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한 달 일정을 정해주세요 (1)
사흘 동안은 운기조식을 하거나 먹고 자고의 연속이었다.
매일 아침에 의원이 방문해 몸 상태를 회복시켜주었고, 하인으로 보이는 청년이 아침, 점심, 저녁마다 음식을 날라주었다.
나흘이 되었을 때.
전투방식을 껐음에도 능력수치 확인이 가능해졌다.
오늘따라 몸이 가벼운 느낌을 받았는데, 예상대로 체력과 내공이 모두 회복되어 있었다.
[State Summary, 상태 간단 요약]
설휘 [은영단 (진)사령대장]
체력 11만/11만
내공 11만/11만
전투력 40만
그리고 닷새가 되었을 때.
처음으로 침상에서 일어났다.
그간 모든 시간을 운기심법과 AI의 전투학습에 힘썼기 때문이다.
“그놈이 보였던 검술의 변화. 전투능력…….”
설휘는 며칠 전 그때를 잊을 수 없었다.
자신의 몸으로 은영단주와 싸우던 AI의 모습.
충격을 넘어 경외심이 절로 드는 전투였다.
AI가 특별한 능력을 사용한 게 아니라는 점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구천(九泉)의 틈에 숨어 지켜보는 약은 놈아. 네놈에게 가장 부족한 점이 뭔 줄 아느냐?
설휘는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녀석이 자신에게 했던 충고.
이건 단순하게 이해하며 넘길 일이 분명 아니었다.
-바로 끊임없이 갈구하는 탐욕이다.
미친 듯한 탐욕.
처음 자신도 그랬던 적이 있었다.
화경의 고수에게 죽어갈 때 더 나은 환경만, 더 좋은 무공만 있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거라고.
그런데 지금은 그러한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기연’을 얻고도 그때의 마음과 같은가.
강함을 갈구하는 욕망. 그것을 뛰어넘는 탐욕이 자신에게 있는가.
“전투력이나 절대무공이 중요한 게 아니다.”
설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한쪽에 비치된 면경을 바라보았다.
Coin 4 [네 번의 기회]
역설적이게도 목숨이 늘어날 때마다 간절함은 점점 줄어들었다.
목숨이 많을 때는 위험한 길보다 안전한 길을 택했지만, 목숨이 하나였을 때는 오히려 반대였다.
나약해진 정신력이.
두려움에 맞서는 용기가 부족했다.
“3년이라 했지.”
설휘는 곤마가 했던 얘기를 떠올렸다.
3년간 단원으로 있다가 은영단 사령대장으로 발탁해준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 안에 AI란 놈을 기필코 능가해 주겠다. 그놈이 알지 못하는 영역까지.”
설휘는 주먹을 불끈 쥐며 한쪽에 뉘어 있던 단영검을 챙겼다.
“그나저나…….”
설휘는 방안을 한 번 둘러보며 밖에서 볼 때와 또 다른 기분을 느꼈다.
창가를 기준으로 우측엔 자신이 잤던 침상이 놓여있었다. 좌측엔 전신이 보이는 면경과 간이 탁자가 놓여있었고.
창가 반대편 가장자리에는 서탁이, 그 밑에는 투박한 옥함 하나가 놓여있다.
그리고 나가는 문 쪽 옆엔 옷장이 존재했다.
방안을 눈에 담은 후 침상 옆에 놓아둔 명왕전포를 다시 집어 들려는데, 갑자기 이런 글귀가 눈앞에 떴다.
<저장하시겠습니까? 승낙/거부>
어떤 특정 사건을 해결하거나, 목전에 두었을 때 나타났던 알림창이다.
그런데 이번엔 침상에 다가가자마자 뜬 것이다.
□ 천력 95년, 제2장-1. 곤마가 제시하는 세 가지의 삶
■ 천력 95년, 제2장-15. [핵심무사 되기] 무관도 시험 탈락 후, 마지막 상대.
□ 천력 95년, 제2장-20. [핵심무사 되기] 마지막 이야기.
이상했다.
시간의 기록은 이미 공간이 다 차서 불가능한 게 아니었던가?
이 상태에서도 선택하면 또다시 적용된다는 의미일까?
설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 번째를 선택해보았다.
첫 번째, 세 번째와는 달리 두 번째 기록은 지금 상황에서 그다지 필요가 없었으니까.
<여기에 덮어쓰시겠습니까? 승낙/거부>
‘어, 이게 되네?’
가능한 듯 보였다.
덮어쓰기란 기존에 기록된 삶을 없애고 지금 삶을 기록하겠다는 뜻이니까.
