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청해 무사수행 (3)
대충 예상이 된다.
두 개의 임무가 있다고 나와 있지만, 지금은 받지 못할 거다.
아마도 무사수행을 선택하고 이곳에 와야만 임무를 준다는 의미겠지.
“저기, 누구신지…….”
잠시 설휘가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석두가 먼저 관심을 내보였다.
그러자 주소혜가 반색하며 말했다.
“어머! 방금 엄청난 무위를 보이신 분이시죠? 뒤에서 지켜봤는데 정말 대단했어요.”
“아, 예? 그, 그랬습니까? 헤헤헷…….”
설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헤헤헷이라고?
“정말 멋져요. 이리 대단하신 분들을 직접 보게 될 줄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멋진 무위였어요.”
“가당찮습니다. 조무래기들을 혼내준 거에 불과하니까요.”
“그래도 나름 이 일대에 검수라 불리는 자들인데…….”
“그런가요. 헤헤헷…….”
역시나 잘못들은 게 아니다.
분명 헤헤헷 이라고 했다.
이제보니 색마에게 처맞은 이유가 짐작이 간다.
볼때기가 홍조를 띠어 벌게진 석두 녀석을 보자면, 색마보다 이놈부터 후려치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헌데, 누구시오?”
“아, 소개가 늦었어요. 저는 만금산장 장주의 손녀 주소혜라고 합니다. 자랑을 조금 하자면, 이 근방에서는 저를 모르는 사람이 없지요.”
“만금산장의 손녀가 여긴 무슨 일로 왔소?”
“아, 다름이 아니라…….”
예상외로 당당하게 나오는 상대.
잠시 주소혜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하지만 다소 위축될 법한 상황에도,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다리를 느긋하게 들어 꼬며 배시시 웃어보였다.
“저는 귀하 같은 고수들을 보면 흥미가 생겨서요. 조금 알아 두고 싶기도 하고.”
“우린 그대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사람은 아닌데.”
“재주가 뛰어난 사람일수록 어딘가 한구석은 모나기 마련이지요.”
‘꽤 비위가 좋은 여인이로군.’
예쁜 미모답지 않게 살갑게 말을 받는 그녀를 보며, 설휘는 흥미가 동했다.
약간 경계가 풀어질 무렵, 살짝 시선을 내리던 주소혜가 질문했다.
“보아하니 근방의 사람은 아니군요. 어디 출신인가요?”
“여기와 조금 떨어져 있소.”
“복장도 말투도 중원 쪽은 아닌 것 같고…… 서장(西藏)에서 왔나요?”
서장이라면 청해 최남단에서도 수천 리나 있는 곳이다.
마교가 있는 신강을 거론하지 않는 걸 보면 그쪽은 아예 염두에도 두지 않는 듯했다.
“뭐, 비슷하오. 그건 그렇고, 이리 본 것도 인연이니 내 부탁 하나 할까 하는데. 들어보시겠소?”
설휘는 껄끄러운 주제를 뒤로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사이 서 있던 석두는 어디서 의자를 가지고 와 자리에 앉았고.
티격태격 싸우던 검문이라는 녀석들은 이미 객잔을 나갔는지 객잔 안은 조용했다.
“초면에 부탁이라니. 뭐 좋아요. 어떤 얘기인지 들어볼까요?”
확실히 보통이 아닌 여자다.
스스로 자리에 합석한 걸 핑계 삼아 간단히 이용을 좀 하려고 했는데, ‘부탁’이란 말을 강조하며 주도권을 뺏기지 않으려는 모양새다.
산장(山莊)이라는 재력가 출신답게 사람을 상대하는 데 능숙해 보인다.
“우리가 잡아야 하는 놈 하나 있소, 이곳 지리를 잘 모르는 우리보다는 소저가 나을 터. 거기다 만금산장이라면 정보에도 능할 테니, 좀 알아봐 주겠소?”
“그 사람에 대한 정보가 있나요?”
“용모파기는 없소. 그 색마 녀석이 분장을 하고 다녀서 어떻게 생겼는지는 도움이 되지 않을 거요. 그나마 여자를 미친 듯이 밝힌다는 것, 그리고 마공(魔功)을 쓴다는 것.”
“……!”
그녀의 눈이 커졌다.
이 정도 반응은 예상했다.
청해 지역은 중원에서도 포함되지 않을 만큼 떨어진 세외지만, 마교에 대한 두려움은 그들 못지않은 듯했다.
설휘는 계속 말을 이었다.
“마성을 지니고 있지만, 숨길만 한 능력 또한, 가지고 있소. 사실 본신의 힘을 발휘하지만 않으면 외견상 드러나지는 않지.”
색마, 음무기란 녀석은 그런 식으로 사람들 속으로 스며들었을 것이다.
본교에서 사람이 나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할 머리가 있을 테니, 행동도 각별히 조심했을 터이고.
“그럼 혹시 당신들도…….”
“그럴 리가.”
설휘는 고개를 저었다.
