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Part 1. 사령대 조장들(1)
설휘는 문밖에 서 있었다.
곤마가 백몽전주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문밖을 나오던 백몽전주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설휘라 했던가.”
“예.”
그의 눈가엔 여전히 살의가 담겨 있다.
또다시 갑작스럽게 살수를 펼칠까 걱정되었지만, 이내 우려는 사라졌다.
다행히 곤마가 뒤따라 나왔기에.
“자넨…… 어찌 또 볼일이 있을 것 같군.”
백몽전주는 그렇게 자신을 스치며 이곳을 떠났다.
설휘가 슬쩍 옆을 돌아보자, 곤마는 가볍게 웃어 보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내가 여기 있는 한, 너에게 결코 손을 쓰지 못할 것이다.”
“……감사합니다.”
설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곤마의 든든함을 이번에 새삼 상기할 수 있었다.
반반한 얼굴과 외견상 왜소해 보이는 체격 때문에 그가 어떤 인물인지 잠깐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젠 확실히 인정해야 했다.
자신이 백몽전주의 수하들을 죽였음에도 그를 당당히 설득해냈다.
천마제자의 이름값인지, 아니면 뭔가 거래가 있었던 건지는 모르나, 그게 무어든 지금은 자신을 보호해주는 인물인 것이다.
“아무튼 이번에 큰일을 해주었다. 이걸 받거라.”
곤마는 약간 벅찬 감정을 느끼고 있던 설휘에게로 자신의 허리춤에 찬 검을 들어 내밀었다.
‘아…….’
설휘는 얼떨떨했다.
척 보기에도 평범한 검이 아니다.
검집에 음각된 용조각의 표식.
고작 외면에 이 정도의 심혈을 기울였다면, 필시 검신은 몇 배 더 놀라운 모습일 거다.
아니라 다를까.
검 자루를 잡자마자, 별도의 상태창이 눈 앞을 가렸다.
[<신병이기> 예오후검(禮悟后劍)을 얻었습니다.]
‘신병이기?’
예상대로 단순한 병기가 아니었다.
특히 상세보기도 아닌, 밑으로 달린 줄줄이 특성들이 자랑하려는 듯, 멋대로 나타났다.
예오후검 : 고대의 제단사들이 기도할 때 쓰이는 예검 중 하나로, 이 검은 최고의 제관이 사용했다.
<기본 능력>
일반 무공시 파괴력 70% 증가
극음 무공시 파괴력 50% 증가
극양 무공시 파괴력 50% 증가
사대극마공 사용시 파괴력 30% 추가 증가
<추가 능력>
전투방식(턴제, AI, 시뮬레이션) 능력 증가
<특별 능력>
추혼기(追魂氣)(봉인된 저주)
엄청나다.
설휘 자신이 가진 모든 무공에서 파괴력이 증가했다.
전투력 증가와 전투방식 능력까지.
거기다 알 수 없는 특별 능력이 더해졌다.
이건 거의 기연을 얻은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백혈대에게 둘러싸인 홍 의원에게 자용초를 건네받고도 살아 돌아왔다면 필시 그에 걸맞은 실력을 갖췄을 터. 넌 이걸 받을 자격이 된다.”
곤마는 천마제자나 사용할 법한 명검을 주면서도 아쉬워하는 표정이 없었다.
그는 설휘를 잠시 응시하더니 어깨를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자네에겐 기대가 크다.”
“반드시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발길을 돌렸다.
뭔가 후련하면서도 약간은 미묘한 웃음과 함께.
설휘는 그가 떠나는 뒷모습에서 한 가지는 알 것 같았다.
자신이 건네준 자용초가 분명 그에게 큰 힘이 되었을 거라는 거.
그의 머리 위에 있던 상태창 능력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말이다.
백몽전주와 곤마가 사라진 후, 설휘는 건네받았던 검을 천천히 빼 들었다.
정말로 파괴력이 증가하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스르릉.
“아…….”
검집에서 검을 꺼내들자, 단번에 감탄이 흘러나왔다.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예리하게 뻗은 날.
검신 양 끝에는 불길한 기운이 담긴 마력(魔力)이 느껴진다.
아마도 이게 ‘특별 능력’이 지닌 힘으로 보였다.
설휘가 사선으로 들어 검인(劍刃-검의 날)을 보니, 여러 철을 조합했다고는 보이지 않고, 처음부터 하나의 철을 조합한 몸체처럼 보인다.
“풍신을 써보면…….”
설휘는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여러 무공이 떠올랐지만, 이내 지워버렸다.
현재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고의 마공.
‘사대극마공 풍’ 특성 기술인 풍신을 써보는 것이 제일 낫겠다고 생각했으니까.
투욱.
마당 중앙으로 걸어간 설휘는 검을 천천히 세웠다. 그리고 특성표의 움직임대로.
몸동작을 빠르게 취했다.
“하앗!”
아직 예오후검이 손에 익지 않은 탓에 한 번에 성공은 하지 못했다.
