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살고 싶으면 생각해라 (3)
솔직히 말하자면 곤마를 쓰러뜨리고 싶었다.
그를 제거한 뒤 이어질 후폭풍이 우려스러웠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목숨 + 10]
이제껏 몇 번의 회귀를 하면서 이 정도로 많은 삶을 얻을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잘못된 선택을 했더라도 무려 10번이나 보상해주는 기회가 있지 않은가.
‘우선 살아야 해.’
하지만 설휘는 모험을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이쯤 되면 모험이 아닌 객기다.
전투력이 2배 이상이나 차이가 난다는 의미가 어떤 건지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 곤마를 설득시킨다.
곤마에게서 도망치는 건 애초에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도망갈 수 있을지도 모르며, 설령 도망친다고 해도 어디로 숨을 것인가.
그러니 이걸 골라야 했다.
<‘곤마를 설득시킨다.’를 선택하셨습니다.>
선택 후, 설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곧장 이라도 살수를 쓸 것 같은 긴장 상태에서, 그는 노여워할 뿐 죽이려 들지 않았다.
그걸 보고 있자면 왠지 대화로 풀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이 상황에서도 변명할 수 있다는 건가?”
설휘는 곤마의 거듭된 물음 속에서 그가 계속 말을 거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강한 의심과 불신.
표면적으로는 그러했지만, 그 이면에는 이질적인 무언가가 더 존재했다.
아직까진 잘 모르겠지만.
‘사대극마공…….’
설휘가 눈을 감자 사대극마공의 구결이 떠올랐고, 수십 배에 달하는 주해(註解)가 튀어나와 무공의 묘리를 풀어냈다.
마공도 크게 보면 무학의 일종.
무학에는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깨달음이 모여 있다.
본디 그 하나하나의 예시와 학습의 결과를 글로 풀어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의 영역이다.
하지만 설휘에게 나타난 이 기연들은 그것을 가능케 했다.
‘아!’
마공 구결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던 설휘는 그와 유사한 구결들이 운용되는 또 하나의 마공을 찾아냈다.
사실 완전히 다른 형태의 무공.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보면 양극단에서 기(氣)를 다루는 방식이 유사했다.
“이 자리에서 변명거리를 찾고 있는 건 아니겠지?”
곤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느덧 불신에 더해진 고요함은 점점 위태로워지고 있었다.
“이걸 한번 보시겠습니까?”
“……?”
채애앵.
갑자기 설휘가 검을 바닥에 던지자 곤마의 미간을 좁혔다.
뭔가 불순한 의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그의 태도에 불쾌감이 약간은 누그러졌다.
‘소수마공 최대 경지는 10성.’
설휘의 머릿속을 메우는 소수마공의 구결들.
이론상 10성이 최고지만, 그건 거의 궁극의 경지였다.
실질적으로 9성에만 도달할 수 있어도 극한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으으으…….”
스스스슥.
손끝에 냉기류가 밀려 들어오자 설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공이 부족한 이유 때문이 아니다.
아직 자신은 하단전을 능숙하게 사용할 정도로 몸의 모든 혈이 타동되지는 않은 상태다.
고작 임시방편으로 뚫린 길만 사용하기에는 소수마공을 펼치는 게 힘겨웠다.
“하앗!”
손끝에 기운이 거북스러워질 때쯤, 설휘는 바닥을 손으로 내리쳤다.
그리고 눈앞에 그 역시 믿기 힘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쩌저어어억!
그를 중심으로 강한 기류가 퍼져 나갔다.
이내 그 기류는 얼음 칼날로 변했고, 셀 수 없이 많은 날이 지면을 뚫고 삐쭉삐쭉 솟아올랐다.
일전에 익혔던 소희마공과는 비교도 안 되는 냉기가 가시처럼 전 방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허……!”
놀란 건 설휘뿐만이 아니었다.
곤마는 주변을 뒤덮은 얼음 가시들을 보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설휘의 손끝에 맺힌 냉기만 보더라도 본교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사대극마공 풍이 양기를 태워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라면, 소수마공은 음기를 잡아당겨 한기를 일으키는 극음의 무공.”
“…….”
“호흡법과 방식을 궤를 달리하지만, 모두 극(極)을 추구함에서는 같습니다. 더욱이 궁극에 오르면 하단전뿐만 아니라 중단전, 상단전을 이용하는 무공으로…….”
“너, 냉철마녀 천미려 님의 제자였느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사대극마공을 익힌 이유를 열심히 설득해가던 설휘의 말문이 막혔다.
갑자기 천미려의 제자란 말이 왜 나왔을까.
일단 곤마가 뭐라 하는지 듣기 위해 입을 닫고 기다렸다.
