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다시 도전 (1)
설휘의 몸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펼쳐냈음에도 상대가 쓰러지지 않자, 그만 전의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인지 상대의 저돌적인 움직임에도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
그런데 이구명의 공격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막혔다.
놀랍게도 그를 가로막은 건, 사령대 조장들이었다.
피이이익-!
기습적으로 날린 소령의 암기가 이구명의 앞에 떨어졌다.
재차 이어진 그녀의 두 번째 암기.
화들짝 놀란 이구명은 급히 뒤로 도약했다.
“잡았다!”
그 순간, 바닥에서 튀어 오른 한 남자가 그를 붙잡았다.
음무기였다. 그는 목이 관통된 가운데서도 내력을 쥐어짜내 지혈했고,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여기에 태워 넣었다.
당황해하는 이구명의 얼굴이 잠깐 보였고.
“어서!”
파리한 얼굴빛을 한 그의 외침과 함께 반대쪽에서 강맹한 기공을 발출한 요림.
남은 한쪽 팔로 생성한 창기(槍氣)를 이구명에게 꽂아버린 것이다.
쩌어어엉!
강렬한 기의 파동이 이구명이 있는 곳에서 터져 나오자, 지켜보던 이들은 여기서 끝이 나나 싶었다.
하지만 기공이 연기가 되어 서서히 걷힐 때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은 이구명이 아닌 바로 음무기였다.
그는 이미 목이 날아간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별것도 아닌 녀석들이라 잠시 잊고 있었더니…….”
짐작건대, 요림의 기운이 격발되기 직전 그를 제거한 것이리라.
“이런 식으로 보답을 하는군.”
그렇다고 요림의 공격이 완벽히 실패한 건 아니었다.
이구명의 어깨 어림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온 걸 보면 말이다.
“그래. 내 이번엔 확실히 너희들의 숨통을 끊어주마!”
“……소, 소령!”
이구명이 순간적으로 도약하는 위치를 본 요림이 소리쳤다.
소령 역시 예상하고 단검을 꺼내 대비를 했지만.
“아…….”
패애애액!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이었다.
일합(一合).
한 번의 마주침으로 소령의 목이 날아간 것이다.
“대장!”
요림은 급하게 설휘를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멍하니 선 채로 있었다.
그러다 잠깐 떨림이 있고 난 뒤에 설휘의 시선이 요림 쪽으로 향했다.
“도망치십시오. 제가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겠습니다. 얼마나 버틸지 모르지만…… 그래도 노력해보겠습니다.”
“……?”
“대장! 시간이 없습니다!”
그의 외침에 설휘의 눈에선 작은 파문이 생겨났다.
그 모습에 요림은 그제야 안심이 된 듯 지그시 웃어 보였다.
“부디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며 정진하시길…….”
그 말이 그가 남긴 마지막이었다.
파파팟.
요림은 이구명이 달려들기 전에 먼저 싸우는 걸 택했다.
한쪽만 남은 팔에 창을 꼬나쥐고, 저돌적으로 뛰어갔고.
차차차창!
몇 번의 교전이 있었다.
완전히 방어를 도외시한 공격.
워낙 패도적인 공세에, 잠시 주춤한 이구명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건 잠깐이었다.
그의 바람과는 달리 상대에겐 작은 저항에 그쳤다.
사아아악-!
매섭게 찔러대는 이구명의 검술은 요림의 창대를 순식간에 잘라버렸고.
서걱.
그 이후로는 너무도 손쉽게 요림의 목을 날려버렸다.
“끌끌끌.”
뚝. 뚝. 뚝.
검신에 떨어지는 핏빛.
이구명은 이제야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이제 귀찮은 놈들은 다 끝냈군.”
설휘의 눈빛이 흔들렸다.
전부 죽어버린 수하들.
그리고 싸늘한 시체가 된 그들을 바라보는 설휘의 머릿속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왜 이렇게까지…….’
솔직히 설휘에겐 이들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어차피 죽으면 끝나는 삶.
왜 이렇게까지 스스로 목숨을 바치는 것일까.
자신과 달리 저들은 목숨은 고작 하나일 뿐이지 않은가.
“역겨운 마교 놈들을 상대하다 보면 그나마 하나 부러운 점이 있더군.”
이구명은 설휘에게 말을 걸어왔다.
