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침입 (1)
창룡문은 삼합원과 사합원이 여러 채 섞여 있는 구조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삼합원이란, 세 채의 건물이 가운데에 중정(中庭, 공터)을 두고 둘러싸는 형식. 사합원은 동서남북의 네 건물이 중정을 둘러싸는 주거형식이다.
주로 사천 지방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건물 형태로, 그 쓰임은 주거, 기거 등 여러 가지다.
창룡문은 특히나, 건물 대부분을 훈련용이나 손님을 받는 용도로도 사용했다.
때문에 이 거대한 도장에는 삼합원과 사합원이 무려 10채나 들어서 있었다.
‘계획대로라면 주거관 3곳을 거쳐야 한다.’
설휘는 사전에 준비한 잠입 경로를 떠올렸다.
방향은 정문이 아닌 후문.
상대적으로 경계인력이 적고, 백양천의 거처가 더 가까워 동선이 짧은 이점이 있다.
또한, 창룡문 외벽의 높이 역시 상대적으로 낮아 침입하는 데 좀 더 수월했다.
‘문제는 순찰로로 움직이는 녀석들인데…….’
용도(甬道). 건물과 건물 사이로 나 있는 통로.
이곳으로 거의 반 각마다 무사들이 순찰을 돈다.
영벽을 거쳐, 건물 쪽으로 이동할 때 제일 먼저 지나가야 하는 곳.
이곳에선 극도로 조심히 움직여야 했다.
야간일수록 더욱 정찰무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주변을 물색할 거고, 작은 소리만 나도 그들에게 발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초소까지.’
주거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높은 망루의 경계도 생각해야 했다.
즉, 주변을 순시하는 자.
그리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자.
이 양쪽 경계를 동시에 뚫어야만 했다.
‘최소…… 한 주거관 당 반 각. 총 일각 반 정도가 필요해.’
백양천의 거처는 삼합원과 사합원이 혼합된 3곳을 지나 4번째에 위치했다.
금만중의 정보가 맞다면 불가능하지는 않다.
경계무사의 인원도 알고 있고, 경계 순번을 교체하는 시간도 알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게 계획대로 흐르지는 않는다.
누군가 조금이라도 딴생각을 하거나, 정보가 맞지 않는다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나름 계획한 것들이.
눈앞에 뜨는 시간으로 인해 완전히 망가졌다.
‘제기랄.’
280…… 278……
설휘는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저 시간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과거 3초의 개념에 비춰볼 때 일각 반이라면 대략 1350초라는 걸.
그래서 머릿속이 복잡했다.
고작 300초. 아니, 280초.
이 촉박한 시간 안에 백양천의 거처까지 무조건 가야 했다.
당연히 이동 중에 들키지도 않아야 했다.
목표는 암살이니까.
스윽.
설휘가 고민하는 사이, 수하들의 움직임이 멎었다.
후문을 통과한 첫 번째 삼합원 건물.
객방이나 정방으로 보이는 자리.
영벽을 넘어선 수하 다섯이 처마에서 몸을 낮춘 채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휙. 휘익.
가장 선두에 선 소령이 손을 들어 수신호를 보내왔다.
그녀는 중정을 돌아다니는 무사들을 파악하는 역할을 맡았다.
‘셋인가…….’
핏!
일순, 설휘의 동공이 푸른색으로 변했다.
야백안.
내공을 끌어올려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감지할 수 있는 무공을 펼친 것이다.
스윽.
설휘는 손을 들고 망루에 올라선 무사들을 주시했다. 저들이 바라보는 시야의 사각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210…… 219……
숫자는 무정하게도 차곡차곡 줄어들었다.
등골이 서늘하고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삭!
설휘가 손을 내렸다.
파파파파팟.
요림, 적송, 용진이 즉각 바닥으로 몸을 날렸다.
툭! 우드득!
소음은 크지 않았다.
수하들은 삽시간에 달려들어, 용도를 걷는 무사들의 목을, 하나하나 꺾어버렸다.
‘빨리 처리해.’
꾸벅.
훈혈은 짚는 등, 딱히 살려야 할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이들은 교대 근무를 마친 자들이다.
늦은 밤에 근무를 마친 이들은, 허한 속을 달래거나 참고 있던 용변을 해결하기 마련.
잠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쉽게 이상을 알아차리기 힘들 터. 그러니 빠르게 처리한다.
수하들은 목을 꺾은 시체들을 가까운 사합원의 빈방에 던져넣었다.
그러는 동안 설휘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사위를 살피고 있었다.
예의, 저쪽 편 초소 경계무사들의 시야를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처억.
