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후기지수 (3)
이건 대체 어찌 된 걸까.
태황각 출신 무사가 어떻게 은영단의 자금줄을 대는 지부에 와있는 것인가?
혹시 태황각주가 시킨 것일까?
곤마에게 망신을 당하고 난 뒤, 복수를 위해?
그리고 금만중은 이 사실을 알고서도 그들과 손을 잡은 것일까?
그렇다면 그건 배신이나 다름없다.
‘침착하자. 여기서 감정을 드러내선 안 돼.’
설휘는 심적으로 갈등이 일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알고 있다. 아직은 기다려야 할 때란 걸.
움직이는 것은 모든 게 사실로 드러난 뒤에도 늦지 않다.
아직 상대가 마각을 드러내지 않았을 때, 이럴 때일수록 느긋하게 움직여야 한다.
이제껏 설휘가 수없이 죽어가며 알게 된 교훈이었다.
“자리에 앉으시지요.”
설휘는 그의 안내를 받으며 한쪽 의자에 앉았다.
푹.
얼굴을 마주하자 자연스럽게 금만중에게 눈이 갔다.
뒤룩뒤룩 찐 살집이, 가히 항아리를 연상케 하는 몸뚱아리.
큰 바위 같은 얼굴과 그에 비해 짧은 팔다리가, 가뜩이나 뚱뚱한 체구를 더욱 비대하게 보이게 했다.
“허. 허허…… 잘 방문하셨소. 안 그래도 저희 쪽에서도 요청을 드리려던 참이었소이다.”
금만중은 맞은편 자리에 앉아서 손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요청이라면?”
“그게 말이오. 얘기를 들으셨겠지만, 요 몇 달간 은영단에 상납해야 할 금액을 제때 맞추지 못했소이다. 인근의 문파 하나가 계속 압박을 해와서 말이오.”
“창룡문주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렇소이다.”
금만중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 다시 한번 이마를 닦았다.
쌔액. 쌕.
이후,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게 이년 전쯤 되었나……? 창룡문주와는 근방에 빈 도장을 하나 인수할 때 한 번 만났지요. 헌데, 어찌 된 일인지 요 몇 년 사이 눈에 띄게 세가 불어났소이다.”
“흠.”
“아마도 무예를 잘 가르친다는 소문 때문일 거요. 대갓집의 자제 몇이 크게 실력이 올랐거든? 그 뒤로 입소문이 나서 근처의 왈패들부터 인근의 무가니 상단이니 하는 곳까지, 무공을 쓸 사람들이 몰려들었소. 근래에는 먼 곳에서 온 무림인들까지 북적거리오.”
“사람이 많이 늘었다라. 그래서 창룡문주가 돈이 많이 필요해진 거요?”
“그게 가장 큰 이유 같다고 생각하오. 아무래도 입이 많아지니, 보호비 명목으로 주변 치안을 관리하던 숫자가 늘어났고, 지역도 넓어지니 우리 쪽과 관련된 지분이 탐나기 시작했을 거요. 우리가 관리하는 상점, 고리업, 임대 그리고 가게의 보호세까지…….”
사천 성도는 치안이 매우 발달한 곳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취약한 지점이 많았다.
이럴 경우 보통은 인근 주변의 작은 검문이나 도문이 주변을 맡는 법인데, 창룡문이 월등히 치고 올라간 상황이니 그들이 저들까지 관리하에 두는 모양새다.
더군다나 백양천은 이문에 밝은 편이라고 했다.
그냥 세를 늘리는 것뿐만 아니라, 실력 있는 문도들에겐 일을 시키며 월봉을 챙겨주고, 그런 것이 주변에 보이게 되면서 더욱 세력이 확장된 듯했다.
“대화는 해보았소?”
“당연히 했소. 하지만 이들의 태도를 보아하니 좋게 타협할 수 있는 게 아니었소. 요구하는 액수가 우리가 벌어들이는 돈보다 더 많은데, 이걸 어찌 협상이라 보겠소이까?”
“흐음.”
“게다가 한번 이렇게 물러서면 앞으로 더 많은 걸 요구할 거요. 상계란 금수들의 세상과 같아서, 한번 약하게 보이면 사방에서 죄다 물어뜯으려 하는 법이외다.”
금만중의 말은 그럴듯했다.
은영단의 지부는, 일의 특성상 합법적인 일과 불법적인 일을 겸한다. 그렇기에 정도 문파를 표방하는 곳과 마찰은 불가피했을 터.
더욱이 보호비만 받는 게 아니라, 직접적으로 수익 창출을 지향하는 곳이라면, 알음알음 압박 받는 것이 당연하다.
“해서 이 일 때문에 은영단에 도움을 요청했소만…….”
“뭐라덥니까?”
“은영단 내부 문제로 좀 기다리라는 답변만 받았소.”
‘태황각주 사건 때문이겠군.’
사황대 조장들의 죽음이 떠올랐다.
그것 때문에 은영단 내부는 한동안 난리가 났을 테니까. 이리저리 일이 꼬인 셈이다.
