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살고 싶으면 생각해라 (1)
“이자의 몸속에 있습니다.”
설휘는 밀지가 없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앞섰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눈앞에 뜬 문구대로 정말 거운의 몸을 뒤져보니 밀지로 보이는 양피지가 발견되었으니까.
“흐음.”
조심히 건넨 밀지를 처음 받아든 건 곤마였다.
그리고 뒤이어 마후가 그것을 받아들고 읽었다.
‘어떤 내용이 쓰여 있는 거지?’
설휘는 급히 건네느라 내용을 읽어보지 못했다.
그저 심각하게 굳은 표정의 곤마. 뒤이어 받은 마후 역시 표정이 좋지 않아 가벼운 내용이 아닐 거라 고 추측할 뿐.
아령도 궁금했던지, 슬쩍 마후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이상한 놈이군.”
그때였다.
한편에 우두커니 선 채 지켜보던 살마가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다.
“첩자가 자신을 드러내는 것도 그렇고, 별 같잖은 놈을 무관도에서 떨어뜨리겠다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비록 삼류이긴 하나 명색이 천마제자의 호위를 한다는 놈이……….”
살마는 고개를 들어 설휘를 노려봤다.
“무관도 시험을 치르러 간다는 녀석에게 당했다는 건 너무 우습지 않나?”
“……!”
설휘는 온몸이 굳는 듯 얼어버렸다.
살기다.
그것도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치명적인 살기.
태황각주와는 비교도 안 되는 압박감이 살마의 몸 전신에서 쏘아져 나오고 있었다.
<셋째 보상. 설휘 님의 체력과 내공을 10만으로, 그 외 모든 능력치를 대폭 향상시켜 드립니다.>
띠링!
갑자기 신호와 함께 온몸에 힘이 가득 돌기 시작했다.
[State Summary, 상태 간단 요약]
설휘 [말단 조직 분대원]
체력 100,000/100,000
내공 100,000/100,100
전투력 39만(↑30만)
[소유무공]
<소희마공> 기본단계(↑중급단계)
<적수마공> 기본단계(↑중급단계)
<초극마공> 기본단계(↑중급단계)
[독심술]
<지속스킬> 기본단계(↑중급단계)
<최소 조건을 만족하여 사대극마공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소유무공]
<소희마공> 중급단계
<적수마공> 중급단계
<초극마공> 중급단계
<사대극마공 풍(風)> 걸음마(New)
◆ 사대극마공 특성 기술표 ◆
풍신(風神) : → N(중립) ↓↘, A <4.5배속>
‘우아아아아!’
설휘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온몸에 힘이 미친 듯이 치솟고, 단전은 거대한 바다처럼 끝도 없이 넓어졌다.
이때까진 정말 좋았다.
[경고! 살마가 설휘 님의 빈틈을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대응하시겠습니까?]
▶ 맞대응한다.
▷ 방어한다.
▷ 도망간다.
‘이런 미친!’
설휘는 순식간에 머리가 하얘졌다.
왜? 갑자기 첫째 제자. 살마가 공격을 하는 것인가.
아무리 자신이 강해졌다곤 하나 천마 제자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숙련도가 오른 독심술로도 저들의 능력 수치는 파악되지 않았다.
‘이대로 죽을 수 없다.’
▶ 도망간다.
선택은 정해져 있었지만, 설휘는 망설이고 있었다.
머릿속에 생생히 떠오르는 소희마공 보법 중 가장 빠른 보법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이다.
‘제발 어떻게든!’
설휘는 단단히 각오하고는 세 번째 지문을 선택했다.
패애애액!
선택하자마자 설휘는 전력을 다해 몸을 비틀었다.
동시에 절로 튀어나온 비명.
“크으윽!”
오른쪽 어깻죽지부터 올라오는 화끈거림을 느끼며 곧바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피한 건가….’
정황상 그렇게 보이긴 했다.
어느새 검을 뽑아 든 살마가 자신을 방향을 겨누고 있었고. 통증이 가슴에 느껴지지 않았으니.
‘아냐, 정확하진 않지만 맞았어. 이 갑옷이 날 살려준 거야…….’
검기가 스쳐 간 부위를 만지던 설휘는 깨달았다.
명왕전포. 촘촘한 쇠미늘에 은사로 촘촘히 덧댄 이 방어구가 검기의 방향을 틀었다.
물론 10만대로 오른 내공과 40만에 달하는 전투력 향상이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손가락 구부릴 정도의 힘은 있는 놈이로군.”
철컥.
살마는 무슨 이유인지 검을 회수했다.
그러고는 느린 걸음으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저벅저벅.
‘손발이 움직이지 않는다.’
설휘는 그저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투기(鬪技) 때문이다.
극한의 경지에 오르면 이렇게 눈빛만으로도 온몸이 결박되는 경험을 하게 만들 수 있다.
압도적인 실력 차이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터억.
그런데 자신 쪽으로 다가오던 살마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마후 때문이었다.
그가 밀지를 쑥 내밀자, 슬쩍 쳐다본 살마는 이내 시선을 어디론가 돌렸다.