설휘는 승낙을 선택했다.
그리고 반영이 되었다.
□ 천력 95년, 제2장-1. 곤마가 제시하는 세 가지의 삶
■ 천력 95년, 제3장-1. [핵심무사 성공] 폭풍 성장기(Bonus Story) 3년
□ 천력 95년, 제2장-20. [핵심무사 되기] 마지막 이야기.
‘폭풍 성장기 3년?’
설휘는 폭풍 성장기란 말에 잠시 머뭇거렸다.
그간의 경험으로 봤을 때 ‘삶의 기록’은 지금 자신이 처한 현 상황을 매우 자세히 알려주었다.
그렇다면 지금 주어진 삶은 실력을 키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것이 아닐까?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3년에 한해서는.
“우선 나가볼까.”
며칠 만에 침상에서 일어나니 온몸이 찌뿌둥했다.
어서 나가 세욕도 하고 수련을 하고 싶었다.
그렇게 방문 앞에 섰을 때.
설휘는 또다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천력 95년 9월 일정을 정해주세요. (1/36)>
▶ 무공 배우기
▷ 임무 받기
▷ 무사 수행
▷ 주변을 돌아다닌다.
‘뭐야 이게?’
뜬금없이 나타난 창.
이번엔 내용도 매우 구체적이다.
또한, 가볍게 무시하거나 참고만 할 수도 없었다.
귀가 먹먹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멈춘 것이다.
‘천력 95년 9월이라면 지금인데…….’
날짜를 정확히 가늠할 수 없었지만 아마도 그쯤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숫자 1 옆에 36이라 적혀 있는 건.
서른여섯 번이란 뜻 같다.
그러고 보면 조금 전, 폭풍 성장기 3년이라고 하지 않았나?
설휘는 아래의 선택지문으로 시선을 내렸다.
▶ 무공 배우기
이름 그대로 무공 배우기다.
이걸 선택하면 무공이 자연스럽게 배워지는 건가?
9월 일정을 정해달라 했으니 기간은 한 달쯤 되는 것 같다.
은영단 사령부대에 들어가기로 했으니 거기서 특기를 배우게 될지도 모르겠다.
▶ 임무 받기
표기상 별도의 임무가 주어지는 것 같다.
예전에 신비랑을 죽일 때도 이런 게 떴었지.
그렇다면 그때보다 더 괜찮은 보상을 받을지도….
▶ 무사 수행
‘뭘 수행하라는 건가?’
설휘는 여기서 의아함이 스쳤다.
수행이라 적혀 있지만, 훈련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첫 번째 나왔던 무공 배우기에 있었을 테니.
그렇다면 이건 한곳에서 수련하는 형태의 수행이 아닌, 어딜 돌아다니는 수행이란 의미인 것 같다.
▶ 주변을 돌아다닌다.
주변을 돌아다닌다니?
별것 아닌 지문 같은데 사실은 뭔가 숨은 비밀이 있는 것이 아닐까?
위에 목록을 보면 가벼운 선택지는 아닐 터.
설휘는 다시 시선을 첫 번째에 두었다.
강해지는 게 급하니 일단 ‘무공 배우기’부터 선택해보았다.
<무엇을 배우시겠습니까?>
▶ 은영단의 대표마공 <초급>
▷ 추적술의 이론 <초급>
▷ 혈도의 이해 <초급>
▷ 교육관주의 지도 <초급>
‘설마, 이걸 전부 배울 수 있다는 거면…….’
설휘는 펼쳐진 목록을 보며 눈을 번뜩였다.
눈앞의 이것이 정확히 뭔지 모르지만, 적어도 자신에게 매우 큰 행운을 가져다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것대로 모두 배울 수 있다면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해질 수 있을 테니.
[뒤로 가기]
특히 설휘는 하단에 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말 그대로 일정을 취소할 수 있는 것도 보였다.
그래서 그걸 선택해보니.
<한 달 일정을 정해주세요. (1/36)>
▶ 무공 배우기
▷ 주변을 돌아다닌다.
예상대로 처음 보였던 지문이 나왔다.
‘이렇게 된 거, 모두 한번 선택해보자.’
그 생각이 미치자 설휘는 두 번째, 임무 받기를 선택했다.
<누구에게 임무를 받으시겠습니까?>
▶ 곤마(천마 넷째 제자)
▷ 흑구(은영단주)
▷ 적파(은영단 교육관주)
▷ 설휘를 치료해주던 의원
▷ 매 끼니 식사를 대접하는 하인
‘임무를 받는 사람도 정해져 있구나.’
