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설휘를 고쳐주던 의원(3)
‘11명이라…….’
설휘의 눈이 좌우로 빠르게 움직였다.
숫자가 제법 많다.
그렇다고 손을 써보지도 못할 정도는 아니다.
다만 싸우는 도중 뒤에 있는 홍취서가 죽어버리면 모든 게 끝인 상황.
그게 계속 신경을 건들었다.
“어디 출신이냐?”
육조 조장이 입을 열었다.
이미 유명을 달리한 수하들이 있음을 알아채곤 물어보는 걸 거다.
“출신? 적어도 백몽전 출신은 아니지.”
설휘는 말을 돌리면서 주위를 빠르게 훑었다.
이 싸움. 무조건 선공이 유리하다.
그리고 싸움이 시작되면 압도적인 힘으로 서너 명은 죽여놔야 한다.
그리해야 홍취서에게 가는 이목을 줄일 수 있을 테고.
‘문제는 그다음인데…….’
남은 놈들의 능력치가 계속 눈에 걸린다.
과거에는 감히 쳐다보기도 힘든 전투력을 가진 이들.
특히 조장 녀석은 전투력이 무려 100만이 넘어간다.
“이놈. 여기서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육조 조장이 재차 물어온다.
동시에 뜨는 빈틈창들.
[절호의 기회! ‘설휘’ 님이 백혈대원 6조_3의 빈틈을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대응하시겠습니까?]
[절호의 기회! ‘설휘’ 님이 백혈대원 6조_5의 빈틈을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대응하시겠습니까?]
……
……
하지만 설휘는 무시했다.
지금은 턴제로 싸울 상황이 아니다.
단번에 전부 쓰러트리는 최적이 방식으로 상대해야 한다.
설휘는 곧장 선택사항을 바꿨다.
전투방식 <시뮬레이션>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뜨는 분석창들.
<설휘 님의 무공 개수를 분석합니다.>
<설휘 님의 무공초식을 분석합니다.>
……
<분석 완료>
분석이 끝났다는 표시와 함께 수많은 환영이 다양한 형태로 움직이며 적들을 덮쳤다.
숫자로 세기도 힘들 정도로 화면을 뒤덮던 이들은 곧 설휘에게 최적의 싸움방식을 보여주었다.
<무흔귀신보(無痕鬼神步) 3식 후 사선 베기> <횡이동 후, 좌우 검기 2회> <소신수마공 6초식> ……
조금은 걱정했었다.
열 명이 넘는 이들을 상대로 과연 최적의 방식을 찾아낼 수 있는가.
하지만 이 정도는 별 어렵지 않은지.
‘시뮬레이션’은 이들을 일거에 해치울 수 있는, 완벽한 길을 제시하고 있었다.
* * *
피이이익-
절망의 빛이 드리워졌던 홍취서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적들에게 둘러싸인 설휘란 자가 오히려 선공을 가한 것이다.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그저 눈 한번 깜빡거리던 사이 말을 나누던 자의 목이 떨어졌고.
쩌어어엉! 쩌쩡!
그리고 이어진 싸움의 형태는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조장으로 보이는 놈의 머리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그의 주변에 있던 무사 두 명의 머리도 바닥을 뒹굴었다.
상부지단 내 8전의 하나이며, 백몽전의 부대 중 하나라는 백혈대.
그런 그들. 3명의 목을 단숨에 날려버린 것이다.
“커어…….”
하지만 홍취서의 가슴을 더욱 싸늘하게 만든 건 그다음 전투였다.
쉬이이이-
설휘의 검 끝에서 서리가 맴돌더니, 새하얀 빛을 뿜어냈다.
‘뭐 저런 무공이…….’
단순히 보기만 위력적인 게 아니었다.
달려든 두 명을 향해 설휘가 검을 휘둘렀는데, 몸이 광채에 닿자마자 얼음처럼 깨져버리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극음의 마공.
실로 보기에도 경악할 만한 광경이었다.
“크악!”
“커억!”
그 뒤의 전투는 거의 화려함의 극치였다.
남아 있던 놈들도 합심한 듯 모조리 덤벼들었고. 설휘의 횡 베기 한 번에 죄다 나가떨어졌다.
안색이 허옇게 질려 죽는 자. 몸 일부가 떨어져 나간 자.
목이 떨어져 나간 자. 다양했다.
“엄청난 고수…….”