곤마 쪽이었다.
“…….”
곤마는 말하지 않았다.
눈빛을 마주치지도, 어떤 행동을 취하지도 않았다.
살마는 그 모습에 혀를 찼다.
“쯧쯧…….”
그 길로 돌아섰다.
천만다행하게도 설휘 쪽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살마의 의도는 다른 곳에 있었다.’
설휘는 천천히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기절했던 거운.
그는 어느새 몸이 두 동강 난 채로 절명해 있었다.
살마가 검기를 쏘아내던 방향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거운도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는 설휘와 거운 둘 다 죽일 마음이 있었다는 거다.
“재밌는 수하를 뒀구나.”
툭툭.
마후는 씨익 웃으며 곤마의 어깨를 쳤다. 그러고는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큽.”
설휘를 빤히 바라보던 아령.
그녀도 께름칙한 웃음을 남긴 채 자연스럽게 자리를 떴다.
‘대체 저 밀지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기에…….’
멍하니 앉아 있던 설휘는 정신이 없었다.
살마는 이 일에 연관된 자이니 그렇다 하더라도, 밀지에 뭐라고 적혀 있기에 다른 제자들도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따라오너라.”
의아하게도 곤마도 더는 언급을 피하며 뒤돌아섰다.
설휘는 그제야 숨이 쉬어졌다.
아무렴 좋았다.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어딘가.
* * *
곤마와 같이 걸어간 곳은 건물과 건물 사이였다.
생전 처음 보는 건물이었지만, 설휘는 구조를 보며 대충 추측했다.
‘혹시, 천마 제자들의 가택(家宅)인가?’
본디 고헌(古軒)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상부지단과 하부지단의 가운데 위치한 별장.
이런 곳에 곤마가 직접 데려가는 걸 보면, 그가 잠시 쉬며 무공을 연마하는 공간이 분명했다.
‘그나저나, 넷째 제자가 이 정도로 강하다니.’
설휘는 독심술 숙련도가 높아지면서 드디어 곤마의 능력 수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잘못 본 게 아닌가 눈을 의심했다.
그만큼 그의 능력은 이전에 보았던 마인들보다 월등히 높았다.
[State Summary, 상태 간단 요약]
곤마 [천마 넷째 제자]
체력 95만/95만
내공 88만/88만
전투력 105만(+∞)
이제껏 봤던 어떤 능력보다 높은 수치.
하지만 자신이 생각할 정도로 대단한 능력은 아니었다.
그것보다
‘저 모양은 뭐지?’
처음 보는 문자. 뭔가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을 것 같은데 그에 대한 추가 설명은 없었다.
“다 왔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사이, 앞장서던 곤마가 걸음을 멈췄다.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길을 안내하던 그가 돌아보지도 않고 가만히 선 채로 있는 것이다.
“여기가 어딥니까?”
설휘는 내심 주의하며 조심히 물었다.
밀지 내용도 그렇고, 자신을 데려온 것까지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다.
“어디긴.”
천천히 고개를 돌린 곤마, 그는 웃고 있었다.
평범한 웃음과는 다른 웃음.
“너를 심문할 장소지.”
“……!”
[경고! 정체불명의 적이 설휘 님의 빈틈을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대응하시겠습니까?]
[경고! 정체불명의 적이 설휘 님의 빈틈을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대응하시겠습니까?]
[경고! 정체불명의 적이 설휘 님의 빈틈을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대응하시겠습니까?]
[경고! 정체불명의 적이 설휘 님의 빈틈을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대응하시겠습니까?]
눈앞을 가리는 경고 문자.
그리고 기존과 달리 엄청나게 답변을 요구하는.
3…… 2……
선택 속도.
그 때문에 설휘는 뭔가를 고르기도 전에 이미 선택을 해버렸다.
<‘맞대응한다’를 선택하셨습니다.>
<‘맞대응한다’를 선택하셨습니다.>
………
………
“컥!”
한순간.
번쩍임과 함께 설휘는 정신을 잃었다.
* * *
눈이 잘 떠지지 않는다.
손도, 발도 어디에 묶여 있는지 생각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저 지독한 고통.
그리고 자신의 상태를 알려주는 문구들.
[혈도를 짚여 몸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한쪽 청각이 마비되었습니다.]
[몸 전체에 6곳의 자상과 32곳의 약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기혈이 뒤틀렸습니다. 통증이 지속됩니다.]
그리고 현 자신의 상태.
[State Summary, 상태 간단 요약]
설휘 [말단 조직 분대장]
체력 1만(↓9만)/10만
내공 3만(↓7만)/10만
전투력 35만(↓4만)/39만
모든 능력이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망할 저주 같은 기연.’
고통 속에서도 설휘는 이를 갈았다.
이 모든 결과의 원흉.
보상해준답시고 이것저것 손에 쥐여주더니, 마지막은 꼭 이런 식으로 자신의 뒤통수를 친다.
아무리 좋아하려고 해도 좋아할 수 없는 놈이다.
