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건곤일척 (4)
스윽.
숨을 고르고 시선을 돌리자, 주변을 에워싼 창룡문 무사들이 보였다.
힐끗. 힐끗.
움직이지 않았다.
상천장을 베어버리는 모습에 겁을 집어먹은 것인지, 싸우려 드는 자가 없었다.
그들의 눈에 그려진 자신의 모습이 대충 짐작은 갔다.
‘아마도 흉신악살이나 다름없겠지.’
뭐,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었다.
[전투력이 올랐습니다.]
[이벤트 보상. 혈수마공을 얻었습니다.]
목표하던 것을 얻었으니까.
스르르륵.
자연스럽게 눈앞에 혈수마공의 운행로(運行路)가 투영되었다.
단전을 따라 온몸을 타고 순환하는 기운들.
마치 강하(江河)와 같은 십이경맥 사이사이로, 중요 혈 자리가 그어지고, 중요 혈도에서 진기를 극양으로 만드는 운공법이 눈앞에 그려졌다.
설휘는 한순간에, 혈수마공의 진의를 깨우쳐 버렸다.
[혈수마공을 익혔습니다.]
‘굉장한 무공이다.’
직접 펼쳐보지 않아도 설휘는 알 수 있었다.
극양의 기운을 부릴 수 있다면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걸.
극음의 기운과 마찬가지로,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능력보다 더 강한 적까지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잠시나마 희열에 싸인 설휘는 죽은 상천장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이번엔 AI설휘가 선택을 묻지 않았어.’
평소였다면 ‘기절’과 ‘죽인다’ 두 가지 선택지가 나와야 했다.
그런데 이번엔 AI설휘가 상천장을 단번에 죽여버렸다.
짐작하기로는, 이벤트가 영향을 준 듯했다.
혈수마공과 전투력을 올릴 수 있는 기회를 굳이 고민할 이유가 없으니까.
“아!”
그런 짐작을 하던 설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생각해보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 수하들은 굉장히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어 있지 않았는가.
파팟.
설휘는 이구명과 수하들이 있는 곳으로 급히 몸을 날렸다.
* * *
‘아…….’
설휘는 걸음을 멈췄다.
그의 시선은 바닥에 쓰러진 두 사내를 향하고 있었다.
‘적송…… 용진…….’
둘 다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걸 보면, 아마도 적의 칼에 당한 터.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다.
“대장.”
“오셨습니까…….”
설휘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남은 수하들이 말을 걸어왔지만, 그들의 몸 상태도 거의 최악이었다.
한 팔이 날아간 요림.
이마에서 흐르는 피가 얼굴 한쪽을 덮은 소령과, 건물 벽에 주저앉은 음무기.
“끄르륵…….”
특히 그는 두 손으로 목을 부여잡고 있었는데, 손가락을 타고 피가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살기 힘들어 보인다.
당장 여기서 조치를 한다면 몰라도, 이곳을 빠져나가는 이동을 버티지 못할 몸이었다.
설휘는 다시 시선을 들어, 중앙에 서 있는 한 남자에게 향했다.
“이제 왔냐?”
피 묻은 검을 털어내는 이구명.
그는 실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놈 수하들. 싸워보니 별거 아니더라고. 적당히 상대하다가 한 명씩 처리하는 중이었는데…… 마침 네가 나타난 거야. 내 생각보다는 빨랐네?”
“…….”
“뭐, 이해는 한다. 상천장 같은 녀석은 어차피 소모품일 뿐. 반드시 필요한 인물은 아니었지.”
“…….”
설휘는 그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그의 눈은 다시금, 얼굴을 파묻고 맨바닥에 쓰러져 있는 적송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렇습니다. 저 역시 백정이었습니다.
같은 백정 출신이었던 사내.
적송이 싸늘한 시체가 된 것은 오로지 자신의 판단 때문이었다.
간절함으로 미래를 그려보자고 했던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는데 말이다.
“…….”
“대장…… 죄송합니다. 저희가 부족하여.”
요림이 힘겹게 자신을 부르자 설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나 때문이다.”
사실, 이렇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던가.
자신이 상천장을 죽이고 합류할 때까지, 수하 중 몇은 죽어 나갈 거란 걸.
그럼에도 수하들에게 임무를 줬던 건, 바로 이벤트.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었다.
“나 때문에…… 모두 미안하다.”
