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첫 반격 (2)
거운이 천일관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와 조우했을 때가 아니었다.
<중요지점을 통과했습니다. 저장하시겠습니까?>
갑자기 나타난 문구와 함께 시간이 멈췄다.
설휘는 그것을 보고 눈을 깜빡거렸다.
‘중요지점이라고?’
이제껏 전혀 볼 수 없었던 설명의 문구.
그것이 그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일단 해보자.’
승낙하자마자 다시 문구가 변해 설휘 앞에 놓였다.
[어느 지점에 저장하시겠습니까?]
■ 천력 95년, 제2장-1. 곤마가 제시하는 세 가지의 삶]
[빈 저장 공간]
[빈 저장 공간]
시간을 기록하는 것.
이전 생과 달리 별다른 사건이 없는데도 이것이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게 뜬 이유가.’
모든 게 그랬다.
눈앞에서 선택을 강요하는 이것은 후에 어떤 것에서라도 자신의 미래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나 ‘저장’이라는 기록은 나쁜 의미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쓸데없이 길어지는 인생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지 않았는가.
[빈 저장 공간]
설휘는 빈 저장 공간이라 표시된 두 번째에 기록을 남기기로 했다.
□ 천력 95년, 제2장-1. 곤마가 제시하는 세 가지의 삶
■ 천력 95년, 제2장-15. [핵심무사 되기] 무관도 시험 탈락 후, 마지막 상대.
[빈 저장 공간]
[저장되었습니다.]
‘어? 이게 뭐야!’
시간이 다시금 흘렀지만, 여전히 설휘는 저장된 글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무관도 탈락 후, 마지막 상대.
전혀 예상치도 못한 글귀가 그곳에 기록되어 있었다.
저 말대로라면 자신은 무관도 시험을 보았고, 통과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후, 마지막 상대라 함은.
끼이이이익.
문이 열리자 설휘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천천히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중년인.
설휘는 그를 보고 깨달았다.
그 상대가 바로 거운이란 사실을.
* * *
“설휘라고 했나?”
자신을 향해 말을 거는 중년인.
첩자 거운이다.
그는 자신의 기억대로 회색 단약을 내밀었다.
“받거라.”
<내공증진 단약, 비사단을 얻었습니다.>
“영약…….”
“그렇다. 한 알만으로 십여 년 치의 내공증진을 이룰 수 있지.”
설휘는 당연하듯 집어삼켰다.
영약의 효과는 몸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체력 20,645(↑85)/20,645
내공 23,680(↑2000)/23,680
“혹시 말입니다.”
설휘는 물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허리춤에 시선을 돌렸다.
원래는 그가 줘야 했을 보검. 그런데 고월 녀석과의 전투로 잃어버렸다.
“곤마께서 쓸 만한 검 하나를 보내주신다고 해서 말이지요. 가지고 계십니까?”
“…….”
거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일견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 같아 보였지만, 그저 짐작이었다.
“자.”
투욱.
내던지듯 바닥에 던지는 검 하나.
그걸 본 설휘는 확신했다.
역시나.
도구함에 없는 건, 똑같은 상황에 직면했을 때, 이렇게 계속해서 물건을 내어준다.
“이제, 더는 묻지 말고 따라오거라.”
거운은 그렇게 뒤돌아섰지만, 단영검을 빠르게 회수하던 설휘는 대화를 끊을 생각이 없었다.
“비룡단도 주셨지 않습니까?”
“뭐?”
설휘의 말에 거운이 걸음을 멈췄다.
“곤마께 들었습니다. 가지고 있다고. 내놓으시지요.”
“…….”
이건 예전과 흡사했다.
천천히 자신에게 고개를 돌리던 거운의 표정은 일그러져 있었고, 이내 품속을 뒤져 단약을 던졌다.
“받아라.”
말이 끝나자마자 설휘의 눈이 부릅떠졌다.
비룡단을 받자마자 날아온 거운의 주먹을 본 것이다.
그러나 주먹은 목표를 타격하지 못했다.
설휘가 그의 손목을 낚아챘으니까.
“너…….”
이번 생은 다르다는 걸 그는 모를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으며 지금 여기에 와 있는지.
<수치가 크게 상승했습니다.>
체력 26,733(↑6088)/26,735
내공 29,180(↑5500)/29,180
“이거 왜 이러십니까.”
설휘는 비룡단을 씹어먹으며 말했다.
이제부턴 엎어진 물이다.
이놈을 잡고 무관도를 건너뛰어 나아갈 것이니까.