확실히 단순한 기연은 아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눈앞의 대상에게 뭔가를 받을 수 있는 것 같았다.
설휘는 다시 ‘뒤로 가기’를 선택했다.
<한 달 일정을 정해주세요. (1/36)>
▶ 무공 배우기
▷ 임무 받기
▷ 무사 수행
▷ 주변을 돌아다닌다.
▶ 무공 배우기
▷ 주변을 돌아다닌다.
그리고 이번엔 무사수행을 눌러보았다.
<수행지역을 어디로 결정하시겠습니까?>
▶ 청해
▷ 감숙
▷ 사천
‘희한하군…….’
괜히 재밌어진다.
세외 쪽 두 곳과 중원 내에 있는 지명이 나타났다.
그러고 보면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가봤자 고작 사천이 한계일 터.
설휘는 다시 ‘뒤로 가기’를 눌러 이번엔 ‘주변을 돌아다닌다.’를 선택했다.
<어디를 돌아보시겠습니까?>
▶ 천마 넷째 제자의 가택
▷ 현무관 후원
▷ 사령대 조장들의 쉼터
‘음. 대충 이런 거군.’
설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애초에 하려고 했던 무공 배우기를 선택했다.
<무엇을 배우시겠습니까?>
▶ 은영단의 대표마공 <초급>
▷ 추적술의 이론 <초급>
▷ 혈도의 이해 <초급>
▷ 교육관주의 지도 <초급>
은영단의 대표마공.
설휘는 첫 일정으로 이걸 선택하고 싶었다.
은영단원이 되기 위해선 가장 먼저 배워야 할 마공이었으니까.
<은영단의 대표마공. 일원소마공(一元消魔功)을 배웁니다.>
‘어?’
드르륵.
선택하자마자 문이 열렸다.
마치 문 앞에 대기하고 있었던 듯이 나타난 것이다.
“설휘라고 했나?”
“예…….”
설휘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처음 보는 자였는데, 깡마르고 유난히 얼굴이 붉은 중년인이었다.
“내 이름은 적파(狄芭)다. 너의 상관이며 사령대 교육을 맡고 있지. 오늘부터 넌 은영단의 대표마공을 배울 것이다.”
유난히 얼굴에 붉은빛을 띤 그는 설휘를 향해 손짓했다.
“따라오너라.”
그가 나서자 설휘는 천천히 주변을 돌려보았다.
정말이지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는 인기척이라니.
“뭐하느냐?”
그의 외침에 설휘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천천히 방문을 나섰다.
* * *
<일원소마공을 익혔습니다. [흉내내기]>
- 어찌 그걸 첫날에 모두 익혔단 말이냐?
<일원소마공의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 믿을 수 없군. 이토록 이해가 빠를 수 있다니.
<일원소마공의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일원소마공의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 벌써 검기를 흉내 낼 수 있는 실력이 되었단 말인가?
<일원소마공의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일원소마공의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일원소마공의 숙련도가 올라갔습니다.>
흉내내기 ▶ 기초단계
……
번쩍.
설휘는 눈을 깜빡였다.
분명 조금 전에 방안을 나섰는데, 거처 안에서 면경을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동시에 교육받던 한 달의 기억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고.
이후, 따로 보려고 하지 않았던 능력 수치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한 달의 수련 성과를 알려드립니다.>
체력이 1만 상승했습니다.
내공이 1만 상승했습니다.
전투력이 2만 상승했습니다.
설휘 [은영단 (진)사령대장]
체력 12만(↑1만)/12만
내공 12만(↑1만)/12만
전투력 42만(↑2만)
능력수치는 올라가 있었고, 무공목록에는 하나가 더 추가되어 있었다.
[무공목록]
<소수마공> 흉내내기
<적수마공> 중급단계
<초극마공> 중급단계
<일원소마공> 기초단계(New)
<사대극마공 풍> 걸음마
거기다 한 달 동안 적파와 일대일로 진행했던 수업 장면들.
이 모든 게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것이다.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이 절로 들 수밖에 없었다.
뭔가 홀린 듯 이토록 빨리 시간이 지나간단 말인가.
하지만 설휘가 꿈이 아니란 걸 아는 데에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확인차 다시 문 앞에 서자 다시 일정이 나타났고.
<천력 95년 10월 일정을 정해주세요. (2/36)>
▶ 무공 배우기
▷ 임무 받기
▷ 무사 수행
▷ 주변을 돌아다닌다.
서른여섯 번 중 1이 아닌 2라고 기록되어 있었으며.
9월에서 10월로 변경이 되어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 한 달이 지나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