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육성 시물레이션-27화 (28/379)

27화. 새로운 전투유형 (2)

[Value, 수치]

체력 22,999/22,999

내공 21,000/21,000

전투력 8만

이전 생에서 만났을 때보다 낮은 능력 수치다.

생각해 보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당시 그녀는 언, 서, 판 3개의 시험을 본 후 신(身)에서 자신과 만났을 테니, 그때의 수치와는 차이를 보이는 게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었다.

“안에 계시나요?”

“유원궁에 가셨습니다.”

고개 숙인 두홍의 말에 소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시선을 돌려 설휘를 바라보더니 재차 물었다.

“저분은 못 보던 분 같은데…….”

“태황각 말단 출신으로, 지금은 지하 창고 관리를 맡고 있습니다.”

“아, 그래요?”

설휘는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도 그랬다.

그저 이렇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멎는 것 같은 기분이라니.

“별 볼 일 없는 녀석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습니다. 일말의 관심조차 과분한 녀석이지요.”

두홍의 말에 이벽이 거들었다.

두 노인에게서 노골적인 비웃음이 느껴지는 건,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아. 그래요?”

소령은 대충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설휘에게 미묘한 시선을 보냈다.

‘웃는다.’

갑자기 씽긋 웃어 보이는 소령.

그 미소 사이로 새하얗고 가지런한 이가 보인다.

‘……아!’

그 모습에 설휘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된 것이, 이리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황홀한 쾌감이 전해지는 건가.

“재밌네요.”

그녀의 이어진 말에 설휘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어느샌가 두홍과 이벽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름이 뭔가요?”

돌아설 것 같던 소령이 자신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설휘입니다.”

“설휘. 좋은 이름이네요. 어떻게 지하창고에 머물게 됐는지 몰라도…… 큼.”

대화 도중 소령이 코를 잠시 막았다.

냄새를 맡은 거겠지.

아무리 씻어도 이 지독한 똥 냄새는 쉽게 가시지 않는가 보다.

‘저 개 같은 두 놈 때문에.’

옆에 있던 두홍과 이벽을 죽일 이유가 한 가지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이유가 있겠죠. 그럴 거고요.”

다소 의미가 모호만 말에 두홍과 이백의 시선이 소령에게 향했다.

하지만 그녀는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점 역시 설휘와 같았다.

‘이 여자. 내 능력을 파악했어.’

설휘는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소령이라는 이 여인.

눈빛과 시선이 뭔가 꿰뚫고 있다고.

“또 봐요.”

소령이 손짓하자 설휘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었다.

그러다 흠칫 놀랐다.

두홍과 이백이 노려본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래 지문을 보고 선택하세요.>

시간이 멈추며.

이것이 나와버렸기 때문에.

▶ 나랑 한번 만나 주시겠소?

뜬금없이 나온 첫 지문이었다.

▶ 나와 뜨거운 밤을 보내 주시겠소?

얼토당토않은 지문도 추가로 나왔고.

▶ 내 복근. 한번 만져 보시겠소?

천인공노할 지문이 마지막에 떠버렸다.

‘지문이 왜 이따위야!’

설휘는 속으로 항변했지만, 답해줄 사람이 없었다.

그저 변하지 않는 진실은.

▶ 나랑 한번 만나 주시겠소?

▷ 나와 뜨거운 밤을 보내 주시겠소?

▷ 내 복근. 한번 만져 보시겠소?

8…… 7…….

야속하게 시간이 흘러가는 것과.

무조건 하나는 선택해야 한다는 것.

그것만이 있을 뿐.

‘단순한 현상은 아닐 거다.’

언제나 그랬다.

뜬금없는 지문이긴 해도, 선택지문 대부분은 머지않은 미래의 사건에 영향을 주곤 했다.

자신을 위기에 빠트리고, 그만한 보상도 안겨다 주는 방식으로.

어떨 때는 현생뿐만 아니라 다음 생의 선택에도 관련이 되어 있었다.

4…… 3……

‘에라 모르겠다.’

<‘나랑 한번 만나 주시겠소?’를 선택하셨습니다.>

진행하겠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설휘는 어떤 반응이 나올지 숨죽여 지켜봤다.