그렇게 하기를 여러 번.
“핫!”
아홉 번쯤, 검을 휘둘렀을 때, 설휘는 반사적으로 크게 물러섰다.
패애애액-
[풍신을 사용합니다.]
상태창에 알림신호가 왔고, 강력한 검풍이 쏘아져 나가며, 주변의 바람을 먹어치웠다.
솨아아아악- 쩌저적! 쩡!
눈 깜짝할 사이, 소용돌이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졌고, 거기다 뇌전이 힘까지 더해졌다.
그것은 앞에 있던 외벽을 형체도 없이 날려버린 것이다.
콰콰쾅! 쾅! 쾅!
설휘는 그저 입만 쩌억 벌릴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위력도 그렇지만 바닥이.
딛고 있던 바닥에 폭발이라도 난 것처럼 거대한 구덩이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제야 30% 추가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 * *
<천력 96년 4월 일정을 정해주세요. (8/36)>
▶ 임무 받기
▷ 무사 수행
▷ 주변을 돌아다닌다.
오지 않을 것 같던 상태창.
하루 푹 잔 뒤, 문 앞에 나가보니 4월의 일정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 주변을 돌아다닌다.
설휘는 이번 일정은 수련으로 정하고 싶었다.
이번 일로 임무를 수행하는 게 지치기도 했고, 그렇기에 자신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 풍신을 완벽히 익히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지문 셋 중 ‘주변을 돌아다닌다’를 선택하게 되었다.
[어디를 둘러보시겠습니까?]
▶ 천마 넷째 제자의 가택
▷ 현무관 후원
▷ 사령대 조장들의 쉼터
두 번째 현무관 후원을 선택했다.
[현무관 후원으로 이동합니다.]
드넓은 정원.
호수가 보이고, 꽃과 묘목이 즐비한 곳에 설휘는 홀로 서 있었다.
주변에 인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현무관 후원이 워낙 넓은 데다, 사람의 손길이 닿은 조경들은 대부분 출구와 입구쪽에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본인이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쯤으로 배정된 것으로 보였다.
‘지형지물이 없으니, 누가 감시할 수도 없겠고.’
설휘는 수련장소를 이곳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몇 달이 걸릴지 모르지만, 오로지 풍신을 제대로 익히기 위한 수련을 시작했다.
[4월]
끝없는 노력 끝에, 풍신 기술 성공률을 좀 더 높일 수 있었다.
틈틈이 예호후검 안에 봉인된 기술이 뭘지 이리저리 휘둘러보기도 했지만, 반응이 없어서 그만두었다.
특정 조건이 무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해서 수련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다.
그렇게 4월이 끝나가는 기간 즈음에는 열 번에 두 번 정도는 풍신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5월]
또다시 한 달.
반복된 동작을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꾸준히 하는데도 풍신검을 쉽게 펼칠 수 없었다.
약간의 보폭 거리만 달라도 이 기술은 튀어나오지 않았고, 호흡도 맘대로 들이마시거나 내쉬지 못했다.
심지어 정확한 지점을 바라보는 시선 처리가 없으면 모든 게 무용지물이었다.
그래도 열 번에 세 번까지 성공률을 끌어올린 성과가 있었다.
<천력 96년 6월 일정을 정해주세요. (10/36)>
포기하지 말자.
이 기술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으면, 초절정 고수도 쉽게 이길 수 있다.
한곳에 가둬놓고 수십 발을 갈겨대면 상대가 항복하지 않고 배기겠는가.
아직 성공률은 3할 수준이지만, 노력만 하면 충분히 올릴 수 있다.
목표는 5할이다.
이 정도 성공률은 확보해야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까.
<천력 96년 7월 일정을 정해주세요. (11/36)>
인정한다.
웬만한 기술이었다면 벌써 극성에 도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겐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일이다.
수없이 죽음을 경험했던 자신에게 이 정도의 어려움은 당연하잖아?
<천력 96년 7월 일정을 정해주세요. (11/36)>
왜 이리 처 안 나가는 거지?
<천력 96년 8월 일정을 정해주세요. (12/36)>
근데 이 새끼가 자꾸?
* * *
“미치겠네.”
설휘는 온몸에 땀이 범벅된 채, 거처 안으로 들어왔다.
정말이지 몇 달 동안 풍신을 쓰기 위해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결론적으로 성과는 없었다.
고작 3할 정도의 성공률에서 더는 오르지 않았다.
“대체 뭐가 문제인 거지?”
설휘는 투덜대며 의자에 앉았다.
문제점을 생각해 보려 해도, 성공률이 낮을 뿐. 펼칠 수는 있었다.
그러니 그게 더 미칠 것 같았다.
“혹시 모르니까, 저장이나 할까.”
비치된 그릇에 물을 따라 먹은 그는, 시간을 기록할 수 있는 침소로 이동했다.
그러던 도중 갑자기 이게 떴다.
<천력 96년 9월 일정을 정해주세요. (13/36)>
‘아 벌써.’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단 말인가.