“마성에 휩싸인 녀석들일수록 우두머리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하지. 그 점은 참 부러워. 적당한 시점에 몇 명 골라 가지치기할 수 있지 않은가?”
“…….”
“그런데 한편으로 좀 슬퍼 보이기도 하는군. 대장이란 녀석은 이렇게 겁을 집어먹었는데, 뭘 그리 숭고한 가치를 지킨다고 마지막까지 야단법석인지 말이야.”
그의 비아냥은 이전과 달랐다.
이상하게도 그의 말 하나하나가 설휘의 폐부를 찌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죽는 그 순간까지 목숨을 불태운 수하들.
그에 반해 자신은 무려 목숨이 네 개가 있으면서도 제대로 항거하지 않았다.
그 결과의 추악함을 눈앞에 마주하자, 오히려 감정이 되살아났다.
‘난, 두려운 게 아니었다.’
자신은 늘 생존을 위해 싸웠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주눅 들지 않고 늘 돌파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언제부터일까.
모든 게 소극적으로 변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목숨의 수가 줄어들지 않게, 혹여 줄어들더라도 다음 생을 위해.
그렇게 살고 있었다.
철저하게 계산하며.
“시스템에 잡아먹히지 말란 말이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향해 외쳤던 AI설휘의 목소리가 생생히 들려온다.
만약 시스템이란 게 기연이 아닌, 끔찍한 독주(毒酒)와 같다면.
그것을 마시는 게 맞는 것일까.
아님, 피하는 게 맞는 것일까.
파팟.
이구명이 움직였다.
더는 시간을 주지 않을 생각인지, 한 걸음 만에 거리를 좁혔다.
하지만 이젠 설휘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채채채챙!
빠르게 일어난 교전.
허나, 그것도 고작 몇 번에 그쳤다.
그의 검술에 설휘가 한번 당하자, 그때부터 상대의 무자비한 검술이 펼쳐졌다.
“크악! 악! 악!”
설휘은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화산검법의 화려함과 날카로움은 아직 그가 받아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구명은 화산의 정식제자로 수많은 비무 경험을 쌓은 인물.
담대한 각오만으로는 절대 극복할 수 없는 격차가 존재했다.
더욱이 체력과 내공이 거의 소실된 상태이지 않은가.
그렇게 그의 공격이 잠시 멎었을 때.
툭. 투툭.
설휘의 의복은 피로 시뻘겋게 물들었다.
거의 성할 곳을 찾기 힘들 정도의 상처.
옷을 입고 있지 않았으면, 보기 끔찍할 정도로 상대의 검에 당한 것이다.
“내가 널 바로 죽이지 않는 이유가 뭔지 알아?”
이구명은 이제야 조금 분이 풀렸는지, 실실 웃으며 말을 건넸다.
“바로 그 눈빛. 절망감과 무력감을 담은 그 눈빛이 날 설레게 해. 정말이지 즐겁단 말이지.”
설휘는 극심한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도 주저앉지 않았다.
여전히 시선을 들어 이를 악문 채 그와 마주 보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재미를 부추겼을까.
“쯧쯧쯧. 그렇게 발악해봤자 어차피 너희들은 일개 소모품에 불과해. 이미 윗분들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누군가는 결탁하고, 또 누군가는 배신하곤 하지.”
“…….”
“이곳엔 너희 따위가 함부로 들어올 공간은 없어. 그러니 이제 맘 편히 죽어버리라고.”
설휘를 지켜보던 이구명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 정도면 알아들었을까 하고 쳐다보았더니, 그는 뭔지 모를 소리를 내며 흐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냥 끝내버릴까 하던 차에.
“이제야 조금 알겠다.”
설휘가 고개를 들었다.
“내가 왜 이렇게 싸워야 하는지. 악착같이 기회를 얻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말이야.”
“……?”
“발악해보라는 거다. 시스템이란 녀석이 쳐놓은 운명에 얼마나 꿈틀댈 수 있는지, 얼마나 맞서 싸울 수 있는지.”
“뭐라는 거냐?”
설휘는 잇몸을 드러내며 과하게 미소짓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영문모를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니 틈새란 거 말이야. 찾을 수 없다면…… 내가 만들어내면 돼……. 만들어내야지.”
“더는 들어줄 수가 없군.”
