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곤마가 제시하는 세 가지의 삶 (4)
설휘가 도약했을 때에도 척호란 자는 돌아보지 않았다.
거의 상대의 지척까지 도착했을 때서야 그가 반응했다.
“누구…… 큭.”
그것이 그가 마지막 남긴 유언이었다.
설휘의 칼은 그의 등허리에 정확하게 꽂혔고, 척호의 마지막은 그저 짧은 단말마를 내뱉는 것뿐.
“하아. 하아.”
척호는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제대로 자신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죽은 것이다.
“내가…… 내가 드디어…….”
손끝에 강렬한 희열이 감돌았다.
이런 자를 어떠한 피해도 없이 쓰러뜨렸다는 쾌감.
짜릿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체력 98/205
내공 1,220/2,250
슬쩍 오른쪽에 투명하게 떠 있는 수치를 보고는 이내 생각했다.
“아차. 이럴 시간이 없어.”
설휘는 쓰러진 척호의 몸을 살폈다.
그리고 샅샅이 뒤지던 그는 또다시 놀랐다.
“5개나…….”
신(身) 대나무 조각은 총 5개였다. 아마도 같이 움직이던 이들을 제거한 목숨의 수일 터.
그뿐만이 아니었다.
[천은신갑(天銀身鉀)을 1개 획득했습니다.]
[월향비(月香匕)를 1개 획득했습니다.]
[흑철검(黑鐵劍)을 1개 획득했습니다.]
[금창약을 3개 획득했습니다.]
[철혈독 해독주를 1개 획득했습니다.]
“엄청나구나.”
몸을 뒤지자마자 우수수 떨어지는 장비와 약재들.
천은신갑은 앞서 청년이 입고 있던 갑주였다.
월향비는 비수.
단순한 암기가 아니라, 칼날 끝에 검은 액체가 묻은 채로 칼집에 밀봉되어 있었다.
“그럼 이게 철혈독이겠군.”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한번 감염되면 신경독이 되어 그대로 즉사하는 거라고.
굳이 몰랐어도 철혈독 해독주가 있는 걸 보면 쉽게 추정할 수 있었다.
“척호가 사용하던 이 검이 흑철검이겠고.”
[도구함을 여시겠습니까?]
설휘는 망설임 없이 장비와 약재를 집어넣었다.
금창약 1개는 빼려다 잠시 고민한 그는 일단 전부 집어넣었다.
흑철검만 빼고.
[도구함]
<약재>
연양갱 1, 금창약 4(3↑), 철혈독 해독주 1(New)
<장비>
[갑옷] 천은신갑 1(New)
[병기] 단영검 1, 월향비 1(New)
[여러 물품들을 안전하게 넣었습니다.]
‘보기 편하게 변경이 되네?’
스스로 도구를 분류한 모습을 보니 뭔가 이 도구함이 체계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또 하나.
얼마나 많이 들어갈 수 있을까 궁금증도 일었다.
‘이번엔 선택해볼까?’
설휘는 금창약을 건드려봤다.
[금창약 1개를 사용하시겠습니까? 승낙/거부]
금창약을 모두 넣은 건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조금 전 사용했던 약초처럼, 도구함에 들어간 뒤 다시 나올 때 이런 효과가 있었다.
‘사용한다.’
설휘는 질문에 긍정을 내비쳤다.
[금창약을 사용합니다.]
체력 205(↑107)/205
“헉!”
예상대로 즉각 변화가 나타났다.
주변이 약간 환해진다는 느낌을 받자마자 체력이 단번에 올라간 것이다.
“통증이 완전히 사라졌어.”
그리고 수치는 곧장 현실로 바뀌었다.
슬쩍 등을 만진 그곳에는 상처가 거의 다 아물어 있었던 것이다.
“그럼 이것도 곧장 착용할 수 있는 건가?”
[천은신갑을 착용하시겠습니까? 승낙/거부]
설휘는 곧장 승낙했다.
그 순간.
“하하. 하하하.”
설휘는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미 자신의 몸에 천은신갑이 정확하게 부착이 된 것이다.
입는 과정 따위는 전혀 없었다.
