상태창을 바라봤다.
체력 101(↓2)/205
내공 1,200(↓20)/2,250
체력이 소폭 줄어들었다.
소희마공을 썼기 때문인지 내공도 조금 감소했다.
아직 흉내내기 수준임에도 예전의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강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설휘는 상태창을 보며 생각했다.
자신의 상태를 한눈에 볼 수 있다는 건 나쁘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제길, 일단 치료부터…….”
설휘는 이름 모를 사내의 몸을 뒤졌다.
예상대로 신(身)이라 적힌 대나무 판을 들고 있었다.
설휘가 그걸 급히 회수하고는 사내의 상의를 벗길 때였다.
“……어?”
품속에 주먹만 한 호리병 하나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걸 잡는 순간 눈앞에 상태창이 떴다.
[금창약 1개를 획득하셨습니다.]
“횡재다.”
상처를 낫게 하는 특효약이 그의 품속에 있었다.
* * *
교단에서는 무관도를 통과하면 절정고수가 된다는 얘기가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니 이곳만 통과하면 자신도 강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설휘는 단 한 번의 경험만으로도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우선 무관도를 거치면 절정고수가 되는 건 사실이다.
다만, 여기는 고수를 양성시키는 곳이 아닌 증명하는 곳.
수련으로 고수가 되는 게 아니라, 이미 고수인 자를 뽑는 곳이다.
“시작이 좋지 않군.”
설휘는 이름 모를 방 안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쉽게 가라앉을 상처는 아니다. 등 뒤에 난 상처에는 손도 닿지 않는다.
그나마 죽은 놈의 상의를 이용해 지혈을 시켰기에 망정이지.
“이대로 가다간 필시 죽고 말 거다.”
자신이 가진 목숨은 고작 2개.
이번 생이 실패하더라도 한 번 더 살게 해주겠지만, 지금으로선 큰 의미가 없었다.
고작 2번의 목숨으로 대체 얼마나 달라지겠냐는 말이다.
내공이 급속히 올라가는 것도 아니니.
‘체력이 점차 떨어진다.’
유독 눈이 가는 수치.
체력 96(↓5)/205
내공 1,220/2,250
상처가 완벽히 치유되지 않은 것이 이유인 듯하다.
사실 화끈거리는 통증은 잠시였고, 지금은 꽤나 큰 고통 때문에 움직이기 힘든 상황이다.
‘이걸 써야 하나…….’
도구함에 있는 금창약을 보며 설휘는 고민했다.
상처 때문에라도 당장 쓰고 싶지만, 이럴 때일수록 신중을 기해야 한다.
혹시나 나보다 고수를 만나게 된다면 금창약을 쓴 것이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 추궁하듯 나무라면, 저런 식으로 저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제가 오천각주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 허허허. 그게 어디 태황각주의 잘못입니까? 건방진 수하의 잘못인 게지요.
‘그 새끼들은 한번 죽여보고 이승을 떠야 하는데…….’
아직도 그들의 대화가 머릿속을 맴돈다.
병신이라 놀려대던 태황각주와 오천각주의 표정과 목소리가.
정말로 이번 생에도 아무것도 못 할 거라면, 후생을 위해 뭐라도 얻어야 했다.
모든 능력이 예전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도구함에 있는 것만은.
계속 존재하니까.
[도구함을 여시겠습니까?]
설휘는 자신의 도구함을 다시 확인했다.
[도구함]
약초 + 1
연양갱 + 1
비원교서(여지도) + 1
단영검 + 1
금창약 + 1(new, 신규)
“일단 중요한 건 모두 넣는다.”
문득 단영검을 쓸까 고민했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첩자인 거운이 제시한 3가지 지문.
그중 ‘제게 하고 싶은 말이 있지 않습니까?’를 선택해야 얻을 수 있는 단영검이다.
다음 생에는 선택한 지문 외에 다른 지문을 선택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 정도는 사용해도 되겠지?”
약초를 바라보던 설휘가 이내 눈짓했다.
