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Part 2. 사적대장의 등장(2)
짜증이 난다.
한 번 곤경에 빠트렸으면 그걸로 됐지, 이 녀석은 다시 한번 이 망할 선택지를 강요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농락하려고 작정하고 만든 듯한 선택창이었다.
<아래 보기에서 고르시오.>
▶ (´▽`)ノ(가능)
▷ ˘◡˘(가능)
▷ 입맞춤(가능)
▷ /-//--(불가)
▷ /=/!!##(절대 불가)
‘나보고 어떡하라고!’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지만, 어차피 통하지 않을 거다.
그리고 조금 뒤에는 제멋대로 시간제한을 걸겠지.
‘이번엔 잘 골라야 한다.’
마음을 다잡았지만, 지문을 보니 막막함이 가득했다.
▶ (´▽`)ノ(가능)
새로운 문구다. 이전에는 ‘----’였는데, 지금은 괴상한 모양이었다.
▷ ˘◡˘(가능)
▷ 입맞춤(가능)
또 새로운 문구다.
포옹이 없어졌지만, 입맞춤은 여전히 나타났다.
그 아래는 뭐 선택하려 해도 고를 수가 없었으니 신경 쓸 건 아니고.
‘첫 번째냐, 두 번째냐.’
▶ (´▽`)ノ(가능)
▷ ˘◡˘(가능)
선택은 두 가지다.
그런데 분명 하나는 함정일 것이다.
하지만 이걸 보고서 어떻게 제대로 판단한단 말인가.
‘젠장!’
설휘는 눈이 번쩍 뜨였다.
5…… 4……
멈춰 있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골라야 했다.
둘 중 어떤 거라도.
‘그래. 저 기이한 문양을 자세히 보면.’
왠지 모르게 사람의 얼굴 같기도 보인다. 오른손을 든 모양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제발…… 이번엔!’
설휘는 그렇게 첫 번째를 골랐다.
<‘(´▽`)ノ’를 선택했습니다.>
눈앞에서 생명력이 피어났다.
정적의 시간이 아닌, 현실의 시간이 선택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웃는다!’
소령이 갑자기 미소 짓자, 그녀를 바라보던 설휘의 표정도 점차 밝아졌다.
이번엔 제대로 골랐다는 느낌이 머리를 확 스친 것이다.
“정말로…….”
점차 환해지는 소령을 보며 설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말하거……컥!”
쫘악!
또다시 뺨을 맞은 설휘의 고개가 돌아갔다.
이번엔 힘이 실렸는지, 하마터면 가면이 벗겨질 뻔했다.
“그놈의 변태적 취항은 달리진 게 없네요.”
‘벼, 변태……?’
당황하며 바라보는 설휘의 눈앞에는 선택에 대한 결괏값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소령의 호감도가 99↓ 하락했습니다.>
<여인 소령의 호감도가 ‘호기심’에서 ‘혐오’로 변경되었습니다.>
뭐가 뭔지 보고도 믿기 힘든 결과.
자신과 소령과의 관계가 미친 듯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소령의 호감도>
(기존) 5%[호기심] ->(변경 후) -94%[혐오]
“다시는 저와 마주치지 말길 바랄게요.”
그 말을 끝으로 소령은 뒤돌아섰다.
파파파팟.
얼마나 자신이 싫은 것인지 경공술까지 펼쳐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다.
“와…….”
설휘는 어이가 없었다.
꼬여버린 상황보다도, 그녀의 입에서 나온 변태라는 말은 정말이지 충격적이었다.
“와…….”
그래서 그런지 입에서는 헛말만 새어 나올 뿐이었다.
* * *
거처로 돌아온 설휘는 가면을 벗었다.
꽤 오랫동안 쓰고 있어서인지 얼굴은 땀으로 후끈했다.
“이젠 이건 필요 없어졌네.”
가면을 썼던 이유는 소령 때문이었다.
그녀와의 첫 만남 때 생각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조금 나은 환경. 조금 나은 실력을 쌓아 조우하고 싶다고.
하지만 그 희망은 끝난듯싶었다.
호감도가 불편함을 넘어 최악으로 치닫고 있지 않은가.
“고작 그런 이유 때문일까…….”
설휘는 한쪽 자리에 앉으며 생각했다.
눈앞에 뜨는 이 존재는 항상 자신을 시험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내주는 어이없는 상황과 놀라운 기연들이 복잡하게 맞물려있다.