그랬다. 이미 예상했었다.
하지만 눈앞의 광경에, 설휘는 말 못 할 진한 감정이 핑 솟았다.
그저 셈을 했을 뿐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목숨과 매 선택마다 주어지는 기연이, 인간적인 감정을 둔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자신의 목숨조차 셈할 뿐이니, 수하들의 죽음에는 당연했다.
소모품.
마치 이구명이 말했던 소모품처럼.
“하지만 내 약속하마. 다음 생에는 절대로…….”
설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말을 이었다.
“이런 식으로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정면에 두었다.
사람 잡을 듯이 쏘아대는 설휘의 시선.
그 시선을 받으며 이구명.
화산파 제자는 여유가 있었다.
설휘가 말하는 동안 천천히 기다리기까지 하던 그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준비했던 감성팔이는 다 끝난 건가?”
“…….”
“그럼 이제 슬슬 시작해볼까.”
스윽.
검을 서서히 세우는 이구명.
설휘 역시 검을 꺼낸 채로 그와 마주 보며 섰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이길 수 없다.’
그건 누구보다 본인이 잘 알고 있었다.
전투력 차이는 무려 두 배 이상.
거기에 자신은 이미 백양천과 상천장을 죽인 후, 체력과 내공이 상당히 소실된 상황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투방식 시뮬레이션. 턴제. AI설휘까지 모두 사용했다.
이제는 어떤 도움도 없이, 그와 싸워야 하는 처지였다.
파앗.
선공은 이구명이었다.
한달음에 거리를 좁힌 그는 화산검술의 검격(劍擊)을 곧장 쏟아냈다.
곡선으로 찌르는 게 아닌, 정직한 직선으로 펼쳐 의도적인 부딪침을 유도한 것이다.
쩌엉!
이내 내력이 서로 맞닿자마자, 설휘의 자세가 곧장 무너졌다.
그리고 그걸 이구명이 놓칠 리 없었다.
솨아아악.
매화의 기운을 담은 검초.
한 번에 무려 둘.
떨어지는 매화잎을 검기로 그려내며 쾌검을 쏟아낸 것이다.
“윽! 큭!”
상대의 찌르기에 상처를 입은 설휘가 급히 물러났고.
땅을 디딤과 동시에 한 발을 내밀며 빠르게 반격했다.
<풍신검을 사용합니다.>
기습적으로 풍신검을 펼쳐낸 것이다.
쩌어어엉!
거대한 소용돌이가 지축을 흔들며 앞으로 뻗어 나갔다.
그러나 그곳엔 이구명은 없었다. 이미 횡으로 이동해 설휘 옆으로 와 있었고.
“그딴 걸 내가 맞아줄 줄 알았냐?”
이구명은 재빨리 검을 휘두르며 설휘의 가슴 쪽을 그어버렸다.
파밧!
그러자 갑자기 튕겨 날아가는 설휘.
“어……?”
그 모습에 이구명은 흠칫 놀라며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일격. 분명 베어냈는데 상대가 튕겨 날아간 것이다.
“출신이 마교 놈이라 그런가…… 참 특이한 걸 익히고 있구만.”
작게나마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고 그는 생각했다.
아마 극음의 무공을 토대로, 호심공을 발휘해 몸을 보호했을 터. 이럴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내력을 발출할 걸 그랬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쿨럭. 쿨럭.”
한편, 멀찍이 떨어져 나간 설휘는 선혈을 토해내고 있었다.
내상을 입었지만 그럼에도 한편으론 안도했다.
치명적인 피해를 볼 상황에서 빙원결갑으로 위기를 모면했으니 말이다.
물론 웃을 상황은 아니었다.
이번 상대의 공격으로 자신이 내공이 바닥날 정도로 피해를 입었다.
똑같은 일격을 당한다면 이젠 막을 방도가 없었다.
‘정상적인 방식으론 통하지 않아.’
사대극마공인 풍신.
이제껏 상당히 유용하게 해왔지만, 그것도 상대 나름이었다.
상대는 기술표에 적힌 대로 움직이는 걸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터였다.
“그래도 좀 실망인데? 백양천을 죽인 놈이라 나름 긴장했더니 말이지. 하긴, 그러니까 벽이나 바닥 같은 곳에 숨어들어 암살 같은 짓거리를 하는 게지.”
상대의 비아냥에도 설휘는 침착하게 생각했다.
