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육성 시물레이션-55화 (56/379)

55화. 백몽전주(2)

‘이대로 죽는 건가…….’

눈앞에 뜬 빈틈창.

웬만하면 더 나은 상황을 찾아보기라도 할 텐데, 지금은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상대가 마교 서열 29위.

백몽전주이니까.

6……5……

이길 방도가 없다곤 하나, 선택은 해야 했다.

어차피 한 방에 끝날 테지만 말이다.

‘가만. 무조건 죽는다면, 빈틈창이 뜨지 말았어야지.’

생각해 보면 그랬다.

전생에서 백몽전주에게 죽을 때는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수준차가 압도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그때는, 거리가 너무나 가까웠기 때문이다.

지금은 조금 상황이 다르다.

이렇게 빈틈창이 떴다는 건, 살 수 있는 여지가.

극악의 확률이라 할지라도 있다는 뜻이 아닐까.

2…… 1……

줄어가는 시간 속에서 설휘의 시선이 위에 있는 전투방식에 머물렀다.

설마하니 이 순간에도 바꿀 수 있을까.

혹여나 하는 마음에 선택을 해 보았는데…….

‘바꿔진다!’

전투방식

변하는 게 또렷이 보였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선택 끝에.

전투방식 <시뮬레이션>

시뮬레이션을 선택했고. 곧장 선택 시간이 끝나자마자, 다시금 모든 게 멈췄다.

사사사사사삭-

이후, 눈앞에서 펼쳐지는 셀 수 없는 환영들.

시간이 멈춰진 이때, 그 환영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어떤 녀석은 방에서 방방 뛰었고.

또 어떤 건 자세를 낮추거나 구르기까지 했으며.

또 다른 이는 달려나가고 피하고 물러서는 걸 수없이 반복했다.

이내 모두가 사라지며 딱 한 개의 환영.

그것이 움직이는 연결동작과 함께 눈앞에 그가 하는 움직임이 문자로 나타났다.

1차 : 제자리, 무흔와각(無痕臥脚)

바닥에 등을 붙이며, 다리 하나를 들어 올리는 동작.

무흔귀신보(無痕鬼神步) 4절, 무흔와각이 나타난 것이다.

설휘는 더 고민하지 않고, 그 동작을 똑같이 구현했다.

그러자, 바닥에 누운 설휘의 눈에 순식간에 다가온 백몽전주가 보였고.

퍼억!

아슬하게 자신의 발공격을 피했지만, 중심이 약간 흐트러진 그의 몸짓이 보였고.

그리고 뜨는 두 번째, 행동.

2차 : 두 손을 짚으며 무흔등각(無痕登脚)

설휘는 잽싸게 바닥에 짚은 두 손을 밀어 강력한 발길질을 했다.

분명, 일격을 가할 만한 공격이었다.

그럼에도 백몽전주는 두 손을 막아냈고, 급히 뒤로 물러났다.

3차 : 발검술을 이용한, 소신수마공 3초식, 파검소해(破劍素解)

이번엔 초식 공격이었다.

설휘는 허리춤에 있던 검을 뽑아듦과 동시에 내공을 집중시켜 그를 향해 초식을 뿌렸다.

쩌어어엉!

그를 향해 날아간 백빛의 검기.

그것이 그의 지척에서 사방으로 퍼지며, 흩뿌려졌다. 놀랍게도 백빛의 검기가 깨지며 수백 방위로 그를 찢어발긴 것이다.

거기다 방 안이라는 제약적인 공간이 상대의 퇴로까지 막아서는 효과를 보인 것이다.

스으으으-

소신수마공의 특성인 얼음 알갱이가 잠시 주변을 뿌옇게 만들었다.

그리고 눈앞에 뜨는 문자와 함께.

[시뮬레이션 사용이 끝났습니다.]

“아아…….”

설휘는 입을 쩌억 벌렸다.

백몽전주가.

서 있던 자리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은 것이다.

살아있었다.

자신이 쏘아낸 건 단순한 얼음 알갱이가 아닌, 모두가 하나하나 미세한 검기들.

그 검기를 도망가지도 피하지도 않고 온몸으로 받아낸 것이다.

그래도 약간은 타격이 있는지…… 입가와 정수리를 타고 피가 한줄기 흘러내렸다.

“어찌 한낮 마인이…….”

백몽전주는 급히 반격에 대비하려던 설휘를 보고도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이 믿기 힘든지, 간간이 눈이 떨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도 몰라, 인마.’

설휘는 이런 긴장 속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상대는 자신의 일격을 정통으로 맞고도 그다지 타격을 받은 모습이 아니었다.

