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천마제자들 (1)
본교 외곽에 있는 유원궁은 가장 넓은 정원 중 하나다.
조금 고개를 들어보면 빙하가 쌓인 천산산맥(天山山脈)을 볼 수 있으며, 주변을 살펴보면 잘 갈린 토양과 아름다운 습지, 천혜의 비경을 감상할 수 있다.
특히 물소리가 들리게 곳곳에 조성된 인공연못과 그 주변의 돌담 조경.
잘 다듬은 분재와 교목.
그리고 안을 볼 수 없게 삼 장 높이의 옹벽도 설치되어 있었다.
스윽.
아름다운 절경 속, 귀공자 하나가 찻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갈한 남의(藍衣)를 차려입은 그는 정자에 홀로 앉아 사색을 즐기고 있었다.
“어찌 되었느냐?”
한동안 시간이 흘렀을까.
저편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느끼던 넷째 제자, 곤마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몸을 은폐하던 한 사내가 비호처럼 그의 앞으로 나타났다.
곤마의 심복. 천광(天光)이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
“예. 추적하던 도중에 우리의 존재를 눈치챈 자들이 있었습니다.”
“흔적은… 남긴 건가?”
“염려 마십시오. 모두 화골산을 터트려 존재 자체를 지웠습니다.”
“쓰읍.”
화골산(化骨散).
살과 뼈를 남기지 않고 혈수로 녹인다는 극독.
그걸 썼다는 얘기는 상황이 그만큼 급박했었다는 것이다.
“믿을 수 없군. 절정으로 구성된 은영단 고수들이 당했다니…….”
곤마의 표정이 굳어지자, 천광이 눈치를 보며 말을 붙였다.
“태황각에는 없는 고수들입니다.”
“그렇겠지.”
은영단은 곤마의 정보요원으로 길러진 핵심부대 중 하나.
모두 절정고수들로, 이들은 추적과 도망에 능숙하여 웬만해선 잡힐 일이 없다.
그런데도 당했다.
초고수 반열에 오른 이들이 관여하지 않고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주군. 참 시기가 묘합니다. 하필 왜 이때 태황각주 쪽에 사람을 붙여놓은 걸까요?”
“정보가 새나갔다고 봐야지.”
“그럴리가요… 이번엔 특별히 더 신중을 기하지 않았습니까?”
“신중을 기했다라…….”
곤마가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곧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천광. 지금 내 주위에 나를 따르는 대원들이 몇이나 있겠나.”
“주군. 그건…….”
천광은 곧장 반박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이미 본교에도 다 퍼진 소문이다.
다른 천마 제자들보다 세(勢)가 약해짐에 따라 생겨나는 부작용들.
양으로, 음으로 알게 모르게 매수된 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그들을 색출해내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였으니.
곤마는 말없이 고개를 숙인 천광에게 담담히 말했다.
“자네들에겐 미안하게 됐네. 나약한 주군을 따르게 해서.”
“아닙니다. 저희들은 곤마께서 반드시 천년대계를 이루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천년대계라. 하긴, 그런 미래를 그렸던 적이 있었지.”
곤마는 낙심하는 표정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어찌 보면 천마 제자답지 않게 나약함을 드러내는 행동이지만, 천광은 이해했다.
천마의 제자들.
가진 세력과 힘, 매수한 각료와 당료. 모든 것이 곤마와 비교하면 월등했다.
심지어 어떤 제자는 총단 내 장로들이 직접 찾아가 고개를 숙인다는 소문도 공공연하게 떠돌지 않은가.
“그나저나 내게 발칙한 정보를 알려준 그 녀석은 어찌 되었느냐?”
“2급 호위무사 하나를 보냈습니다. 오늘 무관도 입관시험을 치를 겁니다.”
“음.”
곤마는 조용히 시선을 먼 산으로 돌렸다.
드넓게 펼쳐진 봉우리와 산맥.
눈이 녹지 않아 만년설산이라고 불리는 천산산맥을 보며, 왠지 저곳에서 홀로 푹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천광의 목소리에 곤마는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염려스럽습니다. 그 사내가 건네준 여지도. 혹여나 그 정보가 잘못된 것이라면…….”
“천광. 너는 설휘라는 자를 직접 본 적이 있느냐?”
곤마가 그에게 시선을 맞추자, 천광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주군께 말씀으로만 전해 들었습니다.”
“그랬었지.”
곤마는 다탁 위 찻잔을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찻물을 빙빙 돌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내 조금 조사를 해봤더니, 그자가 태황각주에게 미움을 산 이유가 있더군.”
“……?”
“허락도 없이 부대원들과 태황각주 집무실에 들어가서 무공을 빼돌리려고 했다더군. 그게 걸린 거고.”