“엄청난 기연이야. 이 도구함이란 것.”
설휘는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이 정도의 기연이 자신에게 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앞으로는 이것들을 저주가 아니라 기연이라고 부르겠다고.
세상 누구에게도 없는 능력이 생긴 것이 아닌가.
“흑철검을 써볼까? 어차피 단영검은 도구함에 있으니까.”
도구함에선 상세보기가 가능하다.
척 보기에도 척호가 쓰던 검은 지금 소지한 검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그래. 이건 한번 써보……?”
도구함을 열려던 중 뭔가 이상한 분위기에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고개가 돌아가지 않았다.
상태창 때문에.
[경고! 정체불명의 적이 설휘 님의 빈틈을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대응하시겠습니까?]
▶ 맞대응한다.
▷ 방어한다.
▷ 도망간다.
9……8……
‘야단났다!’
이번엔 상황이 역전되었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주변을 민감하게 살피지 못했던 것이 화근이다.
▶ 맞대응한다.
▷ 방어한다.
▷ 도망간다.
‘혹시 도구함을 열 수는 없나?’
설휘는 급히 상단 우측에 희미하게 적힌 도구함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떠한 반응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처럼 불리한 상황에선 적용이 되지 않는 듯했다.
‘그래, 적의 빈틈을 발견했을 때에는 도구를 사용한다란 선택지가 있었어. 그건 위기의 순간엔 도구를 사용할 수 없다는 걸 알려준 거다.’
6……5……
시간은 흐르고 있었고 설휘는 선택해야 했다.
맞대응을 할지.
아니면 방어를 하거나 도망을 갈지.
▷ 맞대응한다.
▶ 방어한다.
▷ 도망간다.
‘맞대응은 악수다.’
아무리 생각해도 맞대응하는 건 너무 무모했다.
도망간다 해도 이전처럼 큰 부상을 당할 수 있다.
‘방어해보자.’
상대가 강하면 의미 없는 행동일 수 있다.
하지만, 해보고 싶었다.
다행히도 천은신갑이 목과 가슴을 보호하고 있는 상태이지만 그것보다.
할 수있는 한, 최대한 모든 선택의 결과를 알아두고 싶었다.
[방어한다를 선택하셨습니다. 적의 위치를 알려드릴 테니 집중해주세요.]
‘알려준다고?’
이것도 무슨 기회인가 싶었던 설휘는,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을 후회했다.
뭔가 깜빡이는 대상을 발견하자마자 이미 자신의 지근거리까지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패애액!
상대의 검은 설휘의 가슴팍을 가격했고.
“커어억!”
설휘의 몸이 뒤로 튕겨나갔다. 어찌나 강한 내력이 담겼는지, 뒤쪽 벽까지 박살이 났다.
“너무 만만히 봤나? 칼이 안 들어가네?”
설휘가 있던 자리에 사뿐히 내려앉은 인물.
40은 넘어 보이는 중년인이 뭔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쿠웩!”
설휘는 피를 토해냈다.
순간적으로 살았다는 안도감이 들자마자, 시선을 우측 위로 힐끗 들었다.
엄청난 고통이 정신을 뒤흔드는 가운데서도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체력 39(↓166)/205
급속도로 줄어든 체력.
그런 가운데서도 설휘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공격을 막아내기도 버거웠다.’
적은 도망간다를 선택했을 때보다 더욱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아니, 더 빨리 공격해왔다는 것이 맞겠다.
차이점이라면 ‘방어한다’의 선택은 적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일 뿐.
천은신갑을 착용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아. 뭘 착용했나 보군.”
상대는 여유로워 보였다.
무관도에 들어와 처음 자신을 기습한 사내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여유.
그리고 그 여유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도 곧 알 수 있었다.
[State, 상태]
오마 [홍마원(紅魔院) 수라천대 조장]
신체 정상
[Value, 수치]
체력 4,505/4,650
내공 6,020/6,220
‘젠장! 이제껏 상대한 놈들보다 훨씬 더 고수다.’
연유는 모르나 눈앞 사내의 상태창이 주르륵 뜨고 있었다.
