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살고 싶으면 생각해라 (2)
과거 설휘는 사대극마공 비급을 도구함에 넣은 뒤 몇 번의 죽음과 회귀를 반복했다.
이럴 경우, 무관도의 보물처럼 영양갱이 하나 놓이는 것으로 상황이 정리되었다.
그렇다면 사대극마공은 어떨까?
추측컨대, 본래 있던 자리에 처음부터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애초에 세상에 존재했는지, 존재했다면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품속으로.’
설휘는 사대극마공을 시선으로 잡아끌어 품속으로 옮겼다.
“제 품을 뒤져 보시지요.”
곤마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내 자신을 한 번 노려보더니 천천히 품속으로 손을 뻗고.
“이건……!”
그는 곧장 신음을 토해냈다.
당황한 눈치였다.
아니, 충격을 받은 듯 표정이 심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어떻게 네놈이 이걸…….”
그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거다.
천마 제자들만 가지고 있는 비급을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게 이해가 될 리 없을 터.
설휘는 지금이 기회라 생각했다.
“거운이란 녀석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뭐라?”
믿지 않는 눈치다.
하지만 아니라고 반박하기도 어려울 거다.
거운은 그의 호위무사.
곤마에게 자신은 만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일개 말단 무사니까.
“생각해보시지요. 제가 만약 첩자라면, 이걸 어떻게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
“하면, 다시 여쭙겠습니다. 제자께서는 이 비급서를 언제 잃어버리셨습니까?”
곤마는 대답하지 못했다.
안 하는 것일 테지.
이렇게 중요한 걸 잃어버린 부끄러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일 터.
한참을 돌덩이처럼 굳게 닫혔던 곤마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확실히, 이걸 잃어버린 시기상 너와는 겹치지 않는다.”
‘역시. 세상이 다르게 돌아가고 있어.’
설휘는 다시 한번 눈앞에 내린 기연의 신비로움을 느꼈다.
원래는 있어야 할 물건들인데, 도구함에 넣는 순간 인과가 조금씩 달라진다는 것.
“하나.”
곤마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말했다.
“천야각주가 나를 배신할 사람 역시 아니지.”
“그건 제가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천야각주가 지시하지 않았다면, 이것 하나는 밝혀질 겁니다. 우리가 움직였다면, 적들도 가만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요.”
“……무슨 말인가?”
“모략을 주도할 줄 아는 자는 항상 만일에 대비하는 법입니다. 거운이 죽었을 경우. 혹은 발각되었을 경우. 두 상황을 대비해 손을 썼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지금 상황도 모두 그들이 만든 거란 말인가?”
“그 가정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추측은 어렵지 않았다.
분명 눈앞에 떴던 보상 중 하나.
홍마원. 귀안마수 밀지라고 적혀 있었다.
그 정보가 틀리지 않았다고 가정한다면, 그리고 그 밀지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줄 구명줄이었다면, 결국 추론은 이렇게 나온다.
귀안마수가 천무각 밀지로 위조했다는 걸 자신에게 알려주었던 것.
아마 당시에 자신을 살리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을 거다.
특히 첫째 제자로부터 목숨을 보전할 수 있게 말이다.
“넌 나를 항상 혼란스럽게 하는군.”
답답했다.
곤마는 상황 정황을 이해한 것 같으면서도 물러설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마도 이것 때문일 거다.
곤마 <경계선 성격장애>
정서적인 불안감.
본교의 입지에 따른 버려짐의 불안과 의심이 뇌리에 자리하고 있다.
이런 경우, 사람에 대한 불신에서 오는 자아감이 가장 큰 문제다.
“오히려 다를 겁니다. 만약 제가 불순한 의도가 있었다면, 다른 제자들에게 사대극마공 비급을 왜 보여주지 않았겠습니까.”
“그거야…….”
곤마가 말을 잇지 못했다.
아마도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을 거다.
가뜩이나 본교 내 입지가 좁은 상황인데, 자신이 비급을 꺼냈다면 그의 입장은 난처함을 넘어 존폐 자체가 흔들렸을 터.
교주가 건네준 비급을 이런 하찮은 녀석이 들고 있었으니.
“이번 답변은 좀 맘에 들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에서 기립해 있던 그의 수하들.
처음부터 끝까지 그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의문이 있군.”
아직 끝나지 않은 건가.
돌아서서 나가려던 그가 발길을 멈추고 다시 물어봤다.
“유원궁에 왔을 때, 왜 그런 욕설을 한 거지?”
‘아…….’
설휘는 뜨끔했다.
아직 그걸 기억하고 있다는 게 난처했다.
하나 이것 역시 자신이 생각해놓은 게 있었다.
“전 넷째 제자님의 속마음을 대변해줬을 뿐입니다.”
“내 속마음?”
“예.”
설휘는 곤마의 표정을 살폈다.
이전과 달리 약간의 호기심이 담긴 눈빛. 왠지 경계선 성격장애라는 저 문구와 같이 보니 설득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하나는 미친놈, 하나는 사기꾼에, 또 하나는 꽃뱀. 그간 비정상적인 놈들에게서 얼마나 시달렸겠습니까. 그 생각을 하니 순간 화가 났습니다. 그러다 곤마 님의 옆에서 실실거리는 모습을 보고는 더는 참지 못해서…….”
