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K-밀리터리 룩(2)
수백 년이나 된 듯한, 곧고 거대하게 뻗은 당나무.
울창한 나뭇잎 사이로, 누군가 나뭇가지를 밟고 그곳에 서 있었다.
그는 새찬 바람이 불어오는 와중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았다.
각진 얼굴에 매우 다부진 체격을 가진 이.
눈을 감은 채, 고요하게 수련 중이던 사령대 2조장 적송이었다.
휘이이잉.
바람이 잦아질 때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던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큰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뱀처럼 작은 눈은 어딘지 모르게 슬픈 감정이 느껴졌다.
투욱.
그가 삼 장 높이에 뻗어있던 나뭇가지를 밟고 지면으로 내려왔을 때였다.
당나무 옆에서 설휘의 시야가 트였고, 자연스럽게 적송이 말을 걸어왔다.
“언제쯤 오셨습니까?”
“뭐, 방금.”
설휘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막상 이렇게 만나기는 했는데, 무엇을 말할지,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간 호감도를 많이 쌓았지만, 이렇게 단둘이 직접 대면한 건 처음이었으니까.
“정말 놀랍습니다. 저는 기척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자신에게 말을 거는 적송은 호감도에 나온 것처럼 매우 우호적이었다.
처음엔 사령조장 중 나이가 가장 많은 탓에 친해지기 힘든 성격일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렇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니 분위기가 편해졌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대장님께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뭔가?”
적송의 질문에 설휘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는 그다지 강하시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만…… 어떻게 그토록 빠르게 강해진 겁니까?”
“그게…….”
설휘는 잠시 고민했다.
죽어가는 와중에 눈앞에 글자가 나타나서, 그 글자대로 따라가다 보니 강해졌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또 설명한다고 믿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냥.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오더군.”
그래서 대충 둘러댔다.
그러자, 적송은 오히려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이다.
“과연, 함부로 말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긴 하지요. 알겠습니다. 제가 괜한 걸 물었습니다.”
“……어?”
“그럼 살펴 들어가시길. 실례하겠습니다.”
휙.
적송이 불편한 얼굴로 몸을 돌리자, 설휘는 뒤늦게 아차 싶었다.
그래서 그를 다시금 불렀는데.
‘어?!’
눈앞에 문자가 자연스럽게 생성됐다.
<적송의 질문, ‘강해진 이유’에 대한 답변을 아래에서 고르세요.>
▷ 그저, 운이 좋았다고 할까.
지문을 본 설휘는 처음으로 편안하다는 기분을 느꼈다.
이제껏 아슬아슬한 상황, 혹은 승과 패가 나뉘는 선택지가 주류였다.
그런데 이 지문은 절체절명의 상황도, 그리고 한쪽 선택에 운명이 바뀌는 그런 선택도 아니었다.
더욱이 시간의 제약도 없었다.
그래서.
그래서 더 진지하게 접근했다.
적송과의 관계에서 나온 이 선택지는, 적어도 그와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음. 일단 이것으로…….’
고민하던 설휘의 시선이 처음, 간절함으로 향했다.
<‘간절함이었어.’를 선택하셨습니다.>
“간절함 말입니까?”
급히 뒤돌아서며 묻는 적송.
반색한 그의 얼굴 때문인지 설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망설여졌다.
“뭐, 일단은 말이지.”
그리고 머릿속에 대충 떠오르는 생각들을 맞추기 시작했다.
“본교로 들어온 뒤 매일같이 생각했네. 주변을 보고, 뭔가 강해질 게 없을까 하고. 아마도 그런 간절함이 있었던 것 같군.”
“…….”
“우린 윗사람들 지시 하나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삶이지 않나. 그것도 내 목숨만이 아니지. 부하. 동료. 내가 받는 명령 하나에 여러 목숨이 죽을 수도 있으니까.”
설휘는 급히 적송의 눈을 살폈다. 원하던 대답이 되었을까 하고.
