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청해 무사수행(1)
설휘는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옷을 갈아입고는 의자에 앉았다.
기분이 묘했다.
굉장히 피곤하면서도 몸이 날아갈 듯한 상쾌함도 함께 느껴졌다.
- 임독양맥을 타동했는가…….
처음에는 하단전에서 뜨거운 기운만 맴돌았다.
그러다 일순, 단전을 순환하던 열기가 온몸을 덮쳤다.
그 열기가 머리, 가슴, 단전을 미친 듯이 돌며 극심한 고통을 전해주었다.
하지만 그 간격은 극히 짧았다.
지진이 난 듯이 눈앞의 시야가 확 트이며 이내 볼록한 상(狀)이 맺혔기 때문이다.
- 정파에선 생사현관(生死玄關)을 뚫었다고 한다. 이번 교육의 목적이 이것이었으니…… 더는 수련을 할 필요가 없겠구나.
적파는 감정을 애써 누그러뜨리며, 품속에서 서책 하나를 손에 쥐여 줬다.
[무흔귀신보(無痕鬼神步)를 얻었습니다.]
- 본디 이것은 곤마께서 하사하신 사대극마공의 보법이다. 거기에서 은영단에 맞게 더욱 발전시킨 것이지.
그의 말처럼 귀신보는 사대극마공 내에 포함되어 있는 보법이었다. 다만 주력이 마공이라 순간적인 회피동작에 필요한 것들만 있을 뿐.
지구력을 요하거나, 지속 가능한 보법은 아니었다.
실로 제대로 된 보법을 처음으로 손에 쥔 것이다.
- 너에게 따로 가르치지 않는 건,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잘 해낼 거란 믿음 때문이다. 너라면 7성까지는 쉽게 도달할 것이다.
적파와의 기억을 떠올리던 설휘는 문득 상단에 떠 있는 두 가지 목록이 보였다.
[독심술]
<지속스킬> 중급단계(↑고급단계)
중급단계에서 한 단계 더 오른 독심술.
옆으로는 무공목록이 보였다.
초절정에 올랐으니 뭔가 변경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선택했고.
그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무공목록]
<일원소마공> 고급단계(↑완벽)
<소신수마공> 흉내내기(↑중급단계)
<초열권마공> 흉내내기(↑중급단계)
<사대극마공 풍> 걸음마(↑초급단계)
“무공을 많이 익히는 게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구나.”
설휘는 이번 경험을 통해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깨닫게 되었다.
오로지 강한 무공에만 답이 있는 게 아니란 걸.
또한, 강해지기 위한 방법은 무공 속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도.
무학에 대한 깨달음이 시발점이 되어야 한다.
수련도 중요하지만, 무(武)에 대한 원초적인 탐구가 기본이 되어야 했다.
무(武)의 진체를 파악해야 더 높은 경지로 발전할 수 있었으니.
<저장하시겠습니까?>
침상에 누우면 나타나는 익숙한 글귀.
잠깐 고민하던 설휘는 승낙하지 않고 곧바로 잠을 청했다.
아직은 특별히 위기가 느껴지지 않으니.
* * *
이른 아침.
설휘는 하루의 일정을 시작하기 위해 문 앞에 섰다.
<천력 96년 2월 일정을 정해주세요. (6/36)>
▶ 임무 받기
▷ 무사 수행
▷ 주변을 돌아다닌다.
‘없네?’
설휘는 예전과 달라진 점을 곧장 알아챌 수 있었다.
목록에 있던 ‘무공 배우기’가 사라져 있었다.
‘그럼 임무를 받아야지.’
<누구에게 임무를 받으시겠습니까?>
▶ 곤마(천마 넷째제자)
▷ 흑구(은영단주)
▷ 적파(은영단 교육관주)
▷ 설휘를 치료해 주던 의원
▷ 매 끼니 식사를 대접하는 하인
사실, 처음부터 임무 받기를 선택하고 싶었다.
하지만 기본을 배워야 하는 필요성 때문에 애써 피해왔던 선택이었다.
‘곤마부터 해볼까?’
나름 초절정에 올랐으니, 곤마의 것을 선택하는 게 좋았다.
<곤마에게 임무를 받으시겠습니까?>
설휘는 기대감을 품고 진행했다.
승낙을 선택하자, 예상대로 온몸에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매우 강해졌구나. 하나, 네가 갖춰야 할 것들이 있다. 지금은 너의 능력으로는 이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
- 자격을 갖추고 다시 오너라.
“뭐야…….”
자신은 방문 앞에 서 있었다.
곤마의 짧은 대답 이후, 순식간에 지금 이곳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설휘는 주변을 잠시 돌아보다 한 발짝 문 앞에 다가서니.
<천력 96년 2월 일정을 정해주세요. (7/36)>
또다시 일정이 떴다.
설휘는 재차 임무 받기를 선택했다.
다만 이번 선택은 곤마가 아닌, 은영단주였다.
