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첫 반격 (1)
이전에도 이런 경험이 있었다.
죽고 난 뒤 ‘이어서 한다.’를 선택했을 때, 내 몸에서 빠져나와 세상을 관조하는 기분.
지금도 그때의 느낌과 흡사했다.
차이점이라면 창공에서 바라보는 게 아닌, 똥간의 천장 위치쯤에서 볼 수 있다는 것뿐.
“이아아아-앗!”
벽을 집고 날아온 이벽이 펼쳐낸 한 수.
나름대로 필살의 마공을 사용한 건지, 그의 손바닥은 불처럼 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거, 죽는 거 아냐?’
나는 가만히 있는 또 다른 자신을 보면서 기함했다.
상대가 공격해 들어옴에도 그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아니, 뭔가 하기는 했다.
발 받침대를 두 손으로 집고 있었으니.
“아---!”
그렇게 움직이던 이벽의 손이 AI설휘의 앞까지 다가왔을 때였다.
팟.
AI설휘가 급히 발을 박차더니, 발 받침대에 대고 있던 손으로 물구나무를 섰다.
갑자기 상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이벽은 AI설휘가 있던 똥간 위로 치솟아 올랐고.
그 틈을 AI설휘는 놓치지 않았다.
뻐억!
물구나무 선 채로 정확히 발차기 한 번.
퍼억!
그 일격으로 이벽은 똥간 입구, 장지문을 뚫고 튕겨 나가버렸다.
‘허, 동작이…….’
나는 웃음이 나왔다.
무공보다는 체술(體術)에 가까운 동작.
그래서 그런지 강력한 일격을 쓰지 않고도 상대를 너무 쉽게 제압해버렸다.
‘응? 왜 멈춘 거지.’
털그렁.
썩은 잔반 통을 내던지고, 똥간 밖으로 나오던 AI설휘.
이벽 쪽으로 다가가는 듯하더니, 무슨 이유인지 자리에서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때마침 천일관 뒷문으로 누군가 걸어 나왔다.
머리에 남색 편모(便帽, 평상모)를 쓰고, 몸엔 갖옷을 입은 사내였다.
[State Summary, 상태 간단 요약]
표감(杓鑑) [천일관 총사무관]
신체 정상
체력 7450/5450
내공 8909/8909
전투력 3만
주르륵 나타나는 낯선 사내의 능력 수치들.
상대적으로 어려 보이는 나이에도 능력치가 일개 사무관을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만약 신비랑을 죽이기 전 그를 봤다면 꽤 고전했을 만한 상대.
“네 짓이냐?”
표감의 목소리는 상기되어 있었다.
얼굴 곳곳에 칼자국과 화상 자국이 나 있는 것이 저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말하지는 않네.’
제3자의 시선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AI설휘가 조용히 침묵하는 게 그저 신기했다.
인공지능이 개입한 AI설휘는 그렇게 서 있었고, 표감은 그 모습을 보며 이를 갈았다.
“심문은 필요 없겠군.”
표감이 한 발짝 다가오자 나의 시선은 다시 AI설휘에게 향했다.
궁금했다.
과연 어떻게 저자와 상대할지.
처음에 나타난 전투력 수치를 보면 그렇게 긴장할 상대는 아니다.
그렇다고 만만한 상대 역시 아니다.
특히 상대는 칼을 들었고, 자신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다.
그렇다면 맨손으로 싸워야 한다는 얘기인데, 나는 그게 걸렸다.
싸우는 방식이 달라졌을뿐더러 호흡, 발의 위치, 순간적인 판단과 경험 등이 복합적으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물론 소희마공의 권법을 익혔기는 했지만, 전문적인 권법가가 아닌 이상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확인해봐야 했다.
‘상관없어. 그래도 이길 테니.’
나는 그래도 이길 거라 보았다.
전투력 수치가 그리 높지 않아 변수가 크게 없어 보였다.
문제는 ‘인공지능’이라는 이것.
이것이 개입된 AI설휘가 어떤 식으로 상대를 이길지 너무 궁금했다.
나를 제3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경험은 강렬한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으니까.
‘어? 내가 먼저 공격하는 건가?’
천천히 다가오던 표감과 자리에 서 있던 AI설휘.
둘의 거리가 약 삼 장(9m)쯤 되었을 때였다.
파파팟.
오히려 AI설휘가 먼저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너무 무모하잖아!’
검을 든 상대다.
그것도 실력과 경험을 꽤 갖춘 상대.
표감의 공격을 보며 신중을 기하는 게 유리한데도, 이런 방식의 선공이라니.
“건방진……!”
예상대로 표감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검을 뽑는 자세부터 눈빛까지. 이미 잘 벼린 칼처럼 날카롭게 반응했다.
스캉-!
그는 AI설휘가 달려드는 방향을 알아차리고는, 일장 이내로 좁혀지는 그 지점을 찾아 그대로 찔러 넣었다.
칼집에서 칼을 뽑아내는 속도는 가히 전광석화.