“그래, 마냥 한없이 기다릴 수 없어서, 본교에 재차 요청했는데…… 마침 저희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나선 곳이 있었소이다.”
“그게 어디요?”
“홍마원. 상황이 급박해 우선 호위무사부터 배정을 받았소. 일단. 음. 나도 목숨부터 부지하고 싶어서 말이오.”
설휘는 시선을 그의 뒤쪽으로 돌렸다.
과묵하게 선 채로 입을 닫고 있는 무사.
얼굴이 희고 단정한 것이, 근방에서 흔히 보기 힘든 귀공자풍의 사내로, 냉담한 표정과 허리춤에 찬 화려한 보검이 대비되어 꽤 인상적으로 보였다.
“그쪽은 홍마원 내 직책이 뭐요?”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 오각 출신이라 따로 직책은 없다고 들었습니다.”
금만중이 대신 재빠르게 대답했다.
“흠.”
설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홍마원 내에 5각이 있고, 그중 하나가 태황각이었으니.
대신 이자가 태황각주와 어떤 연이 있는지, 어떤 명령을 받고 왔는지 그게 더 중요했다.
“너무 괘념치 마시오. 섭섭지 않은 금액만 떼어주면, 이번 일이 끝나고 돌아간다고 하였으니.”
“…….”
설휘는 살짝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뭔가 위화감이 든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곧 얼굴을 풀고,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음. 이런 경우에 가장 좋은 해결은…….”
그 순간 설휘의 눈에 글귀가 나타났다.
[‘금만중’에게 임무를 받았습니다.]
○ 임무 : 창룡문주, 백양천 제거. 단, 목격자는 없어야 한다.
성공시 : 중원 활동시 필요한 자금 조달, 원하는 장비 제조(중상품).
보상물품 : 봉인해제술서 1개, 비밀교서 지도 일부(1/4).
“문제가 있으면 제거한다. 그게 지금으로선 가장 확실한 방법이오.”
금만중의 말에 설휘가 미간을 좁혔다.
“그러다 되레 역풍을 맞을 가능성도 있지 않소? 화산파 출신이라며?”
“그건 괜찮소이다. 아는 사람 한 명을 섭외해 두었으니까. 늘 그렇듯 정파 중에도 세속에 밝은 사람이 있지 않소? 허허허.”
금만중이 엄지와 검지를 모아 동전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설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돈으로 매수한다. 그러니 문제가 없다?
분명 어느 곳이든 구린 놈, 욕심 많은 놈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누굴 바보로 보나.’
지금 상황에서, 딱 맞게, 누구 하나 죽이면 다 끝난다는,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금만중은 분명 뭔가 속셈이 있다.
다만, 지금으로서는 그의 의도가 어떤 건지 전혀 알 수 없기에 적당히 동의하는 척하는 것이다.
그때였다.
<아래의 보기 중에 고르세요.>
▶ 지금 당장 움직이겠다. (임무 승낙)
▷ 다른 방법을 고민해보겠다. (임무 보류)
▷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임무 거부)
‘갈림길이다!’
설휘의 눈이 커졌다.
임무 형태로 나타난 선택지문.
늘 그렇듯 이런 상황에서 뜬 선택지문은, 평소보다 훨씬 더 중요한 선택으로 작용했다.
‘임무 거부? 임무를 받지 않는 길이 있단 말인가?’
설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지금 나온 임무 승낙의 선택이 위험하다는 걸.
이제껏 경험한 바로는, 이런 지문들은 바로 정답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한 선택이 다른 선택에 영향을 미치거나, 혹은 반드시 어떤 상황을 거쳐야 비로소 올바른 답을 고를 수 있는.
그런 복잡하기 짝이 없는 외통수의 경우를 숱하게 경험했다.
‘이런, 씨발…….’
문제는 지금으로선 방법이 없다는 거다.
구리고 함정투성이인 걸 알지만, 그래도 직접 경험하지 않고선 다른 선택에서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지 알 수 없다.
때문에 결국.
설휘는 임무를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 움직이겠다.’를 선택하셨습니다.>
“좋소이다! 역시 말이 통하는 분이시군!”
표정이 밝아진 금만중은 기다렸다는 듯 서신 한 장을 꺼냈다.
펄럭.
그곳엔 백양천의 용모파기와 함께.
생각지도 못한 글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가 한 주에 식사하는 시간. 용변을 보는 시간. 누굴 만나는 시간. 그의 호위하는 무사들 등을 전부 기록해 두었소이다. 좋은 결과를 얻으신 후, 다시 이리로 들러 주십시오.”
“…….”
바로 암살하기에 필수적인 정보들이었다.
* * *
사흘 후.
해시(亥時). 창룡문주가 간단한 세욕 후 잠자리에 드는 시간.
금만중은 백양천의 암살 시기를 이때로 꼽았다.
그리고 설휘 역시 동의했다.
흔히 세간에서 알고 있기로는, 암살에 가장 용이한 순간은 표적이 잠에 빠진 시간이라고 말한다.
