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색마, 음무기(3) < 둔산 >
“무사님. 혹시 저자가 정 공자인가요?”
사태파악이 어느 정도 된 것일까.
조금 전까지 거리를 두던 주소혜가 제 발로 다가왔다.
사실 이쯤 되면 눈썰미가 뛰어나지 않은 자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설휘가 있던 곳과 무관하게 생겨난 죽음들.
살가죽만 겨우 붙어있는 그 흉측한 광경을 봤다면, 뭔가 불길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짐작했을 터.
“아니. 그는 죽었소.”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아버지가 데려온 정 공자가 색마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내가 찾던 색마가 그놈의 몸을 차지해 지금껏 정 공자로 위장했던 게요.”
“……아!”
그녀는 입을 가리며 신음을 흘렸다.
설휘가 다짜고짜 정 공자를 공격했던 상황이 그제야 이해가 된 것이다.
주완길 역시 자신과 주소혜의 대화를 들은 듯, 충격을 받은 얼굴로 변해 있었다.
“대장! 빨리 처리하십시오!”
“육시럴! 색마 녀석이 어디서 술수를 쓰는 거야!”
그사이 쌍석두는 미쳐 날뛰고 있었다.
서로 설휘를 향해 자신이 진짜라며 항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보통내기가 아니었군.’
설휘는 음무기의 수법에 감탄했다.
짧은 사이 노인과 아이로 위장하며 자신의 판단을 흐리게 했고.
주완길이 사람들을 모두 자리에서 앉게 하는 기지를 발휘했음에도, 석두로 변신해 그의 정체를 숨겼다.
어디 그뿐인가.
정신없는 와중에도 석두의 옷과 완벽하게 맞춰 입은 데다, 목소리까지 흡사했다.
과연 백혼 장로가 제자로 삼은 것이 이해될 정도로 신기에 다다른 묘술이다.
“이젠 어떡하죠? 저 둘 중 동료 무사분이 누군지 알아야…….”
“알 필요 없소.”
설휘는 주소혜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그들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여전히 서로 자신이 진짜라 하는 석두를 향해 말했다.
“음무기. 네놈이 뭘 착각하나 본데……”
철컥.
설휘는 무슨 생각인지 검을 다시 집어넣으며 말을 이었다.
“둘 중 누군지 상관없어. 한 놈씩 반쯤 죽여 놓으면 알아서 기어 나올 테지.”
“…….”
“…….”
잠깐의 침묵.
그리고 우측에 서 있던 석두의 얼굴이 벌게졌다.
“이익!”
그가 음무기였다.
이 전술은 뭔가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다시 얼굴을 바꾸고 있었다.
동시에 체구는 조금 작아졌는데, 보통 장정보다 약간 작은 몸짓으로 변했다.
“얼굴이 변한다! 저놈의 얼굴이 변했어!”
“악귀야! 사람의 탈을 쓴 악귀!”
그의 얼굴이 드러나자 지켜보던 사람들은 경악했다.
광대뼈와 턱, 이마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기이한 광경에 몸을 떨어대는 이도 있었다.
“끌끌끌. 이번 건 좀 티가 났나?”
그는 곧 본연의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거무죽죽한 피부색의 깡마른 얼굴에서 새하얀 동공이 희번덕거렸다.
머리카락을 산발로 풀어헤친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영락없는 마인이었다.
“뭐 아무렴 상관없지. 이젠 나도 도망갈 생각이 없거든.”
본신으로 돌아갔기 때문일까.
음무기의 기세는 이전과 달리 자신감으로 팽배해져 있었다.
이는 단순히 허풍은 아니었다.
더욱이 이전보다 월등히 높아진 마공.
즉, 사람들의 정기를 빼앗아 일시적으로 힘을 증폭시킨 것이다.
“키킥…… 이전과는 다를 거다.”
치치칫.
거기다 음무기가 허리춤에서 긴 철삿줄을 꿴 채찍을 꺼내 들었다.
아마도 그의 독문무기인 것 같았다.
“하아아. 참…….”
설휘는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제 딴에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한 듯했다.
아마도 조금 전 기습을 통해 상처를 입혔다는 점을 믿는 것 같았다.
물론 거동이 불편할 정도의 피해를 입긴 했다.