공격지점과 발검(拔劍)의 위치를 잇는 최단 거리를 계산한 찌르기였다.
“……!”
그런데 맞지 않았다.
순간적인 움직임이 너무나 완벽해 어김없이 당할 것처럼 보였는데, AI설휘가 피한 것이다.
‘물러난 게 아냐. 예상한 거다.’
보고 피했다고 할 수 없었다.
그랬다면 표감의 검에 가슴이 관통당했을 터.
아슬했지만 상처 하나 없이 물러선 건, 애초부터 접근할 의도가 없다고 봐야 했다.
‘와…… 그나저나 나 죽을 뻔했네.’
나는 잠시 눈앞의 사내가 자신의 몸이라는 걸 망각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자책할 시간도 없었다.
다시 AI설휘가 움직였으니.
‘망할, 공격을 왜? 좀 기다려!’
AI설휘가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걸 본 나는 짜증이 치솟았다.
검을 든 상대와 맨손으로 싸울 때는, 실력이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지 않는 이상 저런 식으로 달려들지 않는다.
적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거나, 빈틈을 유도하는 그때에야 공격한다.
저렇게 무식하게 달려드는 게 아닌데…….
‘어?’
표감이 찌를 것을 이미 예상한 것일까.
타탓.
이전과 달리 AI설휘는 상대방의 일 장(3m) 앞에서 급히 옆으로 몸을 틀었다.
표감도 가만있지 않았다.
종(縱-세로)으로 떨어지던 그의 검을 횡(橫-가로)으로 급히 우회했다.
쇄액!
또다시 표감에게서 몇 발짝 멀어진 설휘.
이번엔 완벽히 피하지 못했다.
검이 스치고 지나갔는지, 볼에서 가벼운 생채기가 보였으니까.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이런 식으로 무턱대고 움직이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뭔가 의도한 것이 있는 게 아닌 이상은.
‘또 움직인다.’
AI설휘의 세 번째 선공.
이번에도 AI설휘는 처음과 두 번째처럼 똑같은 방향으로 달려들었다.
“나를 뭐로 보는 거냐!”
표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눈, 망막 주위에 황반(黃斑) 현상이 일어난다는 건 내공을 급격히 끌어올렸다는 방증일 터.
쇄애액!
그것 때문인지 표감의 쾌검이 한층 더 빨랐다.
하지만 그가 검을 채 찌르기도 전에 AI설휘는 좌측으로 이동해버렸고.
“하앗!”
이전보다 더욱 빨라진 상대의 종횡(縱橫) 검술이 AI설휘를 뒤쫓았다.
그때였다.
‘……!’
퍽!
순간적으로 바닥을 구른 AI설휘는, 지면을 손으로 짚자마자 발을 뻗어 표감의 복부를 강타했다.
상대의 일격에 급소를 맞은 표감은 몸을 휘청였고,
빠각!
눈부신 속도로 날아온 상대의 돌려차기에 표감은 턱을 한 번 더 맞으며.
뻐억!
연속으로 휘두른 발등찍기에, 들고 있던 검까지 놓쳐버렸다.
퍼억!
이번엔 AI설휘가 주먹으로 상대의 면상을 후려쳤다.
표감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고.
때마침 이게 떴다.
<‘표감’을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 죽인다.
▷ 기절시킨다.
AI설휘는 내게 선택을 맡겼다.
나는 곧바로 죽인다를 선택했고.
<계속 진행합니다.>
그 길로 그는 절명했다.
우드득.
AI설휘가 표감의 목을 꺾어버렸다.
“아…….”
나는 그저 신음만 흘렀다.
적을 쓰러뜨려서가 아니다.
싸우는 수법과 전술이 너무도 예상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더 눈길을 끈 건.
<인공지능의 개입이 끝났습니다.>
1회에 한하여 결과를 보여드립니다.
Result, 결과
설휘 생(生)
이벽 사(死)
표감 사(死)
Calculate, 정산
설휘 [말단 조직 분대장]
신체 정상
피해 없음
체력 20,548(↓12)/20,560
내공 21,000/21,000
천일관 관리인과 총사무관을 죽이는 데 소모한 체력이 고작 12.
내공은 아예 줄어들지도 않았다.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라, 몸의 힘을 거의 쓰지도 않고 이겼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 * *
“아.”
쓰러진 표감을 보고 굳은 석상처럼 자리에 서 있던 설휘.
빛의 번쩍임과 함께 눈을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시야가 트였다.
제3자로 바라보던 시야가 이제는 설휘의 시야로 바뀐 것이다.
혹시나 하여 그는 주먹을 한번 쥐어보았다.
움직여졌다.
잠깐이나마 남같이 느껴지던 몸이 돌아온 것이다.
설휘는 고개를 들어, 상단에 작게 빛나고 있는 글귀를 바라봤다.
전투방식
고작 12의 체력을 소모하며 두 명을 쓰러뜨린 전투.
이런 싸움방식은 해본 적도 떠올려본 적도 없다.
