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육성 시물레이션-77화 (78/379)

77화. Part 3 태황각주의 속내 (2)

잠깐의 정적.

그 정적이 누군가에겐 피를 말리는 전운(戰雲)처럼 흘러갔다.

태황각주는 고개를 숙인 채로 앉아 있었다.

곤마가 그의 얼굴에 서신을 집어던진 일이 마치 없었던 것처럼, 그는 탁자만 내려보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왜요? 열 받습니까?”

“…….”

하지만 태황각주는 실수를 했다.

짧은 찰나, 순간적으로 미미하게 좁혀진 그의 미간을 곤마가 보고 만 것이다.

“미친 척하고 한번 뒤집어엎을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무공도 그리 강하지 않은 녀석이니까 싸워볼 만하지 않나? 하고 말이죠. ”

“…….”

태황각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의 침묵은 무언의 긍정.

곤마는 피식 웃으며, 조금 더 날이 선 얼굴로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괜찮습니다. 솔직히 말해보세요. 체구는 비실비실하고, 위치도 그저 그런 서열. 싸우면 당신이 이길 것 같은데…… 그냥 한 번 때리면 뒈질 것 같은 놈이 왜 이리 깝치는 거냐고. 솔직히 지금이 기회이지 않냐고, 그렇게 생각하고 계신 것 아니겠습니까?”

“…….”

태황각주는 여전히 침묵했다.

공표된 전투력상, 곤마는 천마제자 중 최약체다.

무공의 수준 역시 별 볼 일 없다. 천살성이란 특징 외에는.

당장 가진 세력도, 혹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도.

다른 제자들에 비해 곤마는 현저하게 떨어졌다.

그래서 태황각주는 더욱 고민이 되었다.

‘분명히 아무것도 아닌 놈인데…….’

겉으로 드러난 힘만 본다면 곤마는 만만한 상대다. 자신이 도전할 수 있을 만큼.

하지만 정말 그게 다라면, 대체 무슨 배짱으로 이렇게나 몰아붙일 수 있는 것인가.

스윽.

태황각주의 시선이 다시 한번 한곳으로 고정되었다.

반쯤 구겨진 채 엉망으로 글이 번져 있는 양피지 서신.

거기에는 자신이 뒤집어쓴 전언의 글귀가 보이는 듯했다.

태황각주는 잠시, 자신이 가진 모든 정보를 검토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고선 입을 열었다.

“……어찌 제 주제에 감히 넷째 제자님을 범하려 들겠습니까. 이 늙은이는 그저, 맡은 바 소임을 다할 뿐입니다.”

“진심입니까?”

“진심입니다.”

스윽.

태황각주는 고개를 숙이며 두 손을 말아 쥐었다.

“이런 자리에서 이 늙은이의 좁은 소견을 얘기하는 건 적절히 않은 것 같습니다. 애초에 하늘같이 높으신 천마께서, 마땅히 생각하시는 것이 있을 터. 그분께 인정받은 제자님들의 일입니다. 감히 제가 뭐라고 함부로 입을 놀리겠습니까.”

꾸벅. 스륵.

태황각주는 고개를 숙여 보이곤 조심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옆으로 한 발짝 물러서서, 다시금 예를 표했다.

“곤마 님께서 하신 답은, 제가 잘 정리해서 살마께 전하겠습니다. 그럼.”

스윽. 스윽.

앞서와는 천지 차이로, 몸가짐을 조심조심하며 물러서는 태황각주.

그런 그가 문 앞까지 물러서, 막 몸을 돌리려 할 때.

“그래. 잃어버린 물건은 찾으셨습니까?”

“……!”

멈칫.

곤마의 질문에 태황각주의 안색이 변했다.

“그것 때문에 저를 만나려고 한 게 아니었습니까? 대체 이 새끼가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싶어서.”

“…….”

태황각주는 침묵했다. 그는 잠시 머릿속으로 말을 고른 후, 다시 예를 표했다.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잘 몰라야지요. 당신이 이 말의 뜻을 아는 순간, 제일 먼저 제거될 테니까.”

“……!”

잠깐 정적이 일었다.

분위기는 표변했다. 태황각주는 잔뜩 긴장한 얼굴이 되어 곤마를 보고 있었고, 곤마는 이제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태황각주. 제가 왜 그 증거를 본교에 올리지 않았는지 아십니까?”

“…….”

“칼은 휘두르는 것보다 검집에 있을 때가 가장 위력을 발휘하는 법이니까요. 그래서입니다.”

“곤마님. 저는…….”

태황각주가 입을 달싹이는 순간, 곤마의 폭언이 날아왔다.

“너, 돌대가리야?”

“……!”

노골적인 욕설에 순간적으로 눈이 커진 태황각주.

아무리 상대가 천마의 제자라 하더라도, 그는 절대 이런 막말을 들을 위치가 아니었다.

다른 각의 각주도 아니고, 가장 높다고 하는 태황각주는 분명히 대우받는 신분이었다.

하지만 곤마는 그를 노려보며 더욱 살벌한 경고를 내뱉었다.

“행동거지 조심하라고. 죽기 싫으면.”

“…….”