무턱대고 싸우면 상처가 벌어져 위험한 상황까지 발생할 수도 있었다.
물론 보통 사람이라면 그랬을 거다.
“싸우자고?”
설휘는 의아하게 묻고는, 그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나야 좋지 뭐.”
<금창약을 사용합니까?>
초절정에 오르고 난 뒤부터, 이런 대치 상황에서도 도구함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상대가 만만한 게 더 큰 이유일 테지만.
설휘는 금창약을 1개 사용했고.
그럼에도 불편함이 채 가시지 않아, 금창약 1개를 더 썼다.
<체력을 회복합니다.>x2
<지혈효과가 적용됩니다.>x2
불편함은 한 번에 싹 사라졌다.
정신없이 치고받으면 또다시 상처가 벌어질 수 있겠지만, 그럴 리가 있겠는가.
“병신 새끼.”
음무기는 설휘가 허풍을 떤다 생각했는지, 준비동작도 없이 곧장 달려들었다.
“아……!”
싸움이 시작되자 지켜보던 주소혜가 순간적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적이 너무나 빨랐다.
정말 눈 한 번 깜짝하는 사이 거리를 좁혔고, 첫 공격 역시 너무도 정확하게 설휘의 어깨를 때렸다.
쫘악!
공기와 피부를 찢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
그것이 한 번이 아니었다.
이후, 이어지는 파상적인 공격은 끔찍할 정도로 상대를 찢어발기고 있었다.
촤악! 촥! 촥! 촥! 촥!
“아…….”
“어떻게…….”
날카로운 채찍 소리에 사람들은 귀를 막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장주가 움직이지 말라고 명을 하지 않았다면, 이미 죄다 도망갔을 터였다.
그만큼 채찍 소리는 듣는 것만으로도 극심한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
“뒈져! 뒈져! 뒤지라고!”
촤악! 촤악! 촤악!
거기다 사람들을 더욱 안타깝게 만든 것은 바로 설휘의 대응이었다.
적의 도발에도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당하고만 있었다.
“이봐. 넌 쓰러지지 못해. 쓰러지면 네 눈깔을 파내고 살가죽을 갈기갈기 찢어서 벗겨버릴 거야.”
잡아먹힐 뻔한 동물의 분노가 이러할까.
채찍을 휘두르는 음무기의 눈은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
살인이 목적이 아닌, 오직 고통만 안겨주려는 악에 찬 눈빛이었다.
그렇게 수도 없이 채찍을 휘두르던 그가 동작을 잠시 멈췄다.
온몸의 피부가 찢겨나가, 거의 만신창이가 된 놈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조금 따갑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그의 눈빛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뿐만 아니라.
“설마 이게 다는 아니겠지?”
도발하는 건 여전했다.
“……!”
한순간 음무기의 눈이 시퍼렇게 변했다.
그의 말에 격노했는지, 손에서 시퍼런 녹색의 마기가 물줄기처럼 뻗어 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손을 타고 흘러내렸고, 채찍은 곧 외문병기인 편(鞭)처럼 뻣뻣하게 세워졌다.
“마기(魔氣)다!”
“저자가 마인 이였어!”
그 기운을 만금산장의 무인들이 먼저 알아봤다.
조금 떨어져 있음에도 숨쉬기 힘들 정도로 역하고 거북한 기운.
마공을 익힌 사람이었던 것이다.
‘걸렸다. 변태 새끼야!’
한편, 설휘의 눈엔 희열이 담겨있었다.
그는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앞에 뜬 문구도 설휘의 행동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 임무 해결 조건을 모두 갖췄습니다. 이제 음무기를 사로잡으시면 됩니다.
“이젠 나도 간다, 이 새끼야.”
“죽----!”
설휘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음무기가 채찍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촤악.
이미 설휘에게 머리채를 잡혔고.
“우선 한 대.”
“악!”
쫘아아아아아악!
싸대기를 크게 한 대 처맞은 후.
“다시 한 대.”
쫙!
“으악!”
또 한 대 처맞았고.
이후.
“또 한 대. 또 한 대. 또 한 대…….”
“윽! 악! 악! 각! 칵! 깍!”
연속으로 여섯 번 휘갈기자, 그제야 음무기는 지금 처맞는 게 자신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사태파악은 이미 늦은 후였다.