어처구니없다는 두 노인의 표정은 애초에 무시했고.

“……후훗.”

‘또 웃었어.’

소령은 방긋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례한 얘기를 듣고서도 그다지 적대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까지는.

▶ 나와 뜨거운 밤을 보내 주시겠소?

▷ 내 복근. 한번 만져 보시겠소?

‘와…… 돌겠네.’

재수 없게도 사라지는 지문 선택이었다.

선택에 따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는, 피해갈 수 없는 선택지.

‘가만,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설휘는 의문이 들었다.

늘 자신은 최악이 아닌 차악을 고르는 선택을 해왔다.

하지만 차악은 오히려 최악으로 변하고, 최악의 선택이 최고의 선택이 되지 않았던가.

만약, 이번엔 척 보기에도 최악으로 여겨지는 선택을 고른다면?

그럼 뭔가 좋은 쪽으로 달라지지 않을까.

어차피 모든 지문을 선택해야 한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나와 뜨거운 밤을 보내 주시겠소?’를 선택하셨습니다.>

선택하기가 무섭게 소령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져 간다.

하긴, 누가 봐도 미친놈으로 보이겠지.

이런 난처한 순간에도 홍당무처럼 빨개진 두 노인의 얼굴은 좀 치워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나도 알고 있소. 이런 말을 지껄이는 게 정상이 아니다는걸.”

무슨 변명을 하겠다고 그녀에게 이따위 말을 늘어놓았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용기 내 뭐라도 말을 걸고 싶었다.

사실, 표현이 어처구니없긴 했어도 영 거짓은 아니었으니까.

“매일 하루하루 더 나아지기 위해 발버둥 치곤 있지만, 보시다시피 이 모양 이 꼴이오. 방금도 똥물을 뒤집어쓰고도 뭐라 대꾸 한마디 말하지 못했소.”

설휘는 그녀의 화를 누그러뜨리려 속마음을 말하긴 했지만, 자신도 이렇게까지 모두 털어놓을지는 몰랐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서러움 때문이리라.

몇 번이나 죽고 죽이며 반복하는 삶에서, 한다는 게 고작 곤마의 마음에 드는 것이 목표라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그러니 안 될 줄 알면서도 노골적으로 말하는 거요.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만들고 싶어서. 당신에겐 큰 모욕이 될 수 있겠지만, 난 그대를 만난 걸 큰 행운이라 생각하겠소.”

설휘는 자신이 뭐라고 주저리 떠드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저 한풀이랄까.

이제껏 혼자만 담아두었던 속마음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그녀에게 먹힌 걸까.

“불쾌하진 않았어요.”

“……예?”

예상치 못한 대답에 설휘는 귀를 의심했다.

그따위의 말이 불쾌하지 않았다니?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일까?

당황한 설휘의 귓가로 다시금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나치게 솔직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죠.”

“……!”

눈으로 보고도 의심할 광경이다.

이 아름다운 여인이 이토록 무례한 말도 담담히 넘길 수 있다니.

입구에 반쯤 걸쳐 서 있던 그녀가 천천히 움직였다.

쿵쿵쿵.

심장이 터지는 것 같았다.

갑자기 소령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쿵쿵쿵쿵.

심장 박동과 비슷한 속도로 들리는 발걸음 소리.

그렇게 걷던 그녀가 설휘의 얼굴에 닿을 만큼 바짝 다가왔다.

‘어, 언제?’

설휘의 시선이 여인의 옆으로 향했다.

언제 손을 썼는지. 두홍과 이벽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꼭 목표한 만큼 강해지세요. 그래서…….”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설휘의 귓가로 가져다 대는 그녀.

그리고 설휘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 지옥에서 같이 탈출해요.”

“……!”

설휘의 눈이 부릅떠졌다.

지옥이라니.

본교의 사람이 그런 식으로 표현하다니.

하지만 그 말이 설휘에겐 또 다른 충격으로 다가왔다.

강해져야 할 이유를 또다시 찾은 것만 같아서.

“기회가 되면 또 봐요.”

소령은 그 말을 끝으로 뒤돌아섰다.

