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마지막 전투유형 (2)
‘쯧쯧. 천미려 님의 제자라더니…….’
곤마는 설휘의 대련을 지켜보며 실망감을 금치 못했다.
공격방식은 생각만큼 뛰어나지 않았고.
초식의 운용은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았으며.
나름의 한 수라 보였던 마공의 위력은 자신의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그나마 그가 펼친 소수마공.
실처럼 가느다랗게 뻗어 나간 냉기류가 흑구의 발 앞 지면에 닿자마자 수십 갈래 생성되는 얼음기둥에 잠시 눈을 뺏겼을 뿐.
하지만 그것도 잠시, 흑구의 발 구르기 한 번에 모든 것이 파훼되지 않았는가.
“넷째 제자님. 굳이 이런 덜떨어진 놈을 은영단에 넣으시려는 이유가…….”
흑구의 입에서 난감하다는 듯이 불평이 튀어나왔다.
빈말이었다.
설휘가 형편없는 실력이 아니라는 건 그가 제일 잘 알 것이다.
보통 상대의 잠재력을 더 끌어내기 위한 은영단주의 노림수 중 하나였다.
아니나 다를까.
설휘의 눈빛이 갑자기 확 달라지는 게 보였다.
‘진짜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곤마는 차분히 기다렸지만, 그다지 많은 기대를 하진 않았다.
은영단주 흑구는 이미 초절정 반열에 오른 자.
그것도 초마를 목전에 둔 자다.
그런 그를 서 있는 자리에서 한두 발짝 밀어내는 정도만으로도 제법 인정받을만한 실력이다.
‘움직이는군.’
파앗.
설휘가 움직이자 곤마는 유심히 바라봤다.
삼 장 앞에서 도약하는 똑같은 동작.
그리고 은영단주에게 너무도 쉽게 막히는 평범한 공격.
‘어?’
그때 곤마의 눈이 약간 치켜 올라갔다.
기운을 쏘아내지 않고, 머금고 있던 마기를 접근전에서 퍼트린 것이다.
재차 휘두르는 검 끝에서 다시금 피어난 염기.
‘저건!’
곤마는 첫눈에 설휘가 펼친 무공을 알아봤다.
열기만으로도 그을음을 만들어낸다는 초극마공을 펼쳐냈다는 걸.
더욱이 그의 시선을 빼앗은 건 설휘의 그다음 공격이었다.
“건방진…….”
흑구가 튕겨내는 순간, 곤마는 똑똑히 보았다.
설휘가 펼치는 보법을.
‘귀신보(鬼神步)다.’
사대극마공의 보법 중 하나.
상대의 힘을 이용해 더 멀리 빠르게 이동하는 수법. 설휘는 공격을 받던 그 상황에서 너무도 능숙하게 사대극마공의 보법을 펼쳤다.
‘거기다 풍환전괴(風環傳壞)까지!’
멀어지면서 날린 한 수.
검풍(劍風)을 고리처럼 휘감아 위력을 몇 배나 끌어 올린, 사대극마공 풍의 삼초식이라 불리는 그것까지 펼쳐내고 있었다.
“저건!”
그리고 마지막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터져 나왔다.
풍환전괴를 피하며 도약한 은영단주를 향해 설휘가 펼친 무공.
그건 초절정에 도달하지 못하면 감히 흉내도 낼 수 없다는 비기.
풍신검(風神劍)이었다.
* * *
풍신이 사용됐다는 문구가 떴을 때, 나의 시선은 온통 설휘의 검 끝에 가 있었다.
그저 검을 위로 퍼 올리는 동작에서 일어난 검풍.
한데, 검풍은 한곳에서 뱅뱅 돌며 삽시간에 몸짓이 불리더니 기괴할 정도로 거대해졌다.
그뿐만 아니라, 번쩍이는 빛까지 담고 있었다.
‘뇌전(雷電)의 힘까지!’
사대극마공 풍검(風劍)의 극의 중 하나.