“첫째 제자께서 그리 경거망동하라 가르치시던가요?
“……?!”
무척이나 당황해하는 모습.
손목이 자신의 손에 잡혔을 때보다 더한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독심술의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지속스킬] 독심술
기초단계 ▶ 기본단계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무관도의 경험, 빈틈창의 활용, 무공의 숙련도 상승과 전투경험. 그리고 대박검의 사용법까지.
예전과 전혀 다른 능력치는 분명 그렇게 가리키고 있었다.
[State, 상태]
설휘 [말단 조직 분대장]
목숨 Coin 2 [두 번의 기회]
신체 정상
[Value, 수치]
체력 26,733/26,735
내공 29,180/29,180
전투력 10만
하지만 운명의 비극은 벗어나려 할수록 끊임없이 현실로 되살아난다고 했던가.
[State, 상태]
거운 [곤마 호위무사 중 일인]
신체 정상
적대감 : 77%(경고)
천마 첫째 제자의 부하. 세작(細作) (간첩)
[Value, 수치]
체력 1만 5천/1만 5천
내공 1만 2천/1만 2천
----지직
체력과 내공은 고작 1만대이면서.
독심술이 오르기 전까지 ‘??’로 표시된 전투력의 숫자가.
전투력 19만
나타났다.
무려 19만이라는 것으로.
이 수치는.
새벽의 존재들보다도 월등히 높은 수치인 것이다.
* * *
전투력(戰鬪力).
독심술이 기본단계에 들어서면서 나타난 정보.
경험상 이 수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설휘 [말단 조직 분대장]
체력 26,733/26,735
내공 29,180/29,180
전투력 10만
자신의 전투력 수치도 이전 삶과 비교해서 놀라운 수치다.
신비랑이 7만이었으니 지금은 그와 싸워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거운 [곤마 호위무사 중 일인]
체력 15,055/15,055
내공 12,032/12,032
전투력 19만
하지만 거운은 그보다 조금 높은 게 아닌, 자그마치 19만.
얼마나 강한지는 싸워봐야 알겠지만, 9만의 차이가 주는 압박감은 목을 죄어오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이거 뭐야?”
자신의 손목이 잡힌 게 눈에 들어온 까닭일까.
당황하던 거운의 표정이 천천히 일그러진다.
그리고 일순, 설휘의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상대의 강한 저항.
“윽!”
결국 설휘는 그의 손목을 놓았고. 혹시 몰라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거운은 공격해오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공격해오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망----할!’
[경고! 거운이 설휘 님의 빈틈을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대응하시겠습니까?]
시작부터 이게 떴다.
전투력의 격차 때문인지, 거리가 제법 있음에도 빈틈창이 생겨났다.
그리고 늘 보던 익숙한 선택창들.
이런 맞대응은 자살행위다.
도망칠 곳도 마땅치 않아, 방어적으로 대응하는 것을 선택했다.
<‘방어한다’를 선택하셨습니다.>
‘힉!’
설휘는 기함을 토해냈다.
거운의 움직임이 상상을 초월했다.
가히 육안으로는 좇기 힘들 정도의 속도로 파고든 것이다.
“큭!”
거운의 찌르기는 설휘의 쇄골 윗부분을 스치며 올라갔고.
캉!
설휘는 자세를 낮추며 의도적으로 상대의 검을 튕겨냈다.
쩌엉! 쩡! 쩡!
이후, 근접전에서 총 3번의 교전.
이번에도 설휘가 밀렸다.
오른쪽 어깻죽지. 허벅지. 왼쪽 어깨를 베였고.
까아앙!
마지막에 서로 맞닿으며 거운을 겨우 밀어냈다.
‘제길!’
[경고! 거운이 설휘 님의 빈틈을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대응하시겠습니까?]
또다시 경고.
분명 밀어냈는데도 창이 또다시 떴다.
<‘방어한다’를 선택하셨습니다.>
슈욱!
한순간, 거짓말처럼 눈앞까지 다가온 거운이 검을 수직으로 그었고.
설휘는 필사적으로 몸을 틀며 공격을 방어했다.
<회심의 일격! 거운이 설휘 님에게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설휘 [말단 조직 분대장]
체력 16,835(↓9,900)/26,735
내공 29,180/29,180
거운 [곤마 호위무사 중 일인]
체력 15,025(↓30)/15,055
내공 11,952(↓80)/12,032
“아씨---.”
설휘는 뒤로 물러나며 왼팔을 부여잡았다.
이번 건 판단 착오였다.