곰곰이 듣던 적송은 고개를 조금씩 끄덕이던 것 같더니, 대답 말미쯤에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그의 태도와 비슷한 반응이 나왔다.
“그건 본교 사람이라면 다들 가지고 있는 마음가짐이 아닙니까?”
부정적인 답.
그리고 다시 뜨는 지문.
<적송의 질문, ‘강해진 이유’에 대한 답변을 아래에서 고르세요.>
▷ 그저, 운이 좋았다고 할까.
설휘는 이번엔 두 번째를 선택했다.
저 중에는 답이 있을 거라고.
<‘노력과 배짱이었지.’를 선택하셨습니다.>
“노력과…… 배짱이요?”
“진인사대천명이란 말이 있지.”
사람이 할 바를 다한 후에, 하늘이 이루어주기를 기다린다라는 의미.
어찌 보면 참 속 편한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거꾸로, 이 말보다 더 현실적인 말이 없었다.
“해결만 바라보고 있으면, 하염없이 아득하기만 할 뿐이네. 그래서 하나씩, 하나씩.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보았네. 비록 작은 티끌이라도, 그런 티끌 같은 것들이 모이면 어느 순간 산처럼 쌓이게 되더군.”
이번엔 적송은 그 말이 마음에 드는지 수긍하며 말했다.
“대장은 그게 노력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럼 배짱이란 것은 뭡니까?”
“뭐. 대단할 것 있나. 이래도 안 되면 죽는 거지. 이렇게 생각했다네.”
“……예?”
적송의 얼굴에 다시 의아한 표정이 떠오르자, 설휘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좀 무책임하지만, 사실 결과는 알 수 없지 않나. 노력한다고 해서 항상 결과가 좋게 나오지는 않는다는 거. 그래서 그냥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안 되는 것은 마는 거지.”
“하…….”
적송은 맥없이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설휘와 시선을 맞추며 대답했다.
“죽으면 죽는 거다. 예전에 저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지요. 소득은 없었지만요.”
“……그랬나?”
적송이 부정적으로 나오자 설휘의 눈앞에 다시금 지문이 나타났다.
<적송의 질문, ‘강해진 이유’에 대한 답변을 아래에서 고르세요.>
▶ 간절함이었어.
▷ 긍정적인 자세랄까?
▷ 그저, 운이 좋았다고 할까.
‘그럼 세 번째로.’
<‘긍정적인 자세랄까?’를 선택하셨습니다.>
“…….”
적송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설휘는 그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내가 말하고 싶은 본질은 이걸세. 아무리 대비를 잘하고 있은들, 실제로 기회가 왔는데 잡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기회…….”
“그래. 기회일세. 하지만 기회가 어디, 지금이 바로 그때다. 라고 알려 주던가? 아닐세. 대개의 기회라는 건, 지나간 후에야 알 수 있지. 지금, 이 순간도. 앞으로도. 위기는 알 수 있지만, 기회는 알 수 없다네. 그러니 자세를 바꾸어야지.”
“그 말은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씀이십니까?”
“대부분은 위기가 닥치고 있는 사이에 슬그머니 머리를 들이밀더군. 내가 본 기회라는 놈은 그랬네. 그러니 어쩌겠나? 마음만이라도 지지 말아야지. 위태위태한 위기가 찾아오면, 그래. 이게 사실은 기회일거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받아들이는 것.”
설휘는 자기가 말하고, 자기 말에 설득되었다. 말하고 보니 정말 그럴싸한 것이다.
무예나 싸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상대가 강력한 절초를 사용할 때, 그 절초를 피해내고 나면, 반대로 엄청난 허점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건, 굳이 선택지가 아니라도 설휘 역시 느끼고 있는 부분이었다.
“이해가 가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강해지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또한, 위기라는 것은 알 수 없을 때도 있지 않습니까?”