홍 의원은 실로 감탄했다.
엄청난 움직임에 이은 쾌검술.
이미 덤벼들기도 전에 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기괴한 검술.
냉기를 머금은 극음의 마공까지.
‘이자가 사령장이 될 자라 했었지…….’
들은 적이 있었다.
곤마의 신임을 받아 사령대장을 역임할 사내라고.
단순히 뒷줄을 타고 들어온 것이라 치부했었는데, 벽혈대의 일개 조를 박살 낼 정도의 실력자일 줄은 몰랐다.
마치 절대 강자와 함께 움직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걸 전부 예측했던 건가…….”
설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가느다랗게 떨리던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놀라웠다.
아니, 이건 놀랍다기보다 두렵다고 하는 게 맞을 듯했다.
시뮬레이션의 동작.
그저 따라 하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정확하게 상대를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
단순히 적들의 반응이라면 이토록 흥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쓰러지는 위치.
남아 있는 적들이 분노하는 감정.
달려드는 순서와 동작.
모든 게 소름 돋을 정도로 완벽하고 정확했다.
[시뮬레이션 사용이 끝났습니다.]
“홍 의원. 그렇게 멍하니 있을 시간은 없다.”
자신의 말에 홍취서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설휘는 손가락을 까닥이며 몸을 틀었다.
그때였다.
“이런…….”
설휘의 표정이 굳어졌다.
인기척이 들렸다.
아마도 동굴 안으로 오기 전, 세 갈림길 입구 정도에 또 다른 인원들이 다시금 모인 것 같았다.
“육조는 왜 나오지 않는 거냐?”
착각이 아니었다.
허광이란 놈의 목소리가 얼핏 들리는 것 같았다.
‘전부 처리하는 건 좋은 방법은 아닌데…….’
설휘의 머리가 다시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이번엔 정말 쉽지 않다.
적의 숫자도 그렇지만 허광이라는 놈의 전투력은 자신과 비등했기 때문.
그리고 정체불명의 투기란 것도 평범한 능력은 아닐 거다.
설사 시뮬레이션을 이용해 모두 처리한다고 해도 그 뒤는 어찌할 건가?
이들을 모두 처리하면 분명 후환이 있을 텐데.
‘무슨 임무가 이따위…….’
“아무래도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어?”
설휘의 고개가 돌아갔다.
등 뒤에 있던 홍 의원이 말을 걸어온 것이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했다.
“아시겠지만, 애초에 저는 이곳을 빠져나가선 안 됩니다. 몰랐으면 몰랐되, 대원들이 죽었으니 제가 희생하지 않으면 분명 설휘 님께 화가 미칠 것입니다.”
“그건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거지. 모두 목을 쳐내면 우리가 했다는 것을…….”
“아시잖습니까? 제가 도망친 모습을 백혈대만 본 게 아니었습니다.”
“…….”
설휘는 대답하지 못했다.
맞는 말이다.
이들을 처리하면 더 큰 화가 미칠 것이다.
자신만이 아닌, 곤마에게까지.
홍 의원은 그걸 아는 거고.
“받으십시오.”
그는 자색 빛을 띠는 풀을 내밀었다.
강호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최고의 영약이다.
설휘가 난감해하자 그는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부디 이걸 곤마 님께 가져다주십시오. 약속해 주시겠습니까?”
설휘는 잠시 영약을 뚫어져 바라봤다.
그의 말처럼 백혈대원들이 이리 죽은 마당에 생각해 봐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알겠소. 허나…….”
뒤에 몇 마디 붙이려 하지만, 더는 말할 수 없었다.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물건을 획득했습니다.]
자용초 1
교주의 찢긴 비밀교서 지도 일부(1/4)
‘뭐야, 임무가…….’
설휘는 어이가 없었다.
임무에 실패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성공이라니?
‘애초에 이건 홍 의원을 데리고 가는 임무가 아니었던가.’
그랬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백혈대에게 쫓기는 홍취서를 구해내는 게 임무가 아니었다.
그에게 믿음직한 신뢰를 보여주라고 했던 것이니까.
“제가 시선을 끌 테니 그사이에 빠져나가십시오. 꼭 곤마 님께 전달해 주십시오.”
“…….”
설휘는 뭐라고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홍취서는 적들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었고.
“여기다, 이놈들아!”
그 시간의 틈을 그는 놓칠 수 없었으니까.