“그래, 처음부터 뭔가 이상했다. 일개 말단 무인이 거운을 잡아 온 것도 그렇고. 내 비급을 보고서 단번에 익힌 것도 그러하고…….”
곤마는 설휘를 응시하며 물었다.
“정말 천미려 님의 제자인 것이냐?”
“…….”
설휘는 곤마의 머리 위에 떠 있는 글귀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의심과 불신.
그 이면에 깔린 것이 무엇인지 곤마의 머리 위에 떠 오른 문구를 다시 보며 찾아냈다.
곤마 <경계선 성격장애>
한곳에 의존하려는 감정.
자신을 대한 믿음과 확신이 없어, 누군가에게 믿고 맡기고 싶어 하는 행동.
이상화와 평가절하의 양극적인 대인관계 양상.
고작 소수마공을 펼쳐 보였을 뿐인데 벌써 자신에게 물어오는 음색에서부터 호의가 느껴졌다.
“결국, 탄로가 나버렸군요.”
설휘는 그의 바람처럼 애써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에라 모르겠다.
오늘부터 내 사부 하자.
“맞습니다. 제가 천미려 님의 제자 설휘입니다.”
“이런. 괜히 미안하게 됐네. 숨기고 싶었을 터인데 내 의심이 좀 많은지라.”
그 말에 곤마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리고 조금 전과는 정반대의 신뢰감을 표출했다.
“그나저나 사부께서는 아직 폐관수련 중이신가? 워낙 신출귀몰하신 분이라, 본교에서도 아는 분은 거의 없어서 말이야.”
‘폐관수련 중이신가?’
설휘는 알 길이 없었지만, 지금은 상황에 맞추어 대답해야 했다.
사실 이쪽 분야에선 자신은 전문가다.
“예. 십여 년 전,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고 싶다며 떠나신 게 그분을 본 마지막이었습니다. 그 뒤로 저에게도 아직 연통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뭐, 그럴 걸세. 워낙 본교에서도 쌀쌀맞기로 유명하지 않은가. 자네가 이해하게.”
곤마는 이제 흡족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반 존대로 말투가 변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자네 말이 맞았네. 천무각주는 이 일에 개입한 적이 없지. 모두 배후의 짓인 듯해.”
곤마가 굳이 묻지 않았던 사실까지 실토하자, 설휘는 그제야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어떻게 순탄하게 넘기기는 했다.
그걸 증명하듯. 곤마는 자신을 원하던 것을 직접 말했다.
“하여 오늘부터 내 자네를 은영단에 입관시킬까 하는데.”
“은영단…… 말입니까?”
“그래.”
곤마의 핵심부대 중 하나.
추적과 은폐. 상황에 따라서 적도 제거해야 하는 여러 임무를 가진 직책.
혹독한 수련은 덤이지만 무관도보다 좀 더 효율적으로 강해질 기회도 있는 그곳.
드디어 원하던 바를 이룬 것이다.
“잘해보세.”
곤마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눈앞에 문구가 나타났다.
<[곤마의 핵심무사 되기]를 성공하셨습니다.>
곤마가 제시하는 세 가지의 삶의 첫째.
핵심무사 되기에 성공했다는 신호였다.
그리고 처음 보는 문구도 나타났다.
<지금까지의 점수를 집계합니다.>
체력 : 11만
내공 : 11만
전투력 : 40만
무공 : 소수마공, 적수마공, 초극마공, 사대극마공
도구함 : 금창약, 상급단갑……
갑자기 이상한 문구들이 뜨기 시작했고, 뒤이어.
<점수 합산 : 목숨 3개를 드립니다.>
목숨이 3개 더 늘어났다.
거기다.
<지금부터 전투방식에 ‘시뮬레이션’ 목록이 추가됩니다.>
<전투 중에 전투방식을 바꿀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투 중에라도 ‘턴제’에서 ‘AI’로, 다시 ‘시뮬레이션’으로 변경하실 수 있습니다. 단, ‘턴제’에서 ‘AI’로 변경한 뒤 다시 ‘턴제’로 되돌아가는 방식의 변경은 불가능합니다.>
<시뮬레이션 전투방식에서는 높은 경지일수록, 무공을 많이 얻을수록 유리합니다.>
<시뮬레이션은 ‘AI’와 마찬가지로 적의 능력수치를 볼 수 없습니다.>
<시뮬레이션은 단 1회만 제공되며, 적이 다수일 때는 제일 강한 상대를 대상으로 최적값을 산출합니다.>
전투방식 <턴제>
말하자면 이건 시간이 멈추며.
적의 수치가 보인 상태로 공격하고 방어하고, 도구함을 쓰는 것.