자신과 비교해 월등히 높은 체력과 내공 수치.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 상부의 명령을 받는 태황각과 달리 마교의 핵심지부.
홍마원 출신의 조장급 인사다.
흑월대장 적명과 흑화대장 척호. 아니, 그 둘이 덤벼들어도 싸움이 될까 말까 한 고수가 자신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하필이면 이럴 때…….’
<목숨 + 1>
어지러운 순간에도 그의 머리 위에서 움직이는 문자에 눈길이 간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이 정도 능력을 가진 자가 목숨 하나밖에 되지 않네?
“뭘, 그리 눈알을 돌리고 있나? 어차피 죽을 건데.”
오마는 소지한 대검으로 자신의 목을 툭툭 치며 말했다.
높은 능력치 때문인지 설휘에겐 그 모습이 거만해 보이지 않았다.
‘이번 생은 나도 열심히 했는데…….’
그래서인지 문득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몇 번을 죽고 되살아나는 과정의 연속.
적어도 이번 삶은 주어진 환경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도 했고.
“뭐라고 중얼대는 거야?”
오마가 불쾌한 표정을 짓자 설휘가 피식 웃었다.
“그냥 뭔가 좀 엿 같아서.”
“……?”
“기회를 얻어도 왜 이렇게 격차가 날까 생각이 드니까, 미치게 억울하더란 말이지.”
“……죽기 전에 미쳤구만?”
“그래. 미쳤다.”
설휘는 눈을 부라렸다.
갈 때 가더라도, 뭐라도 하나는 펼쳐보고 싶었다.
“미쳤다고 이 금짝(金勺, 금수저) 새끼야아아아!”
패애애액.
단번에 거리를 좁히며 쏟아낸 것은 소희마공의 검법.
허연 입김이 서림과 동시에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병신.”
움직임을 감지한 오마가 검을 들어 올리며 방어했고, 상대의 검과 부딪침과 동시에 반격을 가하려던 그는 눈을 부릅떴다.
쩌어엉! 쾅!
공력의 부딪침이 두 사내를 밀어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오마가 밀려난 것이다.
‘어? 이게?’
설휘의 눈빛이 흔들렸다.
내공을 끌어다 익숙한 소희마공을 펼쳤을 뿐인데, 오히려 상대가 밀려났다.
그리고 그게 사실임을 자각하는 데는 상대의 수치가 큰 도움을 줬다.
[Value, 수치]
체력 4,055(↓450)/4,650
내공 5,380(↓640)/6,220
단순히 검의 부딪침이 있었을 뿐인데, 상대의 체력과 내공이 꽤 하락해버린 상황.
“대체 이 무공은…….”
아연실색하는 오마.
그 모습을 본 설휘의 온몸에 강렬한 희열과 한줄기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그것은 ‘-다’였다.
그리고 그 앞은, ‘이긴’이란 단어가 자연스럽게 놓였다.
* * *
소수마공이란 것이 있었다.
극음의 한기를 이용해 펼치는 무공으로, 총단의 장로급들만 펼칠 수 있다는 최강의 마공이다.
극음의 기를 다루는 만큼 남자보단 여인들이 익히기 적합한 무공이었다.
하지만 그 무공이 워낙 강해, 남자들도 마인들도 익히고 싶어 했다.
그로 인해 파생된 무공들이 생겨났다.
소수마공에서 파생된, 쓰임과 역할에 따라 개정된 무공들이다.
설휘는 소희마공도 그런 무공 중 하나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체질이 극음지체가 아니고, 또한 그런 류(流)를 연성하지 않은 자신이 이렇게 손쉽게 펼쳐낸다는 건 그 이유가 아니면 설명할 수가 없다.
“크으으으…….”
오마의 표정이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단순히 공격을 막았을 뿐인데 얼굴에 허연 김이 서린 것이, 필시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내공 910(↓310)/2,250
성공은 했으나 설휘의 사정도 그리 좋지 못했다.
그의 내공도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그래도 좋았다.
그동안 노력했던 것이 허투루 한 것이 아님을 알았으니.
“이익!”
이번엔 오마가 공격을 가해왔다.