“…….”
대답 없이 자신을 노려보는 곤마.
설휘는 그의 시선을 피하면서, 너무 심하게 말했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특히 다른 제자들에게 놈이라 표현한 건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
“하하하하하!”
유쾌한 듯했다.
곤마가 미친 듯이 웃기 시작한 것이다.
얼굴을 돌리며 웃고 있었기에, 진심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지만.
“설휘.”
“예.”
“지금까지의 해명 중에서…….”
다시금 돌아본 곤마.
이내 다가오더니 턱 하고 자신의 어깨를 잡았다.
“제일 맘에 드는 대답이었다.”
분근착골을 쓰는 줄 알고 흠칫하던 설휘의 긴장이 풀어졌다.
그리고 그 길로 정신을 잃었다.
곤마에게 혼혈을 잡혔는지, 눈앞이 어지럽게 돌아갔다.
* * *
설휘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달려졌다 느낀 것은 두 가지였다.
일단 이전과 달리 편안했다.
침상에 몸이 뉘어진 채로 있었다.
그리고 힘이었다.
엄청난 내공이 몸 구석구석 느껴졌다.
[혈담무과화(血潭無果花)를 복용했습니다.]
[몸이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백록천담(白鹿天膽)을 복용했습니다.]
[체력 1만, 내공 1만이 상승했습니다.]
[State Summary, 상태 간단 요약]
설휘 [말단 조직 분대장]
체력 11만/11만(↑1만)
내공 11만/11만(↑1만)
전투력 40만(↑1만)
몸 상태를 치료했음은 물론, 영약까지 먹은 듯했다.
그야말로 최상의 몸 상태.
“살아났어.”
설휘는 침상에서 일어났다.
귀한 신분이 사용하는 공간인 듯, 침상뿐만 아니라 수납장과 서탁, 비치된 옷장.
화려하면서도 단정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면경!’
옷장 옆 면경을 발견한 설휘는 급히 그곳으로 갔다.
머리 위에 어떤 글귀가 쓰여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Coin 1 [마지막 기회]
“확실히 이게 마지막이구나.”
회귀하고 시간이 좀 흘렀다.
그러다 보니 혹시 자신이 가진 목숨 수를 잘못 계산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간 죽을 위기가 너무도 많이 있었기에.
하지만 목숨 수는 변하지 않는다.
새삼 아슬아슬했던 순간들이 얼마나 위험했는지 각인이 되었다.
“내겐 목숨이 더 필요해.”
이전 삶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체력과 내공 그리고 전투력이 급상승해 있다.
나름 여기까지 잘 왔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가 문제다.
가장 약한 넷째 제자의 줄을 잡았으니, 앞으로 목숨을 잃을 만한 상황은 끝없이 나올 것이다.
그곳에서 자신은 어떻게든 기회를 잡아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전투방식 <턴제>
설휘는 상단 위 전투방식을 확인했다.
확실히 턴제로 많은 위기에서 구함을 얻었다.
하지만 전투방식이 ‘AI’로 바뀌는 순간 너무도 부족함을 느꼈다.
그때 자신, 설휘는 천재적인 전투 감각을 넘어 신(神)에 도달한 느낌을 받았다.
다만 위험한 부분은, ‘AI’는 성격 자체가 바뀐다는 것.
“그래, 사대극마공을 익혔었지.”
설휘의 눈이 번뜩였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또렷이 기억나는 정보.
바로 사대극마공을 익혔다는 문구였다.
“내공심법은 단전의 구(球)를 만들어 생성한 열기를 호흡으로…….”
사대극마공을 떠올리자, 머릿속에 수많은 동작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일순.
“……!”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일대 폭풍을 불러일으키는 듯한 초식의 파괴력이 온몸을 휘감은 것이다.
드르륵!
설휘는 급히 방문을 열었다.
빨리 펼쳐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 * *
밖은 조용했다.
드넓은 마당에는 나무 몇 그루만 심겨 있었고, 좌우에 둘러쳐진 외벽 때문인지 지나치리만치 고요하며 적적했다.
[단영검을 꺼내시겠습니까?]
거운을 잡은 뒤, 그에게서 얻어낸 검.
한 번은 잃어버리기도 했지만, 이번 회귀에서는 다시 얻을 수 있었다.
스윽.
설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검을 역수로 들어 올려 손과 수직 방향으로 맞췄다.
……이것이 소주천의 원리이다. 여기서 축기(築基)를 화(火)로서 달군 뒤, 양의(陽儀) 호흡법으로 바람을 일으키니 이것이 극마공의 결정체다.
번쩍.
설휘는 눈을 뜸과 함께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러자 간헐적인 진동과 함께 그의 검신에서 생성된 칼바람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 지면을 할퀴었다.
구구구--쿠와아앙!
“이런 미친…….”
설휘는 광경을 보며 입을 쩌억 벌렸다.
일대의 장관이었다.
지면을 할퀴고 간 극마공. 풍(風)의 흔적들.