이번 생에 그리 중요한 도구는 아닌 듯하니, 한번 사용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약초를 사용하시겠습니까? 승낙/거부]
설휘는 승낙했다.
[사용했습니다.]
“아…….”
약초를 쓰자마자 설휘는 몸의 변화에 당황했다.
직접 꺼내서 사용하는 방법 외에도, 이런 식으로 효과가 바로 적용될 수 있다니.
몸속에서 약간의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변화와 함께 자신의 수치가 변했다.
체력 98(↑2)/205
[효과 : 더 이상 출혈 피해를 입지 않습니다.]
체력이 소폭 상승하며 고통이 한층 가라앉는 느낌이다.
고작 2밖에 오르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등에서 화끈거리던 것이 사라진 게 어딘가.
“……?”
몸이 나아진 것을 확인하고 나설 채비를 하는데 인기척이 들렸다.
문밖이 아닌, 바로 아래층.
자신이 숨어 있는 건물은 황색 건물 2층이다.
‘가보자.’
설휘는 창가를 올려다보며 해를 통해 시간을 대충 가늠한 뒤, 움직였다.
* * *
촤악!
“하앗!”
퍼어억!
황색 지붕 건물.
1층 내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치열한 격돌이 일어나고 있었다.
“비열한 새끼…….”
녹색 무복을 입은 청년이 휘청이는 몸을 검으로 지탱했다.
상대의 첫수에 큰 상처를 입은 것이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아혈당(亞血黨) 출신이라더니 별거 없네.”
삼십 대로 보이는 인상.
검은 무복을 입고 있는 사내는 득의양양하게 외쳤다.
“더럽기로 소문난 태황각 출신이 무관도에 온다는 소문을 듣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군.”
“네가 미련한 거야. 생존하기 위해서는 때론 배신도 해야 하는 법.”
“함께하기로 한 동료의 가슴에 칼을 꽂아놓고 잘도 지껄이는군.”
“동료는 지랄.”
둘은 우연한 기회로 만나 첫 번째 시험을 같이 도와 치르기로 했었다.
하지만 사내는 변심했고, 잠시 쉬고 있던 이곳에서 살수를 펼친 것이다.
“쿨럭.”
청년은 부르르 떨며 피를 토해냈다.
상대의 검에 당해서가 아니었다.
대화 중 상대가 기습적으로 날린 발경(發勁)에 극심한 내상을 입은 징조였다.
“너무 좋아하지 마라. 너를 만나기 전, 얻은 게 하나 있지. 그걸로 저승길에 반드시 너도 함께 데려갈 거다.”
“허세는.”
사내는 피식 웃으며 곧장 질주해 들어갔다.
청년이 빠르게 검을 들었지만 늦었다. 이미 사내의 검이 가슴팍을 파고든 것이다.
“……어?”
그런데 가슴을 관통해야 할 사내의 검이 갑자기 비껴나갔다.
아니, 정확하게는 미끄러졌다.
청년이 착용한 비늘 같은 갑옷으로 인해.
“이제 알겠냐?”
이번에는 청년의 검이 사내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당연히 적중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은 반격.
푸욱!
사내의 가슴에 검이 박혔다.
허나, 아슬하게 비켜나가, 심장 쪽은 아니었다.
“이 새끼야!”
빠각!
그것으로 끝이었다.
사내는 검이 아닌 주먹으로 청년의 정수리를 찍어버렸다.
뚝. 뚝. 뚝.
“젠장할…….”
사내는 이겼지만, 이긴 게 아니었다.
심장을 아슬하게 비켜나가긴 했어도 상당한 중상을 입은 것이다.
“크윽.”
그는 비틀거리며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저놈은 설마…… 척호(拓浩)?’
태황각이 보유한 총 7개의 부대.
토(土), 일(日), 월(月), 화(火), 수(水), 목(木), 금(金)으로 이루어진 부대는 모두 앞에 흑(黑)을 붙여 이름을 짓는다.
척호는 흑화대(黑火隊) 수장이다.