허나 실제로 암살을 수행해 본 이들은 오히려 반대라는 것을 알고 있다.
고수는 잠에 빠져들면서도 온몸의 감각을 깨워 놓는다. 그리고 만물이 잠든 조용한 밤은, 작은 인기척도 크게 일어나는 법.
때문에 금만중은 표적이 잠들기 전, 한 시진 정도 전을 최적기로 꼽았다.
거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는데, 백양천이 잠들기 직전 운기조식을 한다는 내밀한 정보였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그럴듯했다.
특히 무림인이 습격에 반응하기가 가장 어려울 때가, 다름 아닌 운기조식을 할 때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러니 미리 잠복해있다가 금만중을 치는 게 최적의 수이긴 하다.
“대장. 뭐가 그리 고민이십니까?”
날이 어두워진다. 천천히 땅거미가 그려지는 시각. 출정 준비를 앞두고 설휘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에 적송이 물었다.
“후우…….”
눈살을 찌푸리며 얼굴을 굳히고 있는 설휘. 그 모습은 왠지 모를 고민에 빠진 것 같았다.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잠입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텐데요.”
적송은 재차 물었다.
“그게 문제다.”
“예?”
“너무 완벽하니까. 그래서 이질감이 드는 거야.”
툭. 툭.
팔짱을 낀 채 잠시 침묵하던 설휘는 이내 고개를 돌려 적송에게 시선을 맞췄다.
“너무 정확해. 우리가 조사한 것보다 훨씬 더. 마치 시계를 보는 것 같군. 금만중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고 있다니. 이상하지 않나?”
“그거야…… 경쟁자이자 적 아닙니까. 오랜 시간을 들여 살폈다면 알 수도 있지요.”
“그래. 그러니 문제라는 거지.”
“……?”
적송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설휘는 더 말하지 않았다.
괜히 말했다가 수하들의 마음이 흔들려서 실수라도 하게 되면, 그건 정말 걷잡을 수가 없으니까.
지금은 그저, 주어진 임무에만 집중할 뿐.
다만 이것이 걸렸다.
‘백양천이 운기조식하는 시간까지 알 정도라면.’
자신이 아니어도, 그의 호위무사로 있던 상천장이란 놈도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어떤 함정이 있는 것일까.’
직접 움직이지 않으면 알 길이 없었다.
그것이 짜증 났다. 이 빌어먹을 선택지는 경험하지 않으면,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었으니까.
투욱.
설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간이 됐다.
더는 모두 밖에서 대기하고 수하들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가자.”
스슥.
설휘와 수하들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백양천 암살.
교육관주에게 받은 중원의 첫 임무였다.
* * *
창룡문.
백양천이 문주로 있는 무관은 여러모로 수상했다.
이틀 전, 지도만으로 확신할 수 없기에 설휘 일행은 사전 답사를 해보았다.
크고 화려한 건물이 잔뜩 들어선 창룡문.
바깥에서 살피며 설휘는 다시금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일개 무예 도장 따위가 어떻게 이런 규모를 감당할 수 있었던 걸까.’
스윽.
설휘는 후문 쪽 주변을 둘러보았다.
높게 올라선 외벽과 측면에 지어진 망루.
그리고 외벽의 모퉁이에 경비 두 명이 있었다.
큰 문 앞에는 두 명의 문지기가.
전투방식을 턴제로 고정한 뒤에 확인해 보니, 이들의 능력치는 고작 1만 대였다.
처억.
설휘는 소리 없이 손을 들었다.
그 순간.
파파파파파팟.
기다렸다는 듯 등 뒤에서 수하들이 비호처럼 날아들었다.
투욱. 투투툭.
“……!”
“……?!”
그리고 경비들이 뭔가 반응하기도 전에 쓰러졌다.
죽은 건 아니다.
조장들이 삽시간에 이들을 잠재운 것이다.
가뜩이나 수상한 임무에서, 사망자가 발생하면 더 문제가 발생하니, 훈혈을 짚은 것이다.
‘이제 시작이구나.’
까닥까닥. 까닥까닥.
조장들이 수신호를 하고, 그제야 설휘는 움직였다.
계산대로라면 반 각.
그 안에 백양천의 거처까지 숨어들어야 한다.
그래야 미리 자리를 잡고, 표적이 운기조식할 때 급습할 수 있을 테니까.
끼이익.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던 그때.
<침입하시겠습니까?>
눈앞에 갑자기 글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
지금, 이 순간에 왜 이것이 뜬 걸까? 설휘는 꺼림칙한 느낌을 받으며 승낙을 눌렀다.
그러자.
<타임어택! 300초를 드리겠습니다. 제한 시간 안에 백양천의 거처까지 진입하지 못하면, 당신은 목숨을 잃게 됩니다.>
“이게 무슨.”
불길함은 이제 확신이 되었다.
계획된 시간보다 훨씬 더, 선택지문이 요구하는 시간이 촉박했다.
하지만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시작합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