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목숨+4 (3)
멈췄던 시간이 흐르자, 설휘는 시야에 생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서릿발처럼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
한 치의 오차 없이, 시뮬레이션이 보여준 방식 그대로 펼쳐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었다.
쉬익.
잠들었던 몸이 깨어나자, 설휘는 곧장 우측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검을 어깨높이만큼 뻗었다.
이미 엄청난 속도로 도약하던 태황각주가 눈에 들어왔지만, 애써 무시했다.
보이는 것에 현혹되는 순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놓칠 것만 같아서.
‘왔다!’
처억.
검 끝에 뭔가 닿았다는 걸 느낀 설휘의 심장이 빨라졌다.
곧장 시뮬레이션이 말했던 일원소마공의 심법, 소원공을 운용했다.
‘크읍!’
일순, 자루를 집고 있던 손을 타고 화온마공의 엄청난 열기가 파고들었지만 설휘는 검자루를 놓지 않았다.
한 치의 동작이라도, 한순간의 예정된 시간만 빗나가도 뒈진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화아아악-!
‘끄윽!’
설휘는 소원공을 통해 태황각주의 열기를 한데 모으자마자 마지막 동작을 펼쳐냈다.
몸을 비틈과 동시에 검을 옆으로 흘려내는 것이다.
시간은 대충 감으로 때려맞췄다.
시뮬레이션이 말한 100분지 4.
정확한 시간적 의미는 모른지만, 대충 숨을 마시는 시간을 열 개로 쪼개고, 거기서 또 반을 쪼갠 시간 정도로 이해한 거다.
‘성공……인가?’
설휘는 몸을 틀지마자 태황각주의 화온마공 일부가 흑비를 향해 날아간다는 느낌은 받았다.
하지만, 그녀가 화를 입는 장면은 보진 못했다.
자신의 목을 태황각주가 더욱 빨리 틀어쥐었기 때문이다.
“이 썩을 놈이!”
콰악.
매섭게 자신을 노려보는 태황각주.
말을 섞지 않아도 그가 상당한 분노로 차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화아아아-
때마침 자신의 가면이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렸다.
태황각주의 손끝에 화온마공의 잔열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너는…….”
가면이 절반 이상 흘러내리자 태황각주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가 찾던 이가 바로 이곳에 있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
“왜…… 당황스럽나?”
설휘는 상대의 손에 턱이 잡힌 와중에서도 시선을 회피하지 않았다.
뒈지더라도, 할 말은 꼭 해야 했다.
그래야 그가 일 말이라도 그가 열 받은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을 테니.
“그런데 이거 어쩌나. 이게 현실이다. 본인의 가신이 죽어가는 와중에도 넌 그저 구경만 했던 현실.”
설휘는 태황각주의 손아귀에 잡힌 채로 그를 노려보며 비죽거렸다.
“그러고 보면 실상 수하를 버린 자는 내가 아니라……”
“…….”
“너 아닐까?”
“이노오오옴!”
화온마공이 극성으로 퍼지자 설휘의 얼굴뿐 아니라, 온몸에 열기가 파고들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State Summary, 상태 요약]
설휘 [은영단 사령대장]
……
……
Coin 6 [여섯 번의 기회]
상세정보란에 변경된 숫자.
바로 Coin 2에서 Coin 6으로 변경됨을 알려왔기 때문이다.
그 말은 시뮬레이션이 성공했다는 뜻이다.
* * *
“으아아악!”
설휘는 눈뜨자마자 괴성부터 질렀다.
온몸을 파고드는 화온마공의 열기는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끔찍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하, 하아.”
시간을 되돌리고 나서도 이 정도 고통을 상기한 건 처음이었다.
태황각주의 손에 죽기 직전, 그 시간이 너무도 길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 번은…… 한 번은 꼭 그놈이 치욕에 몸서리치는 면상을 봐야 하는데…….”
설휘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태황각주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도 꼿꼿한 신념을 보였던 적송의 태도를.
지금껏 쌓은 조장들의 호감도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선택은 이것이었다.
<다섯 번의 기회가 남았습니다.>
<‘천력 97년, 제4장-5. 조장들의 호감도 채우기’를 불러옵니다.>
“어떻게 한 방 먹이지? 2천만을 자랑하는 전투력을…….”
그간 기연과 함께 나름 착실하게 수련을 했던 설휘였기에 더 막막했다.