바람의 기류에 뇌전에 힘까지 담긴 그것은 일대 폭풍을 불러일으키며 흑영단주 흑구를 덮쳐버렸다.
콰르르르릉!
그 거대한 뇌전 폭풍에 휩싸이며 그것을 온전히 받아낸 흑구.
폭풍의 방향에 따라 뒤로 주욱 밀려 나가더니, 곤마의 거처 즈음에 멈춰서 폭풍을 온몸으로 막아냈다.
쩌저저저적!
건물 기둥이 무너지며 일부분이 파손되고 난 뒤에야 폭풍은 소멸하였다.
‘피해를 받은 건가?’
그리고 바로 앞에 지면을 딛고 선 흑구가 있었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옷은 여기저기 찢겨 있는 것이, 풍신에 당한 흔적이 역력했다.
그런데 그의 눈에는 피해를 입었다는 분노보다 믿을 수 없다는 경악과 당혹감이 담겨 있다.
그런데 AI설휘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역시 이따위 몸으로는 저 애송이를 이길 수 없겠어.
상대를 밀어붙인 그는 오히려 불평을 내뱉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행동.
갑자기 혈자리를 짚기 시작한 것이다.
‘야이 미친놈아아아!’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봤다.
천령혈(天靈穴), 기문혈(氣門穴), 제문혈(臍門穴)을 연거푸 짚는 행동.
잠력을 격발시켜 지금보다 더한 힘을 얻으려는, 수명을 담보로 사혈(死血)을 눌러 싸우려는 미친 짓을 벌이고 있다.
<이 싸움에 개입하시겠습니까? 승낙/거부>
내가 난리를 치려고 하자, 갑자기 눈앞에 뜨는 정보창.
나는 뒤도 돌아볼 것 없이 승낙을 선택했다.
“아, 미친놈. 진짜 엿 될 뻔했네…….”
진짜 아슬아슬했다.
7번째 사혈을 찍힌 후, 마지막을 남겨두고 겨우 자신의 몸을 되찾을 수 있었다.
* * *
“이번 건, 제법 훌륭했다.”
설휘를 향해 걸어오던 흑구의 표정이 점차 밝아졌다.
생각지도 못한 나름의 한 수.
애초에 이건 싸움이 아니었기에, 그래서 웃어넘길 수 있었다.
물론 지금까지는 그랬다.
“죄송하지만…….”
“…….”
“한 번 더 싸워 봐도 되겠습니까?”
설휘가 조심스럽게 말을 붙어왔다.
흑구는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네 실력은 대충 파악을 했으니…….”
“부탁드립니다.”
“허.”
흑구의 표정이 다시금 어두워졌다.
언뜻 들으면 진짜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처럼 말하는 듯했다.
“적당히 하거라. 이미 말하지 않았나. 네 실력을 파악했다고…….”
“계속하거라.”
그때, 대화 중 한쪽에 물러서 있던 곤마가 끼어들었다. 그는 호기심이 잔뜩 어린 눈으로 설휘를 보며 말했다.
“전부 보여 봐라. 가지고 있는 모든 무공을 다 써서.”
“끄응.”
흑구는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름 변칙적인 수법과 화려한 무공.
거기다 사대극마공의 무공을 썼다는 것은 칭찬해 줄 일이 맞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자신이 공격하려 들면 언제든 일 합에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가.
“감사합니다.”
설휘가 다시 검을 세우자 흑구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넷째 제자의 말을 거역할 수 없으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와라. 이번이 마지막이다.”
‘시뮬레이션을 해보자.’
설휘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싸워 봤자 AI만큼 타격을 줄 수 없다는 걸.
하지만 이번에 새로 나타난 전투방식을 파악할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이런 대단한 상대 앞에서 목숨 걱정 없이 써볼 기회가 흔하겠는가.
전투방식 <시뮬레이션>
전투방식을 바꾸자마자 반응하는 정보창들.
<선택제에서는 기본적으로 ‘삼재검법(三流武功)’이 추가됩니다.>
<선택제에서는 모든 무공 최적의 수를 분석하여 영상으로 보여드립니다.>
가장 먼저 뜬 건 이것이었고.
