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육성 시물레이션-54화 (55/379)

54화. 백몽전주(1)

마교는 사원과 팔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네 개의 대규모 토지와 가산을 갖춘 장원(莊院)과 여덟 개의 중요 건물이라는 전(殿)을 말한다.

팔전 중 하나인 백몽전은 교주의 직접 지시를 받는 독립적인 곳이다.

그곳의 전주는 공식서열로는 무려 29위.

일대제자보다 높은 서열에다, 대소사를 관장한다는 총단본부 회의실에도 참관한다고 알려져 있을 만큼 위명이 높았다.

그런 그가 자신을 만나러 직접 이곳에 방문한 것이다.

“처음 보는군. 인사하지. 나는 백몽전주 만검수라일세.”

그는 흡사 한 마리의 범을 보는 것 같은 외모와 풍채를 지니고 있었다.

눈엔 기광이 서려 있고, 목 아래까지 내려오는 흰수염은 절대고수의 풍모를 엿보는 것 같았다.

특히 등 뒤에 멘 이름 모를 대도(大刀)는 과연 실전용 칼인지 의문까지 들었다.

하지만 가장 눈이 간 건, 그의 인상착의보다 머리 위에 떠 있는 기호였다.

[협력 x 2]

‘협력은 뭐야?’

그간 목숨과 통찰. 사랑을 봐왔지만, 협력이란 글자는 처음이었다.

또한, 처음으로 나타난 기호.

바로 ‘x’라는 것이다.

거기다 전투력을 가늠할 수 있는 수치는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어쩐 일로 왔겠나.”

설휘는 최대한 공손하게 예를 차려 물었지만, 어찌 들려온 대답이 신통찮다.

무슨 생각을 가졌는지는 좀 더 대화를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면, 맞춰보게. 왠지 자넨 알 수 있을 것 같거든.”

‘불길하다.’

질문 의도가 지극히 노골적이다.

왠지 자신이 영약을 빼돌린 걸 알고 있다는 느낌이다.

설휘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자신 역시 추적술의 고급과정까지 배웠다.

당시 사용했던 경공술도 그렇고, 결코 누구도 알지 못한다고 단언했다.

“맞춰보래도?”

백몽전주의 거듭된 질문에 설휘는 더는 고민할 수 없었다.

그렇게 모르겠다고 뭐라 말하려던 차에, 느닷없이 지문이 떴다.

‘어?’

정말 오랜만이다.

그런데 그 오랜만에 나타난 지문이.

▶ 뭔 소리야?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고 그래. 18 진짜 짜증 나게.

▷ 제가 그 영약을 먹었습니다. 문제 있습니까?

9…… 8……

어처구니없는 지문 두 개를 보여줬다.

선택창이 나타난 것도 그러했지만, 답변이 너무도 경망스럽다.

마치 곤마를 처음 만났던 그때의 답변처럼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게끔 하고 있었다.

4…… 3……

그나마 한가지 희망적인 건, 그동안 경험으로 볼 때 늘 최악의 선택이라 생각한 지문이 유일한 탈출구였다는 것.

최악과 차악의 선택이 남았을때는, 최악으로 보이는 지문이 빛을 발했었다.

다만, 이번 건 그 점을 고려해도 강도가 너무 심했다.

[‘뭔 소리야?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고 그래. 18 진짜 짜증 나게.’를 선택하셨습니다.]

계속 진행됩니다.

‘방법이 있는 거겠지?’

설휘는 상대의 눈치를 살폈다.

예전이라면 몸부림칠 정도로 이 상황을 두려워했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여기서 죽는다 해도 남은 목숨이 몇 개나 더 있지 않은가.

때마침 자신을 바라보던 백몽전주의 웃음기가 싹 가셨다.

‘왜 말을 하지 않는 건가.’

자신을 뚫어지라 바라보는 백몽전주는 침묵하고 있었다.

충격을 받았는지, 아니면 웃어넘기는 대범함을 보이려는지는 아직까진 알 수 없다.

다만, 이대로 계속 그를 바라봐야 하니 그게 더 답답할 지경이다.

“꽤 당돌한 아이로군.”

‘통한 건가?’

바로 주먹이 날아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그는 오히려 조금 편안해진 듯 대화를 걸었다.

그 말은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걸 얘기하는 것 같았다.