설휘는 오늘이 9월 일정을 정하는 날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또 주변을 돌아다닌다를 선택하려 했는데.
‘어?’
[1년이 지나, 설휘님은 새로운 일정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번엔 좀 뭔가 다른 문자가 나왔다.
그리고 아래로 펼쳐진 지문.
<천력 96년 9월 일정을 정해주세요. (13/36)>
▶ 가르치기(New, 신규)
▷ 임무 받기
▷ 무사 수행
▷ 주변을 돌아다닌다.
처음 보는 게 선택창에 생겼다.
가르치기라니.
자신이 누굴 가르친다는 말인가?
설휘는 호기심이 끌려 첫 번째, 가르치기를 선택해보았다.
▶ 사령대 조장들을 가르치기(가능)
▷ 사령대 조장들과 임무수행(불가)
‘사령대 조장?’
기억이 난다.
예전 곤마가 자신에게 사령대장으로 임명하겠다는 얘길 했었다.
당시에는 조직에 적응할 시간, 자격을 갖춘 뒤에 임명하겠다고 했었는데…….
바로 그날이 오늘인가?
<‘사령대 조장들 가르치기’를 선택하셨습니다.>
설휘는 한번 선택해보았다.
그러자 눈앞이 하얗게 변하며, 예전에 만났던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은영단주 흑구와 대화를 나눕니다.>
[오? 벌써 이날이 왔는가?]
마치, 공간이동이 된 듯한 기분이다.
흑구는 집무실에 앉은 채로 자신을 반기며 대화를 걸어왔다.
[네가 은영단의 사령대 교육과정을 이수했다고 들었다. 그 많은 양을 불과 1년 만에 끝냈다니, 듣고서도 믿기지 않는군. 정말이지 넷째 제자님이 보는 눈은 탁월하다고 생각이 드는구나.]
설휘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너는 모든 자격을 갖추었으니, 예전에 말했던 대로 오늘부로 내 너를 사령대장으로 임명하겠다. 조장들을 잘 이끌 수 있도록.]
이후, 그는 진지하게 자신을 바라보며 주의를 시키듯 말했다.
[참고로, 사령대원들은 모두 곤마에게 선택받은 뛰어난 자들이다. 그런 그들을 휘어잡는 역할도 네 몫이지. 통제할 수 없다면 대장직을 내려놓아야겠지?]
그 말을 끝으로 점점 눈앞이 흐릿해졌다.
다시금 본래 있던 방 안으로 돌아가는가 싶었는데, 새로운 지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시간을 기록하시겠습니까? 승낙/거부]
저장하란 얘기다.
평소에는 뜨지 않는 이 문구다.
그런데도 나타날 때면, 그간의 경험상 필시 위험한 일이 벌어진다는 징조이기도 했다.
‘한번 볼까?’
설휘는 승낙한 후, 저장할 수 있는 목록을 눈여겨봤다.
■ 천력 95년, 제 2장-1. 곤마가 제시하는 세 가지의 삶
□ 천력 95년, 제 3장-1. [핵심무사 성공] 폭풍 성장기(Bonus Story) 3년
□ 천력 95년, 제 3장-8. [핵심무사 성공] 폭풍성장기(Bonus Story) 1년 차.
‘두 번째.’
저 지점이 제일 유리해보인다.
폭풍 성장기 3년.
처음 일정이란 게 생겨났을 시점에 저장했던 곳이었다.
사실 지금 시점을 꼭 저장해야 할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선택하려는 건, 시간을 기록했을 때 어떤 설명이 나오는지 보고 싶었다.
[기록했습니다.]
□ 천력 95년, 제 2장-1. 곤마가 제시하는 세 가지의 삶
■ 천력 96년, 제 4장-1. [핵심무사 성공] 폭풍 성장기(Bonus Story) 2년 차.
□ 천력 95년, 제 3장-8. [핵심무사 성공] 폭풍성장기(Bonus Story) 1년 차.
‘그냥 2년차라 적혀있군.’
싱거운 내용을 본 탓인지 설휘는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렇게 저장되고 끝날 줄 알았던, 눈앞에 또다시 문구가 떴다.
그런데 이번엔.
이전과 완전히 다른 형태의 문구였다.
<‘에피소드’를 보시겠습니까? 승낙/거부>
‘에피소드?’
설휘는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저 듣는 것뿐이니 거부할 이유는 없었기에 승낙했다.
이후. 어둠이 생기더니, 다시금 환하게 변했다.
그리고 눈에 투영된 광경은 그들.
[Part 1. 사령대 조장들]
‘Part 1’이라는 큼지막한 문자가 눈앞에 나타났다가 천천히 사라졌고.
“다들 들었어? 사령대장으로 선출된 자가 이곳에 온다는 거?”
이름 모를 사람들의 수군대는 대화가, 들리기 시작했다.
뒤이어 점점 밝아진 시야 사이로, 그들의 인상착의가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