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시뮬레이션 Lv2 (1)
“허억…… 허억…….”
용진은 부상을 입은 채 객가(客家) 사이의 작은 길로 이동하고 있었다.
돌출된 처마와 튀어나온 영벽. 건물들이 교차하는 지점에 심어진 분묘 등.
팟. 팟. 팟.
주위 지형지물을 이용해 민첩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자신을 쫓는 녀석과의 거리는 쉽게 벌어지지 않았다.
“하악. 하아.”
숨 가쁘게 움직이던 용진의 머릿속은 조금 전 상황이 떠오르고 있었다.
자신은 현무관 후원을 걷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낯선 인기척을 느꼈고, 곧장 그곳에서 공격이 날아왔다.
“누구냐!”
하지만 상대는 대답도 없이, 너무도 쉽게 자신의 방어를 부수고 들어왔다.
단 몇 수를 상대했을 뿐인데, 용진은 온몸에 검상을 입었다.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흉험하기 짝이 없는 살초를 피해낸 뒤, 용진은 전력을 다해서 곧장 자리를 뜬 것이다.
파파파팟.
녀석은 자신을 계속 쫓아왔다.
자신은 곤마의 직속 부대인 은영단 소속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주저 없이 살수를 쓴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길로 계속 가면…….’
무작정 도망치던 용진은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좁혀지지도, 멀어지지도 않고 자신을 따라오는 상대. 그자가 마치 짐승을 길목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아닌가.
쉬이익!
간헐적으로 날아오는 검기를 피하다 보니, 자신의 위치는 점점 은영단 내부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힘들어진 것이다.
‘제기랄. 하필 현무관 후원에 있어서…….’
그는 하필 많은 곳 중에서 이곳으로 향한 자신의 발을 탓했다.
교육이 없는 날이면, 이 주변에는 은영단원들이 자리해 있지 않을 것이고.
지금 다시 현무관을 향하려 해도, 상대의 매서운 검기가 자신을 노릴 것은 자명한 일.
어떻게든 우선 목숨을 부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길. 빽빽한 건물 때문에 눈이 어지럽군.’
주변이 가옥이 많았지만 은영단원이 기거하는 곳은 없었다.
이곳에 위치한 가옥들은 말 그대로 손님을 맞이하거나, 훈련 용도로 쓰이는 공간이었다.
쉬익!
또 한 번, 살벌한 검기가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위력이 아니었다.
‘언제든 나를 죽일 수 있는 강자다. 그런데 왜? 무슨 목적으로?’
위기에 몰린 탓일까, 용진의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져 갔다. 헌데.
훅.
“……!”
뒤에서 갑자기 인기척이 나타났다.
기겁한 용진이 비명을 지르려고 한순간, 자신의 아혈이 눌러지고 동시에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쉿. 사령대장이다.”
* * *
“흠……!”
시야가 트이자마자, 설휘는 은영단 내부 중 가장 높은 건물 꼭대기에 위치해 서 있었다.
이곳에서 보니 용진이 어디로 이동하는지, 쫓아오는 흑비가 어디쯤 있는지도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가 내린 곳은 마침, 용진이 이동하는 동선과도 일치하는 최적의 위치였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설휘는 걱정부터 앞섰다.
막상 끼어들려고 하니 어떤 식으로 도움을 줘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흑비를 제압하기도 쉽지 않다.’
녀석과는 한 번 싸워봐서 안다.
정상적으로 싸워서는 이길 수 없다는 걸.
기습을 통해 승리를 잡는다고 하여도, 그걸로 끝나는 문제가 아닐 수도 있었다.
은영단 외부에 있던 태황각주 역시 개입할 수 있다.
‘흑비를 다른 곳으로 유인하는 게 그나마 나은 방법 같은데…….’
지금 상황에선 그 방법이 최선으로 보인다.
문제는 어떻게 그녀의 눈을 속이냐는 것.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때마침 반쯤 문 열린 가옥 하나가 보였다.
‘제길, 온다.’
더 둘러보려고 하던 설휘의 시선이 아래로 움직였다.
꽤 가까운 거리까지 용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타탓. 파파팟. 팟.
설휘는 예상지점인 골목으로 이동했고. 때를 기다렸다.
적어도 지금.
그에게 가장 빠르게 접근할 방법이 자신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절호의 기회! 용진의 빈틈을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대응하시겠습니까?]