자신을 괴롭히던 적명이 흑월대장이니, 이놈 역시 보통의 놈은 아니었다.
듣기로 토(土)가 제일 약하고, 금(金)이 제일 강하다 하니, 적명보다 더 강할 것이다.
‘기회다. 죽일 수 있어!’
설휘는 문밖 복도에서 이들이 싸우는 장면을 모두 목도했다.
그리고 지금이 그를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실력은 나보다 월등히 위다. 한 번. 단 한 번에 죽여야 해.’
척호는 죽은 청년의 몸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대나무를 회수하려고 하는 것일 터.
그런데 가만 보니 그것만이 아닌 것 같았다.
“이렇게 좋은 것을 혼자 착용하고 있었다니…….”
죽은 청년은 비늘처럼 겹겹이 쌓인 뭔가를 착용하고 있었다.
마치 갑옷 같은 장비로 보였다.
‘혹시 그 능력을 이용할 수 있을까?’
숨을 죽이며 기회를 엿보던 설휘의 머릿속에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바로 시간이 멈추는 빈틈창.
이전 적명을 처리한 것처럼, 상대의 빈틈을 발견했을 때 떠오르는 문자들.
‘하지만 발동시키는 방법을 모르잖아.’
그 문제가 걸렸다.
분명 절호의 기회 때 어김없이 나타나긴 하는데, 그때가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문구만 뜬다면 아주 확실하게 적을 처리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지금이라면 뜨지 않을까? 누가 보더라도 적이 방심한 상태인데…….’
생각해보면 이 방법이 가장 근거가 있었다.
적명을 죽일 때도.
그리고 무관도에 들어왔을 때도 상태창이 뜬 것은 적의 완전히 빈틈을 찾아내거나 혹, 노출되었을 때가 아닌가.
‘한데, 지금은 왜 뜨지 않는 거지?’
상대가 한눈을 팔고 청년의 품속을 뒤지는 이 상황에도 눈앞의 상태창은 뜨지 않는다.
지금보다 더 확실한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말일까?
‘아! 장비를 입기 시작한다.’
그는 청년의 장비를 벗겨내 이리저리 더듬거리고 있었다.
비늘처럼 얇게 스며진 물건을 본 그는 뭔가 이해한 듯 중얼거렸다.
“이래서 칼이 몸에 들어가지 못한 거구만?”
지켜보던 설휘의 갈등은 점차 심해졌다.
망설이면 지금의 기회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젠 못 기다려. 저걸 입으면 아무리 그가 다친 상황이라도 이기지 못…….’
그때였다.
[절호의 기회! 흑화대장 척호의 빈틈을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대응하시겠습니까?]
‘……!’
애타게 기다리던 상태창이 떴다.
더욱이 자신이 바라던 처음 보는 상태창이 시간을 멈춘 채로 눈앞을 가리고 있었다.
▷ 공격한다.
▶ 무공을 쓴다.
▷ 도구를 사용한다.
9……8……
무공을 쓴다고?
어떤 차이지?
설휘는 ‘공격한다’는 곧장 이해했지만, ‘무공을 쓴다’의 의미는 알지 못했다.
특히나.
▷ 공격한다.
▷ 무공을 쓴다.
▶ 도구를 사용한다.
도구를 쓴다는 건 더 의문스러웠다.
자신에게 유리한 지문이 뜬 건 알겠는데, 이게 왜 지금 상황에서 필요한 건지 알 수 없었다.
▶ 공격한다.
▷ 무공을 쓴다.
▷ 도구를 사용한다.
‘공격한다 로 한다.’
설휘는 일단 2번째와 3번째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은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공격한다’로 가는 게 맞다 생각한 것이다.
<‘공격한다’를 선택하셨습니다. 3초 전으로 시간을 되돌립니다. 곧장 움직이세요.>
‘3초 전?’
스스슥.
의문을 갖기 전에 이미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래서 칼이 몸에 들어가지 못한 거구만?”
그 순간.
파팟!
설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들었다.
이미 그는.
3초 전으로 되돌린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