얼마나 호신강기가 강한지, 수백 갈래로 퍼져나간 검기다발을 맞았는데도 말이다.

‘이젠 어찌 되든 모르겠다.’

설휘는 시선을 올렸다.

도저히 답이 없다.

이젠 믿을 놈을 그놈뿐.

분명 또 다른 내 안의 그놈은 방법을 찾을 것이다.

그래서 바꿨다.

동시에 몸에서 분리되는 기분을 느끼며.

전투방식

‘너’라면.

믿을 만할 테니.

* * *

나는 AI제로 바꾼 후 천장에서 그놈을 지켜봤다.

그놈은 먼저 주위를 둘러봤고, 눈앞의 백몽전주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이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내가 위치한 천장 위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야이이이이이 씹자슥아아아아!”

‘헉!’

벼락처럼 소리치는 AI설휘의 외침에 나는 오싹함을 느꼈다.

아마도 지금 상황이 그가 내뱉은 감정과 비슷하겠지.

슬쩍 옆을 보니, 백몽전주도 당황한 눈치다.

무서워서가 아닌, 웬 미친놈이 소리 지르는 게 어이없다는 거겠지.

“…….”

AI설휘가 어느새 감정을 추스른 걸까.

그는 어느새 이전의 눈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시겠지만, 수하들이 죽은 건 제가 나름 배려를 한 겁니다.”

분노나, 울분보다는.

한층 차분해진 느낌이다.

“모두 다 죽일 수 있었지만 말이지요.”

“……뭐라?”

하지만 정작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강한 도발이었다.

의도적으로 자극을 하는 것이다.

“밖으로 나오시지. 내가 누군지 제대로 보여주마.”

그리고 그는 방문을 걸어 나갔다.

너무도 도발적인 행동 때문인지, 백몽전주는 AI설휘가 눈앞을 지나가는 와중에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설마, 이길 방도가 있다는 건가…?’

AI설휘의 태연한 행동에 나는 갑자기 기대감이 생겼다.

혹시 그는 내가 모르는 비상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게 아닐까?

저렇게 당당히 말하는 걸로 보아, 적어도 믿는 구석 하나쯤은 분명히 숨기고 있을 터.

그런데.

‘……어?’

“으아아아아아아!”

AI설휘가 문지방을 넘는 순간, 미친놈처럼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백몽전주가 아닌, 전혀 엉뚱한 다른 곳으로.

‘…….’

그 장면에 난 말문이 막혀 뭐라 평하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너무도 당연하게도.

콰아아앙!

몇 발짝 도망가지도 못한 채, 엄청난 경공술로 뒤따라온 백몽전주의 도기에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AI설휘는 포기하지 않았다.

“으아아아아악!”

흡사 정신이 나간 놈처럼, 계속해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

달리고 달렸고.

또 달리면서 달렸다.

그리고 곧 AI설휘의 등으로 쇄도하는 강렬한 도강을 본 후.

익숙한 문장을 목도했다.

[두 번의 기회가 남았습니다.]

‘씨발…….’

* * *

[시간을 언제로 되돌릴까요?]

■ 천력 95년, 제2장-1. 곤마가 제시하는 세 가지의 삶

□ 천력 95년, 제3장-1. [핵심무사 성공] 폭풍 성장기(Bonus Story) 3년

□ 천력 95년, 제3장-8. [핵심무사 성공] 폭풍성장기(Bonus Story) 1년 차.

설휘는 이것을 본 후, 꽤 한참을 고민했다.

이제 남은 목숨 2개인 상황에서 괜히 미친 척 임무를 맡았나를 수없이 되짚었다.

그럼에도 결국 선택은 세 번째였다.

과거로 돌아가서 똑같은 짓을 하는 것도 짜증 났고, 무엇보다 목숨 2개를 가져간 임무를 버릴 수가 없었다.

[‘천력 95년, 제3장-8. [핵심무사 성공] 폭풍성장기(Bonus Story) 1년 차.’로 돌아갑니다.]

“쓰읍…….”

설휘는 천천히 주위를 돌아봤다.

다시 살아났다는 느낌.

예전처럼 돌아온 기분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애초에 이건 내가 가지면 안 되는 거였다.”

설휘는 생각했다.

자용초는 처음부터 자신이 가져갈 수 없는 거였다.

백몽전주가 찾아올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을뿐더러, 그를 설득시킬 수 있는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설휘의 방법은 하나였다.

자용초를 포기하고, 곤마에게 가져다주는 것.

지금으로서는 그것밖에 없었다.

* * *

- 어쩐 일이냐?