괜히 그녀에게 선입관을 입힐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숨겨도 드러날 일은 없을 거다.
설휘가 초절정에 들어선 이후로부터는 미세한 마기까지 통제할 수 있었다.
화경에 들어서는 초고수가 아님에야, 자신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옆에 있는 석두는 내공 없이 힘만 무식하게 센 본교 사람일 뿐이고.
“좋아요. 부탁을 들어주면 무사님들께서는 제게 무엇을 해줄 수 있죠?”
그때 석두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헤헤헷. 소저 말해보십시오. 무엇이든 우리가 할 수…….”
쫘악!
그러고는 다급히 머리를 부여잡았다.
설휘가 그의 뒤통수를 냅다 후려갈긴 것이다.
“한 번만 더 헤헤헷 이라 하면 제명대로 못 살 줄 알아라.”
“죄, 죄송합니다! 대장!”
석두는 두 손으로 목을 꾹 집어넣고는 시선을 돌렸다.
착실한 것 하나 빼면 어디 하나 볼 게 없는 녀석이다.
“주 소저.”
“네. 무사님.”
“그대가 뭘 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설휘가 주소혜와 시선을 맞추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부탁이지만, 실은 제안에 가깝소. 세상을 혼란케 하는 마인을 만금산장과 연이 있는 무사가 붙잡았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소?”
여인의 미묘한 시선이 전해져온다.
그간 머리를 굴리는 법은 제법 배웠겠지만, 자신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다.
비록 본교에서 말단 조장으로 근근이 연명했다고 해도, 눈칫밥만 삼십 년이 넘는다.
고작 방년의 나이쯤으로 보이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자신에겐 손바닥 들여다보듯 쉬웠다.
“뭐 내 제안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우린 다른 곳으로…….”
“도와드리죠.”
주소혜는 생각보다 쉽게 수긍했다.
설휘는 거기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럼 인심 써서 두 가지 더 보태시오. 편히 쉴 수 있는 공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음식.”
“그것 가지고 되겠어요?”
“……?”
“넉넉한 노잣돈. 언제든 쓸 수 있는 정보력. 유람하기 좋은 주변의 지도 등.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어요.”
주소혜가 너무도 당차게 나오자 처음으로 설휘가 당황했다.
“대신.”
그리고 이어진 말에 호기심이 일었다.
“그 색마를 잡은 후에 다시 한번 만금산장에 들러주세요.”
무슨 이유인지 모르나 짐작은 된다.
아마도 여인에게 내걸린 임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 걸 보면, 확실히 보통의 여인은 아니다.
“그게 제안에 대한 제 조건이에요.”
“좋소.”
그렇다면 더더욱 뺄 필요가 없었다.
* * *
설휘와 석두는 그녀와 함께 만금산장으로 이동했다.
거대한 대문을 지난 뒤에도 객방으로 이동하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하루 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만금산장은 설휘 예상대로 청해 제일의 부자였다.
사람도 사람이지만, 땅이 워낙 넓어 장원에 들어서도 말을 타고 주변을 돌아다닐 정도였다.
그나마 객방은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아, 설휘와 석두는 휴식을 취했다.
“밥그릇이 왜 이렇게 이상하게 생겼습니까?”
하지만 석두 녀석이 자신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수납장 위에 올려진 백자 그릇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응가하는 요강을 왜 이렇게 화려하게 만들었답니까?”
슬쩍 고개를 들어보니 담상채(唐三彩)가 보였다.
태황각주 사마귀 집무실에 놓인 것과 조금 다른 모양이다.
무식한 놈.
그러니 촌놈 소리를 들으며 색마에게 구박을 받았던 게지.
“오! 이건 진짜 가죽인 것 같습니다.”
설휘는 바닥에 깔린 융단을 매만지는 그를 보며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리고 조용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한 번만 더 말하면 뚜드려 패려고.
“여기 물이 나오는데요?”
“뭐?!”
하지만 마지막 대답은 흘겨들을 수 없었다.
그럴 리가.
침소에서 물을 나온다니?
이건 못참지.
“오오오오! 진짜다!”
설휘는 직접 광경을 목도하고 소리를 토해냈다.
기관을 어떻게 설치를 한 것인지, 석두의 말처럼 방 안에서 깨끗한 물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 * *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주소혜의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한 달 정도 집을 비웠던 할아버지가 도착하자마자 자신을 호출했기 때문이다.
보통 이런 경우 일상대화보다는 가문과 관련된 얘기가 오고 간다.
당연히 그 안엔 달갑지 않은 것들도 있을 터.
“들어 오거라.”
허락이 떨어지자 대기하고 있던 시비가 양쪽 문을 열어주었다.
나름 각오를 한 주소혜는 입구 앞까지 펼쳐진 황금빛 융단을 밟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방안은 여느 대궐처럼 넓었다.
화려한 천장과 벽지, 장신구, 쉽게 볼 수 없는 값비싼 귀금속이 차례로 보였고.
그 중앙, 자단목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연초를 태우던 노인이 보였다.
“우리 손녀 왔느냐.”