* * *
“하아. 하아.”
거처로 돌아온 설휘는 식은땀이 났다.
도망치는 건 사실 어렵지 않았다.
홍취서가 이목을 끌었고, 잠영투체술과 경공술을 발휘했으니까.
“가만. 이걸 어쩐다…….”
설휘는 호흡이 진정되자 자용초를 바라보았다.
희대의 영약.
하지만 그의 말대로 곤마에게 전해줘야 하는 물건이다.
그런데 왜 곤마에게 가지 않고 이곳에 왔는가.
이유가 있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오면서 생각한 건 그거였다.
홍취서는 이미 죽고 없다.
그렇다면 이 자용초 역시 존재 여부를 아는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자신이 이걸 먹어도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이 된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홍 의원이 전서구를 통해 이미 소식을 전달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그 점 때문에 설휘는 우선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목숨을 여러 개 가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자용초 1개를 도구함에 넣으시겠습니까?]
도구함에 넣은 뒤.
자신이 생각했던 방식을 선택했다.
바로 이것이다.
[시간을 기록하시겠습니까?]
침소에 눕는 순간 발생하는 상태창.
혹여나 자용초의 존재 여부를 곤마가 알았을 경우.
일이 틀어져도 그에 대해 대비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목숨은 아직 4개나 남아 있으니까.
■ 천력 95년, 제2장-1. 곤마가 제시하는 세 가지의 삶
□ 천력 95년, 제3장-1. [핵심무사 성공] 폭풍 성장기(Bonus Story) 3년
□ 천력 95년, 제2장-20. [핵심무사 되기] 마지막 이야기.
목록이 뜨자, 설휘는 세 번째를 선택했다.
첫 번째는 훗날을 대비해 남겨 두어야 했고, 두 번째는 지금까지 쌓아왔던 업적들이 틀어졌을 경우를 생각해야 했으니까.
■ 천력 95년, 제2장-20. [핵심무사 되기] 마지막 이야기.
[여기에 기록하시겠습니까?]
설휘는 선택했고.
■ 천력 95년, 제3장-8. [핵심무사 성공] 폭풍성장기(Bonus Story) 1년 차.
[기록되었습니다.]
이젠 뒤를 돌아볼 것도 없었다.
곧장 자용초를 입에 넣었다.
그러고는 잘근잘근 씹으며 극적인 변화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역시나 눈앞에 떴다.
[경고! 자용초를 흡수할 수 있는 ‘극양의 심법’이 필요합니다.]
<참고! 극양의 심법이 없으면 자용초를 소화하는 데 ‘1년의 소요시간’이 필요합니다.>
정보를 알려주는 상태창들.
하지만 어떠한 효능을 가졌는지, 어떤 극양의 심법이 필요한지 알려주지 않았다.
확실한 건. 지금 이 희대의 영약을 제대로 섭취할 수 없다는 것.
설휘는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었다.
* * *
설휘는 남은 이십여 일을 오직 방에서만 지냈다.
처음엔 극양의 심법을 찾아볼까 고민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본교에 극양의 심법이라면 대표적인 게 혈수마공이다.
하지만 그 마공은 어디 있는지도 모를뿐더러, 안다 해도 구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교주의 비밀교서 같은 곳에 자신이 어떻게 들어갈 수 있겠는가.
‘위치가 어딘지 영…… 감을 잡을 수 없군.’
또한, 숨겨진 비밀교서 지도 4조각 중 2조각을 얻었지만, 이곳이 어딘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면 최소 하나를 더 찾아야 할 판이다.
‘1년만 참으면 얻을 수 있는 거 아닌가.’
설휘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어차피 시간은 금방 흘러갈 테니.
몇 가지 임무나 무사수행을 하다가 보면 완벽하게 흡수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믿었다.
[백몽전주, 만검수라 님이 설휘 님을 뵙길 원합니다.]
4월을 하루 남겨둔 날.
허광의 상관인 백몽전주가 자신을 찾아왔다.
인기척이 들려 나간 게 아니라, 상태창이 그의 존재를 알려온 것이다.
▶ 수락한다.
▷ 거절한다.
그리고 두 개의 질문이 떴고, 설휘는 당연히 ‘거절한다’를 선택했다.
지금 자신의 거처까지 왔다는 건. 분명 자신들의 수하들과 연결점을 발견했다는 것이 아닌가.
[거절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한다.
이 망할 선택창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