다음부터는 스스로 뭔가 정리하는 듯한 정보를 나타냈다.
<설휘 님의 무공 개수를 분석합니다.>
→ 소희마공, 소수마공, 적수마공, 초극마공, 사대극마공, 마천검, 흑마칠검……… 도합 7개.
<설휘 님의 무공초식을 분석합니다.>
팔괘소자(八卦素刺), 낭적천애(浪迹天涯), 소빙개동(素氷開凍)……… 도합 32개.
<설휘 님의 보법을 분석합니다. 정식으로 익힌 보법이 존재하지 않아 무공 내 보법을 추출합니다.>
……14개.
<설휘 님의 권법을 분석합니다.>
……5개.
<분석 완료>
초식 35개, 보법 14개, 권법 5개.
‘이게 끝인가?’
더는 정보가 뜨지 않자, 설휘는 움직이지 못했다.
이대로 흑구에게 덤벼들면 처음에 벌어진 전투처럼 아무런 효과도 없을 터.
아니라 다를까.
“싸울 생각이 없나?”
흑구가 짜증을 내며 묻자 더욱 조바심이 났다.
때마침 다시 선택제의 창이 뜨며, 턴제와 마찬가지로 시간이 멈췄다.
<영상을 보여드립니다. 1회.>
눈앞에서 나타난 건 사람 형상의 환영.
이전에 소희마공을 처음 익힐 때 나타났던 것보다 더 검고 짙은 그림자였다.
다다다닥.
그놈은 자신의 몸에서 나와 흑구를 향해 냅다 달려들었고.
톡.
흑구의 몸에서 나온 똑같은 그림자가 그 녀석의 머리를 살짝 건드리자, 삽시간에 사라졌다.
스스스--
이후 다시 환영의 몸에서 튀어나오는 그림자는 무려 십여 개.
그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달려들어 흑구를 공격했다.
하지만 흑구의 몸에서 나온 그림자 하나.
그것은 환영의 그림자들을 아주 간단한 동작으로 제압했고, 단번에 없애버렸다.
그리고 그때.
사사사사삭---.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이번엔 수백 개, 아니, 너무 많아 셀 수도 없는 그림자들이 생성되어 흑구를 향해 달려들었던 것이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싸우는 것도 그러했지만, 공격의 형태도 다양했다.
무작정 휘두르는 그림자.
바닥의 모래를 집어던지는 그림자.
검을 집어던지는 그림자.
척 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한 것처럼 보였다.
쉬이이이이-
하지만 어느 놈도 흑구의 그림자를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어떤 방법도 모두 다 파훼하며 밀어내거나 밟아버리거나 쳐내며 대응한 것이다.
그렇게 끝이 나나 생각하던 때에.
“……!”
설휘가 눈을 부릅떴다.
쇄애액!
어떤 한 그림자가 흑구의 허리를 베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그놈만 남기고 다른 놈들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거기에 남은 건, 유일하게 공격에 성공한 그림자의 형상(形像).
일련의 초식처럼 동작 하나하나가 눈앞에 또렷이 멈춰져 있었다.
<상단 찌르기와 중단 찌르기>
<횡 이동 후 사선 베기>
<우측 횡 이동과 함께 하단 베기>
<상·하단 연속 2회 후, 흑구의 등 뒤로 움직이기>
<소상기변>
동작을 나타내는 글귀들과 함께.
* * *
‘시뮬레이션’은 ‘턴제’처럼 시간이 멈추지 않았다.
채챙!
설휘는 처음 동작대로 달려나가 상단과 중단 찌르기를 시도했다.
당연하게도 흑구는 이런 단순한 공격을 쉽게 막았고.
패애애액!
설휘는 그림과 글귀대로 우측으로 횡 이동 후 하단 베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쉽게 막혔다.
이번에는 더욱 빠르게 사선 베기를 시도했다.
챙! 챙! 챙! 챙!
상대의 단순한 공격에 연속적으로 검을 막아내던 흑구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보았다.