교육관주에게 들었다. 생사현관을 뚫었다지? 정말이지 보면 볼수록 놀랍구나.
- 하필 내가 줄 임무의 시기가 지금은 적절하지 않구나. 일 년 뒤쯤 다시 오거라.
“이거 참…….”
또다시 방 안이다.
짧게 스쳐 가는 대화들로 유추컨대, 아직은 자격이나 시기가 아닌 듯 보였다.
“가장 아래에 있는 걸 선택해볼까?”
설휘는 시선은 아래로 내려갔다.
임무 받기 맨 밑.
그다지 특색 없는 지문을 선택한 것이다.
▶ 매 끼니 식사를 대접하는 하인
“계십니까?”
‘어?’
설휘의 시선이 문 앞으로 고정되었다.
인기척도 없던 자가 느닷없이 말을 걸어온 것이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다시금 대화를 건네는 청년.
그제야 이 상황에 적응한 설휘가 답했다.
“들어와라.”
* * *
그는 항상 끼니때마다 자신의 식사를 챙겨오던 자였다.
식사시간이 아님에도 그가 오늘 이렇게 발걸음을 한 이유는 말씀드릴 사연이 있어서라고 했다.
그는 자신을 노삼(路森)이라 소개했다.
주로 사마백혼(司馬白魂) 장로의 시중을 들고 있다는 짧은 설명을 덧붙였다.
사연은 이랬다.
어느 날, 사마백혼이 개인적인 일로 부교주를 알현하러 집무실에 들른 적이 있다고 했다.
마침 부교주가 자리를 비워 기다리던 와중에 우연히 화로 안을 들여다보았고.
거기서 모두 재가 된 다른 책들과 달리 아직 채 타지 않은 비급서 하나를 발견했다고 한다.
순간 어찌할까를 갈등하던 그는 결국 비급을 집어 들었고, 밖에 있던 심복에게 그걸 건네줬다는 것.
“뭐가 문제인데?”
설휘는 설명을 듣다 말고 물었다.
고작 채 타지 않은 비급 하나를 훔친 게 설마 큰일이라도 날까 싶어서였다.
“문제는…… 그 비급을 받은 심복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뭐? 사라져?”
설휘는 그제야 노삼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사라졌다는 말은 총단이나 하부지단으로 숨었다는 뜻은 아니었을 것이다.
본교를 떠나, 중원으로 갔다는 의미일 터.
“어떻게 본교 사람의 눈을 피해 도망갈 수 있지?”
“그걸 모르겠다고 합니다.”
“혹 누군가에게 죽었을 가능성도……, 아님 부교주께서 직접 처리하셨거나.”
“시신이 발견되지도 않은 데다, 연관성이 떨어집니다. 집무실에 들른 건 심복이 아닌 백혼 장로니까요.”
일리 있는 말이다.
문제가 있다면 그 대상을 추구하면 쉽게 해결될 일.
노삼은 시선을 들어 말을 이었다.
“백혼 장로는 심복이었던 그를 찾고 싶어 하시지만, 움직일 수 없는 상황입니다. 만에 하나 부교주가 비급을 놓아둔 게 의도됐던 것이라면, 거기에 말려드는 것이니까요.”
이 역시도 일리 있는 말이었다.
만약 부교주가 덫을 놓은 것이라면?
본교내부의 권력투쟁과 백혼장로의 입지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하지만, 그는 아마도 거기까지 생각한 듯 보였다.
“그래서, 내게 이 말을 왜 하는 건데?”
설휘의 물음에 노삼은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백혼 장로의 걱정은, 만약 심복이라는 자가 본교 밖으로 나갔다면 누군가는 그를 죽여야 하는데 당장 보낼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 정적(政敵)에 얽매이지 않으며,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고, 크게 알려지지 않은 자. 그런 적당한 인물을 찾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거란 말이군.”
말은 그럴싸하게 치장하지만, 실은 죽어도 티가 나지 않은 자란 말이다.
뒷배가 없으니 뒤끝이 없을 거고.
정적에 얽매이지 않으니 예상치 못한 피해도 없을 것이며.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은 본교에서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
뭐, 상관없었다.
심복이 누군지 모르나, 죽여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않나.
임무 받기가 별도로 나온 걸 보면 뒤탈이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내가 그놈을 데려오면, 대가는?”
설휘는 제일 중요한 걸 물었다.
상태창의 보상은 둘째 치더라도, 뒷수습을 해오는데 응당 당연한 대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당연히 있지요.”
노삼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백혼 장로께서 자신을 필요로 할 때, 신세 진 빚을 한 번 갚아준답니다.”
“뭐…… 나쁘지 않지.”
엄청난 보검 하나쯤 줄 거라 여겼던 설휘는,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현직의 장로를 한 번 써먹을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보면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그때였다.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 글귀가 생성되었다.
[‘하인 노삼’에게 임무를 받았습니다.]