흰머리가 가득하고 푸근한 인상의 노인이 그녀를 맞이했다.
주완길.
만금산장을 세운 장주이자, 거력의 재력가.
청해 일대를 걸으면 셋에 하나는 그를 모르는 자가 없을 유명 인사였다.
“여기 앉아라.”
“네. 할아버지.”
주소혜는 다소곳한 자세로 의자에 앉았다.
설휘와 만나 대화를 나누었던 그녀의 모습과는 말투도, 자세도 완전히 달랐다.
주완길은 느긋한 자세로 앉아 밝은 미소로 물었다.
“그래. 집안사람들에게 들으니 요즘 도성에 나가는 일이 잦다고 하더구나.”
“갑갑하게 집에 있는 것보다는 사람들을 보고 대화하는 게 즐거워서요.”
“마음을 알겠다만, 그래도 어중이떠중이 같은 자들은 가급적 본가로 데려오지 말거라. 다 안 보는 척해도, 주위에선 말들이 많단다.”
본가에 온 지 한 시진이 되지 않았는데도 자신이 데리고 온 식객 얘기가 돌았나 보다.
“그리고 이 할아비가 살아오며 큰 원한 관계는 없다고 자부하나, 그래도 예기치 못한 잡음은 어디든 생기는 법이다. 늘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
“명심하겠어요.”
쓰으읍.
주소혜의 대답에 주완길은 곰방대를 물며 연초를 피어댔다.
그녀는 할아버지가 이제 본론을 얘기할 거라는 걸 직감했다.
그는 화제를 돌릴 때, 항상 잠시 뜸을 들이며 얘기를 했었다.
“내년이면 방년의 나이가 되는구나.”
아니라 다를까.
슬쩍 운을 띄우자 그녀는 곧장 말을 받았다.
“네. 아직 세상 경험이 필요한 나이지요.”
“허허. 그 세상 경험을 좋은 혼처와 하면 배가 되지 않겠느냐?”
“키우기 어려운 난초도 온실보다는 들판에서 가장 성하게 자라는 법이지요. 소녀 또래에는 많이 걷고,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게 도움이 됩니다.”
“하나, 국화처럼 태어날 때부터 예쁜 꽃이라면 굳이 관리가 필요하겠느냐는 게 내 생각이다.”
“매번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게 사람의 마음이지요. 할아버지가 청주(淸酒) 맛을 알면서도 아직까지 드시는 것처럼요.”
“허허허…… 녀석.”
주완길은 호탕하게 웃어보였다.
혼담 얘기를 꺼낼 줄 알고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게 눈에 보인다.
그런데 손녀라 그런가.
그런 게 참 밉지가 않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너도 이제 슬슬 준비해야 하지 않겠느냐?”
“할아버지…….”
“정(鄭) 공자는 화산파 출신으로 힘이 있는 가문의 속가제자다. 신의가 있고, 협을 아는 자지. 이런 혼담을 무를 수야 없지 않겠느냐?”
“하지만 신중하지 못하며 성격이 급해 그르치는 일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더욱이 여자를 밝힌다는 소문은 듣지 못하셨나 봅니다.”
“허허허.”
주소혜의 굳은 표정에, 주완길은 흥미롭다는 듯 웃어댔다.
투욱.
마지막 연초를 태운 그는 곰방대를 탁자에 내려놓고는 말했다.
“너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영웅호걸에겐 언제나 여자가 있었다. 취미가 고약하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는 이상은 그게 큰 흠이 될 게 없지.”
“할아버지. 그치만…….”
“허면. 지난번에 네가 얘기한 대로 이 혼사를 무를 만한 고수를 데려왔느냐?”
“그것은…….”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기억이 났다.
정공자처럼 뛰어난 고수가 가문에 필요하다는 아버지의 주장.
당시 그 말에 대한 반발심 때문에, 자신이 정 공자가 대단한 고수가 아니란 걸 증명해 보이면 되겠냐고 했었다.
그리고 그를 굴복시킬 고수를 데리고 오겠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소혜야.”
주완길은 어느덧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의 목표가 고작 청해에만 머무는 것이더냐. 네 어미가 죽은 건, 우리가 힘이 없어서였지 않았느냐.”
“…….”
“누구보다 강한 힘으로 무장해야 한다. 재력도 중요하지만, 그에 걸맞은 무력도 필요하지. 정 공자의 인품에 약간의 흠결이 있다고 하나, 그는 무위만으로는 일대에 알아주는 고수다.”
무공 실력이야 유명했다.
화산파 내에서도 정식제자가 아니라서 그렇지 매화검수 칭호까지 받을 뻔했던 자니까.
“그래서 내 모시고 왔다.”
“예? 누굴…….”
그는 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언제 들어왔는지 한쪽에 공손히 서 있던 외총관에게 물었다.
“어디 계시느냐?”
“정방에 잠시 쉬고 계십니다.”
“할아버지!”
주소혜가 소리쳤지만, 주완길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뒤돌아서며 단호하게 말했다.
“자, 가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