“하긴, 그것도 그렇네…….”
설휘는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위기인데, 위기인 줄 모를 때는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지, 그 역시 제대로 대답해주지 못했다.
<적송의 질문, ‘강해진 이유’에 대한 답변을 아래에서 고르세요.>
▶ 간절함이었어.
▷ 노력과 배짱이었지.
▷ 긍정적인 자세랄까?
▷ 그저, 운이 좋았다고 할까.
‘네 번째는 아니다.’
자연스럽게 답은 마지막으로 귀결된 상황이지만, 설휘는 느꼈다.
강해진 이유가 그저 운이 좋았다고 한다는 건, 답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성의 없는 태도도 그렇지만, 애초에 처음에 말했던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왔다’는 대답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럼 답은 없는 건가?’
잠깐동안 눈앞에 뜬 질문에 대한 의문이 이어졌지만, 이내 의심을 거뒀다.
그간, 의미 없는 질문이란 건 없었다.
의아한 선택지는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선택지는, 분명 적송과 자신의 관계. ‘호감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일 터.
가볍게 봐선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럼 답은 뭐지?’
네 가지의 대답 중 세 가지의 부정적 반응과 남은 한 가지의 선택.
그것은 설휘에게 또 다른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혹시 이건 나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아서일지도 몰라.’
그 생각이 든 건, 선택 지문임에도 적송의 반응이 제각기 달랐기 때문이다.
자신의 말을 충분히 들은 뒤,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럼 결국 실패한 세 가지가 답이란 얘기일 텐데…….’
설휘는 결국 선택했던 지문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모두 정답인 선택지.
다만 그에 대한 근거가 명확해야 한다는 단서가 달릴 때 해당하는 말일 터.
▶ 간절함이었어.
▷ 노력과 배짱이었지.
▷ 긍정적인 자세랄까?
세 가지 중 설휘는 고민했다.
무엇을 선택하면 그를 설득시킬 수 있을지.
지문이 아니라, 지문 뒤에 이어질 말이 더 중요한 선택.
그렇게 고민하던 설휘의 선택은.
<‘간절함이었어.’를 선택하셨습니다.>
다시 첫 번째였다.
“간절함 말입니까?”
이전처럼 급히 뒤돌아서며 묻는 적송.
반색한 그의 얼굴을 보며 설휘는 잠시 뜸을 들였다.
잠깐이나마,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고 보니 말인데…… 자네 고향은 어디였나?”
그렇게 입을 연 설휘.
“고향이라……. 별로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만.”
적송은 갑자기 고향이란 말에 잠깐,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설휘는 그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실, 나도 잘 기억이 나지 않네. 오래됐고, 기억하고 싶었던 과거도 아니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머릿속에 떠나지 않는 기억은, 아니 실제처럼 또렷하고 생생히 기억나는 건, 동물들의 괴성과 피비린내네.”
“……?”
자신을 바라보는 적송은 시선이 조금 더 가라앉았다. 무슨 의도로 얘길 하는지 몰라서 그랬을 수도 있고.
좀 더 관심이 생겼을 수도 있고.
“소나 돼지를 도살하면 비명이 귓속을 파고들거든. 동물마다 소리가 다르지만, 그 감정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지. 이상하게도 그 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적응이 되지 않더군.”
결국, 그를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얘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강해지는 방법을 찾는 근거는, 바로 어릴 적 강해지고 싶었던 자신의 욕구에서 출발해야 했다.
“거기다 피나 고기에서 비릿한 냄새가 나는 건 더 고역이었지. 백정 마을은 항상 그 냄새가 배어 있었고. 사실, 피 냄새도 피 냄새지만, 더 지독한 건…….”
“지려버린 대소변 냄새지요.”
“……!”
설휘는 눈을 부릅떴다.
그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곧장 물었다.
“혹, 너도…….”
“그렇습니다. 저 역시 백정이었습니다.”