○ 임무 : 백혼 장로의 수석제자 음무기(陰無忌)가 비급을 들고 청해로 도망쳤습니다. 그를 한 달 내로 사로잡아 임무를 완수하시오.
성공 시 : 서열 31위 사마백혼의 신임.
보상물품 : 역용술서(易容術書), 교주의 비밀교서 지도(1/4)와 열쇠.
‘수석제자였구만.’
노삼이 심복이라 말을 했지만, 실은 아끼던 제자였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가급적 죽이는 것보다 생포해서 데려가는 게 좋을 터.
‘역용술서라면…… 역용술인 것 같은데?’
보상 물품을 눈여겨보던 설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과거에 들은 적이 있다.
본교 비급 중에 자기가 원하는 얼굴로 바꿀 수 있는 수법이 있다는 것.
하나, 자신은 믿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공만으로 얼굴을 바꾸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얼굴 골격뿐만 아니라, 피부색과 머리카락, 눈동자까지.
뼈와 살이 아닌, 조직까지 완벽하게 만들어내기가 불가능하지 않은가.
하지만 일설에 의하면, 그것도 가능케 하는 비급을 기기아대에서 만들어냈단 소문이 돌았다.
워낙 익히기 어렵고 또 제약이 있긴 하지만 분명 그런 얘기가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 걸 부교주가 가지고 있었던 것 같고.
‘비밀교서를 주는 걸 보면, 또 거기에 뭔가가 있나 본데.’
교주쯤 되면 자기만의 무학창고가 있기 마련.
보상으로 나올 정도면 거기에 굉장한 게 있을 터.
음? 가만…….
이름이 음무기라고 했나? 뭔가 좀…… 이상한데?
“백혼 장로의 심복이라는 그놈 말이다. 혹시 색마(色魔) 아니야?”
설휘의 물음에 잠시 당황한 노삼이 대답했다.
“아? 아……. 예. 그렇습니다.”
“이 미친.”
욕설이 절로 튀어나왔다.
색마에게 역용술을 줬으니 당연히 도망가지 않고는 못 배기지!
얼굴을 바꾸고 돌아다녔으니 당연히 찾지 못했을 것이고.
“뭐 알겠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노삼에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 지금 출발하면 되는 거야?”
“아, 또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설휘는 짜증을 내며 되물었다.
“그게…… 제가 고른 자가 승낙하면 백혼 장로께서 자신이 보낸 인물과 함께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자가 음무기를 잘 알고 있고, 본교 밖으로 나갈 때 수월하다고 해서……”
‘감시하려는 거군.’
설휘는 짜증이 났지만, 토를 달지 않았다.
“누군데?”
“지금 데리고 오겠습니다.”
* * *
노삼이 데리고 온 인물.
설휘가 본 그의 첫인상은 ‘매우 험상궂다’였다.
단순히 험악한 느낌 때문은 아니었다.
본교 내에서도 험악한 인상은 많다.
하지만 이자는 척 봐도 ‘심각할 정도’라는 게 느껴졌다.
찢어진 넝마 옷에 튀어나온 고목나무보다 더 굵은 팔뚝.
얼굴 빽빽이 들어선 화상과 자상자국.
키도 어찌나 큰지, 설휘의 머리가 그의 어깨 높이 정도에 머물렀다.
그리고 가장 특이한 것은,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머리카락이 한 올도 없는 대머리라는 점.
그래서 그런지 설휘, 그 자신도 검자루에 손이 갈 정도의 위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State, 상태 요약]
석두(石頭) [목수]
체력 30만/30만
내공 0/0
경지 초일류
전투력 9만
※ 특이사항 : 알 수 없는 발달장애.
‘내공 바보네.’
수치가 뜨자마자 잠깐이나마 긴장했던 설휘는 자신을 돌아보며 자책했다.
누가 봐도 고수 같은 면모를 풍기던 그는 내공이 없는 잡꾼이었다.
그래도 놀라운 게, 내공이 없는데도 절정 아래인, 초일류 단계에 들어섰다는 거다.
그렇다면 이 놈은 천골지체라고 봐야 한다.
타고난 무골의 신체가 아니면 이런 평가를 받았을리 없을 테니.
“석두라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설휘는 고개를 푹 숙이며 예의를 갖추는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덜떨어진 놈이 자신의 감시자일 리는 없을 터.
아마도 백혼 장로는 본교를 빠져나가기 위해 사람을 붙였을 것이다.
“그래 석두. 우린 어떻게 가면 되나?”
설휘가 묻자 그는 씨익 웃었다.
“본교로 들어오는 초입 길에 제1선의 방책(防柵)을 짓고 있습니다. 좋은 목재를 고르겠다고 하고 빠져나가면 됩니다.”
“그래. 그러자.”
설휘의 대답과 함께 석두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눈을 살필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청해의 성도. 서녕(西寧)으로 이동합니다.]
문구와 함께.
다그닥 다그닥.
청해의 수도로 이어지는 관도길에 이미 도착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건 좀 편하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