상대방의 내리긋는 방향에 맞춰 몸을 틀어야 했는데.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리다 당해버렸다.
거운의 칼이 깊게 들어와 손목에 뼈가 드러날 지경이었다.
‘상대의 검술을 따라갈 수 없어…….’
확연한 실력의 격차.
몇 번이나 교전했는데, 상대에게 타격을 입히기는커녕 오히려 피해를 입었다.
‘대박검은 물 건너갔네…….’
이번 공격에 맞아 힘줄이 끊어진 것일까.
왼손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너…… 어디서 기어 나온 거야?”
거운이 물었지만, 설휘는 대꾸하지 않았다.
화가 났다.
체력과 내공이 높은데도 이렇게 밀리는 자신에게.
‘무공을 써야 해. 무공을…….’
설휘는 내공을 검 끝에 모았다.
지금 그가 유일하게 대적할 수 있는 건 체력과 내공이다.
그것을 활용하지 않는다면 이 싸움.
절대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어……?”
그때쯤, 거운의 시선에도 약간의 당혹스러움이 스쳐갔다.
맞은편 사내의 검 끝으로 흘러나오는 기운. 진기가 영성(靈性)을 띠는 현상을 목격한 탓이다.
“이놈. 보통 놈이 아니구나.”
거운의 표정에 경계심이 아로새겨졌다.
마기를 드러내지 않을 수 있는 실력자.
상대가 마기생검(魔氣生劍)의 경지에 올랐다는 걸 안 것이다.
‘선공해야 한다.’
설휘는 곧장 움직였다.
쇄애액!
득달처럼 파고든 검의 찌르기.
챙!
거운이 막아내자 재빨리 검을 회수하며 가로베기.
‘엇!’
일순, 거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상대가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운무(雲霧)가 주변을 잠식해버렸기 때문이다.
소희마공 육초식(六招式) 소상기변(素狀奇變).
소상의 뜻은 얼음의 형태, 기변의 뜻은 변환으로, 검을 휘두르기 전에 흡사 안개가 낀 것처럼 상대의 시야를 막아버린다.
휘리릭! 까강-!
그럼에도 거운은 물러서지 않고 방어해냈다.
설휘는 포기하지 않았다.
상대가 막아내자마자, 다시 몸을 돌리며 원심력을 이용한 하체 베기를 시도했다.
“으윽!”
극음의 무공을 펼쳤기 때문일까?
거운은 그 공격도 막아냈지만, 표정이 일그러졌다.
몇 번 부딪친 칼날에 한기가 파고든 탓이다.
“하앗.”
설휘의 공격은 계속 이어졌다.
반복적인 사선 베기였고. 이번엔 휘두르자마자 시린 한기가 온몸을 파고들었다.
삼초식(三招式) 소빙개동(素氷開凍).
극음 성질이 온몸에 뻗어 나오는 이것은 강한 한기가 주변을 덮는다.
뿐만 아니라, 검을 부딪칠 때마다 퍼져 나온 설빙(雪氷) 가루들이 상대를 더욱 얼어붙게 만드는 성질이 있었다.
쩌정! 쩡!
아니라 다를까, 설휘는 거운을 강하게 밀어붙였고, 점차 그는 물러서기에 바빴다.
이윽고 그의 신형이 무너지자, 더 강한 힘으로 그를 내리치려 했다.
‘엇!’
일순, 설휘의 동작이 멈칫했다.
[경고! 거운이 설휘 님의 빈틈을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대응하시겠습니까?]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상대가 초식을 펼치던 동작의 연결점.
그 틈을 비집고 반격을 해온 것이다.
▶ 맞대응한다.
▷ 방어한다.
▷ 도망간다.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이번엔 분명 피해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위기가 닥친 것이.
설휘는 더는 피하기 싫어 첫 번째를 선택했다.
<‘맞대응한다’를 선택하셨습니다.>
지이이잉-.
한순간이지만 그의 눈앞에 보였다.
검영(劍影).
내기(內氣)를 응축하여 발출할 수 있는 검기의 바로 전 단계.
그것이 자신이 반응하기도 전에 어깨 쪽을 관통해버렸다.
<회심의 일격! 거운이 설휘 님에게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설휘 [말단 조직 분대장]
체력 847(↓15,988)/26,735
내공 29,180/29,180
그리고 거의 동시에 날아온 주먹.
그것을 맞은 설휘는 눈앞이 번쩍였고.
어둡게 변하는 시야 앞으로 처음 보는 문구와 마주했다.
[<기절> 상태 불능이 되었습니다.]
결과는, 패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