두 손을 바닥에 짚고 피하면서 발차기를 하는 건, 자신이 한 번도 시도하지 않던 수법이었다.
“나였더라면…… 절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싸운다고 하더라도 체력과 내공 소모는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자신은 검이 없는 상황에 표감은 검을 들고 있었다.
그런 상대를 이렇게 간결하게 끝내버리다니.
“몇 수 앞을 보고 있었던 거지?”
설휘는 궁금했다.
‘AI’라 쓰여 있는 문자.
천축의 언어 같지도 않은 이것은 분명 몇 수 앞을 바라보는 듯했다.
그저 피상적인 접근방식이 아니라, 뭔가 면밀한 계획에 입각한 수.
그렇지 않다면 체력과 내공 소모가 이토록 적게 쓰였다는 것은 설명이 안 된다.
“좀 더 싸워봐야 알 것 같다. 좀 더…….”
아직까지 전투방식 ‘AI’에 대해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설휘는 몇 번의 반복된 경험이 그 궁금증을 풀어줄 거라 믿었다.
“가만.”
설휘는 뭔가 잊은 게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잊은 존재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야, 이 새끼야---!”
그 모습에 설휘는 소리 지르며 이벽을 향해 달려갔다.
그동안 당한 모진 설움과 고통.
모욕과 치욕을 갚아줘야 하지 않겠는가.
“야, 죽은 건 아니지? 야……. 눈 떠. 눈 뜨라고…….”
하지만 야속하게도 이벽은 눈을 뜨지 않았다.
게거품을 물며 뻥긋뻥긋하던 입은 어느샌가 돌처럼 굳어 있었다.
“내가 당한 게 얼만데…… 눈 뜨라고. 눈 뜨라고, 새끼야아아아아!”
설휘는 소리쳤지만, 이미 죽어버린 이벽이 말할 리가 없었다.
* * *
설휘는 3명의 시체를 빠르게 유기했다.
“어차피 발각돼도, 나는 천일관을 떠날 거니 상관없어.”
대충 이들을 흙에 묻은 뒤, 설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를 보니 진시(辰時, 오전 9시)쯤 된 것 같다.
그가 알기로 첩자 거운은 정오쯤 도착했었으니, 아직 조금의 시간이 남아 있을 것이다.
설휘는 그를 맞이하기 위해 곧장 천일관 지하창고로 이동했다.
Coin 2 [두 번의 기회]
“목숨이 다시 두 개가 됐다.”
설휘는 엊그제 이벽의 침소에서 들고 온 면경을 보고 있었다.
두홍을 죽이고 난 후 얻은 또 하나의 생명.
설휘에겐 더없이 귀중했다.
“이제 거운을 죽이고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는 거다.”
무관도 시험의 목적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강해지는 거고, 둘째는 넷째 제자의 마음을 얻는 것.
설휘는 이 정도면 충분히 강해졌다고 판단했다.
또한 거운을 잡으면, 넷째 제자의 마음을 얻은 것 역시 충분하다고 믿었다.
“이제 제대로 준비해야겠군.”
설휘는 상단 우측에 있는 도구함을 열었다.
[도구함]
<약재>
금창약 5, 철혈독 해독주 1
<영약>
환속영신단 1
<장비>
[무기] 무령도 1, 월향비 1
[갑옷] 천은신갑 1, 상급단갑 1, 명왕전포 1
[보조무기] 백혼탄 1
<절대비급>
사대극마공 풍(風)
<잡화>
검술의 이해[책], 무관도 보물지도(7/7), 약도(무관도-신(身) 1, 내역표(무관도) 1
“그동안 꽤 많이 모았구나.”
설휘는 도구함을 보며 내심 뿌듯했다.
[천은신갑을 착용하시겠습니까?]
우선 방어구를 착용했고, 별생각 없이 검술의 이해를 톡 하고 선택해 보았는데.
[‘검술의 이해’를 사용하시겠습니까?]
잡화에서도 이게 선택되었다.
[검술을 이해했습니다. 이해도가 올라갑니다.]
이게 뜨면서.
<기술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초극마공] 폭열공
초급단계 ▶ 기본단계
제일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무공이 상승했다.
설휘는 싸움 중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무공 목록을 봤다.
<소희마공> 기본단계
<적수마공> 기본단계
<초극마공> 기본단계
모든 수치가 ‘기본’으로 맞춰져 있었다.
“내 능력은.”
설휘는 자신의 수치를 확인했다.
[State, 상태]
설휘 [말단 조직 분대장]
목숨 Coin 2 [두 번의 기회]
신체 정상
[Value, 수치]
체력 20,548/20,560
내공 21,000/21,000
전투력 9만
[Equipment, 장비]
병기 : 흔한 검(劍)
갑옷 : 천은신갑
“모든 준비는 끝났다.”
설휘는 전투방식을 바라보았다.
사실상 이것을 선택하며 마지막 준비를 끝마쳤다.
전투방식
에서 한 번 더 선택했고.
전투방식 <턴제>
이렇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