“어찌…… 일개 말단 조원 따위가.”
대담하다 못해, 미친 짓거리다.
직속상관도 아닌, 영내 최고 책임자의 집무실을 훔쳐볼 생각을 하다니.
“한데 그 과정에서 상당히 의문스러운 일이 있었네. 그 짓을 알게 된 태황각주가 곧바로 손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지. 왤까?”
“잘 모르겠습니다.”
“자넨. 설휘를 따르던 분대원들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가?”
그가 대답 없이 곰곰이 듣고만 있자, 곤마가 말을 이었다.
“모두 죽었다네. 화산파 놈들에게.”
“……!”
일순, 천광의 눈이 커졌다.
얼마 전, 본교의 삼류 무사들이 화산파의 공격을 받았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적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 죽은 녀석들이 설휘의 부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지도 안에 있던 밀담의 내용. 그 내용에 대한 신빙성을 알려주는 사건이란 말인가.
“혹시 말입니다. 이 모든 게 태황각주가 의도한 일이라면 어찌하겠습니까?”
자연스럽게 드는 의심이다.
분대장이라는 설휘만 홀로 살아남았고, 그런 그가 자신들에게 여지도를 건네주었다.
하여 곤마는 은영단원들을 보내 태황각주 뒤를 밟게 했고, 결과적으로 모두 죽어버렸다.
“아직까진 어느 쪽도 확신할 수 없네.”
“예? 무슨 뜻인지…….”
스읍.
곤마는 이미 식은 찻물을 모두 마셨다.
그러고는 잠시 느리게 흘러가는 연못의 물결을 눈에 담으며 말했다.
“설휘가 건네준 여지도. 그 안에는 정파와 오간 밀담에 대한 태황각주의 수기가 쓰여 있네. 그건 본교의 규율을 뒤흔드는 사건이라, 일개 조원 따위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무겁지.”
설휘의 부하들이 죽음으로서 여지도가 사실일 가능성이 드러난 이상.
결코, 좌시해서는 안 되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것이 곤마에게도 세를 불릴 수 있는 큰 기회로 작용했다.
“정황상 그가 천일관에 간 뒤, 태황각주가 여지도의 분실 사실을 알아차린 게 더 자연스럽네.”
그는 사실이란 가정 하에, 태황각주의 행보를 추측하고 있었다.
그런 중요한 문건을 태황각주와 일개 조장이 밀담을 나눴을 가능성은 없다.
여지도가 없어진 뒤, 만약을 대비하고 있었다는 게 오히려 더 심증이 갔다.
“허면, 주군께서 설휘란 아이를 무관도에 보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천광은 얘기를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의문이 들었다.
어쨌든, 설휘란 자는 이제 쓸모없어진 소모품.
그에게 보검과 영약을 주면서까지 굳이 무관도에 보낼 필요가 있을까 궁금해졌다.
“약속했네. 그가 강해질 기회를 달라 했거든.”
“그 아이의 실력으로 무관도를 통과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 않습니까?”
“아마 그렇겠지.”
영약과 보검을 주었지만, 그거야 최소수준.
시험을 통과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특히나 무관도의 합격자는 이미 선별된 고수 중에서 나오지 않던가.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살아남는다면,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는 고개를 들어 바라봤다.
“나도 조금은 그 사내를 통해 기운을 얻을 수 있지 않겠나.”
‘아!’
천광은 그제야 자신의 주군이 그를 무관도에 보낸 진짜 이유를 추측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도 그 설휘란 아이에게서 자신을 본 것인지도 모른다.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천마 제자란 무게.
그 안에서 어떻게든 뚫고 나아가야 하는 그 자신의 처지처럼 비슷한 무언가를 말이다.
피리리링-
산들바람과 불어오는 작은 피리 소리에, 곤마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경계를 서는 대원들의 신호였다.
이곳으로 누군가 오고 있다는.
“불편한 손님들이 오는군.”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서 세 명의 사람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살마와 마후. 그리고 아령.
사형들과 사저. 천마의 제자들이었다.
* * *
“여기가…….”
설휘는 고개를 들었다.
가끔 지나가다 눈으로만 담았던 곳.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에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봤던 기억이 있었다.
이곳은 태황각이 속한 오각(五閣)도 아니며, 일상 업무를 담당하는 구당(九黨)도 아니다.
그렇다고 사원(四院) 팔전(八殿)은 더더욱 아니다.
독립적인 궁(宮)의 영역이며, 오직 천마와 그의 제자들.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가신들만 지낼 수 있는 곳이 바로 유원궁이다.
“읍, 읍!”