전투방식
이건 몸 안의 다른 자아가 튀어나와 능력 이상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거기다.
전투방식 <시뮬레이션>
이런 게 하나 더 생긴다는 거지.
적들의 능력수치는 볼 수 없고 말이다.
“…….”
설휘는 마지막에 뜨는 정보까지 확인했다.
이건 참고사항인 것 같다.
<조언>
만족스러운 삶이 나오지 않는다면 좀 더 높은 난이도에 도전하세요.
예) 곤마가 제시하는 세 가지의 삶
* * *
내 급한 볼일이 있어 잠시 자리를 비울 터이니, 다시 찾아올 때까지 이곳에 지내거라.
곤마는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왠지 급한 볼일이 무언지 궁금했지만, 굳이 물어보진 않았다.
“하아…….”
누워있던 침실로 돌아온 설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게 꿈처럼 느껴졌다.
몇 번의 죽음과 몇 번의 환생.
뜻하지 않게 나타나는 선택지문과 계속되는 싸움.
강해지고 싶었던 열망도 거듭된 선택과 전투 속에서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런데도 포기할 수 없었다.
여긴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다.
오로지 명령에 대한 복종. 그 무엇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어떤 것도 될 수 있다.
정점에 서지 않으면, 이 지옥에서 탈출할 수 없다.
Coin 4 [네 번의 기회]
면경에 한 번 서 보니, 조금 전 나타났던 문자처럼 목숨 3개가 더 불어나 있었다.
평소라면 더없이 기분이 좋았겠지만, 지금의 설휘는 그렇지 않았다.
그만큼 더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벌어질 거란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우선 눈부터 붙이자.”
설휘는 잡념을 지우고 침상에 누웠다.
생각이 많아지면 걱정이 앞서고 나약해지기 마련이다.
빨리 자고 깨끗한 정신일 때 뭐라도 하는 게 나았다.
* * *
아침에 눈을 뜬 설휘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도구함을 열어보는 거였다.
[도구함]
<약재>
금창약 5
<영약>
환속영신단 1
<장비>
[갑옷] 상급단갑 1
<잡화>
무관도 보물지도(7/7), 약도(무관도-신(身)) 1, 내역표(무관도) 1
도구함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
한 가지는 시선으로 선택만 하면 바로 적용되는 기능.
영약의 경우 체력과 내공을 순식간에 회복시켰고, 장비는 자동으로 장착되었다.
다른 하나는 직접 눈앞에 나타나게 하는 방법.
곤마에게 보였던 사대극마공 지도는 그렇게 꺼낸 것이었다.
“목숨은 Coin. 통찰은 더 높은 무공서. 그리고 사랑은…….”
정보를 더듬어가던 설휘가 말을 얼버무렸다.
사랑? 그게 뭐지?
그건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모르겠다. 수련이나 하자.”
설휘가 대충 옷을 갈아입었을 때였다.
드르륵.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청년이 들어왔다.
“잘 잤느냐?”
곤마였다.
볼일이 있다며 사라졌던 그는, 일이 해결되었는지 아침부터 자신을 찾아왔다.
“예.”
“그럼 나와라.”
대답하고 뒤돌아서는 곤마.
설휘는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어?’
밖으로 나오자 팔짱을 낀 채 서 있던 중년인이 나타났다.
본교에서 처음 보는 인물.
하지만 설휘는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란 걸 느꼈다.
[State, 상태]
흑구(黑狗) [은영단주]
신체 정상
경지 초절정
[Value, 수치]
체력 400만/400만
내공 270만/270만
전투력 980만
‘뭐? 980만이라고!’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전투력이다.
체력과 내공도 그렇지만, 전투력은 가히 상식을 뛰어넘는 수치.
대체 얼마나 강한것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본래 은영단에 들어가기 위해선 입관시험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넌 이미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
곤마는 설휘를 보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이건 너의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알아보려는 거다. 실력에 맞는 직책을 내려야 하니까.”
“허면, 저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마음껏 공격해라.”
설휘가 묻자 곤마는 흑구를 보며 말했다.
허리춤에 찬 검은 꺼내지도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중년인.
그를 보던 설휘는 눈이 번뜩였다.
‘그렇다면 뭐…….’
이번 싸움은 그 어떤 전투보다 마음이 편했다.
곤마도 말했지만, 생사를 걸고 싸우는 방식이 아니라는 걸.
정보창 역시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실력에 따라 등급이 정해집니다.>
은영단주
-> 흑구를 쓰러트림
은영단 사령대장(死靈隊長)
-> 흑구에게 인정받음
은영단 사령대 4조 조장
-> 흑구를 당황시킴
은영단 사령대 4조 대원
-> 흑구를 실망시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