만약 가면을 착용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고작 소령과의 관계 때문은 아닐 것이다.
“현무관 앞에서 시간이 멈춘 이유도.”
있을 것이다.
단순히 소령과 만남이 아닌 자신의 생각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저장하시겠습니까?>
설휘가 침상에 누우니 문구가 자연스럽게 떴다. 자려고 한 게 아니라, 삶을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꽤 많은 날을 달려온 터라, 한 번 해두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 천력 95년, 제 2장-1. 곤마가 제시하는 세 가지의 삶
■ 천력 96년, 제 4장-1. [핵심무사 성공] 폭풍 성장기(Bonus Story) 2년 차.
□ 천력 95년, 제 3장-8. [핵심무사 성공] 폭풍성장기(Bonus Story) 1년 차.
또 다른 이유는, 저장했을 때 어떤 내용이 적혀 있을까 궁금한 것도 있었다.
<여기에 덮어쓰시겠습니까?>
설휘는 두 번째를 선택했고, 승낙했고.
□ 천력 95년, 제 2장-1. 곤마가 제시하는 세 가지의 삶
■ 천력 96년, 제 4장-4. Part 2, 사적대장의 등장
□ 천력 95년, 제 3장-8. [핵심무사 성공] 폭풍성장기(Bonus Story) 1년 차.
곧장 저장한 내용에 시선이 갔다.
‘사적대장의 등장이라…….’
이전에도 나왔던 사적대장의 등장이란 문구.
여기 시간의 기록에도 쓰이는 걸 보면, 결국 조만간 자신은 그와 조우한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그 지점은 언제일까?
미래를 알 수 없지만, 설휘는 이번엔 왠지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인가?’
한 달 일정을 마치면 늘 거처에서 일과가 끝이 났었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달랐다.
거처가 아닌, 현무관 주변에서 시간이 멈췄기 때문이다.
물론 소령과 만남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사박.
때마침 들리는 작은 인기척.
순간적으로 설휘의 고개가 문 쪽으로 움직였다.
아니라 다를까.
예상 그대로였다.
[사적대장이 설휘님과 만나길 원합니다. 응하시겠습니까? 승낙/거부]
그가 자신을 만나러 이곳에 직접 온 것이다.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 같은데…….’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마냥 우연히 들르지는 않았을 터.
아마도 몇 번의 확인을 거친 뒤, 나름의 확신을 하고 여기에 왔을 것이다.
물론 그쪽에서 먼저 사령대 조장을 공격했으니 명분이 이쪽에 있겠지만, 자기 수하 역시 죽었으니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을 터.
다들 은영단 소속이기에 무턱대고 싸움을 걸진 않겠지만, 그래도 그와 만남이 꺼려지는 게 사실이었다.
‘가만, 거부할 수도 있나?’
설휘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쳤겠지만, 지금은 유독 ‘승낙/거부’에 눈길이 갔다.
이렇게 된 거.
설휘는 승낙 옆에 있던 거부를 선택했다.
<만남을 거부하셨습니다. 어디에 숨으시겠습니까?>
‘뭐라고? 숨으라고?’
고개가 갸웃해졌다.
거부했음에도 계속 뜨는 문구.
그리고 자신의 눈앞에 다시 선택의 항목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 침대 아래
▷ 책상 밑
▷ 목함
▷ 옷장
‘이거 참.’
설휘는 난감했다.
만나면 만나는 거고, 안 만나면 안 만나는 거지, 어디에 숨을지 선택하라고 하다니.
거기다 두 번째 지문에 책상 밑은 뭔가.
여긴 구조상 책상 밑에 숨어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에겐 매우 잘 보이는 구조다.
‘굳이 골라야 한다면…….’
설휘의 시선이 맨 아래로 향했다.
옷장.
마침 옷장 안에는 아무것도 없이 텅텅 비어 있다.
바닥에 눕거나, 몸을 접다시피 해야 하는 목함이 아닌, 편한 자세로 숨어있는 공간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선택을 해야 한다면 옷장만 한 게 없었다.
<옷장을 선택하셨습니다.>
선택하자마자 설휘의 주위가 어둡게 변했다.
공간이동을 한 것처럼 순식간에 옷장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뭐, 상황을 피하기만 하면 되는 거니…….’
설휘는 편하게 마음먹기로 하고 기다렸다.