▶ 공격한다.
▷ 무공을 쓴다.
▷ 도구함을 사용한다.
▷ 상대의 지척까지 다가간다.
그리고 그것은 곧 눈앞에 나타났다.
시간의 멈춤과 함께 턴제가 발동되자, 설휘는 아래 목록 중 네 번째.
▶ 상대의 지척까지 다가간다.
이것을 선택했다.
원래는 기습적 공격에 쓰이는 방법이지만, 지금은 이게 가장 빠르게 접근할 방법이었다.
<‘상대의 지척까지 다가간다.’를 선택하셨습니다.[동][서][남][북] 중 어느 위치로 이동할까요?>
설휘는 용진의 등 뒤, 남쪽으로 위치를 정했다.
<남쪽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동하자마자 용진의 혈도를 짚었고.
거의 시간차 없이 급히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으읍……?!”
“쉿. 사령대장이다.”
당황한 눈길.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는 얼굴. 하지만 저항은 줄어들었다. 약간의 안도감도 떠올라 있었다.
‘됐어. 이제 이동해야 해.’
용진을 확보했으니 이제 흑비의 눈을 피해야 했다. 설휘는 그를 들쳐메고 처음 위치했던, 건물 꼭대기에서 보았던 가옥으로 달려갔다.
‘제발…… 제발…….’
전력으로 이동하는 중간에 설휘는 속으로 빌었다.
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자신이 미리 생각해놓은 계획을 실행할 수 있을 것이다.
파파파파파팟.
그는 모든 내공을 짜내 경공술을 펼쳤고.
투욱. 툭.
“후아.”
다행히 가옥으로 들어간 설휘는 급히 문을 닫았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쿨럭쿨럭.
창문 사이로 어스름한 빛이 보이는 가운데, 격하게 몰아쉰 숨이, 기침이 되어 토해져 나왔다.
툭. 툭.
“대장. 어떻게 여길…….”
쉬잇.
혈도를 풀자마자, 용진이 당황한 듯 말했다. 하지만 설휘가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자, 쥐죽은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설명할 시간 없다. 저 녀석. 곧 우릴 찾을 거다.”
설휘는 냉정하게 말했다.
용진의 뒤에 나타난 순간, 운 좋게도 건물과 건물들의 그림자 사이에 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보통이 아니었다. 아마 종적을 놓친 지점부터, 주변의 모든 가옥을 샅샅이 다 뒤져볼 테니까.
“저게 누군지 아십니까?”
“흑비. 태황각주의 비밀 호위다.”
“태황각주라고요? 그럼…….”
“그래.”
삭. 화다닥.
설휘는 대답과 함께 가면을 벗었다. 그리고 입고 있던 K-밀리터리 옷도 함께 벗었다.
“대장, 지금 뭐하는……?”
“옷을 바꿔입자. 내가 목표가 될 거다.”
“예? 그러지 말고 싸우는 게 어떻습니까?”
“그러다 태황각주가 따라오면? 그땐 우리 둘 다 뒈지는 거야.”
“아!”
그제야 상황을 인식한 용진이 다급히 말했다.
“헌데, 태황각주께서 우리에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나도 모르지. 어서 벗어.”
설휘는 대충 짐작이 갔지만, 적당히 둘러댔다.
태황각주는 적송을 만나자 자신의 거취를 물었고, 그래서 적송을 빼내고 나자, 이번엔 용진을 노렸다.
이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다.
놈의 목표는 아마도 설휘 자신.
사령대 조장들을 노리는 이유란, 이들을 취조하거나 겁박해, 곤마 몰래 자신의 거처를 캐묻기 위함이다.
‘아마도 여지도의 존재를 캐물으려는 거겠지.’
설휘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 벗었습니다.”
“그래? 그럼 이건 네가 입고.”
설휘는 용진이 벗어 준 옷을 입고 있었다.
용진 역시 주섬주섬 입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이게 통할까요? 대장과 저는 체격도 그렇고 얼굴도 다른데…….”
“그건 걱정마라. 무사수행 때 익힌 기술이 있으니까.”
“무사수행요?”
“그런 게 있어.”
설휘는 용진의 옷을 다 입고 난 뒤, 곧장 무공을 펼쳤다.
그러자 몸이 꿈틀꿈틀하더니 점점 체격이 작아졌고.
뚜둑뚜둑.