상대의 뒤집힌 눈깔이 눈깔을 보고, 그제야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말도 못 할 정도로 심각하다는 걸 인식한 것이다.
“이제 무한대 간다. 어금니 꽉 깨물어. 얼굴에 있는 뼈란 뼈는 다 함몰될 테니까.”
“아, 아아…… 아아아…….”
설휘에게 머리채 잡힌 음무기는 제대로 실감하고 있었다.
처맞는 공포가 이 정도로 두려울 수 있다는 걸.
몸이 아닌 오장육부까지 바들바들 떨릴 정도로, 상대의 행동은 극한의 공포를 안겨다 주고 있었다.
“자, 드가자!”
퍼어어억-!
그랬다.
설휘가 내민 건 빳빳한 손바닥이 아니라.
울퉁불퉁한 주먹이었다.
* * *
조그마한 창 하나에 사방이 꽉 막힌 밀실 공간.
방 가장자리에는 서탁과 문방사우가 놓여 있었고, 그 중심에는 십(十)자 모양의 고목나무가 박혀 있었다.
거기에 인간고목이 된 사내가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다.
“내가 순순히 불 것 같나? 맘대로 해. 죽이든가.”
외견상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그의 상태가 심각했다.
뼈란 뼈는 다 함몰이 되어 주저앉아 있었고, 피부는 죄다 터지고 찢어져 있었다.
심지어 턱도 내려앉아서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음무기는 눈빛이 살아있었다.
“어때? 아직도 불지 않나?”
때마침 방문을 열고 설휘가 들어왔다.
그 말에 석두가 고개를 저었다.
“징한 녀석입니다. 이 상태가 되고도 저에게 협박까지 하더라고요.”
석두는 씩씩거리며 음무기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예전의 관계 때문인지 음무기는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여길 탈출하게 되면 너부터 죽여주마.”
“이 새끼가.”
쫙!
뺨을 후려쳤음에도 그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오히려 죽음을 원하는 듯 득의양양하게 외쳤다.
“애송이들. 내게서 그 어떤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참고로 이런 고문은 숱하게 겪어봤지. 크큭.”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발 주먹으로 때리지만 않으면 모든 걸 불겠다던 음무기였다.
그런데 역용술서 내용을 종이에 적으라고 말하자마자, 눈빛이 확 돌변했다.
아마도 자신이 불지 않으면 뭘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래? 음…….”
설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음무기를 살리든 죽이든 그런 것엔 큰 관심은 크게 없었다.
어찌 된 게 이번 임무는 달성했음에도 보상으로 받은 건 2개뿐.
감히 들어갈 생각도 들지 않는 찢어진 교주의 비밀교서 지도(1/4)와 열쇠뿐이었다.
“오면서 생각했는데 말이야. 색마에겐 효과가 확실한 방법이 하나 있더라고.”
“……무슨 소리냐?”
“무슨 소리인지 일단 보자고.”
설휘가 씨익 웃어 보이자, 음무기의 눈빛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그리고 이내 상대가 다가온 뒤.
자신의 가랑이 사이로 다리를 들어 올리자,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뻐억!
“……하아아아악!”
음무기는 비명도 아니고 신음도 아닌, 요상한 울음소리를 냈다.
깨졌다.
이건 깨진 거다.
정신을 뒤흔드는 고통과 쓰라림. 그리고 복통.
이 세 가지 감정이 한꺼번에 드는 건 오직 그것밖에 없었다.
“아, 나도 참.”
설휘는 경련을 해대는 음무기를 보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이후, 그의 어깨를 붙잡고 나직이 말했다.
“손속에 사정을 둬버려서 그런 건가. 두 개여야 하는데 하나가 아슬하게 비껴나갔어. 사과하지. 하지만!”
설휘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음무기와 시선을 맞추며 씨익 웃었다.
“이번 건 실패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네.”
“……부부부부부!”
설휘가 다시 다리를 들어 올리는 자세를 취하자, 음무기가 뭐라고 내뱉기 시작했다.
이미 그의 눈빛에는 수많은 감정이 담겨있었다.
삶의 방향.
인생의 목표.
남은 생.
이런 것들이.
“써어야아. 써야아아아대에에.”
이미 그는 한 마리의 온순한 양처럼 변해 다시금 외치고 있었다.
“시키넌…… 더… 로, 하게스으으……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