설휘의 말을 무시한 이구명은 검에 내력을 주입했다. 그러고는 마지막 경고를 말을 날렸고.
“황천길이다. 이제…….”
동시에 움직였다.
“……!”
전광석화처럼 복부로 파고드는 이구명의 검.
설휘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그저 몸 안에 파고드는 검을 떨리는 손으로 뒤늦게 붙잡았을 뿐.
“끝났군.”
여전히 자신을 노려보는 설휘를 보며 이구명의 표정은 그제야 편안해졌다.
그런데.
그렇게 검을 회수하려는 순간.
설휘는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엔 주저앉은 듯 보였는데, 이내 머리를 자신 앞으로 들이밀며 손을 뻗으려는 동작을 보였다.
“병신.”
헛짓거리였다.
상대는 이미 단전이 깨진 상태.
관통된 복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 판단한 것.
그것이 그의 큰 실수였다.
설휘의 풍신 기술 마지막 동작인.
고개를 앞으로 내밀며 이구명의 검신을 붙잡는 그 동작까지 무시한 것 말이다.
“이렇게 말이지.”
설휘의 짤막한 말 한마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때까지도 그는 정말 몰랐다.
쿠와아아아아앙!
설휘의 손이 닿자마자, 가공할 기류가 이구명의 검신 그리고 손을 타고 퍼져나갔다.
그것은 이구명의 몸으로 파고들더니, 이내 전신을 뒤덮었다.
“으아아아악!”
그 압력은 이구명으로서는 도저히 억누르지 못했다.
풍신장.
지축을 뒤흔들 만한 기공을 전면으로 받아버린 것이다.
콰아아아앙!
결국, 폭발음과 함께 이구명의 신체는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터져나가 버렸다.
“더는…… 잡아먹히지 않겠다.”
천천히 쓰러지는 설휘.
그의 얼굴에는 말 못 할 비장함이 가득 서려 있었다.
[전투력이 올랐습니다.]
[매화검법서 얻었습니다.]
희미해지는 시야로 어둠이 점점 밀려왔지만, 설휘는 더욱 정신을 붙잡았다.
아직 그에겐 할 일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절대로 네 녀석에겐…….”
[예오후검을 도구함에 넣으시겠습니까?]
[진초혜를 도구함에 넣으시겠습니까?]
잃어버리면 안 되는 신병이기와 신발.
더듬기만 하면 도구함에 넣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했다.
그것이 마지막 일이었다.
[예오후검을 도구함에 안전하게 넣었습니다.]
[진초혜를 도구함에 안전하게 넣었습니다.]
천천히 뜨는 문구.
그리고 거의 시차 없이.
<세 번의 목숨이 남았습니다.>
남은 목숨이 얼마나 남아있는지와.
▶ 처음부터 시작한다.
▷ 계속 이어서 한다.
▷ 저장한 지점을 불러온다.
선택지가 있었다.
* * *
설휘에게 저장된 삶은 모두 3가지로 되어 있었다.
□ 천력 95년, 제2장-1. 곤마가 제시하는 세 가지의 삶
■ 천력 97년, 제5장-9. 조장들 신뢰 성공, 음무기 영입 9개월 차
□ 천력 95년, 제3장-8. [핵심무사 성공] 폭풍성장기(Bonus Story) 1년 차
곤마가 제시하는 삶.
설휘는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이미 갈림길 중 하나 위에 놓인 삶은 어떻게든 결말을 지어야 했다.
세 번째인 폭풍 성장기 1년 차.
여기 역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수하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 왔던가.
설휘의 선택은 두 번째로 향했다.
만일에 대비해, 매달 침소에 눕기 전 저장을 해왔다.
그래서 은영단 교육관주에게 임무를 받기 전, 98년 1월 일정을 정하기 바로 전날 밤으로 돌아왔다.
“…….”
설휘는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걸 확인했음에도 꽤 오랜 시간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수하들의 죽음.
그것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지키고자 했던 그들의 외침이 이구명에게 당했던 끔찍한 고통도 잊게 하고 있었다.
“지금은 살아 있을 텐데…….”
그럴 것이다.
이전으로 돌아왔으니 목숨을 걸던 수하들이 모두 온전히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기분은 뭐냐…….”
먹먹하고 그리운.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설휘의 머리를 계속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