얼굴의 형상도 변했다.
다행히도 본래 머리카락이 길었기에, 용진의 모습과 영락없이 흡사했다.
“정말 신기합니다.”
자신의 변화에 용진의 눈에 감탄이 어렸다.
이 정도로 완벽하게 자신의 모습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한 얼굴이었다.
운이 좋은 거다.
무사수행을 통해, 그리고 의뢰를 통해서 얻은 능력을 여기서 발휘하게 될 줄이야.
“너도 제법 어울리는군.”
특이한 복장을 한 용진을 보며 설휘는 피식 웃었다.
“대장. 죄송합니다. 제가 힘이 약해서…….”
“그런 말 마라. 난 너희들의 대장이다.”
설휘는 한마디를 하고는 천천히 뒤돌아섰다.
시간이 없었다. 추적해오는 흑비의 눈을 속이기 위해선, 한시바삐 나가서 그녀를 유인해야 했다.
<용진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용진의 호감도가 끝까지 상승합니다.>
<호감도>
1조 조장 용진 100/100(↑20) [신뢰]
‘역시. 이것이었군.’
예상한 대로 였다.
기다렸다는 듯, 용진의 호감도가 변화했다.
[호감도가 신뢰 단계에 올랐습니다.]
[앞으로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호감도가 줄어들지 않습니다.]
[용진에게 직접 임무를 내릴 수 있게 됩니다.]
헌데, 그렇게 가려는데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게 있었다.
<용진에게 아래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 현무관 후원을 거닐었던 이유에 대해서
▷ 전투방식, 시뮬레이션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습니다.
‘저건 뭐지?’
상황이 상황이라도 저건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업그레이드라니?
설휘는 두 번째를 선택해보았다.
<‘전투방식, 시뮬레이션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습니다.’를 선택하셨습니다.>
처음엔 대답이 없었다.
그저 눈앞에 뜨는 글귀뿐.
<시뮬레이션 Lv2로 업그레이드 됩니다.>
‘뭐지?’
설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용진의 말.
- 시뮬레이션 Lv2는 활용하기에 따라서 더욱 효과적인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 시뮬레이션을 사용하고 원하는 바를 말하면, 그에 따라 판단합니다.
- 단순히 적과 싸우는 것만이 아니라, 도망치기, 특정 부위를 공격하기 등. 상황에 따른 응용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건 또!’
뭔지 모르지만, 설휘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확실히 이건 달랐다.
상황에 따라서 변화한다니. 최적의 길을 알려준다니.
왠지 모르게 용진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럼 가마.”
“옙.”
용진이 대답했다.
그러고는 이전에 정보를 다 내놓고 난 적송처럼 갑자기 움직임이 없어졌다.
설휘는 더는 끌지 않고 문을 열었다.
* * *
파파팟.
설휘가 가옥 지붕으로 올라섰다.
그리고 그때쯤. 저편에서 기민하게 움직이는 뭔가가 있었다.
‘날 발견했어.’
설휘는 급히 몸을 날렸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다.
‘확실히 빠르다.’
상대의 경공술은 굉장한 수준이었다.
이 정도 속도라면 용진이 당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분명히 전력으로 도망치고 있지만, 거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태황각주 쪽과 멀어져서 그런 건가.’
설휘는 결국 나름의 한 수를 꺼내 들었다.
‘한번 해볼까?’
전투방식 <시뮬레이션 Lv2>
<설휘 님의 무공 개수를 분석합니다.>
<설휘 님의 무공초식을 분석합니다.>
……
<분석 완료>
처음은 이전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이후의 답은 달랐다.
<어떤 시뮬레이션을 돌려드릴까요?>
갑자기 물어오는 질문.
그리고 어떤 선택창도 없었다.
‘선택이 없어? 말로 하는 건가.’
설휘는 생각하다 대답했다.
“흑비에게서 도망칠 수 있는 경로를 알려줘.”
이게 통할까 싶었다.
<분석 중……◇>
그런데 정말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앞에 뜨는 글자.
<찾았습니다.>
▶ 사적대장 위치 1.3km, 선으로 표시해드립니다.
눈앞에 세상이 격자무늬로 펼쳐지고.
그중 길을 따라, 붉은 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사적대장의 거처가 아니라, 현무관과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시뮬레이션이 어둠에 가려져 있는 그의 위치까지 찾아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