“가끔 거닐다 보면 수하들의 얼굴에 열꽃의 흔적이 보일 때가 있어. 보통 영약을 먹은 후, 명현현상(瞑眩現象)이 일어날 때 보이는 반응이지.”

“……예?”

“괜찮아. 숨기려고 했을 수 있지. 그게 어떤 영약인데. 그렇지?”

“억!”

무슨 말이라도 하려던 그때, 설휘는 이미 자신의 목이 백몽전주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저 빠른 정도가 아니라,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상황이었다.

“이봐. 젊은 친구. 내가 널 죽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난 천마 제자분들의 어느 진형에도 서 있지 않거든. 그래서…….”

푸욱.

“억!”

극심한 통증과 함께 설휘의 눈앞이 흐려졌다.

고통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주먹 한 번에 자신의 가슴이 관통당한 것이다.

“네놈을 죽여도 문제 될 게 없다는 거지.”

희미하게 들리는 웃음소리.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세 번의 기회가 남았습니다.>

이번 생의 목숨은 여기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 * *

[‘천력 95년, 제 3장-8. [핵심무사 성공] 폭풍성장기(Bonus Story) 1년 차.’로 돌아갑니다.]

“아씨! 어떻게 만든 목숨인데!”

십여 일 전, 시간을 기록하기 전으로 돌아온 설휘는 발끈했다.

지문 선택이 잘못되었고 너무도 갑작스럽게 일격, 어떤 수를 써보지도 못하고 당해버렸다.

“망할 임무를 받아버린 거야.”

자용초를 얻은 건까지 좋았지만, 그 뒤로부터 완전히 꼬여버렸다.

백몽전주가 이리로 찾아온 걸 보면 나름 자용초의 존재를 확신에 찬 듯 보였으니까.

“잘한 선택일까.”

저장된 지점을 불러올 때 진지하게 고민했다.

잘못 들어선 길이라면 다른 길로 가는 게 더 낫지 않느냐고.

최소한 이런 위험성 있는 지문은 받지 않을 테니까.

그럼에도 설휘는 이 지점을 골랐다.

협력이라는 저 단어에 의미를 알아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첫 번째 지문은 명백히 아니었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다.

다른 것도 아닌, 백몽전주에게 그런 욕설을 내뱉고도 살기를 바라는 게.

또한, 이번 경험으로 설휘는 깨달았다.

최악의 선택이 자신을 늘 구원해준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결국, 다른 선택이 답이었나.”

그렇다면 두 번째 지문.

자신이 그 영약을 먹었다는 선택이 남는다.

한 번 죽어보니, 결과적으로는 그 선택이 옳다는 게 더욱 증명되는 것이다.

“만약에, 애초에 자용초를 먹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면…….”

하지만 설휘는 또 다른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애초에 자신이 자용초를 가지면 안 되는 걸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홍 의원 말대로 이걸 직접 곤마에게 가져다주는 게 정확한 답일 수 있는 것이다.

다행히 이전 생에서 저장하기 직전, 도구함에 자용초를 넣어놓았다.

그랬기에 아직 자용초를 어떻게 쓸지 결정할 수 있었다.

“만약 곤마에게 줬는데도 해결되지 않는다면?”

설휘는 또 다른 가정을 해보다 보니 더욱 고민스러워졌다.

백몽전주가 설사 곤마가 가져간 걸 알게 된다고 할지라도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전에 백몽전주와 마찰을 우려한 곤마가 자신을 버릴 수도 있다.

자용초 사건이 어디로 튈지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다.

설휘는 다시 사건을 처음으로 되돌렸다.

이 상황에서 이런저런 가정이 아닌, 눈앞에 확실한 것만 보며 판단하기로.

“협력이라는 것에는 분명 의미가 있을 것인데…….”

그나마 실마리라고 한다면 협력.

그의 머리 위에 뜬 그것이 뭔가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지 모른다.

그게 어떤 식으로 작용할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자신이 들고 있는 자용초와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 * *

설휘는 이십여 일을 방 안에서만 지냈다.

사실, 하루 정도 고민한 다음 어떻게 움직일지 결정했다.

그리고 그건 곤마에게 주는 게 아닌, 직접 백몽전주에게 건네주는 것이었다.

당연히 위험이 따른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협력이란 문자.