때마침 어깨 위에서 장정이 심하게 발버둥을 친다.
포단에 감싼 뒤 둘러멘 거운이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퍼억!
하지만 설휘가 주먹을 내리꽂아 이내 조용해졌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길게 둘러친 옹벽이 사라지고 또 다른 옹벽이 보이는 길목쯤.
“누구냐?”
경계를 서는 무사 하나가 보였다.
자연스럽게 그의 능력 수치에 눈길이 갔다.
[State Summary, 상태 요약]
반곡(斑梏) [유원궁 문지기_7]
신체 정상
체력 18,050/18,050
내공 1,230/1,230
전투력 11만
‘뭐 이런 일개 관리 무사가…….’
설휘는 상대의 전투력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간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기고, 그것도 모자라 실제로 죽은 적도 몇 번이었던가.
특히 어깨에 멘 이놈과 생사 혈투를 하고 난 뒤라, 일개 관리문지기의 수치가 주는 박탈감은 더욱 컸다.
“뭐 하는 놈이냐고!”
버럭 소리 지르는 그의 목소리에 설휘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넷째 제자님을 만나 뵈러 왔습니다.”
“뭐?”
쌍심지를 켜던 반곡의 표정이 넷째 제자란 말에 빠르게 누그러졌다.
“미리 약속되었느냐?”
“예. 아마도.”
“끄응.”
그는 잠시 주변을 돌아봤다.
평소같이 근무를 서던 동료를 찾는 것인지 조금 고민하던 그는.
“따라오거라. 단, 거짓일 경우에는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물론입니다.”
설휘는 어깨에 둘러멘 거운을 단단히 붙들고는 앞서 걷는 문지기를 따라갔다.
* * *
넷째 제자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소로를 걷다 보니 연못이 나왔고, 정자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걸 발견했다.
“이름이 설휘라고 했지? 너는 여기 있거라.”
“예.”
문지기의 말에 설휘는 조용히 기다렸다.
그는 조심히 정자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정자에 모인 사람들과 뭐라 뭐라 말을 주고받는 듯하더니.
잠시 후 다가와 말했다.
“가거라.”
“감사합니다.”
설휘는 그의 허락을 받고 정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점점 정자와 가까워질수록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곤마의 얼굴이 보이는 거리까지 도착했을 때, 한 사내의 얼굴을 보고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망할! 첫째 제자가 있어!’
정자에 등을 기대 자신을 바라보는 인물.
육 척 반에 달하는 장신에 검게 탄 얼굴 속 무감정인 표정.
무엇보다 그의 시선을 끄는 것은.
[State Summary, 상태 요약]
살마 [천마 첫째 제자]
신체 정상
체력 ---/---
내공 ---/---
전투력 ---
첫째 제자란 표시 이외에 나타나지 않는 수치들.
그리고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마후, 아령, 심지어 넷째 제자 곤마조차도 신체가 정상이란 표시 외에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네가 여기 왜 왔지?”
곤마는 자신을 보자마자 곧장 연유를 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움보다 황당함이 서려 있었다.
무관도에 있어야 할 자신이 여기에 있는 게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거 어찌하나…….’
설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거운.
자신이 들쳐메고 있는 자가, 하필이면 여기에 있는 첫째 제자의 첩자가 아닌가.
“네가 여기 왜 있느냐고 묻잖아!”
곤마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기 때문일까.
정자에 반쯤 누워있던 둘째 제자인 마후란 자가 관심을 보내왔다.
셋째 제자인 아령이란 여인도 그랬다.
무엇보다, 조용하던 첫째 제자 살마의 시선이 자신 쪽으로 향해 있었다.
“저, 그게…….”
“사제. 왜? 누군데?”
때마침 마후란 자가 거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멈췄다.
지문이 떴기에.
한데, 설휘는 이 지문을 보고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아래 지문을 보고 선택하세요.>
▶ 나다, 이 씹새끼야.
황천행으로 갈 수 있는 욕설이 첫 번째.
▶ 마후는 나가 있어. 뒈지기 싫으면.
황천행으로 갈 수 있는 도발 두 번째.
▶ 첫째 제자 살마. 그의 첩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황천행으로 갈 세 번째까지.
▶ 나다, 이 씹새끼야.[+3]
▷ 마후는 나가 있어. 뒈지기 싫으면.[+2]
▷ 첫째 제자 살마. 그의 첩자를 데리고 왔습니다.[+1]
더는 추가 목숨이 없는 상태에서.
물러설 수 없는 3개의 지문이 떠버렸다.
의미를 알 수 없는 ‘[+3]’, ‘[+2]’ ‘[+1]’ 모양도 같이 붙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