“…….”

삶이란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선택의 합이다.

그리고 그 합의 결과를 모으면 운명이 된다.

흔히 운명은 변하지 않는다고 알려졌지만, 설휘는 이번 선택으로 전생과 현생의 미래가 변화했음을 직감했다.

과거에는 아니, 조금 전까지도 없던 구어.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그것이.

<사랑 + 3>

방금 뒤돌아선 소령의 머리 위로 팽글팽글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와씨. 지겹도록 맞았네.”

천일관 뒷문으로 나온 설휘는 부풀어 오른 얼굴을 부여잡고 빨래를 하고 있었다.

아니라 다를까.

소령 소저가 사라지고 난 후, 그야말로 두 노인의 주먹세례를 받아야 했다.

주먹과 발로 어찌나 후려쳤는지 턱 아래가 아직도 얼얼할 정도였다.

팍! 팍!

옷을 모두 빤 설휘는 앞쪽에 설치된 빨랫줄에 하나둘씩 내걸었다.

대충 다 걸자 설휘는 도구함을 열었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듯 씨익 웃었다.

“망할 노인네. 이리 좋은 걸 혼자만 독식하고 있었네?”

○ 명왕전포(明王戰布)

설명 : 상급으로 분류되는 보호장비. 호국(浩國)라는 왕족 군복재단사가 만든 전투복이다.

효과 : 방어력이 꽤 상승한다.

이벽의 침소에서 목욕물을 받아주다가 훔친 옷.

가장자리에 비치된 수납장에서 훔친 전투복이었다.

○ 백혼탄(白魂彈)

설명 : 황가세가에 구술로 내려오는 벽력탄에 염료를 넣고 혼합한 폭탄.

효과 : 이것을 사용하면 전방 3장 이내에 있는 적들을 일시적으로 혼란에 빠트린다.

이건 침대 밑에 있었다.

거기 있는 걸 알고 훔친 게 아니라, 손으로 몇 번 더듬으니 도구함에 들어갔다.

○ 검술의 이해

설명 : 250년 전, 독염장로가 중원의 무공을 공부하며 만들었다는 책.

효과 : 검법에 대한 이해도가 올라간다.

이건 두홍의 집무실 서탁 서랍에 있었다.

그가 잠시 사라진 틈을 타 찾아낸 것이다.

“며칠만 있으면 의뢰는 모두 끝날 것이다. 그때 알아차려도 상관없지.”

설휘는 고개를 들어 완수한 임무의 개수를 확인했다.

두홍의 멍멍이가 되시오(4/8)

목욕물 받을 때도 그렇고, 다했다는 보고를 하지 않았음에도 숫자는 올라가 있었다.

쉬운 임무라서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다.

“그나저나…….”

설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술시라 그런지 날이 저물어 주변은 어두웠다.

늘 고독했던 삶의 밤인데도 오늘따라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있을 줄이야…….”

마공(魔功).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오로지 힘의 탐욕만을 발하는 무공이다.

본교 사람들은 강해지고 싶은 욕구 때문인지 이 힘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러다 그 힘에 중독되어, 더 강한 마공을 갈구하며 세뇌당하게 된다.

하지만 자신처럼 그렇지 않은 자도 있다.

세뇌당하는 것을 거부하고. 모든 걸 의심하며 더 나은 걸 찾으려는 돌연변이.

물론 그런 자들이 본교 내 종종 있긴 했다.

한데, 그녀가 그런 돌연변이 중 하나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또 만날 수 있을까.”

설휘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저 강해지고 싶다를 목표로 정한 이유.

더러운 꼴, 추잡한 꼴을 보기 싫은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더 뚜렷한 이유가 생겼다.

힘을 키워 그녀와 함께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

“강해지다 보면 분명 보게 되겠지.”

설휘는 하늘에 다짐했다.

비록 아직까진 초라할 정도로 약한 힘이지만, 언젠가.

언젠가 누구도 무시 못 할 힘을 키워 마교를 벗어날 것이라고.

그리고 그때 기회가 된다면 소령이란 여인과 함께 가리라고.

설휘는 그날이 빨리 오길.

마음으로 간절히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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