앞으로 몇 번의 사선을 넘기면 분명 기회가 생기리라 믿고 있지만, 그럼에도 지금 전투력의 격차는 너무도 심했다.
“아직 그 녀석과 싸울 땐 아냐. 목숨을 쉽게 버려선 안 돼.”
막상 다시 과거로 돌아오자, 설휘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흑비를 죽였으니 절반의 복수는 했다.
거기다 태황각주의 분노에 찬 얼굴을 보니 처음 느꼈던 감정은 어느 정도 잦아든 상태였다.
그럼 이제부터 뭘 해야 하는가?
적송을 구하는 게 우선이 아닌가?
“적송을 빼돌리는 게 먼저다.”
설휘는 적송과 대화했던 그때를 떠올려보았다.
태황각주 등장은 분명 신뢰도를 다 쌓은 이후다.
그렇다면 태황각주가 나타나기 전, 적송을 다른 장소로 이동시킬 수 있다면?
그럼 이전과 같은 일이 발생하지도 않을 것이고, 적송이 자신에 대한 호감도 역시 최고치로 올릴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태황각주의 면상에 주먹을 갈기지 않으면 억울해서 잠도 안 올 것 같다는 거.
‘잠깐, 내 검은?!’
대충 생각을 정리하던 그때.
순간적으로 태황각주와 싸울 때 소지하고 있던 검이 생각났다.
예오후검.
무공에 따라서 파괴력을 늘려주는 그 보검이.
“이런!”
설휘는 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침실 옆에 비치해놓았던, 신병이기의 검은 없었다.
당시 싸움으로 검을 소실해 버린 것이다.
“아, 도구함에 넣지 못했으니.”
설휘는 크게 절망했다.
곤마에게 받은 신병이기의 보검.
특히나 모든 능력을 올려주는 그만한 검을 구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가만, 잃어버렸던 장소에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그 검은 자신이 가로챈 게 아니다.
정식으로 곤마에게 받았고, 태황각주와 싸우기 직전까지 자신이 들고 있었던 검이다.
만약, 인과가 틀어진 게 아니라면.
그 검은 자신이 죽었던, 적송이 있던 그 장소에 있지 않을까?
‘그래, 어차피 적송을 보러 갈 테니, 거기서 확인해 보자.’
설휘는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잠자리를 들었다.
오늘따라 시간이 너무 가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 * *
아침이 되었다.
기다렸다는 듯 일정을 알려달라는 표시가 나왔다.
<천력 97년 3월 일정을 정해주세요. (19/36)>
머뭇거릴 필요 없었다.
▶ 사령대 조장들의 쉼터
자신은 이전과 똑같은 걸 골랐다.
새하얀 빛과 함께 눈앞에 빛이 투영되었고, 예상대로 모든 게 그대로였다.
당나무 앞에서 시야가 넓어졌고.
“언제쯤 오셨습니까?”
이전처럼 적송이 말을 걸어왔다.
“뭐, 방금.”
설휘는 그때처럼 똑같이 대답했다.
다만, 그를 바라보는 감정은 이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죽는 순간에도 자신을 향한 충성심.
수하에게 그 정도의 충정을 받아본 건, 그로서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정말 놀랍습니다. 전, 기척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여기까지도 이전과 같았다.
그런데.
“오해하지 말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거…… 대장님 검이 아닙니까?”
“……?”
설휘가 흠칫하며 그를 바라보자, 적송이 검 하나를 내밀었다.
놀랍게도 그건.
‘예오후검!’
설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했지만, 정말로 이게 여기 있을 줄이야.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이 주변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자신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
태황각주에 의해 자신은 이곳에서 죽었고, 그 검은 버려진 상황.
그런데 여기 덩그러니 놓여 있다는 건.
자신이 소지했던 물건들은, 인과관계가 틀어지지 않는 이상 죽었던 그 자리에 놓인다는 걸 뜻했다.
“안 그래도 이걸 찾으러 왔네.”
“아, 예…….”
적송은 의아한 눈치였지만, 뭐 상관없었다.
얘기한다고 해도 알아들을 리 없을 테고.
처억.
설휘는 급히 예오후검을 받아들었다.
‘이걸 도구함에 넣을까.’
잠깐 고민했지만, 이내 다시 허리춤에 찼다.
어차피 다시 돌아온 이유는 태황각주와 싸움을 하려는 목적이 아니었으니까.
‘혹시나 피치 못할 싸움으로 잃어버린다면, 다시 찾으면 된다.’