- 이건…… 정말 홍 의원이 이걸 건네주라고 했다는 것이냐?

-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내 결코 오늘 일을 잊지 않을 것이다.

- 걱정 마라. 백몽전주가 널 찾아와도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

“휴…….”

설휘는 곤마와 대화 후 안도의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리 간단한 걸 왜 그렇게 어려운 길로 가려고 했을까 하는 자책도 들었다.

‘망할! 내 아까운 목숨 2개.’

그리고 이번 일로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지나친 과욕은 목숨을 버릴 수 있다는 것.

임무라고 해서 무조건 받는 게 좋을 게 없다는 것.

위험은 항상 자신의 주위에 도사리고 있기에 냉철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었다.

설휘는 유일하게 희망으로 남아 있는 무공연마에 몰두했다.

자신이 지닌 최고의 절기.

엄청난 풍압을 일으키며, 상대를 찢어발기는 풍신을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 사대극마공 풍. 특성 기술표 ◆

풍신(風神) : → N(중립) ↓↘, A <4.5배속>

어려웠다.

수없이 연습했지만, 제대로 펼쳐내기조차 쉽지 않다.

정확한 동작에 집중하면 움직임이 쫓지 못했고, 움직임에 신경 쓰다 보면 동작이 확실하지 않다.

특히 움직임에 요구하는 조건이 과했다.

아주 정밀한 흐름에 정확한 지점을 찔러줘야 풍신 기술이 시전되는 것이다.

대박검과는 난이도에서부터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그렇게 이십여 일이 지나고.

성공의 빈도가 높아질 즈음에, 눈을 의심할 만한 일이 벌어졌다.

[백몽전주, 만검수라 님이 설휘 님을 뵙길 원합니다.]

오지 말아야 할 썩을 녀석이, 또다시 방문한 것이다.

정확히 하루 남겨 놓은 시점이었다.

* * *

[거절할 수 없습니다.]

수락 거절 지문 중, 거절을 선택하니 이전과 같은 문구와 함께 그가 나타났다.

“처음 보는군. 인사하지. 나는 백몽전주 만검수라일세.”

‘미치겠네.’

분명 곤마에게 자용초를 전해줬는데 그가 나타났다.

그것도 예전과 똑같은 몸짓과 말투로.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그래도 한 번은 물어봐야 했다.

곤마가 아무 일 없을 거라 했었으니, 설마 거짓말을 했겠는가.

그런데.

“어쩐 일로 왔겠나.”

‘아씨!’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분위기를 보니 곤마가 별도로 이자와 만나지 않은 듯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면, 맞춰보게. 왠지 자넨 알 수 있을 것 같거든.”

‘잠깐. 이거 대화가…….’

설휘는 눈을 번뜩였다.

대화 자체가 마치, 전전생과 흡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고민은 정확하게도 들어맞았다.

“맞춰보래도?”

“일단 안으로…….”

급히 대화하기 위해 말을 내뱉었지만, 어느 순간 더 이어갈 수 없었다.

절망스럽게도.

이게 지문이.

망할 그 지문이 더 빨랐다.

▶ 뭔 소리야?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고 그래. 18 진짜 짜증 나게.

▷ 제가 그 영약을 먹었습니다. 문제 있습니까?

‘곤마 이 새끼이야아아아! 약속이 틀리잖아!’

속에서 열불이 터져 나왔다.

어떻게든 대화를 통해 풀어가야 할 상황에 황천길로 가는 지문이, 떠 버린 것이다.

6…… 5……

‘망할 자용초를 얻어버려서……’

설휘는 스스로 자책했다.

이쪽 저장 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여긴 어떻게든 위기를 돌파할 수 없는 지옥 같은 곳이었다.

3…… 2……

반쯤 자포자기한 설휘는 시선을 내렸다.

황천길로 가는 길이라도, 이전과는 다른 선택이 더 낫지 않겠는가.

<‘제가 그 영약을 먹었습니다. 문제 있습니까?’를 선택하셨습니다.>

-계속 진행됩니다.

“…….”

“…….”

자신의 대답을 들은 백몽전주는 침묵했다.

예전과 같은 분위기다.

그리고 좀 있다가 바로 살수를 펼쳤었지.

“건방진…….”

놈의 눈빛이 점점 매서워지자 설휘는 시선을 올렸다.

시뮬레이션을 선택해 시간을 좀 벌어보자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 계셨군요.”

“……!”

“……!”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설휘는 그를 보자 가슴속에 있던 울분이 눈 녹듯 내려앉았다.

곤마였다.

그가 백몽전주 뒤에서 나긋하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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