저 녀석을 이길 방법.
대체 어떤 방식을 써야지 쓰러트릴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저 녀석이 펼치는 검술의 초식만 알 수 있다면…… 아니, 방어라도 할 수 있다면 어떻게라도 해볼 것인데.’
상대의 검술은 예측할 수도, 감을 잡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방어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대로라면 뼈째로 상대의 검에 저며질 터.
“뼈마디에는 틈새가 있고 그 안을 넣어야 한다. 제일 중요한 건 근육과 뼈. 엉긴 곳이지. ”
“...?!”
하지만 거기서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
적송의 죽음 때문일까, 아니면 뼈째로 저며진다는 생각 때문일까.
뜬금없이 이상하게도 아주 오래전 일이 떠오른 것이다.
“평범한 백정들은 보통 달마다 칼을 바꾼다. 이는 제대로 뼈와 살을 가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솜씨 좋은 백정은 일 년 만에 칼을 바꾸지.”
“…….”
포정해우라는 고사가 있었다.
숙련된 백정(庖丁)이 소를 해체하는(解牛) 모습을 보고, 옛사람이 감탄해서 남긴 이야기.
비록 피 냄새나는 천한 일이라도, 한 분야의 달인이 이룬 경지는 학문을 닦은 사람 못지않다는 말이다.
‘틈새.’
그것이 어릿하게, 설휘의 뇌리를 자극했다.
생각해보면 그도 그랬다.
아주 어릴 적 백정 때 배웠던 기술들. 소나 돼지를 잡으며, 칼날을 계속 교체해가는 자신을 어르신들은 꾸짖었다.
틈새를 보라고. 결을 보라고.
그걸 못하니 칼이 뼈를 긁으며 부러지고, 살을 베며 무뎌진다고.
‘가능할까? 그게? 여기서?’
언뜻, 그게 지금 상황과 비슷하게 여겨졌다.
분명히 말이 안 되는데, 직감이 속삭이고 있었다.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어떻게 하면 틈을 찾을 수 있을까?’
이구명의 검법은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틈새를 찾을 수 있을까.
어리어리한 생각 속에서 설휘는 한 가지를 생각해냈다.
‘어쩌면.’
상대가 공격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치는 방법이 아닐까.
“어디다 정신을 팔아!”
슈슈슉!
사방에서 화려한 검술이 쏟아졌다.
설휘는 대항하지 못하고 계속 뒤로 물러서기를 반복했다.
감히 부딪칠 생각도 받아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잠자리 날갯짓처럼 제대로 보이지도 않으니, 상대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한 번만.’
그러던 한순간.
기회가 왔다.
상대를 수세에 몰아놓았다고 생각했는지 이구명이 잠시 공격을 멈춘 것이다.
“하앗!”
그 틈을 설휘는 놓치지 않았다.
목숨을 도외시하듯 달려들며 소신수마공 삼 초식, 소하개동을 펼쳤다.
짜아아악!
원래라면 한기로 상대방의 움직임을 멎게 하며, 지면과 허공에서 빙사의 기운으로 베어낼 공격을.
치이잉!
완전히 다르게 변형시켰다.
본래 펼쳐야 할 사선 방향의 베기가 아닌 찌르기로.
그 결과, 특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쩌어어어어엉!
“뭣?”
황당해하는 이구명의 표정이 잠깐 보였고.
<풍신검을 사용합니다.>
빙사의 기운을 머금은 검풍이 강렬하게 치솟으며 그의 몸을 덮쳐버렸다.
“크아악!”
졸지에 저 멀리까지 날아가 버린 이구명.
파직파직!
그의 몸에는 전기 불꽃이 튀고 있었다.
조금 전 끌어올린 뇌전의 힘까지 더해지며 그를 완전히 잠식시켜 버린 것이다.
아니, 그럴 줄 알았다.
“하아…….”
설휘는 허탈했다.
역시나, 회심의 일격에 상대는 당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공격을 예상해내고 전력으로 방어해낸 것이다.
그래서 바닥에 내리꽂히지도 않았다.
“감히…….”
으드득!
하지만 그럼에도 피해는 있었다.
이구명의 머리가 산발이 되고, 내상을 입은 거로 보였으니까.
거기에 심리적인 타격은 더 큰 듯했다.
분노에 가득 찬 그가 냅다 달려오고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