분명 이것이 자신에게 또 다른 기연을 안겨다 줄지 모르는 일이니까.

[백몽전주, 만검수라 님이 설휘 님을 뵙길 원합니다.]

아침이 되는 날.

이전처럼 눈앞에 문구가 나타났다.

승낙 후, 설휘는 예전처럼 방문 앞에서 그를 맞이했다.

“처음 보는군. 인사하지. 나는 백몽전주 만검수라일세.”

두 번째 겪는 상황이다.

담담하게 내뱉는 그의 말투와는 달리 설휘의 등골은 서늘해졌다.

그의 무력을 한 번 경험해봤기 때문이다.

“오셨습니까.”

“……?”

자신이 너무 태연하게 말을 받자, 오히려 그가 당황한 것 같았다.

설휘는 지문이 혹시 뜰지 모르는 상황 때문에 빠르게 대답을 이어갔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 * *

그가 방 안으로 들어올 때도 설휘는 점점 초조해졌다.

갑자기 지문이 뜨면 모든 것을 망치는 것이다.

그랬기에, 담담히 반응하는 것조차도 나름 힘에 겨웠다.

“왠지 날 기다린 듯한 모습이군.”

의자에 앉던 그가 나직이 물어온다.

목소리는 호수처럼 잔잔했지만, 그 안에 회오리처럼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그래서.

“이유가 있지요.”

“……?”

“자용초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요.”

먼저 수레바퀴를 굴렸다.

어디로 굴러갈지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호오.”

백몽전주는 흰 수염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들었다.

미묘하게 변하는 입꼬리.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지만, 확실한 건. 어떤 의미이든 상관없다는 거다.

기세에 버틸 재간이 없다면, 자신이 그 기세 속으로 들어가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냥 알려드릴 수는 없습니다.”

설휘는 그런 가운데서 최대한 그와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의 생각을 읽기보다는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끌고 와야 한다.

자신에게 유리한 전장으로.

이길 수 있는 싸움 방식으로.

“곤마께서도 이 사실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지요.”

“…….”

설휘는 시선을 탁자에 두었다.

이제는 기다릴 때다.

그가 자용초를 받아 갈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를.

어느 선택이든 상관없었다.

이걸로 목숨은 확보한 셈이니까.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받지.”

“……!”

“애초에 자용초는 우리 것 아닌가. 제자님께도 내가 잘 말해둘 테니. 같이 협력하세.”

‘협력이라고……?’

예상치 못한 대답이다.

그가 긍정적으로 말해올 것을 몰랐다는 게 아니다. 스스로 협력이란 말을 꺼낼 거라는 생각은 애당초에 하지 못했다.

설휘는 그와 처음으로 시선을 맞췄다.

기분 탓인지 협력이란 글자가 유독 또렷하게 보인다.

“좋습니다. 드리지요.”

더는 망설일 필요 없었다.

머릿속에 협력이 목숨이라면 이건 자신에게 더 큰 이득이다.

영약은 아쉽지만, 자신이 가져갈 방법도 쉽지 않아 보였기 때문에.

“그래, 어디에 있나?”

백몽전주의 물음에 설휘는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미리 확보 해둔 자용초를 그에게 천천히 내밀었다.

“호오. 고맙네. 그럼 수고하게.”

드르륵.

그는 그렇게 뒤돌아섰다.

설휘가 안도감을 느끼기도 잠시, 문득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이 스쳤다.

‘왜 없어지지 않는 거지?’

백몽전주가 협력이라고 분명 말했다.

그렇다면 분명히 그의 머릿속에 단어와 기호는 없어져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도.

[협력 x 2]

저 문자가 그의 머리 위에 여전히 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참. 그리고.”

백몽전주는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걸음을 멈췄다.

“받을 게 있었는데…… 깜빡했군.”

“뭘 말입니까?”

설마 이제 협력이 없어지는 말을 꺼내려는 걸까.

설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게 말이야…….”

천천히 돌아서는 백몽전주.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과 함께 눈 앞을 가리는 상태창.

“내 수하들의 목숨 값 말이야.”

[경고! 백몽전주가 설휘 님의 빈틈을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대응하시겠습니까?]

‘헉!’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그렇게 떠날 줄 알았던 그가.

▶ 맞대응한다.

▷ 방어한다.

▷ 도망간다.

이런 식으로 기습할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