“눈을 떴나?”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미약한 빛에 의존하여 설휘는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자리에 앉아 있는 건 곤마였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는 복면을 쓴 다섯의 무인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그건 네가 더 잘 알 텐데?”
질문이 이상했다.
자신이 더 잘 안다니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무엇을 더 잘 안다는 말입니까.”
스윽.
곤마가 뭔가를 자신 앞으로 내밀었다.
설휘는 힘껏 눈을 떠 그것을 보았다.
- ΔΗΙθγγΩ.
밀어처럼 보인다.
당연히 해독을 하지 못하는 설휘로선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모르는 척하니 알려주지. 천마 제자들은 5각과 9당에서 쓰는 모든 밀어를 알고 있다. 그리고 이건 나를 따르는 천야각(天夜閣)의 밀어이고.”
그는 한쪽 서탁 위에 놓인 촛불로 밀지를 가져다 대고는 말했다.
“해석하면 배신자를 처단하라는 뜻이지.”
“……!”
그 소리에 설휘는 떠지지 않던 눈을 치켜떴다.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배신자라니.
곤마를 따르는 천야각은 또 뭔가?
이건 홍마원 귀안마수의 밀지 아닌가?
“연기가 제법이군.”
곤마는 자신의 얼굴을 설휘의 눈앞으로 바짝 가져대더니 말을 이었다.
“너는 어떤 임무를 받았느냐? 너의 배후에 누가 있냐 말이다!”
“저는 누가 보낸 건지 도통…… 크아아악!”
분근착골이다.
뼈와 뼈가 뒤틀리는 고통.
곤마가 설휘의 어깨를 잡은 채 펼친 고문은 저번 때보다 훨씬 더 극명한 고통을 안겨다 주었다.
더욱이 시간도 길었다.
“끄허허허…….”
고문이 멈춰졌을 때, 설휘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성이 마비되는 것 같은 고통과 경고 가득한 목소리만 들릴 뿐.
“쉽게 발설하게 내 친절히 도와주지. 태황각주가 네놈의 부하들을 죽일 때, 너만은 천일관에 보냈다. 그리고 넌 내게 여지도란 문서를 줬지.”
“…….”
“내게 환심을 사기 위해 강해지겠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 널 무관도로 보낸 거다. 그런데 지금 보니 넌 무관도 따위는 충분히 뛰어넘을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어. 해서 추측해봤지.”
설휘는 정신을 다잡기 위해 노력했다.
배신자 거운을 잡았는데, 되레 자신이 배신자가 될 수는 없었다.
“넌 무관도를 통과할 마음이 없었어. 너의 목적은 첩자가 되기 위해 나의 신임을 얻는 것. 아닌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찾아야 해! 방법을…….’
설휘는 곤마의 이야기 하나하나를 허투루 듣지 않으려 노력했다.
항상 작은 정보에 담긴 의미가 큰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가정해보았다.
밀지에 ‘배신자를 처단하라’고 적혀 있다는 말은 정말 확실한 걸까라고.
아마도 그건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천마 제자들이 밀지를 보고 돌아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세력이 없는 곤마. 그를 따르는 천야각의 밀어라면 충분히 납득이 간다.
정리하자면, ‘곤마 쪽 사람이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고’, 거운을 시켜 ‘배신자를 죽이라’는 밀어를 보냈으며, 그 밀지를 천마 제자들이 본 셈이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자신이 누군가의 첩자인 거다.
그들의 입장에선 그런 거운을 되레 죽였으니 설휘, 그 자신은 여전히 ‘곤마에게 접근한 첩자’가 되어 있었고.
그 처분에 관해서는 곤마에게 맡기고 자리를 떠나갔을 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설휘가 축 처졌던 고개를 다시 들었다.
곤마는 매우 불신하는 표정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안되면 그뿐이다.
“제가 태황각주 사람이 아니란 것만 증명하면 되는 겁니까?”
“……무슨 말이냐?”
“그러니까. 그들의 편이 아니라는 것만 증명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곤마는 불쾌한 표정이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하지만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증명할 수 있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설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속으로 몇 번이고 빌었다.
열리기를.
그곳엔 이 모든 것을 타개 할 수 있는 귀중한 물건이 들어 있다.
[도구함을 여시겠습니까?]
늘 그렇듯. 선택창의 지문은 도망칠 길을 열어 놓는다.
제자들이 있는 상황에서 설휘 스스로가 첩자가 된 것.
그것이 첫째 제자의 의심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요행이든, 운이든 수많은 삶의 반복으로 얻어낸 또 하나의 증거품.
그것이 지금 상황과 적절하게 맞아떨어졌다.
‘된다!’
전투 중에는 열리지 않았던 도구함.
지금은 가능했다.
기연인지 저주인지 정말로 알 수 없는 이 목록창들은 자신의 살길을 마련해 주고 있었으니.
<사대극마공 풍(風) 비급서를 꺼내시겠습니까?>
이게 설휘의 마지막 한 수였다.
곤마 입장에서 절대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는 비급.
절대비급서를 그에게 건네줄 생각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