조용히 석상처럼 서 있던 설휘는 다시 한번 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한 곳을 가리켰다.
삭. 삭.
스르륵.
수하들은 모두 합을 맞춘 듯, 능숙하게 외벽을 타고, 다른 주거관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정작 앞서나가야 할 설휘의 표정은 심각히 굳어있었다.
‘제길. 이대로는 제시간에 당도하지 못한다.’
150…… 149……
시간을 반이나 소비했다.
아직 남은 주거관은 2채.
지금처럼 조심스레 이동하면, 반도 가지 못해서 시간이 끝나고 말 터.
‘이건, 정상적인 방법으로 절대 도달할 수 없어!’
타닥.
설휘는 벽을 타고 처마 위로 올랐다. 그러자 과연 확인할 수 있었다.
곳곳에서 느껴지는 수많은 인기척을.
외담의 경계, 각 건물의 초소 그리고 이동이 용이한 공간에는 하나같이.
시선이 돌아갔다 돌아왔다 하고 있었다.
‘아무리 빨리 움직인다 해도 발각되고 말 것이다.’
주르륵.
설휘는 진땀을 흘렸다.
저 모든 시선 하나하나가 닿으면 폭발하게 될 도화선이다.
제각각 언제 어떻게 갔다가 돌아올지 모르는, 아차 하는 순간 모든 것을 끝내버릴 죽음의 시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저 시선 모두를 피하고, 위치까지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어…… 조장?”
이름 모를 정방 처마에 매달린 음무기는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뒤에 있어야 할 대장이, 아직 저편에서 외담도 넘지 않고 서 있는 것이다.
‘뭐 하는 거야. 저 양반……. 뭐 좋은 거 보고 있나?’
생각을 들을 수 있었다면, 설휘는 음무기에게 감탄했을 터였다.
사실, 그는 그때부터 다른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전투방식 <시뮬레이션제 Lv2>
<설휘 님의 무공 개수를 분석합니다.>
<설휘 님의 무공초식을 분석합니다.>
……
<분석 완료>
시간 정지가 끝났다.
새롭게 바뀐 시뮬레이션은, 스스로 물어왔고.
<어떤 시뮬레이션을 돌려드릴까요?>
“적들의 눈을 피해 백양천 거처로 가는 최단 시간을 알려줘!”
설휘의 외침과 함께, 시뮬레이션은 곧장 반응했다.
그런데.
<불가! 정보량이 너무 부족합니다. 창룡문이 한눈에 내려다보는 곳으로 이동해, 데이터를 수집하십시오.>
“제기랄.”
할 수 없다.
설휘는 지금 자리에서 제일 가까운 초소로 향했다.
타닥. 타닥.
높이는 5장. 지붕 처마에서 뛰어오르면 닿을 위치다.
다만, 이 아래에서 움직이던 창룡문 무사들도 신경을 써야 했다.
- 남색 지붕 아래에 있는 셋을 제거해.
- 소령만 남고, 모두 내 뒤를 따라와!
멈칫.
복면을 써서 얼굴은 숨겼지만, 수하들의 멈칫거리는 행동에서 약간 당황한 듯한 표정이 그려졌다.
계획과는 다른 설휘의 전음입밀에, 뭔가 문제가 발생했다는 걸 안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 소령은, 누구보다 설휘의 명령에 빨리 착수했다.
처억.
그녀는 비수를 꺼내, 남색 건물 지붕 아래를 빠르게 훑었다.
그리고 순찰조 셋을 발견하자마자,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쇄애액!
즉각 몸을 돌린 후 외벽을 밟아 경계선을 되돌아오며, 걸어가는 순찰조에게 비수를 던진 것이다.
“……!”
“……억!”
세 개의 비수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들의 목을 꿰뚫었다.
파파팟.
그 순간 설휘는 자리를 박차고 지붕을 밟아 몸을 날렸다.
초소까지 거리는 대략 십여 장.
쓰러진 놈들을 넘어서고 달려가는 그때.
또다시 마당을 걷는 순찰조 둘이 보였다.
- 요림!
설휘의 전음입밀에 요림이 즉각 반응했다.
거의 몸이 휘어질 듯 민첩히 움직이던 그는 단숨에 순찰조 둘의 목을 날려버렸다.
파파팟.
그사이 설휘는 거의 초소 근접까지 접근했다.
하지만, 그것은 패착이었다.
초소 주위는 사합원 같은 주거관이 아니다.
초소 아래에서 무려 여덟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 모두 제거해!
일순, 적송, 요림, 음무기가 도약하며 그들을 덮쳤다.
어둠 속인 데다가 급습하는 상황이라 그런지, 수하들의 움직임은 평소보다 더 기민했다.