그 말에 조금 침중한 낯빛으로 고개를 숙인 태황각주.

그는 난처한, 그리고 살짝 겁을 먹은 듯한 얼굴로 다시금 뒤로 물러섰다.

달칵. 스르륵.

태황각주는 문을 닫고 곤마의 처소에서 물러 나왔다. 그리고 그렇게 몇 발. 충분히 거리를 만든 후.

“크…….”

싸아악!

죽이고 있던 성질을 드러냈다. 조금 전의 굴복하는 듯한 얼굴과는 완전히 달리, 지금의 태황각주의 얼굴에는 매서운 살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 * *

“어?”

스르륵.

태황각주와 곤마의 모습이 사라졌다. 새하얀 빛이 번져 눈을 부시게 했다.

그리고 다시 잠잠해진 시야. 주위를 둘러보니 작은 방 안이었다.

낯선 천장. 낯선 벽. 낯선 침상까지.

‘여긴 어디지?’

당연히 본인의 거처로 이동된 줄 알았던 설휘는 잠깐 당황했다.

그러다 주변을 돌아보고 조금은 안심하게 되었다.

부글부글.

쌉싸름한 냄새를 잔뜩 풍기며 끓고 있는 약탕.

그리고 반짝이며 잔뜩 놓여 있는 침구와 거무튀튀하게 얼룩이 번진 붕대까지.

의료실. 혹은 치료실 같은 곳이었다. 몸을 살펴보니, 출혈이 심했던 부위를 꽁꽁 감싼 붕대와 정체 모를 약물이 덕지덕지 발라진 것이 눈에 들어온다.

드르륵.

“엇. 대장. 깨어나셨습니까?”

그러고 있자니 곧, 익숙한 얼굴 두 명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요림과 소령. 그의 수하인 두 사람이었다.

“이게 어찌 된 건가?”

설휘는 연유를 물었다.

“아. 갑자기 쓰러지셔서 이곳으로 이동했습니다. 꽤 중한 상처를 입으셨지만, 의원의 말로는 치료는 잘 되었다고 하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쓰러졌다고? 내가?’

설휘는 잠시 생각을 해 보았다.

곤마와 태황각주를 보는 시점으로 바뀌었을 때.

아마 그때 자신은 이미 정신을 잃은 듯했다.

다행히 조장들이 나서서 치료까지 해줬다니 마음이 놓이고 고마웠다.

‘이것 때문인가?’

설휘는 그들 위에 떠 있는 글귀에 눈이 갔다.

[요림의 호감도가 신뢰 단계에 올랐습니다.]

<호감도>

1조 조장 요림 100(↑20)/100 [신뢰]

[소령의 호감도가 매우 우호적으로 변경되었습니다.]

<호감도>

4조 조장 소령 60(↑29)/100 [우호적]

요림의 호감도는 최대로 올랐다. 다만 소령은 조금 모자랐다.

하긴, 몇 번의 실수로 인해 호감도가 바닥까지 내려갔으니, 단번에 신뢰로 올라가긴 무리가 있을 터였다.

“……너희들은 좀 괜찮으냐?”

설휘는 그제야 이들의 행색을 살폈다.

분명 자신뿐만 아니라 이들 역시 크게 다치지 않았는가.

“괜찮습니다. 저희는 다행히 치명적인 상처가 아니라서…….”

“뭐. 대장이 조금만 늦었으면, 우리도 여기 같이 쓰러져 있었겠지요.”

요림과 소령의 말에 설휘는 피식 웃었다.

이 상황에서 이런 농담이라니?

“아, 그리고.”

요림이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면은 벗기지 않았습니다. 그건 제 목숨을 걸고 증명합니다.”

“아…….”

설휘는 손을 들어 얼굴 위에 뭔가 덧씌워진 걸 매만졌다.

요즘 가면을 쓰는 일이 잦아서 그런가? 자신이 뭔가 얼굴에 쓰고 있다는 것을 가끔 잊고는 했다.

“뭐, 가면을 쓴 건 특별한 이유가 아니다. 어차피 곧 너희들도 알게 될 거고.”

“그렇습니까?”

“그래. 그리고 요림?”

“예. 대장.”

“잠시 자리 좀 비켜주겠나?”

“……?”

약간 의아한 시선을 바라보는 요림. 그러다 이내, 살짝 짓궂은 얼굴로 예를 표하며 밖을 나갔다.

드륵. 탁.

요림이 나가고 나자, 혼자 남은 소령이 물었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있지.”

스륵.

설휘는 말과 함께 천천히 가면을 풀었다.

약간 당황한 소령의 얼굴이 가면 사이로 보였고, 완전히 시야가 멀끔해졌다. 오랜만에 공기에 노출된 얼굴이 시원하고 개운했다.

“다, 당신은……!”

순간, 소령이 말을 잇지 못했다.

흔들리는 눈동자. 경악한 감정이 온 얼굴에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원래 그런 거다. 혹시나 하는 짐작과 달리, 직접 확인하는 기분은 다른 법.

설휘는 그녀의 반응에 담담히 대답했다.