밖에서 뭐라고 몇 마디 들려왔지만, 설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뒤, 그가 돌아갔으리라 추정되는 그때.
드르륵.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냥 갈 줄 알았던 비군 녀석이 방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몇 걸음 걷는 소리가 들렸고.
“나오시지요.”
<옷장 안에 바보처럼 숨어있던 설휘 님이 발각되셨습니다.>
‘아씨!’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반사적으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럴 거면 왜 숨으라고 한 거냐고.
목함 안에 숨었어야 하나라는 생각으로 이어질 때쯤 또 다른 문구에 설휘는 헛웃음이 나왔다.
<가면을 쓰시겠습니까?>
이쯤 되면 가면을 쓰게 하는 이유도 있을 것 같았으니까.
* * *
“큼.”
난감했다.
옷장에서 주섬주섬 걸어 나올 때는 정말이지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앉으시지요.”
설휘는 자리에 안내했다.
감히 자신의 방에 허락도 없이 들어온 것을 맹렬히 꾸짖고 싶었지만.
비군 [사적대장]
체력 550만/550만
내공 420만/420만
전투력
637만(+격노 12%)
상대의 전투력을 본 뒤, 그런 사소한 문제는 입에 올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이미 문 앞에서 사적대를 맡은 비군이라고 소개를 했기에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한번 맞춰보시지요. 사령대장님.”
느긋하게 다리를 꼬며 말하는 비군를 보던 설휘의 표정이 굳어졌다.
상대는 스스로 자신의 신분을 밝혔지만, 설휘는 스스로 사령대장이라고 밝힌 적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 자신을 향해 사령대장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니, 마치 너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투로 들린 것이다.
역시나 자신의 존재를 어느 정도 알고 왔다는 것을 뜻했다.
“그리 물으니 두 가지는 알 것 같습니다.”
“……무엇입니까?”
눈썹을 들어 반응해오는 비군.
설휘는 미간을 좁힌 눈으로 말했다.
“우선 내 가면이 남들이 보기에 아주 멋있다는 것을요. 그러지 않고선 여기까지 올 일이 없을 테니까요.”
꿈틀.
상대의 눈이 가늘어진다.
황당함인지 분노인지는 알 수 없어도. 적어도 불편한 기색으로는 읽혔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하지만 상관없었다.
도발했으니, 응대해 줄 뿐.
그가 불편해서 피했을 뿐이지, 이런 상황이 무서웠을 거면 자신의 손으로 사적대 조장을 죽이지도 않았을 테니까.
“나와 친해지고 싶어 한다는 것을요.”
“하. 하하. 하하하하!”
갑자기 비군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설휘는 그 웃음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기다려주었다.
“정말이지…….”
그렇게 한참을 웃던 그가 자신을 노려보았다.
웃음기가 완전히 가신, 약간은 노기가 서린 눈으로.
“재미있는 분이군요.”
“그런 소리를 종종 듣곤 합니다.”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좀 전과는 달리 팽배해진 분위기를 설휘는 느꼈다.
이렇게 그를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따갑게 느껴지니 말이다.
“사실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침묵이 길어질 때쯤, 다행히 비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최근에 꽤 아끼던 조장 하나 녀석이 죽임을 당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사건을 조사해보던 중 사령대장의 수하 하나가 연관이 있더군요.”
설휘는 곰곰이 듣고 있었다.
“거기다 그 수하와 관련된 누군가 나서서 죽였다는 사실까지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찾아왔습니다. 혹시 아시는 게 있는가 하고요.”
‘간을 보고 있군.’
자신이 사적대 조장을 죽이고 난 뒤, 나타났던 사적대 놈들의 대화를 기억한다.
이놈은 모두 다 알고 와서 묻는 거다.
“그전에 한번 물어보고 싶군요.”
설휘는 담담히 말을 꺼냈다.
오히려 이런 경우, 상대하기는 쉽다.
“말씀하시지요.”
“혹시 그자가 가면을 썼습니까?”
상대가 혼자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정보.
혼자만 알고 있기에 자신의 패를 전부 보이지 않을 것이다.
“글쎄요…….”
“썼을 겁니다.”
“……?”
그걸 역이용하면 된다.
왜냐하면, 그가 혼자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정보가.
자신의 발목을 잡을 테니까.
“나의 사령대뿐만 아니라 우리 은영단을, 분열시키려는 놈들이 있거든요.”
이런 식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