잠깐 그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적송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뭔가 잃어버린 걸 찾는 것 같은 표정.
또는, 상상하기 힘든 고통을 너도 느꼈냐는 그런 표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죽은 동물의 시취(屍臭)를 기억 못 할 수 없다.
코를 찌르는 독한 냄새. 똥통보다 더 지독하고 야릇한 썩는 냄새로 이어지는 것이다.
“어릴 적에는 참 돌아서기가 무섭게 배가 고프곤 했는데…… 너도 작업장 뒤편에서 고깃조각들 챙겨두었나?”
“그랬지요. 주로 겨울에.”
“그때가 좋았지. 얼어붙은 고기들은 칼로 잘 안 잘려서 도끼로 내리찍었는데…….”
“예. 그러면 조각들이 튀곤 했습니다. 그걸 슬금슬금 녹이면서 씹어 먹었지요. 하하하.”
“기억나지, 기억나. 그래도 사람들은 백정이 좋다고 그랬지. 다들 초근목피로 연명하는데, 백정은 굶지 않는다고. 하하하.”
적송이 갑자기 유쾌하게 웃자, 설휘도 따라 웃었다.
아무리 칼 위에서 나고 죽는 무인이 되었다 해도, 어린 시절의 기억은 미화하기 쉬웠다.
같은 길을 걸어온 사람일수록 더욱더.
“간절했네. 그 마음이 지금까지 이어졌지.”
설휘는 옛 기억에 잠시 입을 닫았다.
즐겁고, 향수를 느낄 만한 얘기를 꺼냈지만, 그로 인해 따라오는 끔찍한 기억들.
고초를 겪고, 수없이 많이 봉변을 당했던 사건들은 굳이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태황각 출신이라면서 왜 무공은 하사받지 못하셨습니까? 듣기로 그곳에 소속 없이 떠돌아다녔다는 얘기가 있어서…….”
다행히 잠깐의 침묵 속에서, 적송이 질문을 해왔다.
“마성을 알아보는 검증에서 불합격이 떴네.”
“……예?!”
적송은 귀를 의심했다.
불합격이라니.
이토록 수준 높은 마기를 다루는 자가, 어떻게 불합격을 받았다는 건가?
그렇다면 지금의 무공은 어떻게 하사받은 건가?
아니, 애초에 그 상태로 이렇게 강해질 수 있는가?
“의아하겠지. 마성(魔性)에 취하지 못한 대부분의 무사는 그냥 잡부 인생을 살아가니까. 그래서 나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네. 강해지기 위해 태황각주 집무실을 뒤지곤 했지.”
“태황각주 집무실을요?”
자살행위다.
아니, 능지처참도 모자라, 끔찍한 죽음을 맞이한다.
다른 곳도 아니고 상관의 집무실을 뒤지는 건, 그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애초에 마성이란 게 그렇다.
정종무공과 달리 마공은 더 강한 자에게 굴복하는 성질을 내포하고 있으니까.
“어차피 죽는 거 한 번 아니겠어? 그러다 운 좋게도 태황각주의 약점을 잡았고, 곤마 님을 만났지.”
“……놀랍군요.”
적송은 진심으로 놀랐다.
목숨을 건 그의 대담함이.
그리고 여기까지 살아온 그의 절실함이.
이자는 간절함 때문에, 정말로 죽으려고 했었다는 걸.
“결국, 대장께서 언급한 간절함은 미친 짓을 말한 거군요.”
“뭐, 그렇게 보면 또 그렇지. 하하.”
설휘도 웃자, 적송도 따라 웃었다.
그랬다.
그는 정말로 미친 짓을 했다.
그런 미친 짓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지금은 그 미친 짓 때문에.
<적송을 설득시켰습니다. 적송의 호감도가 끝까지 상승합니다.>
<호감도>
2조 조장 적송 100/100(↑20) [신뢰]
그를 설득시킬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