파파팟.
그 와중에 설휘는 공중을 밟으며 초소 위까지 도달했다.
동시에 시야에 들어오는 순찰조 두 명.
촤아아악!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의 목을 날려버렸다.
“헉. 헉.”
그리고 설휘는 숨도 돌릴 새 없이 시간을 확인했다.
78…… 77……
남은 시간은 절망적이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시간과 눈앞에 자연스럽게 뜨는.
<데이터가 충족되었습니다. 분석 중……◇>
한 줄기의 희망.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서 이 전투방식만을 꺼내고 싶지 않았던 설휘의 간절한 바람이 있었다.
<명(明), 최랑(崔郞), 초명(肖明), 만박노조(萬博老祖) 1만 3천, 5만, 정상, 15만/15만 옥면청삼(玉面靑衫)……>
차아아악.
어둠이 자욱이 내리깔린 건물들.
창룡문 내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수많은 글자가 솟구치듯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찾았습니다!>
결과가 나타났다.
<시뮬레이션 결과 55초 안에, 백양천의 거처에 도달할 수 있는 최단 동선을 보여드립니다.>
<이동 중 마주칠 수밖에 없는 적이 7명 있습니다. 모두 근접전으로 제거해야 합니다.>
<적을 일격에 쓰러트리지 못하면, 예상시간이 늘어납니다.>
적색으로 진하게 표시된 길.
첫 시작은 초소 난간을 밟고 뛰는, 공중 도약이었다.
<따라가세요.>
시작을 알리는 글귀와 함께.
* * *
팟!
설휘는 한 마리의 새처럼 공중을 날았다.
무려 5장 높이에서 펼친 그의 도약은, 지면에서 7장 높이까지 오르며 건물 위로 솟았다.
파앗!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높은 외벽을 밟으며, 다시 한번 도약했다.
시야의 붉은 선이 급격히 아래로 꺾이는 지점.
거기서 두 명의 경계병들을 보았다.
“……어?”
경공술로 사뿐히 내려앉았지만, 무사들은 그 미약한 인기척을 감지했다.
갸웃하고 반대쪽을 보고 있던 무사들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
갑자기 시간의 흐름이 극도로 느려졌다.
“……!”
설휘의 눈에 투영되는 세 개의 환영들.
느릿느릿 극도로 느려진 시간 속에서, 그들은 평소 설휘의 움직임을 흉내 내며 움직였다.
‘모두 다르다!’
제각기 움직임이 다른, 세 개의 환영.
하나는 즉각 두 명에게 득달같이 달려들다가, 갑자기 붉은색 그림자가 되어 사라졌고.
또 하나는 옆으로 숨었다가, 적들의 바로 옆 통로를 통해 기습하는 방식.
마지막 하나는 그들의 시야에 아슬하게 빗나가게, 바로 옆 건물 벽을 밟는 방식이었다.
다만, 의아한 건.
어떻게 죽이는 건지는 방법이 나와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아마도 이것 때문에.
<선택하세요.>
▶ 득달같이 달려든다.
▷ 건물에 숨었다가, 기습한다.
▷ 몸을 틀어 우측 벽을 밟고 나아가 공격을 펼친다.
5……4……
이런 선택지가 나온 것이리라.
빠르게 줄어드는 시간 속에서 설휘는 세 번째를 선택했다.
<‘몸을 틀어 우측 벽을 밟고 나아가 공격을 펼친다.’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이 다시 이전처럼 돌아오는 그때.
파파팟.
설휘는 옆 건물 벽을 밟으며 질주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자리를 박차고 도약했을 때쯤.
“……!”
“……!”
그들의 시야에 걸렸고.
촤악!
한 명의 목은 베었고, 또 한 명에게 검을 휘둘렀다.
캉!
녀석은 막아냈다. 설휘는 거기서 빠르게 오른쪽 어깨로 상대를 밀어내듯 쳐냈고.
퍼억!
“윽!”
상대의 몸의 균형이 무너지자, 즉각 가슴에 검을 꽂아 넣고 입을 막았다.
“우웁…… 욱…….”
파르르.
온몸을 떨던 반응이 점차 줄어들었다. 가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자.
<시간이 5초 늘어났습니다.>
‘제기랄!’
신경이 곤두서는 글귀가 나타났다.
65…… 64……
절대시간은 줄어들고 있는 데 반해, 예상시간은 늘어났다.
<예상시간 60초>
설휘는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앞으로 5명.
최고의 선택으로 그들을 처리해야 백양천의 거처로 당도할 수 있었다.
적이 아니라 시간과의, 목숨을 건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