설휘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대장님께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적송과의 대화를 걸어왔다.
확실히, 자신이 잃어버린 검만 제외하면, 예전과 그대로였다.
* * *
<적송을 설득시켰습니다. 적송의 호감도가 끝까지 상승합니다.>
신뢰가 다 차오르고, 눈앞에 뜨는 상태창들.
[호감도가 신뢰 단계에 올랐습니다.]
[앞으로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호감도가 줄어들지 않습니다.]
[적송에게 직접 임무를 내릴 수 있게 됩니다.]
여기까진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같았다.
다만, 다른 것도 있었는데.
<적송을 통해 더는 알아낼 것이 없습니다.>
뻣뻣하게 굳은 자세로 서 있던 적송에게 다가가니 이런 글귀가 나왔다.
아마도, 이전에 설명을 다 해줬기 때문이리라.
“적명.”
지금부터 중요했다.
앞으로의 판단이 미래를 가를 것이다.
“……예, 대장.”
다가가지 않고, 부르니 적송이 고개를 들어 대답을 해왔다.
“너는 지금 어서 교육장으로 돌아가라.”
“교육장은 왜……. 아직 배울 게 남았습니까?”
“다른 이유가 있다. 더는 묻지 말고 일단은 오늘 거기로 가 있거라.”
“……알겠습니다.”
약간은 이해 안 되는 표정을 보였지만, 적송은 설휘의 지시를 거부하지 않았다.
호감도가 신뢰로 바뀌면서 설휘의 명령을 어기지 않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적송은 이곳을 벗어났고, 설휘 역시 재빨리 다른 곳으로 몸을 숨겼다.
그렇게 조금 시간이 흘렀을까.
당나무가 꽤 멀다고 느껴질 거리에 서 있던 설휘의 눈에 한 노인이 포착됐다.
거리는 있었지만, 설휘는 그게 태황각주란 걸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바보들.’
그들은 잠시간 그곳에 서성였다.
그러고는 이내 왔던 길을 되돌아갔고, 자연스레 글귀가 눈앞에 떠올랐다.
[어디를 둘러보시겠습니까?]
▶ 천마 넷째 제자의 가택
▷ 현무관 후원
적송과의 관계가 완수된 것일까?
또다시 뜨는 두 개의 지문에, 설휘는 이번에 어디로 갈지 잠시 고민했다.
천마 넷째 제자의 가택, 이곳보다는 현무관 후원이 더 눈이 쏠린다.
왠지 여기서 또 다른 사건이 터질 것 같았으니.
<‘현무관 후원’을 선택하셨습니다.>
선택하자, 이런 문구가 떴고.
[하루, 그리고 반나절의 시간이 지납니다.]
시간의 흐름이 동했다는 글귀와 함께 새하얀 빛이 눈앞에 투영되었다.
* * *
제일 처음 설휘의 시야에 들어온 건, 달빛 주위를 감싸는 어둠이었다.
그리고 서서히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하더니.
파파팟.
무언가 빠르게 이동하고 있는 인물이 보였다.
그리고 점점, 그 인물의 인상착의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용진.’
긴 머리만 보고도 곧장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용진은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파파팟.
용진은 전력으로 현무관을 벗어나고 있었다.
동작이 날랬고 기민했는데, 경공술을 쓸 정도로 상당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쯤, 설휘는 용진을 뒤쫓아가는 인물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곧 쫓던 이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흑비?!’
어둠과 복장 때문에 인상착의는 보지 못했음에도 설휘는 확신했다.
손목에 언뜻 드러난 자검(自劍).
그리고 허리춤에 찬 기형검과 체격을 보면 필시 자신이 알던 그녀가 틀림없었다.
‘왜지? 왜 용진을?’
의문은 곧장 따라왔다.
갑자기 이들이 왜 사령대 조장인 용진을 공격하려 드는 걸까.
‘설마.’
설휘의 시선이 이번엔 용진이 달려가는 방향 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저편에서 시선이 고정되었다.
은영단 외부.
놀랍게도 경계선이라 불리는 외담 끝에 태황각주가 서 있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선택지문이 눈앞에 뜬 것이다.
<개입하시겠습니까?>
▶ 돕는다.
▷ 지켜본다.
설휘는 이번엔 기다리지 않았다.
용진의 호감도를 올릴 수 있는 기회.
그리고 저들에게 또다시 엿을 먹일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야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