사방으로 뻗어 나간 바람이 수백의 개의 칼날이 되어 땅을 조각조각 분리해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외벽이 흔들릴 정도의 엄청난 풍압(風壓)까지 발생시켰다.
아직 걸음마 수준인데도, 그저 적당히 내기만 운용했을 뿐인데 이 정도일 줄이야.
“어? 언제부터 저런 게 떠 있었지?”
감격에 겨워하던 설휘는 상단을 보다가 한곳에 시선이 고정됐다.
상단의 문구 중에 떠 있는 ‘!’ 표시.
특히 무공목록이라 적힌 곳 옆에 떠 있었다.
[‘!’무공목록]
“그래. 통찰을 얻었을 때…….”
설휘는 이제야 기억이 났다.
전생(前生)의 삶에서 거운에 패한 뒤, 귀안마수를 통해 얻었던 통찰이었다.
설휘는 궁금증이 일어 시선으로 한번 선택을 해보았다.
[숙련도가 ‘중급단계’ 이상의 무공만 선택할 수 있습니다.]
[무공목록]
▶ 소희마공
▷ 적수마공
▷ 초극마공
▷ 사대극마공 풍
‘어?’
설휘는 선택할 수 있다는 표시를 보며 갸웃했다.
당시 통찰을 얻었을 때 나왔던 내용.
소유한 무공 중 하나를 더 높은 무공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얘기였지 않았는가.
“뭐 얼마나 대단한 무공을 주려고……”
설휘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사대극마공을 얻은 상태.
이런 무공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만만한 소희마공을 선택했다.
<무공이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소희마공 ▶ 소수마공(素手魔功)
“뭐라고!”
설휘는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눈으로 봐도 이게 정말인지 믿기지 않았다.
소수마공.
익히게 되면 두 손이 푸르스름한 광채를 띠게 된다는, 본교를 대표하는 마공.
맨손 상태에서도 검을 든 상대와 싸울 정도로, 베어지지 않는 도검불침의 상태가 된다고 알려졌다.
“잘만 사용한다면, 사대극마공보다 강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다.
사대극마공이 천마제자들의 무공으로 알려져 있긴 하나, 수백 년의 역사를 볼 때 본교를 대표하는 무공이라는 것에는 의문이 있다.
사대극마공으로 본교에 이름을 떨친 자들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수마공은 그렇지 않다.
굳이 역사를 뒤져보지 않아도, 불과 이십 년 전.
맹의 수호단 백여 명을 혼자서 압살했던 자가 냉철마녀(冷徹魔女)라 불리는 천미려(天迷麗)가 아니었던가.
그 외에도 무수히 많은 무용담이 전해져 온다는 무공이다.
그 무공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모략을 주도할 줄 아는 자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법이라 했지.”
“……!”
툭.
누군가 지면을 밟았다.
옆에 있다는 걸 감지도 하기 전에 나타난 인물.
곤마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시 욕설을 한 것도 나의 속마음을 대신하기 위함이라고 했고.”
‘뭔가 잘못됐다!’
설휘는 직감했다.
화난 표정을 짓는 곤마의 표정은 거짓이 아니라는 걸.
“그런데 이상하지? 비급은 거운에게 얻었다면서, 어떻게 사대극마공 무공을 쓸 수 있는 거지?”
이는 단순한 분노 따위가 아니었다.
이제껏 설휘가 자신을 희롱했다는 것에 대한 수치심.
그걸 믿었던 그 자신에 대한 분개.
자신의 무공을 쓴 것에 대한 적개심.
이런 많은 감정이 복합적으로 얽혀 극한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었다.
<중요 지점을 통과했습니다. 저장하시겠습니까?>
■ 천력 95년, 제2장-1. 곤마가 제시하는 세 가지의 삶
□ 천력 95년, 제2장-15. [핵심무사 되기] 무관도 시험 탈락 후, 마지막 상대.
[빈 저장 공간]
곤마가 달려들까 긴장하던 설휘의 눈에 이것이 떠올랐다.
목숨이 하나 남은 상황에서 이게 뜬 이유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짚고 넘어가야 한다면 일단 짚는 게 맞았다.
그래서 남은 빈 곳을 선택했다.
□ 천력 95년, 제2장-1. 곤마가 제시하는 세 가지의 삶
□ 천력 95년, 제2장-15. [핵심무사 되기] 무관도 시험 탈락 후, 마지막 상대.
■ 천력 95년, 제2장-20. [핵심무사 되기] 마지막 이야기.
<저장되었습니다.>
‘마지막 이야기?’
설휘는 저장에 뜬 목록 내용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마지막이라니.
지금 상황이 핵심무사 되기 직전의 단계란 뜻인가?
<아래 지문을 선택하세요.>
늘 그렇듯 의문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해결된다.
또다시 설휘의 눈앞에 목록이 나왔고.
▶ 곤마를 쓰러뜨린다.
▷ 곤마를 설득시킨다.
▷ 곤마에게서 도망친다.
자신을 따라오는 ‘특별한 기연’은 3가지 지문으로 이 상황을 해결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늘 최상의 방법을 한곳에 숨긴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