어떤 보법을 쓰는 건지, 발동작이 독특했다.
설휘도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보인다.’
자신감이 붙으니 적의 움직임도 눈에 확연히 들어왔다.
물론 여전히 상대의 속도를 따라잡는 건 쉽지 않았다.
패애액! 패액!
그저 피하고 또 피하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한 번에 승부를 본다.’
상대가 강한 만큼 일수에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패애액.
오마는 이리저리 피하는 상대에 화가 난 듯,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전면전으로 단번에 승부를 보려던 심산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상대를 구석으로 모는 그의 전법은 설휘가 다시 한번 무공을 펼칠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닿는 것은 무엇이든 얼어붙게 만드는 소희마공의 특성이 오마의 동작을 더디게 만들었고.
그 틈에 소희마공을 발동시킨 것이다.
쩌어엉!
“큭!”
그럼에도 오마는 밀려나지 않았다. 오히려 밀려난 건 설휘였다.
체력 19(↓17)/205
체력은 거의 바닥났고, 숨도 매우 거칠어졌다.
사실 서 있을 힘도 없었다.
“한가락 재주로 오래 버텼구나.”
설휘의 상태를 살피던 오마가 히죽거렸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방심과는 멀었다.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어?’
절망에 빠진 설휘의 눈에 시선이 자극했다.
<소희마공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흉내내기 ▶ 초급단계
‘이게 뭐지?’
힘이 생기거나, 체력이 더 좋아지거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혹시나 하여 설휘가 좌측 상단 위에 ‘무공’이라는 목록을 봤다.
[무공]
<소희마공>검법&보법&권법(초급단계)
<적수마공>적열장(흉내내기)
<초극마공>폭열공(흉내내기)
팟.
설휘는 자리를 박차고 달려들었다.
방어하는 자세를 취하던 오마가 보기엔 다소 무모하다시피 한 움직임이었다.
부딪치기 전까지는
채채채챙!
“윽!”
몇 번의 막아내던 오마가 처음으로 뒤로 물러났다.
찌르고. 피하면서 다시 휘두르는 동작이. 이전보다 몇 배는 더 빨라진 것이다.
챙! 챙! 챙!
몇 번의 화려한 초식이 서로의 옷과 피부를 찢었고.
“이노오오옴!”
“주어어어-!”
공중에서 내력을 끌어모은 한 번의 큰 동작이 서로의 병기와 맞부딪쳤다.
쩌어어엉!
승패는 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갑자기 신체능력이 비약적으로 오른 설휘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다.
“어떻게 한 거냐! 대체 어떻게! 어, 어?”
“……!”
그런데 말을 이어가던 오마의 눈에 당혹감이 서렸다.
그가 든 대검의 날.
스스륵.
쇠붙이의 날 중간이 쪼개지고 있었다.
그것 때문이었을까.
[절호의 기회! 수라천대 오마의 빈틈을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대응하시겠습니까?]
그것이 떴다.
▶ 공격한다.
▷ 무공을 쓴다.
▷ 도구를 사용한다.
설휘는 환호를 외칠 새도 없이 곧장 밑으로 움직였다.
공격한다를 선택한다 해도 죽일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 공격한다.
▶ 무공을 쓴다.
▷
도구를 사용한다.
그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또다시 생성된 문자.
[무공을 쓴다를 선택하셨습니다. 목록을 보여드립니다.]
[무공을 쓴다.]
▶ 소희마공(불가)
▷ 적수마공(가능)
▷ 초극마공(불가)
3가지 무공이 나타났지만, 소희마공과 초극마공은 선택이 불가했다.
아마도 내공 때문이리라.
지금.
그렇다면 선택은 적열장이었다.
무공을 쓴다 ▶ 적수마공 ▶ 적열장(흉내내기)
[적열장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설휘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선택했고. 그 순간.
퍼억!
통제를 벗어난 설휘의 손이 오마의 가슴에 정통으로 격중했다.
“컥!”
시간이 본래대로 돌아왔음을 자각했을 때쯤.
“……아!”
설휘는 보았다.
오마의 머리가 바닥에 처박혀 있는 광경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