뭔가 자신이 농락당했다고 느낀 것 같았다.
챙!
아니라 다를까, 마지막 공격을 막은 후 신경질적으로 허벅지를 향해 공격해 들어왔다.
‘헉!’
설휘는 원치 않게 공격을 피해내고 스스로 놀랐다.
보면서 피한 것이 아니다.
흑구는 정확히 다섯 번의 공격 후 반격해왔고 그림자에 따라 물러난 것뿐.
‘……소상기변!’
설휘는 마지막 그림자가 했던 것처럼 초식을 펼쳤다.
소희마공 육초식 소상기변으로.
패애애액!
잠깐의 정적.
매섭게 휘두른 칼은 흑구의 허리를 스쳤고, 설휘는 정확히 그의 세 걸음 뒤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을 검을 바라보았다.
충격적이게도 검날에 피가 묻어 있었다.
‘시뮬레이션이라는 게…….’
AI도 내지 못했던 상처.
그런데 너무도 간단히 상대에게 피해를 준 것이다.
반면, 흑구는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자신의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 대며 다시 손을 들어 그걸 바라봤다.
“……!”
이내 그의 눈에 경악이 담겼다.
상대가 반 촌의 깊이로 자신의 허리를 베고 지나간 것이다.
“이 새끼가…….”
움직임이 빠른 건 아니었다.
평범한 베기와 찌르기로 따분함을 유도한 후 갑작스러운 초식 전개가 들어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방심이 불러온 참극.
피를 본 흑구의 눈에 점차 살심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검 끝에 일렁이는 파멸의 기운은 그의 심정을 나타내고 있었다.
“아, 잠시…….”
설휘는 분위기가 이상해짐을 감지했다.
하여 노골적인 살기에 손사래 쳤지만, 흑구는 멈출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때 또다시 셀 수 없는 그림자가 불어나며 그의 움직임을 예측했다.
그런데.
<……불가! 이미 사용.>
시뮬레이션 역시 포기한 듯한 반응을 보였다.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콰아아아앙!
뭔가 바람이 확 불어오는 느낌을 받으며 설휘의 몸이 휘청였다.
그리고 뒤늦게 눈앞에 벌어진 일을 확인했다.
흑구가 덤벼들었고, 누군가 막아냈다.
그 위력의 여파만으로 지면이 일 장이나 가라앉을 정도.
흑구의 접근을 막은 자는 넷째 곤마였다.
“여기까지.”
곤마의 경고에 이성을 차린 흑구가 급히 물러섰다. 그리고 그를 향해 부복했다.
“용서하십시오.”
“아니다. 내가 보더라도 설휘가 도발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었다.”
설휘는 멍하니 곤마를 바라봤다.
흑구가 뿜어내는 괴기스러운 힘도 그렇지만, 그걸 막은 넷째 제자가 더욱 놀라웠던 것이다.
‘전투력이 그리 높지 않았는데…….’
그의 능력 수치는 정말로 높지 않았다.
사실, 흑구보다도 한참 낮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는 너무도 손쉽게 막아냈다.
능력 수치 옆에 붙은 ‘∞’ 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은 기분이다.
‘강하다는 게 이런 것인가…….’
흑구의 움직임. 그걸 막아낸 곤마의 움직임.
그들의 힘은 가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실력으로 보건대 설휘를 사령대장으로 임명해야 하나, 아직 조직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터.”
곤마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말을 이었다.
“교육관주를 붙여주고 별도의 교육을 받은 뒤 사령대장으로 임명하는 게 어떻겠느냐?”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어느새 감정을 누그린 은영단주는 간단한 읍을 해 보였다.
곤마는 다시 시선을 돌려 설휘를 바라봤다.
“잠깐 너를 사령대원으로 임명하마.”
“감사합니다.”
설휘는 대답을 한 후에 정보창을 볼 수 있었다.
<설휘 님이 은영단 사령대원으로 발탁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쓰러졌다.
능력 수치는 뜨지 않았지만, 남은 체력과 내공을 전부 소진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