“그래. 아마 예전에 짐작했겠지. 내가 맞다. 그때, 천일관 지하에서 잡무를 보던, 바보짓만 하던 놈.”

“어떻게…… 어떻게 이곳에…….”

“그냥 운이 좋았다. 태황각주의 약점을 알게 되었고, 그걸 통해 곤마 님의 눈에 들었지. 덕분에 무공도 배웠다. 그러다 보니 여기까지 들어온 거지.”

“…….”

소령의 눈빛은 여전히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럴 만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까마득한 하급 무사였던 이가, 갑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한 조직의 임무를 내리는 수장이 되었다.

말이 쉽지 이건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일까.

“……무슨 계교를 부리시는 겁니까?”

소령의 눈에는 경계가 가득했다. 아마도 혼란스런 감정이 긍정보다 부정 쪽에 쏠린 듯했다.

그저 우연이라고 하기엔, 지금의 결과가 너무도 어이없는 것이기에.

“계교라. 그런 거였다면, 난 여기 없었겠지.”

하지만 설휘 역시 알고 있었다.

우연한 결과보다 더 믿기 힘든 것들은.

현재 곤마가 처한, 그리고 우리들이 처한 상황이 아니던가.

“내가 속셈이 있었다면, 가장 힘없는 넷째 제자의 선택을 받을 일도 없을 것이고, 그의 세력 중에서도 가장 약한 사령대에 더더욱 들어오지도 않았을 거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면 이야기는 다르죠.”

“그 그럴 만한 이유가 뭔지 말해봐.”

“…….”

소령은 대답하지 못했다.

당연히 생각나지 않을 거다.

이미 충분히 강해질 조건을 갖추고서, 이곳에 굳이 들어올 이유 같은 건.

“사실 네 말이 맞다.”

그 순간, 열심히 생각을 돌려보던 소령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설휘가 그녀의 말을 긍정한 것이다.

“네 말대로 여기에 온 이유가 있다.”

설휘는 담담하게 소령을 바라보았다.

이제껏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얘기.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

허나 왠지 그녀에게는, 이 순간에는 해도 될 것 같았다. 아주 약간의.

그가 가지게 된 감정의, 주인이 그녀였으니까.

“그게 뭔가요?”

“강해지려고.”

“……?”

“누군가 그러더군. 강해지라고. 강해져서 이 지옥에서 같이 탈출하자고.”

“당신 무슨…….”

소령이 버벅거렸다.

방금 그 얘긴, 과거 그에게 자신이 했던 말이 아닌가.

그런 그녀의 시선을 설휘는 피하지 않았다.

그때 천일관에서 그녀에게 느낀 감정과는 조금은 달랐지만.

결국, 진심. 그 마음만은 똑같았다.

“어떻게든 버텨보자. 그래서 이 지옥에서 너와 우리 조장들. 다 함께 살아남아 보자고.”

“…….”

설휘의 말에도 소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표정만 봐선 알기 힘들었다.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 어떤 생각인지.

그래도 설휘는 스스로 성공이라 생각했다. 굳이 그녀가 직접 말하지 않아도.

[소령의 호감도가 매우 우호적으로 변경되었습니다.]

<호감도>

4조 조장 소령 80(↑20)/100 [매우 우호적]

“후우…… 솔직히 전부 믿기 힘드네요. 뭔가 음험한, 다른 목적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뭐. 그럴 수 있지.”

소령의 말에 설휘는 끄덕였다. 겉으로는.

‘아. 젠장. 아직 모자라나?’

딴에는 이 순간에 가면을 벗으면서, 이제까지 밝힐 수 없었던 자신을 밝히면서, 그걸로 호감도를 최대까지 찍을 생각이었는데.

그것만으로는 좀 부족했던 걸까. 호감도는 제법 올랐지만, 소령의 대답은 여전히 부정적이다.

‘더 뭐 없나? 따로 어떤 임무를 통해서 올려야 하는 건가?’

설휘는 아쉬움을 접었다. 뭐. 신뢰라는 게 그렇게 쉽게 쌓이는 게 아니니까, 당장 급하게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같이 지내면서 쌓아 보자고.

“……대장. 왜 굳이 여기 온 건가요? 당신 능력이면 더 좋은, 더 안전한 곳으로 갈 수 있을 텐데?”

“응?”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자신에게 물었다.

뭐지? 이미 알아들을 만하게 충분히 말했는데? 그런데 왜 또 같은 물음을 하는 거지?

그렇게 설휘가 생각한 순간.

<자, 여기서 그녀에게 해줄 말은?>

갑자기.

한동안 없었던 선택창이 눈앞에 뜬 것이다.

‘이 뭔…….’

▶ 내가 너 좋아하면 안 되냐? 내가 너 좋아할 수도 있잖아!

▷ 야, 됐고. 술 사와!

▷ (´▽`)ノ(가능)

그리고 뒤이어진 지문들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여기서 대체 무슨 선택을 하라는 말인가.

‘아니야. 답이 있을 것이다. 이번만큼은!’

설휘는 이를 악물었다.

이제껏 계속해서 실패만 해 왔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이번엔 정말 믿고 싶었다.

호감도 100으로 올릴 방법이 반드시 이 중에 있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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